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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1950년대에 나온 마산 진일기계 공업사의 발동기 소개서이다. 1960년대 마산에서 상당히 알아주던 향토기업이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신마산 월남동에 큰 공장이 있었다. 주로 디젤 발동기류룰 생산했었다. 한 동네에서 살던 친구가 공고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그 회사에 다녔는데 나도 고향을 떠나면서 그 친구와 소식이 끊어졌다가 몇해전 우연히 친구의 소재를 다시 찾았었다.
70년대 후반 디젤엔진 제작의 메카였던 진일기계공업사는 대기업으로 넘어갔다. 당시 진일이 만들었던 여러가지 기계중 발동발전기 (Motor Generator) 는 등대불을 켜기 위한 전기를 생산하는 기계였다. 그외에도 선박용 등의 발전기를 제작했던 것으로 아는데, 조사를 해 본 결과 입수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마산상공회의소 등에 관련 자료나 서책이 있을 것이므로 다음 기회에 정리하고자 한다.
진일기계는 이웃 도시 진주의 대동공업사 (1947년 창업) 와 함께 경남지방의 기계산업의 선구자였으나 그 명맥을 잊지못하고 70년대 후반에 대기업에 인수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진주의 대공공업사는 1980년대초 부터 공장을 대구 부근 공단으로 옮겼다. 우리나라 농기구 제작의 선구자인 대동공업사는 진주지방 경제에 상강한 영향을 끼쳤고 그 회사 본사와 공장이 80년대에 타 지역으로 이전할 때 진주 시민 수만명이 서명하여 타지 이전을 반대하는 운동을 펴기도 했었다.
대동공업사 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진일기계도 당시 마산에서는 알아주던 기계 제작회사였으나 더 큰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회사는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마산은 1970년대까지 선박용 각종 기계를 만드는 중소기업이 해안가에 산재해 있었고, 서성동, 북마산 회원동 등에 많은 철공소나 각종기계 제작소들이 영업중이었으나 대부분 소규모의 영세한 기업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마산지역은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맞게된다. 그것은 소상공업도시를 포함한 농촌경제 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 지역사회가 변화해가는 시대를 맞은 것이기 때문이다. 1965년 양덕동에 현대식 합성섬유제조업체인 한일합성섬유공업(주)가 건설된 것을 시발로 공업도시화의 신호가 올려졌고, 이후 마산의 지도와 지형이 서서히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마산 지역 공업화의 가장 큰 계기는 정부의 강력한 공업화정책에 따라 마산과 창원지역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건설되면서부터였다. 1970년 1월 제정공포된 수출자유지역설치법에 따라 조성된 대지위에 수출자유지역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이런 변화가 오면서, 마산 합성동 일대 1977년 12월 전시민의 숙원이던 마산역이 건설준공 되었고 연이어 시외버스터미널이 서성동에서 역시 합성동으로 이전되어 마산의 교통중심지 가 합성동 시대를 맞았다. 그리고 교통소통을 위해 8차선의 중앙간선도로가 개통되었으며, 이로서 종전의 구마산, 신마산, 북마산 이외에 새로이 동마산이라는 지역이 생성되게 된다.
6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시작된 동마산의 태동과 함께 인근 창원의 산업기지화는 마산의 확대와 인구증가를 더욱 촉진시켰다. 1961년 16만명에 지나지 않던 마산인구는 1971년까지 10년 사이에 4만5천명이 증가한 19만5천명으로 늘어났으며, 1976년에는 33만8천여 명으로 5년 사이에 2배 가까운 증가를 보였고 1980년대 말에는 45만명에 이르렀다.
1970년대 초 부터 마산에는 새로운 도로망이 정비되면서 서서히 공업단지로서 변모한다. 한국철강이 들어왔고, 마산 수출자유지역이 1970년대에 가동되고, 한일합섬, 그리고 창원의 공업단지가 삼귀지역을 중심으로 우선 매립 개발되면서 산호동, 양덕동 부근이 급격히 발달하게 된다. 또한 남해고속도로의 발달은 또한 서마산 인터체인지 지역과 동시에 북마산에서 석전동으로 나아가는 지역의 발전을 가져왔다.
마산의 발전은 인근 창원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확대되었다. 창원시는 1973년부터 당시의 창원군 창원면 상남면,웅남면 일대의 넓은 분지에 거대한 규모의 창원기계 공업단지를 건설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중화학공업정책에 따라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된 창원기계 공업단지에는 산업기계, 정밀기계, 전기기계,수송기계, 일반철물 등 기계업종 중심의 1백여 개 이상의 기업이 들어섰고 수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결집되었다.
대규모 공단의 배후 도시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설계에 의해 조성된 창원시의 발전은 마산시를 발전 확대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창원이라는 신시가지가 조성되자 마산의 인구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한일합섬 이 사양산업으로 공장을 폐쇄한뒤 부터 그 속도는 더 빨라졌다. 그 옛날 조그마한 공단에 불과하던 창원지역에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이 이전해오면서부터 창원의 발전은 날개를 단듯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마창진 통합으로 향후 지역의 발전상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겠으나, 기존 3개시에 긍정적인 방향의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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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대동공업사 1947년 초기 모습
참고자료:
<1960년대 마산의 제조업>
1961년대 중반 이후 마산의 경제구조는 오랜 세월 이어온 유통시장 중심의 경제체제로부터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공업주도적인 경제구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6년 반네들일대(현 회원구 양덕동)에 국내에서는 최대규모의 화학섬유업체인 한일합섬이 유치되고 이듬해 1967년에는 시내 해운동 매립지 5만평의 부지에는 철강생산업체인 한국철강이 건설되었다. 뒤이어 산호동 갈대밭 습지에는 임해공업단지의 조성이 추진되었다.
1973년과 1979년 두차례의 유류파동을 겪어면서도 1970년대의 마산경제는 외형상으로나 내용면에서나 다함께 크다란 성장을 이룩했다. 새로이 조성된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입주 기업체들도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 섰고 이웃 창원의 종합기계공업단지의 건설 등으로 마산지역 경제의 공업화가 보다 가속화되었다. 이와함께 사회간접자본도 놀라울만치 확충되었다.
남해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의 건설, 함안군 칠서면에서 시작되는 낙동강 광역상수도의 건설, 새로운 항만시설을 비롯한 전기, 통신시설의 확충 등 지역경제 발전을 뒷받침할 갖가지 중요 사업들이 모두 국내외적 여건이 가장 어려웠던 1970년대에 이룩되었다. 이들 사회간접자본의 확충과 공업화에 따른 급속한 인구 증가로 마산의 재래 유통시장에도 활기를 더해 주었다.
시 통계조사 자료에 의하면, 1960년대 마산의 제조업계는 3·15와 4·19, 5·16의 사회적 정치적 변혁기를 넘기면서 새로운 발전의 길에 들어 서게 되었다.1961년 중반 마산시에 등록된 제조업체수는 121개업체였으며 이에 종사하던 총 고용원수는 2,960명에 불과했고 이들 업체중에서 100명이상을 고용하는 업체는 고려모직, 마산방직, 대명모직, 동양제모 등 4개의 모방직계통 업체들뿐이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에 따른 중소기업육성책과 수출진흥책에 힘입어서 63년 이후 시내 제조업체 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1960년대 전반기까지 주류나 모직물 같은 내수용 상품의 생산을 주로 했던 마산의 제조업계는 60년대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화학섬유 기계제품 요업제품 등을 주축으로 하는 수출대체 상품지향적 상품 생산을 위주로 하는 공업구조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한편, 성장기류를 탔던 섬유제조업체등의 대기업도 1973년10월 석유파동과 정부의 금융긴축정책으로 수출물량이 크게 줄어 들고 국내시장의 수요도 후퇴하여 생산제품들이 적체되었으며, 수출산업체의 하청업체와 보세가공업체들도 수주물량이 없어 문을 닫는 업체들이 늘어났다.
1970년대 하반기에 들어 국제적 무역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시내의 기간 대기업들의 가동도 활기를 찾기 시작했고 수출자유지역 입주기업체들의 조업도 호전되고 창원기계공업단지의 조성 등이 연계되면서 보다 빠른 성장을 이루어 나갔다.
마산의 주요 수출업종인 섬유공업체들은 수출대상국을 다변화 함으로써 수출물량이 크게 늘어 나게 되었고 그동안 경영부실로 어려움을 겪어 온 한국철강이 정상을 되찾기 시작했고 중소기계업체와 주물공장들의 영업도 신장되었다.
1980년 조사에 따르면, 마산시 상공당국에 등록된 제조업체수는 총 116개업체이고 고용인원은 2만1천387명이었다. 이를 1971년과 비교하면 등록업체수는 192개소에서 76개소나 크게 줄었으나 생산총액은 1971년의 400억원에 비한다면 무려 10배나 증가했고 고용인원도 5천명이나 늘어 났다. 그런데 통계 숫자상에 나타난 등록업체수의 감소는 경기불황으로 인한 일부 중소업체의 폐업과 신설업체들의 미등록 인근 창원시의 탄생에 따른 행정구역조정에 의한 마산시 행정구역의 축소 등에 기인되었다.
<마산의 섬유공업>
1962년을 기점으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추진되면서 마산의 섬유공업계는 모방직 섬유공업으로부터 화학섬유 제조업계로 전환하게 되었다. 국내최대의 화학섬유 제조업체인 한일합섬이 1967년 1월 시내 양덕동 7만평의 부지위에 세워지고 연이어 남성모방, 경남가내공업센터, 개성산업, 성림산업 등 고용인원 100명이상을 갖는 섬유제조업체와 보세가공업체들이 신설되었다. 이들 신설 업체들의 가동은 매우 순조로왔다. 1960년이후 섬유류 수출 물량은 차차 늘어나 1970년의 수출용 섬유제품은 한일합섬과 마산방직의 화학사와 쉐타종류 및 홀치기 보세가공 제품들인데 시내 19개 섬유제조업체의 당년 수출액은 1천739만달러에 이르러 70년의 마산시 수출총액 1천997만달러의 85%를 차지했다.
화학섬유제조업체들의 경기상승과는 달리 1950년대 마산의 주요 업체의 하나이던 동양제모주식회사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취임이후 세계적으로 번진 탈모(脫帽) 유행에 밀려서 문을 닫게 되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순모양복지를 생산했던 고려모직주식회사를 비롯한 모방직 제조업체들은 국내의 재벌기업들이 이 업계에 진출하자 시장쟁탈경쟁에 밀려나게 되고 이에 곁들여 수요자들의 구매성향이 화학섬유제품으로 기울게 되자 시내 모방직업 체들은 1960년대를 넘기면서 점차 쇠퇴해 갔다.
1970년대는 두 차례의 유류파동과 미국의 수입규제 등으로 수출물량의 감소와 국내 경기의 침체 등 우리나라 제조업계의 시련기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한일합섬이
1956년 부산에서 창설된 경남모직주식회사가 시내 봉암동 666번지에 1979년 9월 1만5천평의 대지에 7천여평의 새 공장을 세우고 첫 가동에 들어갔다. 1979년 복지 740만8천야드를 생산하여 이중 348만3천야드를 수출하는 등 1980년대를 향한 마산 섬유업계의 도약에 밝은 빛을 던져 주었다.
<금속·기계공업>
1961
60년대 중반 한국철강의 마산유치는 큰 희망이었다. 65년 7월 시내 해운동 5만평 부지에 착공된 공장건설은 67년 4월 준공되었다. 각종 철강류 생산을 목적으로 한 이 한국철강 건설에는 내자와 외자를 합쳐 총 22억원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창업초기의 경영부실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밖에 진일기계공업사와 흥안공업사의 디젤엔진이 동남아 수출에 성공했고 신설회사인 삼성라디에타공업주식회사의 라디에타, 화신산업의 펜촉 등이 수출 또는 수출대체 산업으로 개발되었다. 광신기계의 펌프압축기, 명신기재의 콤프렛샤, 대동기계주물의 선반공작기 제일기계와 동양특수기계의 제지기 등이 새로운 기계 제품으로 선보이면서 마산 기계공업의 앞날에 청신호를 던져 주었다.
그러나 동남아시장 진출에 성공한 신종 기계제품들도 유류파동의 후유증으로 수출이 중단되었다. 이에 뒤이어 정부의 금융긴축정책으로 대다수의 기계제조업체들은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중유발동기 생산에 성공하고 동남아 시장에 수출하게 된 진일기계공업사는 그간의 시설확장을 위해 투자된 채무가 누적되어 1979년 효성그룹에 흡수, 문을 닫게 되었다.
진일기계와 함께 중유발동기를 생산, 수출을 시작했던 흥안공업사도 수출중단과 자금 압박에 못이겨 날로 사세가 위축되었다. 그밖에도 재건의 꿈에 부풀었던 여러 중소제조업체들도 심한 자금난에 허덕이면서 부침했다.
<조선>
조선부문에서는 1972년 양덕동 매립지에 건설된 코리아타코마조선회사가 76년이후 본격 가동되어 1980년에는 수출용 요트 1만1천434톤을 건조하여 총 269억원의 생산실적을 올렸다. 1980년 마산시에 등록된 기계공업체는 총 55개 업체가 있었는데, 이들에 의한 생산액은 총 673억5천188만2천원이었다. 이는 10년전의 1971년의 업체수 75개업체보다 20개소가 줄었으나 생산액에 있어서는 71년의 78억1천I77만4천원에 비해 무려 8.6배이상의 큰 증가세를 보였다. 비록 10년간의 물가 상승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히 높은 성장세를 나타낸 것이다.
고용인력면에서도 80년에는 총2만1천387명이 취업,71년의 1만6천274명보다도 5천명이상의 증가를 보여 제조업체들의 조업이 호전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삼성라디에타>
1963
1967년 3월 28일 수출품생산업체로 선정되어 1969년 GMC용 라디에타를 생산 필리핀에 처녀수출한 이후 해외시장에서도 그 성능을 인정받게 되었다. 1970년 6월 20일 회사조직을 법인체인 삼성라디에타공업주식회사로 바꾸고 대표이사는 창업주인
1980년에 마산에 소재했던 주요금속기계 제조업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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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명 |
대표자 |
소재지 |
취급품목 |
종업원수 |
한국철강주식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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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영동621 |
철광재 |
1,158 |
중앙주물기계공업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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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동1가 2-3 |
주물 |
63 |
광신기계공업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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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동 3-1 |
공기압축기 |
185 |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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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동974 |
각종선박 |
1,289 |
동환산업주식회사 |
高東煥 |
상남동100-1 |
자동차부품 |
120 |
<식음료 제조업>
*<청주>
양조기술의 미숙과 원료 및 자금난이 겹쳐 해마다 위축되어 온 청주양조 업계는 1961년 초 白洸, 綠水, 朝海, 三光, 三江, 大興, 三一등 7개 양조장이 남아 있었으나 제대로의 조업이 이루어 지지 못해 白洸, 三光을 제외한 나머지 업체는 모두 문을 닫았다. 1973년 정부에서는 군소 주류업체들에 대한 통합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에 따라 마산에는 백광양조장 하나만이 남았다. 그러나 이 백광양조장도 회사 안팎의 사정으로 조업을 계속하지 못해 문을 닫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주양조업의 최적지로서 주도 마산이라는 마산의 청주업계의 명성도 197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소주·주정>
1961
마산의 소주업체의 생산량은 1960년대 상반기까지는 연평균 5천㎘내외에 지나지 않았지만 67년 이후 수요증가로 연평균 생산량은 1만3천㎘를 웃돌았다. 71년 10월 정부의 주류업체 통합조치로 시내 신창동의 무학양조장이 경남일원의 35개 군소 소주공장을 통폐합하여 무학주조주식회사를 설립, 경남의 소주생산을 독점했다. 71년의 생산량은 증류식소주 25만 ℓ, 희석식 2천66만ℓ 이었으나 72년에는 증류식 14만여 ℓ, 희석식 1천677만 8천여 ℓ로 줄었다. 1975년이후에는 수요가 늘어 나자 생산량도 매년 늘려나갔다.
*<탁주>
*<주정>
소주와 주정을 함께 생산했던 유원산업은 1965년 이후 주정생산에만 치중하여 종래 연간 181만ℓ 가량의 생산량을 점차 높여 65년에는 연간 330㎘이상으로 증산하고 소주 수용의 증가에 따라 생산량은 더욱 늘어났다. 1970년대에 들어 주정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여 72년에는 648만 ℓ 74년에는 814만 ℓ를 생산했다. 70년대 하반기에는 수요량이 급증하게 되자 1978년 7월 4일 자본금 20억원으로 연간 6만드럼의 생산능력을 갖는 무학주정주식회사(대표
*<청량음료>
1950
<장유제조업>
<제빙업>
1962
<식품가공업>
<요업>
우리나라 애자업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시내 산호동의 대한애자 주식회사는 1969년 10월 국내 처음으로 2만2천㎸특고압애자(碍子)생산에 성공하여 한국전력의 공인을 받고 정부지원자금과 일본의 차관자금으로 71년 자동식시설을 완비하여 고압, 저압 등 애자를 생산 국내 수요의 60%를 충당했다. 그러나 유류파동이후의 불황과 타 회사와의 판매경쟁 시설투자의 과잉으로 인한 부채 원리금의 체불 등이 겹쳐 78년에 들어 문을 닫게 되었다. 한편 시내 소계동에서 71년 11월에 설립된 고려애자주식회사(대표
<연료공업>
원료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던 연료사정은 70년대 하반기에 들면서 무연탄의 원활한 공급으로 연탄제조업체의 조업이 호전되었다. 시내 경남연탄과 유원연탄 2개 업체가 75년 이후 마산시와 경남 중서부지역의 공급을 맡아 왔는데 1980년에는 양 회사의 생산능력을 100%가동하여 1일165만개, 연간 1천19억6천700만개의 구공탄을 생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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