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상>, 2013년 2월호.
엄 씨네 일 푼 날
맹문재
어제 저녁부터 내린 눈이 그쳤지만
날씨가 독촉장처럼 차다
엄 씨네 도라지 밭이 팔렸는데
여름에 일한 품삯을 계산해주지 않는다고
친척 아주머니께서 꿈에 이르셨다
해몽하기 어려워 그냥 아침을 먹었다
결혼과 부고의 연락이 한꺼번에 왔지만
먼저 가야 할 데를 정하지 않았다
이사 다니는 일이며 슬픈 웃음에 익숙한 나는
어느덧 선택의 달인이 되었다
날이 찬데도 화분들은 창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다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도 몸을 돌리고 있다
엄 씨네 도라지 밭 일이 비로소 풀렸다
나는 빌린 돈들을 따져보고
부의금과 축의금 액수를 정했다
<시작 메모>
애년의 하루하루는 대출금과 부의금과 축의금과 공납금과 후원금 등 마련에 바쁘다. 나는 이런 얘기들을 적느라고 더욱 바쁘다. 그렇지만 빚지는 일이 아니기에 괜찮다.
맹문재(孟文在)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1991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안양대 국문과 교수.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 등.
첫댓글 선생님 새해에는 더 좋은 날만 있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