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무왕은 도대체 몇 살까지 살았을까?
친히 대군을 이끌고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던 주무왕은 몇 살까지 살았을까? 여러 문헌에 기재된 것은 각각 상당히 차이가 있다. 무왕의 나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의 견해가 있다.
1. 93세까지 살았다 설
한대에 널리 퍼져서 대부분 믿고 있는 학설이다. 서한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예기》의 〈문왕세자(文王世子)〉에는 “문왕은 97세에 죽었고, 무왕은 93세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후한의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 기수편(氣壽篇)》에는 “문왕은 97세에 훙(薨)하고, 무왕은 93세에 붕(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에는 제후의 중금을 ‘훙’이라 했으며, 제왕의 죽음을 ‘붕’이라고 했다. 문왕이 죽었을 때는 아직도 상왕조의 제후였으므로 훙이라 했으며, 무왕은 천하의 통치권을 장악했으므로 붕이라 하여 두 사람의 죽음을 다르게 불렀던 것이다. 왕충은 “사람이 받은 수명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연히 밖으로부터 닥친 수명이며, 다른 하나는 체질의 강약과 장수(長壽)와 요사(夭死)라는 수명이다. …… 사람의 수명은 원래 100살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살까지 살지 못하는 것은 기가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수명의 차이는 하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제각기 타고난 기의 차이 때문이다. …… 문왕은 무왕에게 ‘나는 100살까지 살고 너는 90살까지 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3살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과연 문왕은 97세에 죽었고, 무왕은 93세에 죽었다. ……성인은 조화로운 기1)를 받았기 때문에 정상수명을 채울 수가 있다. ……” 후대의 정현(鄭玄)과 왕숙(王肅)이 쓴 《상서주(尙書注)》와 황보밀(皇甫謐)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에도 무왕이 93세에 붕했다는 기록이 있다.
2. 54세까지 살았다는 설
남송의 나필(羅泌)이 쓴 《노사(路史) 발휘(發揮)》 제4권과 김이상(金履祥)이 쓴 《통감전편(通鑑前篇)》 제6권에는 《죽서기년》을 인용하여 무왕이 54세에 죽었다고 말했다. 또 청대의 학자 주우증(朱右曾)이 편찬한 《급총기년존실(汲冢紀年存實)》과 근대의 학자 왕국유(王國維)가 쓴 《고본죽서기년집교(古本竹書紀年輯校)》에서도 그와 같은 견해를 기록하고 있다.
3. 45세까지 살았다는 설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이 쓴 《진고(眞誥)》 제15권에는 무왕의 이름을 발이라 하고 주석을 달아 문왕의 아들로서 《죽서(竹書)》에 따르면 45세에 죽었다고 말했다.
앞에서 말한 첫 번째 견해는 유가에서 정통으로 여기는 학설이다. 그러나 송대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에 의문을 품어왔다. 그들은 무왕이 죽고 난 후에 맏아들인 성왕(成王)이 아직도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숙부인 주공이 섭정을 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든다. 7년 후에 주공은 성왕이 성년이 되자 왕위를 정식으로 계승하도록 했다. 《회남자(淮南子) 요약(要略)》에는 “무왕은 제위에 오른 지 3년 후에 죽었으며, 당시 성왕은 강보에 싸여 있었다.”고 했다. 《사기 노세가(魯世家)》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이들은 무왕이 93세에 죽었을 때 맏아들인 성왕은 어려서 품안에 안고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뭔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필은 《노사 몽령망(夢齡妄)》에서 90세에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의 유학자들이 허망한 말을 지어냈다고 비판했다.
다른 견해는 무왕이 죽었을 때 성왕은 어렸지만 강보에 싸여 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나이가 10살이었거나 13살은 족히 되었다고 말한다. 동한의 위굉(衛宏), 정현, 허신(許愼) 등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는 없다. 김이상은 이들의 말대로라면 무왕이 80세에 맏아들인 성왕을 얻었다는 의미가 되므로 성왕의 동생인 당숙우(唐叔虞) 등은 어떻게 낳았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청대의 학자 최술(崔述)은 《풍호고신록(豊鎬考新錄)》 제4권에서 그렇다면 무왕이 60세가 넘어서 부인인 읍강(邑姜)과 결혼을 했으며 80세에 맏아들을 얻었다는 말이므로 도저히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두 번째 견해인 무왕이 40에 무렵에 죽었다는 설은 무왕이 죽었을 무렵 성왕이 어렸다는 사실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러므로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다. 현대의 학자 고힐강(顧頡剛)은 《문사(文史)》 제4집에 발표한 “무왕의 죽었을 때 나이와 기원”이라는 글에서 이 학설이 《일주서(逸周書) 도읍(度邑)》과 일치된다고 주장했다. 이 글에는 무왕이 은왕조를 멸망시켰을 때 주공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60년이 경과했다2).”
60년이라는 숫자는 무왕이 태어나기 전부터 은왕조가 멸망하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므로 무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50세 정도라는 말이다. 《노사》에서 인용한 《죽서기년》과 일치되는 견해이다.
그러나 무왕이 54세에 죽었고, 당시 성왕의 나이가 10살 정도였다면 무왕이 40세에 맏아들은 얻었다는 의미가 되므로, 고대 중국의 일반적인 출산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다. 《사기 관채세가(管蔡世家)》에는 무왕이 은왕주를 멸망시킨 이후에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을 크게 봉했지만, 어린 동생인 강숙봉(康叔封)과 염계재(冉季載)는 나이가 어려서 봉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염철론(鹽鐵論) 미통(未通)》에 따르면 고대에는 남자들이 20세가 되면 관례식을 거행하여 성인으로 대접했다고 한다. 무왕이 두 동생이 어렸기 때문에 제후로 봉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아직도 20세가 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만약 무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54세였다면 은나라를 멸망시켰을 때는 51세였을 것이다. 당시에 20세가 되지 못한 동복인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면 이들과 나이 차이가 30세도 넘는다. 그렇다면 무왕의 어머니가 50세가 넘어서도 아이를 낳았다는 셈이다.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상을 감안하면 무왕이 45세에 죽었다는 세 번째 학설이 가장 타당하다. 무왕이 45세에 죽었다면 성왕을 30세에 얻었다는 계산이 나오며, 그의 어린 두 동생과도 20세정도 차이가 난다. 세 번째 학설은 《죽서기년》이 출토된 진대(晋代)에 가장 가까운 남송의 학자들이 이것을 인용하여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왕의 수명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이 펼쳐진 것은 《상서 무일(無逸)》에 기재된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다.
“문왕이 천명을 받았을 때는 고작 중신이었을 때였으며, 5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文王受命惟中身, 厥亨國五十年).”
‘中身’이란 한 사람의 수명의 절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문왕이 중신에 왕이 되었으며, 5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면 90세가지 활동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맹자 공손추상(公孫丑上)》에는 “문왕은 덕이 있었으므로 100세가 되어서야 붕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이 100살까지 살았다면 그가 굳이 40세정도에 죽었을 이유는 없다. 하물며 그것은 무왕이 죽었을 때 성왕이 어렸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서주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로 만든 제기의 기록에는 성왕의 동생인 당숙우가 대명을 받고 무왕을 보좌하여 사방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 당숙우가 무왕을 보좌하여 사방을 다스렸다면 적어도 20세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은 무왕이 살아있을 때 그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무왕이 죽고 난 후에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던 주공이 자신의 정치적 행위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성왕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아직도 강보에 싸인 아이와 같이 어리다고 말한 것이 와전된 것이 아닐까?
첫댓글 오랜만에 뵙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온 가족의 건강도 함께 기원합니다. ㅇ많이 웃어 행복한 날들 많이 많이 만나시기를...^*^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일단 인사부터 하고,,,,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철퍼덕....나중에 읽을께요.
잘읽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