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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스물일곱 덜컥 폐병에 걸리고 말았다. 폐가 별로 좋지 않았던 데다가 화학공장을 경영했던 까닭에 폐병이라는 무서운 병마에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었다. 지금이야 약이 좋아 폐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드물지만 천구백사십년대 말의 폐병이라는 것은 불치의 무서운 병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아버님과 큰형님, 넷째 형님이 모두 폐병으로 인해 돌아갔는데, 집안이 넉넉했던 터라 큰 형님은 일본의 대학병원에까지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목숨을 읽고 말았으니 내게 찾아온 폐병은 곧 죽음을 의미 하고 있었다.
별다른 치료방법도 없었으므로 공기 좋은 곳으로 가 요양이나마 할 요량으로 대둔산에 있는 태고사을 찾은 것이 출가에의 인연이 될 줄이야.
태고사는 일고여덟분의 스님들이 주석하여 참선수행을 하고 있던 조용하고 풍광이 좋은 절이었다. 촛대바위가 절경인 그곳에서 평소에 가까이하던 철학 서적을 읽으며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조실스님께서 내 방엘 들러 물으셨다.
'그래 무슨 책을 그리 읽고 있소'
그렇게 조실스님과 토론이 시작되었다. 여러 사업으로 꽤 재산가였던 내 아버님은 '일본말 배워 그들 하인 노릇 하려 하느냐'며 자식들을 학교엘 보내지 않았다. 해서 나는 일찌감치 경영에 눈을 떴고, 그 틈틈이 세계문학전집이나 철학서적들을 탐독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웬만한 인생살이엔 말문 안 막힌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날 조실스님의 방문 후 내 밑천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스님과의 토론이 이어졌던 한 주일 후엔 내 스스로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땐 몰랐으나 훗날 알고 보니 그분이 일관했던 말씀은 '공도리空道理'였는데, 무슨 수로 세상사를 관통하는 불법의 논리를 대응할 수 있겠는가.
병에 걸려 절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절집 사람들을 내심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일제말 절집 생활이란 말이 아닐 만큼 가난했고 대처승이 많았다.
스님네들이 절에서 엿을 고아 가지고 오거나 튀각 같은 것을 해가지고 신도집에 오면 쌀 한말씩 얻어가곤 했고, 조그만 사찰에선 볏단을 얻어다 먹고 살았던 시절이었으니 불법이 무엇인지 모르던 내 눈에 그들이 그저 천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독립군 출신이며 만공스님의 상좌였던 조실 포산 스님의 '공도리'가 나를 압도했던 것이다. 어렴풋이나마 '불법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나는 문학서적도 남의 팔자얘기나 듣는 것 같아 시들해 졌고 토론에서 번번이 패하기만 했던 철학책에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럴 즈음 조실스님께서 비로소 내게 그곳에 온 이유를 묻더니 조그만 책 한 권을 내놓았느데,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牟陀羅尼經'이었다.
'이 경 속에 있는 관세음보살모다라니주'를 일심정념으로 꿈속에서도 송주할 수 있도록 정진하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고 그대의 병이 나을 수 있다.'
이미 불법의 깊은 진리에 관심이 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스님을 깊이 믿고 있었으니 그 분의 말씀에 뭐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 그날부터 앉으나 서나 누워서나 일념으로 주력을 하기 시작했다.
'나무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아리야 바로기네 세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 가로니가야 다냐댜 아바다 아바다 바리바제 인혜혜 다냐다 살바다라니 만다라야 인혜혜 다냐다 살바다라니 만다라야 인혜혜 바리마수다 못다남 옴 살바작수가야 다라니 인지라야 다냐다 바로기제 새바라야 살바도따 오하야미 사바하'
불법에 있어 주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었으나 조실스님을 믿고 전심전력으로 주력에 몰두했으니, 나중에는 태고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주력이 실려 있는 듯 주력과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한 달은 채 안 되었을 것이다. 삼주쯤 지났을 때였을까. 나를 돌보아주었던 의사가 내 몸을 진찰해 보더니, '아, 이 선생 병이 다 나았군요'하며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반가워 일어서니 법당 안이었다. 비몽사몽 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날아갈 듯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순간 불전에 나도 모르게 무수히 예배를 드렸다. 그 불치의 폐병이 그렇게 씻은 듯이 사라졌으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한 가피, 헤아릴 수 없는 대은혜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부처님 법을 믿고 수행 삼매에 들었을 때 오는 그 무한한 가피를 온몸으로 경험했고, 그 가피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가는 경험한 이만이 알 것이다. 나는 그때 경험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출가를 결심했고 그 후로도 어떤 인연으로 선을 하게 될 때까지 줄곧 서른 해를 주력으로 수행을 삼았다.
아무리 성취하기 어려운 일도 내게 맡겨지면 안 되는 일이 없었으니, 주력수행은 나와 뗄 수 없는 인연이 깊은 수행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피를 얻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몰아의 경지로 수행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이 바라는 일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부처님법이 무엇인지 공부해 자신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정진하다보면 자연히 부처님법이 내 것이 되어 실생활에 실천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 가만 보면 부처님법을 알려고 노력하고 수행에 몰두하기 보다는 그저 뭔가 이루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빌기만 한다. 기도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부처님 법을 깊이 체득하고 원을 세워 수행정진하다 보면 업장이 녹아 어려운 일을 미리 막기도 하는 것이다.
경전을 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야 수행이 제대로 되는 것이어서 나는 신도들에게 경전을 익혀 불법이 무엇인지 알고 수행에 들어가라고 이르고 있다. 경전을 공부하며 스스로 수행의 필요성을 절감할 때 수행이 빛이 나는 것이다. 끊임없이 참회하며 수행에 매진해야 한다.
병이 씻은 듯이 나은 후 곧 포산스님을 은사로 오계를 받고 절집사람이 되었으니 사실 나에게 행자시절이란 것이 생략된 셈이다. 글쎄 굳이 행자시절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포산스님의 공도리를 들으며 불법에 끌렸던 일,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찬 없는 밥 먹어가며 주력삼매에 빠졌던 그 시간들과 그 후 태고사를 떠나 계룡산 용화사로 들어가 다시 주력으로 수행하며 지낸 몇 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전 사제인 탄성스님이 문득 입적했다하여 법주사엘 다녀왔다. '인욕보살'이었던 그도 세월이 가니 그렇게 갔다. 어느덧 불가에 들어와 쉰해를 넘겼고 다시 여든을 넘겼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존재 아닌 소유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난리법석인데,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입산한 이 출가수행의 길에서 얼마만큼의 힘을 세상에 회향했을까. 어쩐지 그 일을 생각해도 흡족하지 않다.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감사 합니다 ...()()()...
나무 관세음 보살 !!!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