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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는 6장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바울신학의 주요 사상들이 잘 제시되고 있다. 요한 칼빈이 에베소서를 가리켜, ‘바울 작품의 면류관’이라고 규정할 만큼, 에베소서는 지난 교회 역사를 통하여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바울 서신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이 이 에베소서를 읽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에베소서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설교 때에도 이 말씀은 잘 다루지 않는 형편이다. 그래서 보통 성도들은 이 에베소서 말씀에 대해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 버린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 에베소서 만큼 교회에 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한 책은 없다. 에베소서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한 새사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그리스도의 신부’ 등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에베소서를 보아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꿈의 결정체’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모든 중심에는 바로 이 교회가 있다.
우리는 매주 주일이 되면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예배당에 온다. 왜냐하면 이 예배당에 오면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만나 찬양과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식사 교제를 하는 그 모든 시간들이 참으로 행복한 시간임을 우리 모두는 체험하고 있다.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한 장소인 에베소는 터키 서부 해안에 자리잡은 도시로 광범위한 무역 중심 도시였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때 이 곳에 머물면서 회당과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바울은 에베소를 아시아 지역의 전초기지로 삼았고 여기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에베소 서신은 바울이 1차 로마 감금 생활 중에 기록한 서신이다. 에베소서를 읽으면 크게 둘로 구분이 되는데 에베소서 1장 부터 3장 까지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제시’하고, 4장부터 6장 까지는 이런 축복과 특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책임에 대한 말씀’이다.
‘1.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사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고 인사말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도록 결정하셨다. 창세 전에 그 분은 열망을 가지고 바울을 선택하신 것이다. 사실 육신적으로 본다면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 까지 하였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던 그런 악한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그 날도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려는 목적으로 가던 도중 예수님을 만나 예수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토록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 것이요,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바울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계셨다. 바울을 통해서 유대인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케 하고자 하는 큰 열망이 있었다. 오늘 읽은 새번역 성경에는 이 말이 없지만 개역 성경에는 편지를 받는 대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아! 에베소에는 신실한 성도들만 있었구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흔히 우리는 초대교회는 지금 타락한 오늘날 교회와는 달라 신실한 성도들만 있었으리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초대 교회에도 오늘날 만큼이나 교회 안에 죄가 많았다. 에베소서 4장을 보면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얼마나 타락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함께 에베소서 4장을 보겠다.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4장)’. 이 말씀을 정리해서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행했던 일을 살펴보면 ‘거짓말을 하고, 화가 나면 그 성질을 참지 못해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었고, 심지어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까지 하였고, 더러운 말을 내 뱉었으며, 성령을 근심케 하였고 악독과 노함과 떠드는 것과 형제를 비방하고 자매를 비방 하던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약 3년간 체류하였기에 누구보다 더 에베소 교회 형제 자매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악한 일을 행하는 성도들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들을 신실한 성도라 불렀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사람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눈으로 에베소 교인들을 보았다. 에베소 교인들의 허물과 죄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덮어 버렸기에 하나님의 눈에는 허물 많은 사람들이 아닌 신실한 성도로만 보여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허물 많은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허물을 허물로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오늘도 우리 함께 이곳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는 고통의 상황이었지만 에베소에서의 성도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허물과 죄는 바울의 눈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오직 기쁨만이 넘쳤다. 그 이유는 바울은 성도들 안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형제 자매들을 대할 때 육신으로 대하면 안된다. 육신으로 보면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주 예수님의 눈'으로 형제 자매들을 바라보라. 주님이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마음의 눈으로 지체를 바라보라. 그럴 때 참으로 사랑스럽고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는 형제와 자매로 보일 것이다.
전에 교회 생활에 관해 한번 말씀 드린 적이 있다. 헨리 나웬은 교회를 ‘결코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언제나 같이 사는 곳’이라 표현했다. 천사와 같이 완벽한 사람들과 함께 교회 생활을 하였으면 좋겠지만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에베소 교인들과 같이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분을 해가 질 때까지 품고 있다가 다음 날 까지도 분이 풀리지 않아 화를 내고, 도둑질도 하고 더러운 말을 하며 악독한 말을 하고 성질을 내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기를 ‘그리스도를 믿는 신실한 성도들’이라고 말하며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바울은 남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라 보았다. 바울 자신이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말씀을 안다고 하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옛사람에 속한 악한 성품을, 자신이 얼마나 엉터리 중에 엉터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로마 1차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기록을 한 책이다. 즉 에베소서를 기록한 후에 기록을 한 책이다. 바울은 믿음 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온갖 어두운 죄악을 다 드러내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바울 사역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바울은 고백한다. ‘죄인들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로 인하여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은 그러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고백하기를 죄인 중에서 자신이 우두머리라고 고백을 한다. 자신보다 더한 죄인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히 변화가 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다.
이번 주 새벽에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저를 용서하소서. 제가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제 안에는 온갖 죄성이 가득 차 있음을 고백합니다. 거짓말 하고, 형제를 미워했으며, 질투하였고,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의 온갖 정욕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았습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주님께 내어 놓고 회개하오니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나는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 갈 때마다 가슴이 뜨겁다. 날씨는 몹시 춥지만 가슴이 더 뜨거운 이유는 형제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두 자매님들이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기 때문에 더 기대가 되고 더 뜨겁다. 식사를 한 후 먼저 교육실에 들어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밀려오는 행복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게 된다. 나 같은 엉터리가, 수시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세상의 재물과 쾌락을 좇는 그런 내가 이런 복된 자리에 참여 할 수 있다니 이것은 정말이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는 행복이 밀물과 같이 내 가슴을 뜨겁게 데워준다.
바울은 비록 사랑하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만날 수는 없지만 그들을 생각하며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늘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바울은 벅찬 가슴으로 하나님을 찬송한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가장 최선의 것은 무엇인가? 헌금인가? 봉사인가? 남을 섬기는 것인가?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지금 가장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이다. ‘하나님! 참 잘하셨어요. 하나님! 멋쟁이에요’. 정말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은 멋진 분이심을 실감한다. 하나님 없는 삶이란 상상도 못할 비극이다. 아! 주님은 정말 귀한 분이시다. 섬기면 섬길수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기쁨과 소망이 넘친다.
아직도 이런 주님을 믿지 못한 분이 계신다면 이 자리를 통해 여러분에게 권한다. 예수 안에 기쁨이 있다. 예수 안에 소망이 있다. 이 세상 그 어디를 가도 참된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가 없고,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성공을 해도 여전히 만족함이 없지만 예수 안에는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다. 그 예수를 믿고 주님으로 평생 섬기는 귀한 체험이 있길 바란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우리는 함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주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의 어깨에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모든 죄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죄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주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대신 죽어 주신 그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원전부터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나아가 보라.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휴! 어찌 염치도 없이 그렇게 나가나요? 제가 한 짓을 보면, 지금도 죄 때문에 형편없이 무너진 못난 저인데 이런 모습으로 어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나갈 수 있나요?’ 아니다. 괜찮다.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오늘 우리가 찬양하는 하나님은 ‘나와 같은 형편없는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인간과 똑 같은 인생을 사심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셨고 마지막에는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나를 그리고 여러분을 자신의 생명 보다 사랑하신 그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다 아시고 우리 보다 훨씬 더 많은 고초를 당하셨고 약함을 다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찬양할 수도 없지만 주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담대히 나아가며 찬송할 수가 있는 것이다.
찬송이란 단순히 목소리로나 악기로 연주하는 것 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노래와 악기 연주는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노래를 부르면서 감동할 수 있고 심지어는 기뻐 뛰고 울 수도 있다. 때문에 우리 찬송의 기초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놀라게 되고, 감탄하게 되며, 감사에 넘치게 되어 이런 선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가 있다.
그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모든 신령한 복’은 다시 말하면 ‘성령안에 있는 축복’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 축복은 성령과 하나 될 때 받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명예, 권세, 건강이나 성공을 통해 복을 찾는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것으로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참된 복을 소유하고 싶은가? 이런 복락의 강을 누리고 싶은가? 이런 복을 소유하고 싶다면, 이런 복락의 강을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럼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과연 무엇인가? 그 답은 4절과 5절에 있다. ‘4.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5.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6.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우리를 택하셨는데, 시간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므로 이 선택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기초에 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시간에서 환난과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영원 세계에서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예정은 시간이 침범할 수 없는 영원 세계에서 이미 선택 되어진 것이므로 시간이 지나도 변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우리의 감격이 있는 것이다.
그 분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실수 하지 않으셨는지 오히려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 자신을 바라보면 거룩하지 않고 흠이 많은 흠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봐도 그렇고 또 주변의 형제, 자매들을 볼 때에도 별로 거룩하지도 않고 흠도 많아 보인다.
찬송 한 곡 부르겠다. ‘주는 완전합니다’ 아까 함께 불렀던 찬양이다.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 합니다. 주 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 우린 우린 연약합니다. 주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 합니다. 주의 긍휼을 구하는 죄인입니다. 우리 주만 바라봅니다. 한 없는 주님의 은혜 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 가릴 수 없는 주 영광 온 땅 위에 충만 합니다 주님만이 길이오니 우린 그 길 따라 갑니다 그 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하루 하루 힘겨운 날들을 살아가며 연약하여 넘어지고 실수를 한다. 참으로 형편 없고 부족한 자이기에 한 없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설교를 하고 있지만, 나처럼 무능하고 미련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 단에 올라 오기 전에 두려워서 기도한다. ‘주여! 내 입에 숯을 놓으소서. 내 입술은 부정하고 더럽습니다. 제발 제 입술을 정결케 하여 주십시오. 제 생각이 아닌 주님의 생각을 오늘 함께 나누게 하소서. 주님만 바라봅니다.’ 일주일 내내 이 설교 말씀만을 붙잡고 살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말이지 설교를 할 자격이 없는 연약한 사람이다.
우리가 완전하다면 주님을 바라볼 필요도 없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고 실수하는 존재이므로 매 순간 넘어지고 실수 할 때마다 주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찬송 마지막 구절이 이렇다. '그 날에 우릴 이루실' 난 이 찬송가 가사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렇다. 지금은 비록 형편 없지만, 별로 거룩하지도 않고 점도 많고 흠도 많지만 그 날이 되면, 우리가 주님과 만나는 그 날이 오면 우릴 이렇게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만드실 것이다. 지금은 형편 없지만 그 날에 이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온 우주 가운데 충만하신 하나님!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아들로 삼아 주신 그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자.
5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나오는데 여기 나오는 자녀는 원어로 ‘휘오데시아’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양자로 삼았다’는 말로 자신의 자녀가 아닌 남의 아이를 자신의 자녀로 입적하는 것을 의미하는 전문 법률 용어이다. 양자로 삼게 되면 그 부모의 모든 소유가 다 양자가 된 아이의 소유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해 주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시는 것도 모자라서 보너스로 그 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 주셨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가 다 우리의 것이 되었다. 하나님 안에 속한 모든 선한 것들과 그분의 기업이 다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이런 양자됨의 기쁨을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누리고 있고, 훗날 하늘 나라에 가면 그 분의 모든 기업을 실제적으로 다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6절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우리는 마음껏 소리 높여 찬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토록 큰 것이다. 우리는 이토록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안된다. 우리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자.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도록 서로 서로 축복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형제 자매들을 바라보자.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복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자.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셨으며, 우리를 하나님의 모든 풍성을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그 영광을 찬송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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