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속된 것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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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
카메라에는 피사체를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기능을 가진 눈이 하나 있다.
일명 줌렌즈(zoomlens)가 그것이다.
줌렌즈는 카메라의 시야에 들어오는
피사체를 잡아당기거나 밀어내면서
피사체의 특징을 포착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을 찍느라
카메라의 줌렌즈를 조작하면서
문득 무지의 비늘이 벗겨진
신앙인의 맑은 눈도
줌렌즈와 같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들 속에서
그것들을 지으신 창조주를 포착하는 눈.
경건한 신앙인의 눈은 마법을 부린다.
그의 눈은 견디기 어려운 어둠과
참기조차 힘겨운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빛을 발견해낸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하느님의 거룩이 드러난다.
그의 눈길이 초점을 모은 곳마다
맑고 투명하게 하느님이 드러난다.
그의 눈은 만물 속에서
투명하게 비치는 하느님께 고정된다.
맑은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거룩한 장소가 따로 없고,
거룩한 대상이 따로 없다.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말했듯이,
"거룩한 사람은
땅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그의 눈에는 대지의 모든 것,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이
훌륭한 묵상 소재다.
그의 눈에 비친 만물은
하느님께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의 눈에는 성(聖)과 속(俗)을
날카롭게 가르는 예리한 면도날이 없다.
그의 눈은 이름 없는 들풀도,
길가의 작은 돌멩이도
허술하게 놓치는 법이 없다.
그의 눈에는 길가의 돌멩이 하나,
한 포기의 들풀도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눈에 비친 사물들은
그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잡이다.
그의 눈은 모든 사물을 뚫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발견해낸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러한 모범을 접한다.
바로 예수님의 눈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
들의 백합꽃을 보시면서
하느님의 먹이시고 입히시는 사랑을 보셨다.
헤셸의 말처럼, "모든 사물이
하느님의 돌보심의 대상으로서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처럼,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보는
맑은 눈의 소유자들은 같은 목소리를 낸다.
13세기 독일의 창조 영성가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트는
"내가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날은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만물 안에 계심을
보았던 때다."라고 하였고,
14세기 영국의 창조 영성가
노리치의 줄리안은
"충만한 기쁨은 만물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들 모두 일상을 성화시키는
보배로운 눈을 지닌 분들이 아니겠는가?
이들이 만물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충만한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이분법의 비늘을 벗겨내었기 때문이다.
만물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도록,
만물 속에 깃들인 하느님의 신성을 보지 못하도록
신앙인의 시야를 가리고 방해하는 비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이분법이다.
면도날처럼 예리한
이분법의 굴레에 빠진 사람은
곧잘 이렇게 말한다.
"성스러운 곳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법이다,
이곳은 속된 곳이고,
저곳은 거룩한 곳이다,
하느님은 성전에만 계시고
다른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
나는 선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이렇게 이분법의 비늘을
벗어 던지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따돌려
저기 먼 곳에 계시게 하고,
남을 따돌리고,
일을 따돌리고,
삶을 따돌려 소외시키게 마련이다.
그런 태도는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추방하고,
남을 질리게 할 뿐 아니라,
삶 자체를 질식시키고 만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위,
우리의 일 속에서 매 순간
우리를 기다리신다. 그리고는
우리의 따스한 눈길이 닿기를 바라신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일상을 거룩하게 만들 줄 아는
눈을 찾고 계신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 말한 대로,
"하느님은 시인의 펜,
농부의 곡괭이, 화가의 붓,
여염집 아낙네의 바늘 끝에도 계신다."
때때로 우리의 현실 세계가
사막처럼 건조한 곳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그래서 저 너머 어딘가를 기웃거리고,
거기로 월담하고 싶은 때도 있다.
하지만 실패와 낙담이 자리한 곳,
상처로 얼룩진 곳이라 하여도,
그곳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곳이야말로 하느님의 임재로
가득한 광야이기 때문이다.
절망이 밀려와 우리의 두 어깨를
짓누르는 그곳이야말로
하느님이 관심 하시고,
거룩한 숨결로 감싸시는 곳이다.
야곱의 경험이 떠오른다.
루스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뒤에,
야곱은 이런 고백을 한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하느님을 만나기 전의 그곳은,
야곱이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하룻밤 신세를 지던 곳에 불과하였다.
어찌 보면 그곳은
야곱에게 상처를 상기시키고
낙심을 안겨주는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하느님은
도망자의 신세로 쓸쓸하게 잠든
야곱의 마음을 두드리셨고,
야곱은 눈곱을 떼어내고
그곳에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었다.
야곱의 눈에서 곱이 떨어지는 순간,
그가 딛고 서 있던 현실 세계는
"하늘로 통하는 문"이 되었고,
그곳에서 야곱은 자기가 베개 하던
돌덩이를 취하여 단을 쌓고,
그곳을 "하느님의 집"(베델)이라 이름 하였다.
말하자면 야곱은 자기가 서 있던 현실을
성소(聖所)로 들어 올렸던 것이다.
곱이 떨어져 맑게 씻긴 눈의 소유자는
하느님으로부터 만물을,
혹은 만물로부터 하느님을 따돌리지 않는다.
그는 자기에게서 하느님과
타인과 만물을 밀어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자기의 현실 세계에서
하느님을 몰아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느 곳에서든
하느님의 숨을 들이마시고,
만물을 통하여 맑게 비치는 하느님의 빛을 쬔다.
나는 내 눈에 들러붙은
이분법의 곱을 떼어내고,
나와 남, 성과 속을 가르는
예리한 면도날을 내려놓는다.
그런 다음 따스한 눈길로
만물을 끌어당겨(zoom in)
그 속에 둥지를 틀고 계신 하느님을 바라본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가 발 딛고 선 현실을
성소로 들어올린다,
내가 발 딛고 선 그곳이야말로
하늘로 통하는 문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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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득, 괜시리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듯 삶을 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물소리가 제 마음속에 아득한 고향의 그리움으로 흘러옵니다. 그리움이란 내 내적 본성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은 좀 우울하군요. 그러나, 속히 우울로부터 벗어나오고 싶습니다.
일상을 거룩하게 만들 줄 아는 눈...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광야...야곱 자신이 박 딛고 선 현실을 성소로 들어 올린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겠습니다.
저는늘그랫습니다.교회안에서의 생활이곧거룩을향한문이라고...그믿음이어느날환경을통해깨어져나갈때난 정말힘이들었고..마음의곤고함은또다를세계로 향하는 문이었습니다..내눈에 마음에 붙은 더럽고 추한 모든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그날 난 깊이주님을 진정 만날것입니다...
오솔길에와서 목사님의 글을 통하여 진정한 믿음의길로 나아가는 그문을 찿아갑니다,,오늘 저희집에오신 코디님께도오솔길을 소개하엿습니다,,그가 갈등하는 내면의주님계신 마음의 오솔길을 찿으리라 생각합니다..감사드립니다은빛드림
wind님! 조금 바쁜 일이 있어서 카페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모처럼 들어왔습니다. 그리움은 내면의 중심을 사랑하는 대상에게로 옮기고 있다는 표시이자, 자기를 비우는 여정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움을 지우지 마시기를 바래요. 언젠가는 그분의 입술 뜨겁게 닿을 날이 올 테니까요.
상록수님! 그래요. 클로버 밭에서 네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세 잎 클로버 자체의 꽃말이 "행복"임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의 성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발견이 있는 곳이 바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 아닐까 싶네요.
은빛님! 곁님의 바람대로 언젠가 그날이 오면 절절이 그분을 만나게 될 거예요. 중요한 것은 그리움을 돋우고 또 돋우는 것이지 싶습니다. 곁님의 코디에게도 오솔길을 소개하셨다니 제게는 흐뭇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함께 어깨동무하고 오솔길을 거닐 곁님이 또 생기나보다, 그런 설렘이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