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제 설정과 범위
성서의 비평학에서 시작된 성서 해석학은 각 시대 사조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그 역사적 과정을 살펴본다면 모든 과학의 증명은 이성적인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는 18세기의 계몽주의자의 영향을 받은 역사비평학이 19세기에 들어와서 헤겔의 역사 변증철학의 영향을 받아 1978년 벨하우젠(J. Wellhausen)의 "이스라엘 사의 서설"(Prolegomena zur Geschichte Israel, 1978)이라는 책의 출판을 계기로 성서해석학은 종교사학파의 방법으로 기울여졌다. 이런 성서의 비평학은 19세기 말엽 독일의 학자 궁켈(H. Gunkel), 킷텔(R. Kittel), 그레스만(H. Gressmann)에 이르러 구약신학은 근동제국의 사상과 비교 연구해야 한다는 양식사 비평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성서해석학은 20세기 접어들어 폰 라드(Gerhard von Rad)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사건을 구속사(Heilsgeschichte)라는 굵은 줄에 꿰매어 놓은 사건의 연속이라 보았다. 고도로 발달한 연대의 자연과학은 복잡한 이론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과학적 사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러한 과학의 시대에 사람들은 창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우주를 관찰하여 볼 때 인류의 역사란 한 점에 불과하며 과학을 통해 한 생명의 신비를 해쳐 볼 때 과연 생명이 무엇이며 어떻게 창조되었느냐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러한 시각 아래서 구약신학을 구속사의 우위적인 입장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창조에 대한 견해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 해답을 얻는 것은 구약의 민족 지도자들이 이같은 상황을 맞았을 때 창조와 역사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 민족으로서 자각을 가지고 애굽으로부터의 출애굽 후 가나안에 입성해서 볼 때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정황에 부딪쳤다.
또한 바빌론 포로에서 이스라엘이 비교할 수 없이 긴 역사와 높은 문화(文化)를 가진 민족 속에 휘말려 들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웨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자부했던 민족적 구원사상에 심각한 신학적인 반성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이런 반성을 해야 할 상황에서 소외감을 느낀 히브리인들이 바벨론의 종교적인 문화에 흡수 동화되어 버리지 아니하고 야웨 하나님의 창조신앙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기 동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야웨 하나님의 창조성과 유일성과 영원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2이사야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서 말한 상황에 처한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의 창조신앙의 신학적인 문제는 폰 라드(von Rad)가 말하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입장이 창조신앙을 구속신앙의 보조적인 역할로 일종의 서론격으로 보는 데서 구체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저들이 가진 특수한 역사적인 경험,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대한 구속의 신앙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우위적이라고 해석하고 그 구속신앙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창조신앙은 구속신앙을 돕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로서만 보고 있다.
이와 같이 구약을 구속사의 입장으로만 보는 것은 창조의 신앙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되지 못하며 구약의 다양성을 모두 구속사란 굵은 줄에 꿰매어 버릴 수만 있을까? 물론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역사적인 존재로서 자각했기 때문에 인간을 상대로 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역사 속에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인간을 상대로 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구원"(Salvation) 또는 "구속"(Redemption)으로만 볼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구약 세계에 나타난 개개의 사건을 모두 구속사(Heilsgeschichte)로만 이해할 것인가? 물론 독일어의 구원이란 말인 Heil은 영어의 구원(Salvation)이나 구속(Redemption)이란 일반적인 개념보다는 훨씬 그 의미가 넓은 개념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구속사의 신학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고 본다. 오히려 구속의 행위는 창조 하나님의 행위로만 보아야 한다.
이러한 각도에서 본 논문의 초점은 제2이사야가 창조와 구속신앙을 선배 예언자(J 기자나 주전 7.8세기의 예언자)들에게서 어떻게 전승 받아서 해석하고 또 신학적인 반성에서 창조를 다른 예언자들보다도 더 많이 서술함을 연구해 보고자 하는 의도이다.
특히 본 논문은 이사야 40장을 중심으로 하여 제2이사야가 쓰고 있는 문체 양식 및 특징을 살펴보고 거기서 특출하게 들어내는 창조의 형식을 찾아보고 나아가서는 구약의 창조신앙의 출애굽 전승에 대하여 연구해보며, 고대 근동의 다른 국가가 바벨론과 가나안 종교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검토해 봄으로서 창조와 구속을 어떻게 연결짓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제2이사야의 문서와 역사적 배경
이사야 40 55장의 예언에 대하여 학자들은 한 무명의 예언자인 이 텍스트의 주인공을 "제2이사야"(Deuter-Isaiah)라고 부른다. 그러나 Torrey는 36 39장을 제외한 34 66장을 제2이사야의 것으로 간주하는가 하면, 또 Morgenstern은 40 48장만은 제2이사야의 것으로 보고 있다. 또 Smart는 34장과 40 66장을 제2이사야의 것으로 간주한다.
이처럼 이사야서를 두 부분으로 보느냐(1 39, 40 66) 혹은 세 부분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Duhm이 그의 주석서(Das Buch Jesaja, 1892)에서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를 설정한데서부터 생겨난 논란이다.
이러한 논란을 떠나서 보수적 입장을 가진 로마 카톨릭 학자 Kissane는 현재의 이사야서 전 66장이 모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즉 B.C. 8세기의 예언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단일저작설을 주장하는데 그밖에 Oswal T. Allis, Edward J. Young도 단일저작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사야 40 55장의 저자는 분명히 1 39장의 저자와는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 1 39장은, 주로 심판이 말해지고 있으나, 40장 이후에는 위로가 예언의 주제이다.
2) 1 39장은, 예루살렘이 그 배경이 되나, 40장 이후에는 포로생활과 귀환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3) 1 39장은, 이사야의 이름이 거듭 말해지나, 40장 이후에는 그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보면, 제2이사야의 예언 텍스트는 B.C. 8세기의 이사야 예언자의 역사적 배경과 구별된다.
한편 40 55장을 제2이사야의 예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40 48장과 49 55장이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즉 40 48장은 바벨론의 파멸 상황을 전제하는데 비해서 40 55장의 역사적 상황은 약간 다르다는 것이다.
40 55장에서는 고레스에 대한 언급이 결여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미 바벨론이 고레스에 의해 패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40 48장과 49 55장이 약간의 다른 역사적 상황을 가진다 해도 그 형식과 연결에서의 일치를 찾을 수 있으며 또 B.C. 538년 직전의 바벨론을 40 55장의 역사적 배경으로 설정한 Duhm의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40 55장으로 그 범위를 설정한다.
이제 이사야 40 55장의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겠다. 대개 B.C. 587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B.C. 539년의 바벨론 제국의 몰락 사이에서 제2이사야의 예언의 역사적 배경이 설정된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44:26) 파사왕 고레스가 세계정치의 무대에 뚜렷이 나타나며(44:28, 45:1) 바벨론에 의한 세계지배는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되며(47:) 이스라엘의 포로들이 고레스의 특별조처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45:13) 제2이사야서는 보여준다.
예루살렘의 이사야 시대에는 앗시리아 제국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B.C. 7세기의 말엽부터는 패망의 길로 치닫고 만다. 드디어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B.C. 612년 메데와 바벨론의 공격에 의해 파괴되고 난 후에는, 앗시리아 제국의 휘하에 속했던 대부분의 것은 바벨론 제국의 지배권에로 편입되었다. 신흥 바벨론 제국의 세력은 이제 앗시라아 제국의 침공 이후에 얼마 안가서 B.C. 587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강대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바벨론 제국도, 느브갓네살 왕의 치하에서 그 위세는 절정에 달했지만(B.C. 664 562) 느브갓네살 왕의 죽음으로(B.C. 561) 바벨론 제국은 쇠퇴해지고 만다.
사실 느브갓네살 왕의 죽음은 바벨론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는 첫 징조였다. 한편 바벨론 제국의 쇠퇴에서 경쟁국으로 등장한 메데는, 앗시리아 제국을 패망시키는 데에서 바벨론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나라이다. 한 시대를 장악하고 있던 제국의 쇠퇴는 또 어쩔 수 없이 그 진공을 메우기 위한 패권다툼의 열전에로 이끈다. 이때 남부 이란의 얀산(Anshan)의 봉신군주(Vassal king)인 고레스가 B.C. 550년경 등장한다. 홀연히 나타난 파사인 고레스는 눈부신 승리 끝에 메데와 리디아를 차례로 공격하고 마침내 B.C. 539년 고레스는 바벨론 제국을 정복한다.
이와 같이 바벨론의 정복자인 파사왕 고레스에 의한 연속적인 승리에서 제2이사야는 B.C. 539년에 일어난 바벨론의 급박한 멸망을 예견하고 있다. 바로 40 55장은 이러한 역사적 고찰에서 나온 서사시이며, 그 역사적 배경이 고레스의 출현과 바벨론 제국의 몰락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제2이사야의 예언시기를 B.C. 539년 직전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3. 제2이사야의 문학양식 및 40장의 내용분석
제2이사야서에 대한 문학적인 연구는 둠(Duhm)의 연구이후 계속 박차를 가해왔으나 그러나 그레스만(H. Gressmann)이나 켈러(L. K hler), 베그리히(J. Begrich)에 와서 양식사 비판 연구를 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학적 문제가 대두되었다. 물론 둠이나 폴쯔(P. Volz)도 전혀 그러한 문학양식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둠에 있어서도 우리는 예컨대 "논쟁화"(41:1 7), "토론"(41:21 29), "신탁"(42:14 17), "재판의사"(43:8 13), "개선가"(47:8 15), "책벌설교"(48:1 11)라는 양식규정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양식"(42:8, 9 참조), "지혜문체"(46:9 11)같은 표현법도 찾을 수 있으며 폴쯔(P. Volz)에 있어서는 "양식 그 문제 제시의 교체"(40:12, 13, 18, 21), "변증양식"(44:6 8, 9 20), "시초양식"(45:14), "유일신론적 양식"(45:22b), 찬송문체에 있어서 "찬양과 자기 칭호"(44:24 28), "야훼의 자기선서"(45:23b), "참회권유 설교"(48:1 11), "조롱"(44:9 20, 48:1 11), "유일신론적 변증양식"(41:4, 46:4, 48:12) 등의 연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2이사야에 대한 모든 분명한 해석을 그 문체를 따라 형성한다는 노력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한 노력은 비로소 양식사 학파에 와서 그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 개별적 문장단위 연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 이사야 40 55장의 문학적 양식
폴쯔 동기에서 생겼다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예언자로 한 "설교자" 또는 추방당한 교회의 "지도자"로 보았다고 한다. 베그리히(Begrich)는 예언자가 신탁문제로 제사장의 신탁에서 모방한 것이라 하여 제2이사야의 주요 양식을 "제사 구제신탁"(Das pristerliche Heilsorakel)이라고 규정지었으며 베스터만(C. Westermann)에 와서는 베그리히의 제2이사야 문체양식의 비판이 대폭 가감되었다고 한다.
베그리히가 제사문제의 문체로 보는 신탁문체는 오히려 제2이사야 문체양식이 비판이 대폭 가감되었다고 한다. 베그리히가 제사의 문체로 보는 신탁문체는 오히려 제2이사야를 예언자의 전통에서 보려는 것이라 하고 여기서 그는 제2이사야의 문체를 하나의 연설체로 관찰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빙켈(S. Mowinckel)을 중심한 앵글로 스칸디나비아(Anglo-scandinavisch Schule) 학파에서는 제2이사야로 생의 정황(Sitz im Leben)에서 "제사 예언자"(Priester Propheter)에 넣고 그가 사용한 문체는 예배 양식 문체에 예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우상에 관한 제2이사야의 문구도 역시 여러 신이 서로 투쟁하는 신화에서 생긴 것이며 야웨 신은 여기서 가장 강한 자로 인정되고 이방인과 이방신들도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구속되니 고레스(Cyrus)는 땅 위에 이 판결을 시행키 위해 소명을 받았고 이로써 우주적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폰 왈도우(Edhard von Weldow)에 와서 절정에 달하는데 그는 제2이사야를 "제의 예언자"(Kult Propheten)로 보고 있다. 제2이사야의 문학양식 문제 연구에 있어서 결과적으로 제2이사야가 그의 예언을 구두로 전달했느냐 또는 서신으로 전달했느냐 하는 문제까지도 나오게 된다. 구전으로 정말 했다면 그가 사용한 단어들은 아주 짧은 단어들이며 기록으로 썼다면 문학적 단위들은 더 길어야 하고 전체 책을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보고 구성했어야 할 것이며 사상배열의 원칙이나 사상의 논리적 연속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현재 그것이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책으로 볼 때 주는 문체의 양식만 고찰해본다.
2) 이사야 40장의 내용 분석 및 문체의 특징
제2이사야서 전체 중 이 40장을 그 책의 서론 부분만으로 간과할 수는 없다. 이사야 40장에서 예언자는 그의 전 예언서의 성격을 규정했으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 형식을 전개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유일신이며 우주의 창조자이심을 말해 주며 동시에 고난받는 이스라엘에게 위로를 주는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예언하고 있다.
이사야 40:1의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반복의 명령형 동사는 분명히 닥쳐 올 위로의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임박성을 알려주는 선포이다. 이러한 표현을 스마트(J.D. Smart)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마치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말씀을 백성들로 하여금 받도록 하고 그리고 징계적인 심판의 암흑시대를 벗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조바심을 갖고 하나님이 절망하는 백성들을 기다렸던 것과 같이 "위로하라"의 동사의 반복은 절박함을 알리는 것이다. 용서는 심판의 종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계약관계의 회복이며 거기서 새 생명의 시작과 새 시대의 시작이 있으며 그 날에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 목적의 완성을 향해 움직여 나가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제 자유하시고 용서하시는 "위로하라, 위로하라"의 선언을 하면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생생한 방법으로 용서의 멧세지로 전하고 있다. 파괴되고 파멸된 이스라엘은 남편에 의해 버림받은 부인과 같으며 그러나 지금은 호세아가 자기 부인에게로 돌아가듯이 남편은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저들을 제2이사야는 과부나 불모지, 목자 잃은 양, 굶주리는 백성, 눈 먼 자나 귀머거리나 포로들로 표현하고 있다(사 42:18f). 그러므로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오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것은 죄의 용서와 결혼 관계의 회복으로서 나타나며 그리고 목자의 귀환관 사막에 물이 나며 굶주린 자에 대한 식량이나 눈먼 자나 귀머거리가 보고들을 수 있으며 죄수가 자유를 얻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제2이사야의 멧세지에 대해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취급한다고 한탄했으며(사 20:27) 이런 백성들에 대해 제2이사야는 책망하고 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아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않으시며"(40:27)
그러나 백성들은 우상이 저들을 구원할 것이라 믿고 그것을 섬기기 시작했다. 이에 제2이사야는 우상을 섬기는 자와 우상의 허무성을 여지없이 공격하며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성을 백성들에게 선포했다(40:12 20). 제2이사야는 열방과 야웨 하나님에 대한 표현을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함으로써 잘 대조하고 있다.
"보라! 그에게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들의 적은 티끌 같으며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사 40:15 16)
제1행은 주와 열방을 비교하기를 열방은 한 방울의 물로 비교했으며 제2행은 적은 티끌로, 제3행은 먼지로 비교했다. 그 외 사 40:6 8도 좋은 예가 된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의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붐이로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제2이사야가 사용한 시 문체의 특징을 보면 비유적 표현으로 하나님을 왕이나 재판장 또는 강한 자로 나타내며(40:10) 또 40:28절에서는 창조주로 나타나고 있다.
그가 사용한 수사명구는 40:29절의 대조법이다. 누가(who, 40:12, 13, 14, 10, 25, 26), 무슨(what, 40:18), 어찌하여(why, 40:27), 어디(where, 40:13, 15) 등의 다각적인 사용법을 보여주며 특히 이것은 시의 특징인 대화형식의 부분임을 말해준다.
그 외에도 "외치라", "소리를 높여라" 등의 명령형의 동사가 30회 이상이나 사용되는 이 명령은 시에서 강조, 열정, 긴박성을 들어낸다. 또 반복문도 사용하는 데 역시 강조를 나타내고 그 중요성과 긴박성을 들어내는데 낱말의 반복(사 40:1), 접두사의 반복(40:9, 10a, 10c, 42:12 24)과 문장의 반복(40:9, 40:10 11) 등을 문제의 특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3) 창조에 나타난 문학양식
개인이건 단체이건 예배에서 하나님에 대한 숭배는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찬양을 통한 것이라 하겠다. 모빙켈을 중심한 앵글로 스칸디나비아 학파(Anglo-Scandinavisch Schule)에서 제2이사야를 제의 예언자(Cultic Prophet)라고 한 것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좀더 자세한 것을 본다면 제2이사야가 그의 예언을 구두로든, 기록으로든 백성들에게 전했던 것은 비록 봄들은 바벨론의 포로이나 거기에서도 예배의 모임은 가능했다. 우리는 시편 137편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배에서 제2이사야는 분명히 민족의 지도자로서 또 제사를 인도하는 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가 그의 예언서를 읽고 느낄 수 있는 대로다. 어떤 학자는 제2이사야를 유대인의 분견대의 한 군목같은 예언자라고 제안한다.
그러면 저들이 드렸던 예배는 과연 어떤 종류의 예배였을까?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의 정향으로 볼 때는 저들의 예배는 현재의 징벌은 과거의 잘못으로 인한 것임을 자각하고 그것을 회개하는 참회 예배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포로인들이 잡혀가면서도 가지고 간 순수한 시편전승(Psalmodic Traditio)을 함께 가져간 예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참회예배에서 저들의 하나님이 땅 끝까지 창조했다는 우주의 창조자로 표현한 신앙고백은 찬양으로서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40:21 26, 28 31(cf. 사 44:24 28, 46:8 11)에 나타난다.
폰 왈도우(von Waldow)는 이 찬양형식을 예언자 논쟁형식의 문학양식(Gattung)으로 분류하며 그 안에서 같이 취급하고 있으나 베스터만(Westermann)은 이 찬양시를 논쟁과 분리해서 따로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 다루어 말하기를 "환호로 울리는 화음"(Der juhelnde Klang)이라 하고 제2이사야가 구원의 멧세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 환호로 하는 화음을 사용하였다고 보고 특히 40:12 31 안에 잘 나타나 있고 곧 찬송시(10b Psalmen)라고 판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레스만의 연구 결과로 제2이사야는 논쟁어법(Rede forum der Disputation)임이 판명되었다고 하며 이 어법은 제2이사야의 전후에 나타난다고 한다(암 3:3 6, 7 8, 9:7, 사 10:8 11, 28:24 29, 헴 8:8). 이와 같은 논쟁 형식 안에 찬양 형태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문학양식으로 나타남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을 환언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찬양을 귀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열방들과의 논쟁 형태로 나타났다.
Ⅱ. 본론: 제2이사야의 출애굽 전승과 창조전승
1. 옛 출애굽의 회고
출애굽전승 문맥 안에 결합되어 있는 창조전승을 이해하고 창조전승이 어떤 상황과 문맥 속에서 보존되고 해석되고 이스라엘의 옛 창조로서의 출애굽의 기점과 새 창조로서의 새 출애굽의 종점의 양극 사이에서 창조전승이 어떤 의미를 제공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제2이사야가 출애굽전승을 어떻게 기억했으며 새 출애굽의 전망을 어떤 의미로 기대했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1) 옛 출애굽의 회고
제2이사야가 바벨론 포로 말기에 자기 동족의 민족적 해방과 구원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 주제를 기억하여 새 출애굽을 전망하였다. 새 출애굽 사상은 제2이사야가 종말론적 종장으로 그리려고 시도한 전승적 동기에서 가장 의미있고 탁월한 사상이다. 이런 새 출애굽을 언급하기 위해서 옛 출애굽을 회고한 출애굽 전승적 사고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구원을 바라보는 전망 속에서 다음 13곳 단위에 나타나 있다.
40:3 11: 광야의 대로
제2이사야 멧세지의 서곡(40:1 11)으로서 출애굽 시에 "광야와 사막에서 하나님이 길(대로)을 낸 것"(3절)을 기억하고서 바벨론에서부터 고향으로 돌아 갈 새 출애굽 사건 선포에 "야웨의 길"(derekh Yahweh)을 언급하고 있다.
41:17 20: 광야의 변화
구원신탁으로서 하나님이 산에 강을 내고 광야로 못이 되게 하고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면서 탄식하는 민족에게 "여호아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창조한 바인 줄 알며"(20절 하반절)란 말로 출애굽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지으신다"('sh)동사와 "창조한다"(br')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새 출애굽의 창조를 보여주고 있다.
42:14 17: 야웨가 백성을 모르는 길로 인도함
구원신탁으로서 탄식하는 민족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하여 "소경을 인도하여 광명한 길로 인도하듯"(16절) 장해물이 되는 원수들과 우상들을 산과 들과 강들을 마르게 함과 같이 만들면서 길을 인도하신다고 하고 있다. 16절이 마치 애굽에서 나와 시내광야로 백성을 인도할 것을 회상하고 있다.
43:1 7: 물과 불을 통과
구원신탁으로서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구속하신 야웨가 물과 불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통과하도록 인도하신다고 노래하고 있다.
43:16 21: 광야의 길
구원신탁으로서 바다 가운데 길을 내어 출애굽의 구속을 보여주신 야웨가 이제 "새 일"을 함에 있어서도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어 구원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44:27: 깊음과 강물을 마르게 함
고레스에 관한 신탁(44:24 28)으로서 왕실신탁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서술적 찬양으로 "깊음"(deep)을 마르게 하고 강물을 마르게 하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하고 있다.
48:20 21: 바벨론으로부터 탈출
찬송시인데 바벨론에서부터 나와서 사막을 통과할 때 물을 내게 해서 구출했던 야웨의 행위를 찬양하라고 부르고 있다.
49:8 12: 약속의 땅으로 새로 들어감
둘째 "주의 종의 노래"(49:1 6)에 추가된 발언으로서 그 구조가 구원선포의 구조와 같다. 8절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란 말은 옛 출애굽 때의 부자유를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으로 해결해 준 것처럼 다시 구원의 날에 하나님이 개입해 줄 것이라고 믿는 말이다. 9절에 있는 "잡혀있는 자에게 ...나오라,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란 말도 특별히 출애굽 때를 생각하고서 고향으로의 복귀를 재촉하는 말이다.
50:2: 바다를 마르게 하고 하수를 광야가 되게 함.
논쟁형식(50:1 3)(혹은 법정연설)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탄식하는 불신집단에게 바다를 꾸짖어 마르게 하고 하수를 광야가 되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전채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51:9 10: 바다에서의 새 승리
민족탄식시로서 창조 때에 혼돈의 괴물을 정복한 하나님의 능력과 출애굽 때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백성을 구원하게 한 하나님의 능력 즉 "하나님의 팔"의 힘에 호소하고 있다. 창조와 구원이 밀접히 연결된 말로서 신화적 용어를 빌려서 창조 때의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고 출애굽 때의 기적적인 구원을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제2이사야의 창조전승과 구원전승의 연결을 연구하는데 가장 적절한 내용이다. J. Muilenburg 교수는 제2이사야의 종말론적 전망과 신앙을 동반한 깊은 정서가 9 10절의 간주곡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하였다.
52:11 12: 새 출애굽
이 시는 "떠나라"란 명령으로서 제2이사야가 전체 멧세지의 방향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이 백성을 시온으로 인도할 길을 준비해 놓고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외국의 모든 불결한 것에서 이탈하여 정결한 몸으로 떠나라고 하고서 출애굽 때의 구원을 회상시키고서 평화롭게 돌아갈 것을 확신시키고 있다. 새 출애굽은 안전한 여행이 될 것이란 것이다.
55:12 13: 이스라엘의 기쁨과 평화로 나감
제2이사야의 최종시는 포로에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기쁨과 평화로 나아갈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제2이사야는 이 자유와 해방의 사건을 가장 깊은 정서가 담긴 서정시적 표현을(40:3 5; 41:17 20; 43:19 31; 49:9c 13; 51:9 10; 52:11 12)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옛 출애굽과 대조가 되어 있는데 둘째 출애굽에서 나타날 놀라움이 첫 출애굽의 구원사건을 능가할 것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물인 산과 들이 "개선의 합창"에 한 몫 끼여 노래 부를 것이란 것이다.
'창조와 역사가 하나님의 생각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위에 소개한 13개의 단위들은 제2이사야의 예언이 새 출애굽 주제로 시작하고(40:3 5) 또 끝맺고(55:12 13) 있는데 그 사이에 출애굽의 구원사건을 회고하고 기억하는 출애굽전승이 명백히 포함되어 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옛 신앙고백"(신 26:5 9; cf. 여 24:2 13)과 마찬가지로 제2이사야의 기억과 사상에서도 살아있는 구원사적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의 구원사의 제일 핵심이 되는 출애굽으로 인한 구원을 기억하는 과거의 구원사건의 재해석이 바벨론으로부터의 탈출인 미래의 새 출애굽 창조의 전망에 연결이 되었던 것이다.
새 출애굽의 창조란 전망을 위한 출애굽전승들 속에 야웨 하나님이 최초의 창조자로서 천지만물을 만들었다는 창조신앙 보다는 이스라엘을 자기 민족으로 선택하여 창조했다는 창조개념과 "창조" 동사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특히 구원신탁인 41:17 20에서 "창조한다"는 "바라"(bara) 동사의 목적어가 새 출애굽의 결과로 되어 있고 43:1 7에서는 "바-라"의 목적어가 야곱과 이스라엘이 되어 있고 43:16 21에서도 이스라엘의 목적어가 되어 있다.
"야싸르"(yatsar, , form, 만들다)란 창조동사의 목적어도 이스라엘이고 (43:1, 7; 43:21) "아사"('asah, make, 만들다)의 목적어도 새 출애굽(41:20), 구속된 이스라엘(43:7), 새 출애굽(43:19)으로 되어 있다.
이런 "창조" 동사들이 출애굽 전승 기억에서 이스라엘의 창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과 구원을 전망하는 데서 구원사적 신학의 전문단어로 해석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둘 동사 중에서 특히 "바라"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관심이 제일 많이 쏠려있고 또 창조전승을 연구하는데 이 동사의 유래와 제2이사야의 활용과 해석을 문제삼아서 제2이사야가 창조전승을 독자적인 유래에서 이어 받아 구원신앙에 합류시켜 나갔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이 출애굽 전승을 기억하는 44:27과 51:9 10은 혼돈과의 싸움에서 질서로 창조한다는 옛 신화적 창조주제를 회상하고 있다. 이 문제도 좀더 구체적으로 제2이사야의 창조전승 중 이스라엘의 창조라고 하는 구원적 창조사상에 앞선 좀더 시발적이고 원초적인 창조시상을 창조신화 속에서 찾아보는 시도가 필요로 하다.
2) 새 출애굽의 전망과 이스라엘의 창조
출애굽의 기억을 회고하는데 있어서 제2이사야는 그의 선배 예언자들이 즐겨 이어 받아 해석한 출애굽전승(암 2:10; 3:1; 호 11:1; 13:4; 미 6:4;, 사 11:16; 렘 2:2ff; 겔 20:7 9)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제2이사야가 처음으로 이를 종말론적 문맥에다가 관계시켰다.
예언자들 중에서도 제2이사야만큼 더 잘 과거의 구원사건을 기억했었던 예언자가 없었다. 왜냐하면 제2이사야가 훈계를 할 때에는 "기억에서부터 희망으로 과거의 신기원적 사건에서부터 미래에 더 결정적이고 구속적인 사건으로" 이스라엘의 관심을 돌리면서 미래를 전망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B.W. Anderson은 "제2이사야에 나타난 출애굽동형론"이란 논문에서 구약 역사해석의 한 방법인 동형론(同型論; Typology)적 사고를 제2이사야에게서 찾아내기에 앞서, "인간의 관심은 자신을 시간이나 역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에서 역사의 극적 사건에 참여하고 희망으로 미래를 대함으로써 역사의 의미를 구체화하는데 있고, 과거의 결정적인 사건과 인간의 관계를 가짐으로써 자기의식을 하고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사건의 의미를 나누고 고백한다(신 26:5 10)"고 전제하고, 제2이사야가 옛 출애굽과 새 출애굽 사이의 동형론적 일치(Typological Correspondence)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 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과거의 결정적 사건인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원신앙 고백"으로 고백하고 해석하면서 "더 깊은 구원론적 의미와 더 넓은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더 훌륭한 방법으로 성취할 새 출애굽의 한 유형으로 삼고서", 제2이사야는 역사 안에서 유일하신 야웨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여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려는 목적을 달성한 "이전 일"(former things, 리쇼노쓰)을 기억하라는 명령을 포로민에게 계속하였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46:9)
"옛적 일"이란 "옛부터의 이전 일"(former things from of old)인데(cf. 41:4, 22; 42:9; 43:9; 44:7; 45:21; 48:3, 5, 14) Mullenburg 교수는 "여기에서 역사적 기억과 하나님의 유일성이 서로 연합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역사에 나타난 "이전 일"은 여기에서는 특별한 역사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서 행하신 주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난 "이전 일" 중의 결정적인 구원사건이 출애굽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이 과거의 일이 미래에 나타날 "새 일"(New Thing, 하다샤)에 연관되지 않을 때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과거지사로 끝내고 있다. 제2이사야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날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43:18 19).
라고 말함으로써 "이전 일"인 출애굽사건과 가나안 정주 사건만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고 오히려 그 "이전 일"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구원의 사건인 "새 일"인 새 출애굽의 사건을 하나님이 나타낼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김철현 교수는 "이전 일"과 "새 일"의 결합은 제2이사야의 독특하고도 종말론적 사상에서 나온 것이지 단순히 같은 사상의 연장이 아니라고 보고 "이전 일"인 출애굽과 완전히 비슷하게 해서 "새 일"인 새 출애굽을 제2이사야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요 주제로 선포하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제2의 출애굽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첫 번째 출애굽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제2이사야가 보았지만(43:18f) 최초의 신앙고백인 출애굽전승을 앞으로 새로 행하실 하나님의 새로운 행동인 새 출애굽과 결합시켜서 회상하고 기억하는 일이(46:9f)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구원적 행위와 연결을 맺는 적극적인 신앙의 반응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제2이사야의 기억하는 행동은 "단순한 내적 묵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과 만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대대로 전통을 기억하면서 만나는 실재에 대해서 신앙으로 증거해온 민족인데 그들이 고백한 구원사는 다만의 이스라엘 경건사(Glaubengeschichte)가 아니라 각 세대가 자기 당대의 삶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해석한 역사적 증거를 재해석해 나갔던 것이다.
제2이사야가 위대한 예언자란 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 이방민족의 종교문화의 영향 속에서도 어떻게 자기민족의 고유한 정신적 신앙적 전통을 기억하고 살려서 민족주체의식을 강화하고 미래의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인 해방과 귀환의 길에 오를 때 생동적인 반응을 할 수 있도록 출애굽전승의 사고를 시종 일관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고 있는 탄식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새 출애굽의 구원을 주제로 보여 주려고 옛 출애굽의 구원사건과 동기를 재해석해 주었다.
3) 창조전승과 구원사
출애굽전승 기억으로 시작하고(40:3 11) 끝나는(55:12 13) 출애굽전승 사고문맥 안에는 창조에 관한 언급이 다음 여섯 단위에 있다. 이 창조전승에 나타난 최초의 창조와 구원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40:12 31 창조자가 구원자임
논쟁양식으로서 최초의 창조에 관해서 21, 26, 28절에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라고 선포하고서 우주를 다스리는 주(Lord)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최초의 창조자인 야웨가 세상만사 주인이 되시며(22 24절) 천체를 다스리며(26bc) 영원히 피곤을 모르는 자이라는 것이다.
42:5 7 "내가 너를 의로 부름"
주의 종이 노래의 서곡에 해당하는 노래로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의 종을 소명할 때 야웨가 우주창조(Cosmic Creation)자임을 찬양하고 있다(5절).
44:24 45:7 고레스에 관한 신탁
자기찬양과 왕실신탁으로서 24bc에서는 야웨가 우주의 최초 창조자로 언급되어 있다. 첫 창조자 언급 다음에 야웨만이 이스라엘의 구속자요(44:2a, 25 28; 34:1 6) 재창조자(45:7)라는 것이다. 그런 야웨가 이제 새로이 고레스를 세워 열국과 왕국들을 굴복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재창조할 것이라고 기대되어 있다. 44:27에 야웨가 "깊음"을 정복하는 Chaoskampf 형용이 이스라엘의 재창조를 위한 싸움에 연결되어 있다.
45:9 13 질그릇과 토기장이
논쟁양식으로서 12절에서 야웨가 우주의 최초 창조자임을 변호하고 있다. 9 11절은 현재까지의 이스라엘 역사 순간마다 야웨를 "만든 자"와 창조자로 내세우고 자녀를 돌보듯 돌보기를 계속한다고 하고 있다.
48:12 17 "내가 너를 불렀다"
이스라엘에 대한 법정연설 형식으로서 제2이사야의 관심이 자기 동포들의 절망을 극복하고 바벨론 신들에게 끌리기 쉬운 유혹을 극복하도록 하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12절에서 야웨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First and Last)라고 선포하고 13절에서 야웨가 우주의 창조자임을 회상시킴으로써 야웨의 권위를 세우고 그의 권위를 그의 증인으로 발동시킬 뿐만 아니라(13b) 자기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 권위를 이용하도록(18 19절) 하였다.
51:9 16 나타날 구원
민족탄식(9 11절)과 이에 응답하는 신탁(12 16절)이다. 태고시 최초의 창조 때 혼돈의 괴물인 라합을 정복함으로써 창조의 능력을 보여 준 "하나님의 팔"(9절)의 힘이 출애굽 때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10절) 건너게 한 기적을 이룩했다. 이 구원의 사건을 회고하면서 하느님의 힘에 호소하고 있다.
새 출애굽의 전망을 보여 주는 응답(12 16절)에 다시 천지의 주재자인 창조자 하나님을 상기시키면서 동족들의 해방과 구원이 성취될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
이상 여섯 개 단위의 시들이 창조전승을 보여 주고 있는데 대개 야웨가 최초의 창조자(first Creator), 우주의 창조자(Cosmic Creator)임을 각 단위의 문맥에서 먼저 언급하고 있다. 혼돈을 정복함으로써 창조한다는 신화적 창조개념이 반영 회고된 곳은 4:27과 51:9 10이다.
von Rad의 해석이나 그를 따르는 학자들은 이 여러 곳에 표현되어 있는 창조신앙이나 창조교리는 그 자체를 위해서 소개된 것이 아니고 구속 혹은 구원의 새 역사적 전망을 위한 보조적 기능으로서밖에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우선 논쟁양식으로 야웨를 가장 잘 찬양하고 있는 41:12 31에서 28절에 있는 창조교리를 보면 "제2이사야가 포로백성인 동족의 불신앙에 대항해서 싸워야만 했고 야웨의 무한한 능력을 믿는 신뢰를 일으키기 위해서" 구속의 은혜(redeeming grace)로써 야웨가 세계를 창조했다는 창조교리를 언급하고 있다. 첫 창조에 관한 언급은 간접적으로 잠깐 등장한 것뿐이고 야웨가 우주와 천체들을 다스리는 우주적 주인으로서 새로운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선포하기 위해서 활용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창조와 구원의 병치(Juxtaposition)가 제2이사야에 습관화되어 있다는 대표적인 예가 43:1과 44:24에 있다.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조성한 자가 이스라엘을 구속하겠다고(43:1) 했으며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야웨가 이스라엘을 모태에서부터 조성한 자라(44:24)고 해서 창조자와 구원자란 뜻이 병치되어 있다.
"이렇게 제2이사야에게는 마치 세계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의 똑같은 분배를 예증하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일의 시초에 일어난 일과 지금 이스라엘에 일어날 새일(42:9; 48:6)도 다 하나님의 동일한 구속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실 그렇다. 요일 12:1과 44:24를 읽으면 창조교리가 힘차게 구원론과 조화되어 있음을 보는데 놀랄 것이다."
이런 von Rad의 견해를 따라 Stuhlmueller도 야웨의 구속이란 문맥에서 창조자 야웨 사상이 있는 43:1과 7절의 "창조 동사"를 해석하여 그 동사들이 이스라엘의 구원이란 창조적 행위를 표현하려 한 것이라고 하였다.
야웨가 이스라엘의 창조자이며 조성자(Maker)라고 한 이 두 단어는 창조신앙 동사에서 빌린 것이지만 야웨가 세계 창조자란 신앙을 직접 참고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아니된다고 Harner는 전제하고서 족장전승과 출애굽전승과 같은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적 전승을 도리어 참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야웨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부르고 인도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창조했다"는 전승을 받았다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Harner의 논의는 von Rad와는 달리 창조신앙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것 같다. 제2이사야의 사고구조와 논의 안에서 창조신앙의 기능에 관한 관찰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창조신앙은 제2이사야의 사고를 위한 기초로서 그 자체의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독립된 항목으로 표현되지는 않으며 구원신앙구조 안에 단순히 흡수되지도 않는다. 긴급한 회복을 기대하는 것과 출애굽 전승이 균형을 잡는데 있어서 한 지주(支柱)로서의 구실을 함으로써 제2이사야 사상에서 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런 Harner의 결론은 "제2이사야의 사고의 전체적 구조 안에서 창조신앙이 구원신앙에 새 활력을 주는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구실을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창조전승 중에서 44:24 28과 51:9 10에 있는 Chaoskampf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문제는 옛 신화적 문맥 안에 있는 창조주제를 출애굽주제와 어떻게 연관시키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달렸다. 창조전승 중에서 신화적인 Chaoskampf상을 가진 전승들은 사실 고대 중동세계에 있었던 신화들이 가진 창조사상을 빌린 것인데 이는 창조사상의 독자성을 제공한 유일한 모체이다. 이 신화적 모체에서 찾는 창조사상의 출발에 관해서는 다음 4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기도 하겠다.
그러나 구원신탁의 구조 안에서 본 Chaoskampf 상의 해석은 "혼돈의 물을 말린"(44:27) 야웨가 혼돈 상태에 있는 예루살렘을 혼돈으로 두지 않고 새로 일으킬 것이며, 태초의 혼돈의 괴물을 정복한(51:9 10a) 야웨가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는"(51:10b) 즉 갈대바다를 걷는 출애굽의 구원행동을 이룩한 분이라고 해석한다. von Rad는 여기에서
"제2이사야는 열정적인 확신을 가지고서 신학적으로 두 가지 뚜렷한 행위로 나타나는 일이 실은 한 가지 일이고 야웨의 우주적 구속의 목적과 똑같은 행위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창조교리가 구원론적 신앙의 주문맥(主文脈) 속으로 충분히 흡수되었기 때문에 창조교리와 구원교리는 태고시의 괴물과 싸우는 한 묘사 안에 함께 포함되어 버렸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제2이사야가 Chaoskampf가 가지고 있는 창조사상을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켜 비신화화하고 역사화한 점을 밝혔다.
다시 요약하면 제2이사야의 기본적 사고구조가 된 출애굽 전승기억 속에 야웨가 이스라엘을 창조했다는 구속적 행위로서의 창조사상이 나와 있다. 구체적으로 51:9 10에 있는 Chaoskampf 표현인 창조주제를 제외하고서는 13개의 출애굽전승문맥에서 하나님이 최초의 창조주이시라는 언급은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출애굽주제를 가진 구원신탁(41:17 20; 43:1 7; 43:16 21)에 "창조"동사가 사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열거한 여섯 개 단위의 문맥에 있는 창조전승에는 최초의 우주창조자 사상이 너무나 뚜렷이 나타나 있다. 구원선포에 앞서 창조자 하나님에 관한 칭호를 가지고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야웨를 먼저 부르고 있다. 그 창조신앙이 구원신앙을 돕고 완성하는 보조적 기능을 갖는다고 보더라도 최초의 창조자로서의 야웨 신앙이 뚜렷이 부각된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구원사에서 선택전승에 예속된 창조신앙을 되풀이하여 보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신앙보다 앞서 창조신앙이 먼저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독자성이 제2이사야에게 와서 비로소 구원신앙과 연결되어 새로운 빛을 보게 된 점을 밝힐 수 있다.
창세기의 첫 창조설화(P)가 최초의 창조에 관해서 언급하는데 구원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주위를 끈다. 제2이사야의 위로의 신학도 40:12 31에서 먼저 야웨의 위대한 창조를 언급하고 있다. 구원에 관한 구원신탁은 이 창조전승(40:12 31)언급 다음에 41:8 13, 14 16, 17 20; 43:1 7, 43:16 21로 계속 등장하고 있으며 그 구원신탁들 중 출애굽 주제를 가진 41:17 20; 43:1 7; 43:16 21에 "창조"동사가 신학적 의미의 강화를 위해서 사용되어 있다. 제2이사야는 이렇게 최초의 우주창조의 독립성을 먼저 인정하고서 최초의 창조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첫 출발점을 밝혀 보여 주고 있다.
Ⅲ. 결론
바벨론 포로기가 끝날 무렵에 등장한 무명의 예언자 제2이사야는 자기 동포들에게 위로와 해방과 구원의 멧세지를 선포하는 데에 있어서 출애굽 구원사고에서 야웨 하나님이 이룩하실 새 일은 새 출애굽을 전망하도록 하였다. 출애굽의 구원을 기억하는 문맥 속에서 창조 때 나타난 야웨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려고 창조신앙을 포로민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출애굽 전승과 창조전승이 병합되어 있고 창조의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제2이사야가 단순히 옛 출애굽을 회고하도록 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고 창조신앙의 회복과 창조신앙의 원동력을 재해석해 줌으로써 구원을 기대하도록 한 창조신앙의 제 강조와 확립이 어떤 문맥에 강조되었으며 어떤 경로를 거쳐 창조전승이 제2이사야에게까지 전승되어 왔는가를 밝혀 보려고 하였다.
제2이사야에 나타난 창조전승 연구의 동향을 보면 von Rad의 전승사적 방법을 받아들이면서 그의 구원사적 입장에 치우친 신학적 방법에 입각하여 창조고리가 구원고리에 예속된 제2차적 기능밖에 안 가지고 있어온 방향으로 연구가 기울어진 것을 발견한다.
그 결과로 창조사상의 독자성이 약화되고 야웨가 창조자임을 믿는 창조신앙의 주체성이 희박하게 나타남을 느끼게 된다.
사실 von Rad의 구약신학적 입장은 창조관이 담겨 있는 창세기 1 11장의 태고사를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하는 구원사(Heilsgeschichte)의 서론으로만 보고 구원신앙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창조신앙을 보완적 수단으로만 해석한 구원사 편견에 빠지고 있다.
그러기에 제2이사야에게 출애굽전승이 있음을 확인하고 또 다른 전승인 창조전승이 있음을 인정하였지만 von Rad는 창조전승을 선택전승에 예속화시킨 그의 6경 신학해석 때문에 제2이사야의 창조신앙의 재강조와 창조자 야웨를 믿는 야웨의 독자성 확립에 공헌한 신학적 공헌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이 논문에서는 제2이사야에 국한해서 그의 창조전승을 이스라엘 역사를 중심한 구원사의 부속으로 보지 말고 제2이사야가 전승받은 창조신앙이 외래적이던 본래적이던 그 창조신앙의 독자성을 발견하여 그것이 어떻게 야웨신앙의 주체성에 의하여 재해석되고 재발견되어 이스라엘 역사창조에 생동성을 주게 되었는가를 출애굽의 전승을 중심으로 밝혀보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