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북한은 1970년대 이후 노골적으로 고구려 중심주의와 정통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삼국시대의 주역이고 백제와 신라는 조역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조선전사」나 「조선통사」에는 4세기 말 이후 고구려의 南進(남진)정책은 삼국통일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평가하는 반면에 백제와 신라의 北進(북진)정책은 그 지배층의 탐욕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북한학계는 7세기의 신라가 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민족적 배신행위로 규정합니다.
李仁淑 신라의 삼국통일이 「민족적 배신행위」라는 북한 역사 이데올로그들(理論陣)의 주장은 객관적 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초부터 이미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또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는 낡은 생각이 아직도 나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상의 삼국시대는 원래 하나의 국가가 셋으로 분열된 것이 아닙니다. 청동기시대 이후 수백 개의 城邑國家(성읍국가)가 나타났고, 그것들이 다시 전쟁과 동맹을 통해 광역의 영토국가인 신라, 고구려, 백제로 정리된 것입니다.
權寧弼 북한의 역사책에서 고구려는 선진문화의 창조자와 전파자로서 기록하는 반면 신라는 후진사회이고 그 지배층은 삼국 간의 경제·문화적 교류를 방해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벌여 동족에 대한 더 많은 억압과 착취를 꾀했다는 것입니다.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쪽에 갇혀 있던 「후진사회」라는 주장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이거나 모략입니다. 당시 고구려나 백제는 東아시아의 선진사회인 중국 쪽의 문화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중국과 국교를 맺기 전까지의 신라는 북방 스텝 루트(초원의 길)를 통해 서방세계의 문화를 수용했습니다. 최근, 흥미롭게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문화 수용시대에 축적된 에너지 때문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平壤을 민족사의 중심에 두려는 억지 攻勢
사회 북한의 역사 조작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습니다. 10년 전부터 북한은 평양 근교에서 檀君陵(단군릉)과 檀君 뼈를 발견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단군 뼈를 전자상자성공명연대(ESR)에 의해 수십 번 측정한 결과 1994년 현재 5011±267년 전의 뼈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서울대 이선복 교수는 그런 주장에 대해 기본적인 논리구성에 있어서도, 개별적인 증거의 제시에 있어서도 전혀 아무런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李仁淑 그 무덤 안에서 발견된 金銅冠(금동관)의 파편이 檀君시대의 것이라는 주장은 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원전 3000년 무렵 평양 일대에서 청동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금술이란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억지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BC 12∼10세기에 개막됩니다. 소위 「단군릉」은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5∼6세기 고구려의 어느 유력자 부부의 합장 무덤일 것입니다.
權寧弼 그것은 민족사의 중심을 평양으로 설정하려는 소위 주체사학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문적 관점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방적인 정치선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만 단군조선에 대한 북한의 그런 주장을 남한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회 금년 들어 KBS TV가 檀君陵(단군릉)뿐만 아니라 東明聖王陵(동명성왕릉)에 관한 대형 특집 프로그램을 잇달아 방영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非학문적인 북한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무시해야 마땅한 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영방송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단군릉뿐만 아니라 동명성왕릉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 東明聖王의 무덤은 平壤 천도 이후에도 옮겨지지 않고 舊都인 集安(집안)에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을 방문한 남한의 지식인들 중 일부가 소위 「단군릉」과 「동명성왕릉」을 참배하면서 五體(오체)를 땅바닥에 납작 붙이는 큰절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절(寺) 모르고 시주하는 格이죠.
申瀅植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형성의 틀이 거의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기반이 확고해진 것이죠.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상 최장의 전국시대였습니다. 피를 피로 씻는 수백년 간의 亂世(난세)를 治世(치세)로 바꾸었다는 것만으로 삼국통일은 역사의 큰 발전입니다.
權寧弼 통일신라는 당시의 슈퍼파워 唐제국과 함께 선진문화권을 형성, 민족문화를 한 단계 높인 역할을 했습니다. 통일신라는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 맞은 황금기였습니다.
신라 積石木槨墳은 스키타이 양식
사회 경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경주시내로 진입하면 옛 무덤들이 숱하게 눈에 띕니다. 이 무덤들이 호화무비의 세계적 명품인 금관과 황금칼, 로만 글라스가 쏟아져 나온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돌무지 덧널무덤)인데, 그것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입니까.
金秉模 積石木槨墳은 신라왕이 麻立干(마립간)으로 불리던 시기(4∼6세기)의 무덤들입니다. 원래 북방 초원(스텝) 지역에서는 유력자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살던 통나무 집을 돌과 흙으로 그대로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스텝지역의 적석목곽분을 파보면 난방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고 심지어 창문도 발견됩니다. 신라 金씨들은 그런 옛 전통에 따라 지상에 시신을 넣을 집을 일부러 만들고 그 위에다 냇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半球形(반구형) 봉분을 한 겁니다.
사회 金선생님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스키타이 추장 묘역인 이씩(Iccyk) 지역의 쿠르간(Kurgan=적석목곽분)群을 둘러보셨죠? 경주의 대릉원과 비교하면 어떻습디까.
金秉模 積石木槨墳은 세월이 지나면 목곽 부분이 썩어 주저 앉기 때문에 적석 중앙 부분이 함몰되게 마련입니다. 그 모양은 경주의 고분들과 같았지만 규모면에서 훨씬 크더군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스키타이족의 쿠르간들은 비 온 다음날의 개미굴처럼 수백 개가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權寧弼 스키타이族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黑海(흑해) 지역에서부터 천산산맥 사이에 위치한 넓은 초원지대에서 농업과 유목을 경제수단으로 삼아 생활했습니다. 스키타이는 유별나게 황금을 사랑했습니다. 「스키타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가 붙인 것이고, 그 후손들인 유목민들은 자신들을 사카(Saka)족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黑海를 통해 그리스인들과 교역하면서 그리스 제품인 황금물품을 많이 수입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에는 그 당시 만들어진 물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1991년 한국에서 열린 「스키타이 황금展」에서 전시된 것은 바로 이 유물들입니다. 이것들 중에 戰士 두 명이 角杯(각배) 하나로 술을 나눠 마시는 작품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이씩 쿠르간(적석목곽분)에서 발굴된 黃金人間은 금을 사랑하던 스키타이人들의 풍속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신라 金문화의 한 뿌리는 헬레니즘
李仁淑 스키타이人들은 황금을 사랑했지만 황금을 다루는 기술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용맹했던 스키타이人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동물 무늬와 풍습이 조각된 황금제품을 그리스人들에게 주문하기도 했거든요. 현대 비즈니스 용어로 말하면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입니다. 그리스人들은 무역을 잘하기도 했지만 金세공에 있어서도 천재였습니다.
사회 경주의 積石木槨墳에 누워 있는 墓主들이 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최근 「로마문화왕국-신라」라는 책을 써 크게 주목받은 古代유리 전문가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씨는 『4∼6세기 북방 초원의 길을 통해 들어온 로마세계의 문화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더군요.
李仁淑 신라의 金문화나 유리제품에 영향을 준 것은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입니다. 헬레니즘 문화는 로마문화의 원류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라문화의 뿌리는 그레코 로만 문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權寧弼 신라왕의 칭호는 4세기 중엽의 내물왕 때부터 麻立干으로 바뀌었죠. 신라는 대체로 이 시기부터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고 국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사회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文武王의 陵碑文(능비문)을 보면 侯(투후)의 후예라는 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투후라면 匈奴(흉노)의 休屠王(휴도왕)의 아들인 金日(김일제: 기원전 134∼86)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라김씨는 흉노 출신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흉노는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中原에 압력을 가하던 북방의 기마민족입니다. 당시 초원에는 묵특(冒頓)이라는 흉노의 영걸이 나타나 초원의 패자인 單于(선우)가 되어 있었습니다.
楚漢(초한) 쟁패전에서 승리하여 中原을 통일한 漢高祖 劉邦(한고조 유방)이 흉노를 치기 위해 40만 대군을 동원, 親征을 했다가 白登(백등)이라는 곳에서 흉노군 30만에게 오히려 포위당하고 말았죠. 묵특의 포위작전은 매우 집요했어요. 아무리 포위망은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漢兵은 10인 가운데 두세 명이 동상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흉노병은 추위에 익숙하여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결국 漢나라가 묵특에게 美人과 금을 바치겠다고 약조하고 겨우 포위에서 풀려났습니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게 사실상의 조공을 하게 됩니다. 교훈을 주려 했다가 되레 교훈을 받은 셈입니다.
申瀅植 漢과 흉노의 힘 관계는 漢武帝(한무제) 때에 가서야 역전됩니다. 漢의 장수 곽거병(곽거병)은 기원전 122년 甘肅(감숙)지방에 있던 흉노를 쳤습니다. 흉노의 계속되는 패전에 당시의 單于 이치는 그 책임을 물어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에 두 왕은 이치 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漢나라에 항복하려 했는데, 도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빼앗았지요. 휴도왕의 아들 日 (일제)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漢나라에 잡혀온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후 큰 戰功을 세운 日에 대해 漢武帝는 祭天金人(제천금인), 즉 「하늘에 제사 지내는 알타이 맨」이라고 해서 金씨 성을 하사했습니다.
金秉模 日는 카자흐스탄語의 「삐디」를 한자로 옮긴 것인데, 그 뜻은 학식이 있는 사람, 선각자, 샤만 등입니다. 漢武帝 이후 南흉노는 漢나라에 복속했지만, 北흉노는 서쪽으로 옮겨갔습니다. 北흉노가 바로 게르만族을 서쪽으로 밀어내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촉발한 훈族입니다.
權寧弼 東로마제국을 전율케 했던 훈族의 지도자가 아틸라王(재위 434∼453)입니다. 아틸라王이 이끄는 훈族은 천산산맥 서쪽 일리(Illi) 지역에서 서진하여 단숨에 볼가江을 건너 東로마 경내로 침입했습니다. 보병을 주축으로 했던 東로마軍은 훈族 기마병의 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여러 도시가 폐허화했어요. 훈族은 오늘날의 불가리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를 지나 프랑스의 골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東로마제국은 속수무책이어서 아틸라王에게 평화를 애걸했습니다. 그 결과 불평등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어요. 조약의 내용은 매년 950㎏의 금을 훈族에게 헌납한다는 것입니다. 東로마의 역사가 프리쿠스는 강화회담중에 아틸라를 직접 목격하고 그의 용모를 「키가 작고 뚱뚱하며 머리통이 크지만 얕은 코에 수염이 성긴 모습이다」고 기록해 놓았어요. 전형적인 몽골로이드(황색인)의 특징입니다.
申瀅植 로마세계의 금을 약탈했던 아틸라王의 大攻勢 직후에 신라에서는 세계적 명품인 금관을 정형화했던 慈悲마립간(458∼479)의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또한 慈悲마립간은 100여 척의 배에 타고 신라에 침범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과 서쪽에서 거의 동시대에 알타이系 영웅의 캠페인이 화려하게 펼쳐진 셈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김씨의 始祖는 金閼智(김알지)입니다. 그렇다면 흉노 왕족 김일제와 김알지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사회 김일제는 임종시의 漢武帝로부터 어린 昭帝(소제)를 보필하라는 유촉을 받았습니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대대로 侯(투후)를 계승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王莽(왕망)의 찬탈 때 협조했던 모양입니다. 光武帝 劉秀(광무제 유수)가 일어나 왕망의 新나라를 멸망시키고 漢나라를 부흥시킨 후에 김일제의 후손들은 피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金秉模 그때 김일제의 후손들은 休屠國(휴도국)으로 도주하여 성을 王씨로 바꾸고 살았습니다. 이 사실은 제가 휴도국 故地에 있는 비석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런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文武王의 陵碑(능비)에 새겨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申瀅植 어찌 되었든 김알지는 탄생 후 昔脫解王(석탈해왕)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김알지의 후손인 仇道(구도)는 백제와의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어 공신이 되었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仇道의 아들 味鄒(미추)가 왕위에 올라 김씨계의 첫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김씨 왕들은 尼師今(이사금)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다가 17대 왕 訥祗(눌지)부터 麻立干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 후 智證(지증)을 끝으로 마립간이란 칭호는 더 사용하지 않고 그 다음 대인 法興(법흥)부터 왕이란 칭호를 씁니다.
사회 이사금이나 麻立干의 뜻은 무엇입니까.
金秉模 李基文(서울대 명예교수·언어학) 선생과 李基東(동국대·한국고대사) 교수와 함께 헝가리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 학자가 바로 그런 질문을 합디다. 실은 지금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한국 대학교수가 세 사람이나 가서 답변을 못 한다고 해서야 체면이 서겠습니까. 그때 했던 저의 답변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되풀이하겠습니다. 이사금은 원래 북방 초원지대의 어느 지역 이름인데, 나중에 그곳 출신 사람들이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지역은 아마 카자흐스탄의 이씩 지방인 것 같습니다. 신라의 장군인 異斯夫(이사부), 일본의 전설시대 영웅인 이사오, 흉노와의 전쟁으로 이름을 남긴 漢의 장군 貳師(이사) 등은 모두 이씩 지방과 연결되는 알타이 계통 인물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東歐에 가면 「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신라의 마립간은 말릭+칸, 즉 말릭 출신의 大영웅이 아니겠습니까. 칸은 「칭기즈칸」의 예에서 보듯 북방 초원지대에서 여러 왕들까지 지배하는 지상 최고의 존재, 중국 같으면 황제에 해당하는 인물이거든요. 영웅에도 계급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한 단계 높은 칭호로 보입니다. 이런 얘기를 제가 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그 헝가리 학자가 『헝가리 말로 말릭이 바로 영웅이다』라고 감탄을 하더군요.
金閼智=금(Gold)+금(Gold)
金秉模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알지가 발견된 곳은 始林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무가 많은 곳이죠. 김알지가 들어있던 궤짝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으로 첫번째 꼽을 수 있는 것은 나무(木)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백화수)는 바로 生命(생명)을 의미하는 神樹(신수)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신라를 시라기(白木)라고 불러온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三國遺事에는 昔脫解(석탈해) 이사금이 김알지를 안고 대궐로 가는 길에 「새들이 모두 따라오면서 춤추고 뛰놀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시아 기마민족 간에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입니다. 북방 유목민들 중에는 鳥葬(조장)을 치르는 풍속이 있습니다.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록들은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김알지의 姓(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지의 姓인 김은 금(Gold)을 뜻합니다. 이름인 閼智(알지)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금(Gold+Gold)인 것입니다.
사회 그러니까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계 왕들의 무덤에 금제 유물이 많이 매장된 것이군요.
權寧弼 신라와 가야 사람 이름과 지명 중에 알타이 문화권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것이 여러 개 있습니다. 몽골 쪽에는 Altay, 중국 쪽에는 아르타이(阿勒泰), 러시아 쪽에는 Altai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알타이 산맥의 최고봉인 우의봉에서 흘러내리는 강 이름도 아르치사江이에요. 이 강은 沙金(사금)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그 산의 이름도 金山(알타이山)입니다.
사회 신라의 지배층을 구성한 朴, 昔, 金씨들은 탄생과정이나 성씨의 유래, 角杯 사용과 같은 풍속을 살펴보면 모두 기마민족 문화의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김씨족들만 유별나게 금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금관은 김씨계 묘역인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거든요. 금관은 누가 썼다고 보십니까.
신라 금관은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 주는 暗號
金秉模 금관은 聖骨(성골)만 썼는데, 그 중에서도 왕이 된 사람과 그 형제 자매들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동관은 왕이 되지 못한 인물들이 사용한 것 같고, 은관은 금동관을 쓰지 못한 계층에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사회 신라의 금관은 先行형식이 있는 것입니까.
權寧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을 더욱 크게 하거나 더욱 아름답게 한 것이 아닙니다. 鹿角樹枝形(녹각수지형; 사슴뿔 모양의) 입식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지만, 直角樹枝形(직각수지형) 입식은 신라인의 독창적 창안입니다.
사회 금관을 살펴보면 直角樹枝形 立飾(직각수지형 입식)이 3단인 것과 4단인 것들이 주로 발견되었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金秉模 종래까지 山字形 또는 出子形이라고 불렸던 立飾은 북방 초원지대의 자작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니만큼 樹枝形(수지형)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 같습니다. 금관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한국 고대사의 비밀이 풀립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금관의 樹枝를 보면 1단, 2단, 3단, 4단형이 있습니다. 樹枝의 段(단)은 어느 왕계의 1대·2대·3대·4대 王인지를 표시한 것입니다. 몽골의 고고학자 노브고르도바 박사를 그의 생전에 만나 물어보았더니 『樹枝의 段은 원래 여자 샤먼의 제너레이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단언합디다.
사회 금관 스스로 갖고 있는 암호를 풀어보면 경주 大陵園(대릉원)의 적석목곽분 안에 누워 있는 墓主들이 누구인지 대충 드러나겠군요.
金秉模 가장 화려한 4단짜리 금관이 나온 天馬塚(천마총=155호 고분)은 걸출했던 왕인 지증마립간의 무덤입니다. 曲玉(곡옥)이 달려 있지 않은 4단짜리 금관이 나온 金鈴塚(금령총)은 후계자를 두지 못했던 소지마립간의 무덤이지요. 胎兒(태아)의 모습인 曲玉은 多産을 의미합니다.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3단짜리 금관이 나온 瑞鳳塚(서봉총) 북분은 鳥生夫人(조생부인)의 무덤입니다. 3단짜리지만 가장 장중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은 김씨 왕계의 王中王이라 할 만한 자비마립간의 무덤, 3단짜리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98호 고분) 北墳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비마립간의 여동생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李仁淑 鳥生夫人이라면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인데, 그녀의 금관에만 유일하게 새가 장식되었다는 것이 흥미롭군요. 그런데 서봉총 금관을 조생부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金秉模 지증왕의 어머니인 鳥生은 눌지마립간의 딸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입니다. 그러니까 聖骨 중의 聖骨입니다. 그녀의 탄생 과정에도 새와 관련된 얘기가 있었지만, 失傳(실전)된 것 같습니다. 신라 瓢形墳(표형분; 표주박형의 무덤)의 경우 북분은 여자의 무덤이고 남분은 남자의 무덤입니다. 서봉총 북분의 주인공도 여자일 것입니다. 이 북분에서 서봉총 금관의 임자가 누구인가를 풀 수 있는 유물 하나가 나왔습니다.
銀으로 만든 盒(합)인데, 거기에 「辛卯年」이란 銘文이 적혀 있어요. 그 辛卯年은 지증마립간 4년(511)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王中王으로 일컬어지는 지증왕마립간은 鳥生부인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銀盒(은합)은 지증마립간이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호화로운 유물을 내장하고 「신묘년」이라는 명문까지 써 넣어진 것으로 해석됩니다.
클레오파트라의 금 귀고리
李仁淑 신라금관에는 수목과 녹각, 그리고 새 등이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수목과 새 숭배사상은 神의 메신저로서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시베리아 샤먼의 오랜 전통입니다. 사슴 숭배사상 또한 사슴의 뿔이 나뭇가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결국은 수목숭배에서 나온 모티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금관에는 생명과 多産의 상징인 曲玉이 무수히 장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금관들의 장식 모티브와 제작 아이디어는 그것이 출토된 신라 고분의 墓制인 적석목곽분과 더불어 시베리아 대륙 유목문화의 소산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權寧弼 금관은 결국 신라인의 창안품이지만, 그 조형의 바탕을 보면 기본적으로 사슴뿔과 나무 등의 소재를 디자인화한 것인데,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돈江의 노보체르카스트 출토)과 강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금관에 부착된 둥근 잎새형의 瓔珞(영락; 구슬 꿴 장식)도 동아시아에는 유례가 없는 외래 요소입니다. 금관과 장신구에 부착된 曲玉도 알타이의 파지리크 지역에서 그 사용례가 발견되며 금제 허리띠 또한 오르도스의 흉노 지배층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사회 신라의 금문화는 양에 있어서 엄청나게 풍부하며 주로 장신구류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同시대 東아시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양상입니다.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금제품은 금관, 금귀고리, 금목걸이, 금팔찌, 금반지, 금요패와 패식, 금제 신발 등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금장식으로 멋을 부린 셈입니다.
李仁淑 고신라 무덤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금제 귀고리가 무수하게 출토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太環式(태환식) 귀고리는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중국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예가 없습니다. 신라의 태환식 귀고리와 똑같은 태환식 귀고리의 실물이 확인된 유일한 지역은 이집트입니다. 이집트의 그레코 로만시대, 즉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는 프톨레마이오스王朝의 귀고리 중에서 신라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형태와 제작기법의 유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입니다. 이렇게 신라 금제 귀고리에 표현된 기술을 살펴보면 그 맥이 그레코 로만 시대의 금공예품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權寧弼 신라는 당시 이집트 수학의 8進法을 수용한 것 같습니다. 한양대 김용운(수학) 교수에 따르면 아직도 우리 언어생활에서 사용되는 「이팔(2×8)청춘」 같은 것이 그 흔적입니다.
李仁淑 순금의 가공에 필요한 모든 기술이 총동원되어 있는 듯한 다양한 기법과 표현양식은 모두 찬란한 그리스人들의 金工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똑같은 장식 모티브(의장)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에서 출현할 수 있을까 의아하지만, 이는 확실히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