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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요한복음 공부 제15강
* 말씀 : 요한복음 15:1-27
* 요절 : 요한복음 15:5
열매를 맺으려면
“나는 포도나무여 너희는 가지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우리는 요한복음 13장부터 계속되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자기들의 곁을 떠나려 하십니다. 그러면 지난 3년은 뭐란 말인가, 꿈은 사라졌고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진즉 그만 두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 3년의 세월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게 되고, 또 가지치기를 하고 깨끗하게 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물이 오르고, 양분이 공급되고, 이윽고는 열매를 맺을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 또 인생에 열매 맺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1. 내 안에 거하라(1-6)
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참 포도나무요, 우리들은 가지, 그리고 하나님은 포도원의 농부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포도원에는 포도나무가 있고, 그 가지에는 주렁주렁 포도 열매가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열매를 달고 있을 뿐, 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나무입니다. 나무는 가지에 수분을 공급하고 양분을 공급합니다. 가지는 나무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는 가지에게 있어서 생명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요 우리를 가지라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1:4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또 14:6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또 가지에 달릴 열매의 좋고 나쁨을 결정합니다. 배에는 돌배가 있고, 감에는 땡감이 있고, 살구에는 개살구가 있듯이, 포도에는 들포도가 있습니다. 들포도는 모양도 좋지 않고 맛도 없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가지가 들포도 나무에 붙어있으면 이 같은 들포도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가지는 참 포도를 맺습니다. 탐스럽고 맛있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살면서, 나쁜 열매든 좋은 열매든,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있어야 참된 열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담은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한탄하셨습니다.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이사야5:4). 또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로마서 6:20,21).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사람이 거둔 것은 수치와 죽음의 열매였습니다. 이런 인생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아담의 생명 대신에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으며, 참된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할 참된 열매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열매는 먼저 구원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4:36에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나니…’라고 하신 그 열매입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높이 되고 많은 것을 가져도, 또는 구제를 많이 하고 교회에 오래 다녔다 해도, 영혼의 구원이 없는 사람은 열매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니고데모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정상에 오른 인물이었지만 거듭나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났고, 구원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다음에는 인격의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2,23에서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욘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본성이 변화되지 않고 어린 아이 때나 환갑 때나 그 인격이나 도덕성에 있어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는 열매가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 넓어지고, 기쁨이 깊어지고, 화평과 인내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에 있어서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점점 더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야 합니다.
또 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28:19,20). 예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양을 치라, 제자를 양성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명에 열매가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먹고 사는 일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생 동안 자기 하나 먹고사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가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열매 있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관계성을 갖게 된 사실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한 훌륭한 분을 알았는데, 이제 그와 이별해야 되는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이제부터는 진정한 생명을 얻고 참된 열매를 맺게 되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제 2절을 봅시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농부’라 비유하십니다. 포도원 농부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해 버립니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공연히 수분과 양분만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열매 맺는 가지는 어떻게 합니까? 깨끗케 합니다. 여기서 ‘깨끗케 한다’는 말은 물로 씻는다는 뜻이 아니라 Pruning - 가지치기를 말합니다. 잔가지나 웃자란 가지를 쳐내주는 일입니다.
포도나무는 가지가 많고 또 길게 뻗습니다. 가지 하나만 해도 4미터나 자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지가 생기는 대로 놔두고, 자라는 대로 버려 두면 가지와 잎만 무성해져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가지치기를 합니다. 처음 3년 동안은 아예 열매를 거둘 생각은 하지 않고 가지치기만 한다고 합니다. 어떤 농부가 가지를 다 쳐내는 것이 아까워 그대로 두었는데 아주 자잘하고 지질한 열매만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듬해부터는 순이 나올 때부터 제일 좋은 순 하나만 놔두고 전부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자 탐스러운 포도 열매가 알알이 맺히기 시작했다 합니다. 포도 농사의 비결은 얼마나 부지런하고 또 과감하게 가지를 잘라 내주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꾸는 농부이십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규모 있게 살기보다 아무렇게나 살고 싶어합니다. 또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한 두 가지에 집중하기보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경험해 보고 싶어하고 추억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런 본성을 그대로 두면 한없이 자라서 그의 인생에는 곁가지가 많아지고 잎만 무성해 집니다. 물론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하니 화려하고 그럴듯하게 보이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사람이 본성대로 행하고 욕심대로 살아서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꾸는 농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즉 가지치기를 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까? 예수님은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가지를 쳐내야 하며, 어떤 잎사귀를 솎아내야 하는가를 알게 해 줍니다. 또 그것을 잘라내고 솎아낼 수 있는 힘, 즉 결단력을 줍니다.
우리는 어떤 가지를 쳐내고 어떤 잎사귀를 솎아내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떻게 생각하면 욕심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욕심이 있어야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어 의욕도 생기고 발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미움이나 복수심 같은 것도 무엇을 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력을 갖게 하니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욕심에서 출발한 의욕, 미움에서 비롯한 의지력은 사람의 생명을 갉아먹고 허비하게 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이 더 좋고,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신이 품고 있는 이상이 더 보람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복음적인 사고방식이나 삶의 자세보다도 자유분방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더 진실하고 인간답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보다 자신의 노력으로 사는 것이 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공부할 때 그러한 인간적인 것들로는 참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잘라내야 할 것과 깨끗하게 해야 할 것들을 알게 해 주시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케 되는 것, 이를 ‘영적인 훈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훈련에는 죄악이 드러나는 수치와 그것을 잘라내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너무 아파서 반발하고, 수치스러워서 도망쳐 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은 우리를 열매 맺는 사람으로 가꾸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최고의 사랑입니다. 특히 요즘 대학생들은 훈련을 싫어합니다. 그들 중에는 부모님에게 꾸중 한번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꾸중을 듣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마음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미덕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가지가 많고 잎사귀가 무성합니다. 요즘말로 ‘있어’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쓸만한 열매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서는 아무 것도 남는게 없는 인생이 돼버립니다.
제자들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열매가 없었으니 오고가는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깨우쳐주십니다. 그 3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는 기간, 영적인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마치 포도원 농부가 3년 동안 아무런 열매를 기대하지 않고 가지치기만 하듯이, 예수님은 3년 동안 그들을 말씀으로 가지치기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기도 하시고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도록 떠밀기도 하셨습니다. 5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오는 것을 보시면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을 먹이겠느냐?‘하시면서 시험하기도 하셨고, 노도광풍 속에서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하고 책망하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훈련을 받으면서 때로는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꾸준히 예수님에게 붙어 있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이 떠나셨을 때 그 모든 훈련은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했고 인류의 목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3년의 기간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좋은 열매를 맺는 데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기간이었습니다.
우리가 개척한지 만3년이 넘었습니다. 개척 첫 해에는 아무리 많은 양을 만나도 초청에 응하는 양이 없었고, 이듬해에는 스터디 모임을 시작했는데 학생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특히 자매님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힘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기간은 우리가 깨끗해지는 기간이었습니다. 즉 우리 속에 있는 목자의 경험을 의지하는 마음, 은근히 지방대학생들을 무시하는 마음, 개척하려고 힘든 결단을 했다는 자기 의, 등등을 발견하고 잘라내는 기간이었습니다. 이를 버리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때 마음이 참 자유롭고 개척역사를 섬긴다는 것이 감격스럽고 즐거웠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양들도 조금씩 보내어 주셨고, 지난해와 올해는 큰 노력 없이도 많은 양들이 스터디 모임에 왔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 아직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드물고, 구원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 없어 조급한 마음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고, 괜히 헛수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의 잔가지가 자라고, 그래서 예수님을 배우는 기쁨, 말씀을 순종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잔가지는 한번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자라고 또 자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때마다 이런 잔가지를 말씀으로 깨끗하게 할 때 먼저 우리 안에 희락과 사랑의 열매를 맺고, 더 나아가 양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열매 맺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5절을 다시 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은 아무리 잘 나도 ‘가지’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거해야만 합니다. 열매를 맺는 데 있어서 능력이나 조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며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구원의 열매, 인격의 열매, 사명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자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님에게 붙게 해 주시며, 또 우리를 가꾸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으로 자기를 훈련하며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써,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 내 사랑 안에 거하라(7-27)
우리는 위에서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잘 거할 수 있습니까?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7절을 봅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를 흔히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가지인 우리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호흡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기도 그 자체가 하나의 열매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9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사탄은 늘 우리로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유혹합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사탄은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면 어려움을 주실 리가 없지 않느냐고 속삭입니다. 또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면 열매를 주실 게 아니냐며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유혹합니다. 사탄은 그렇게 해서 늘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떨어지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13절을 봅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결코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믿고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셋째,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16절을 봅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택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줄로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단에 대해 책임지려하고, 자기의 의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연약하고 사람의 의지는 쉽게 꺽입니다. 결국 자포자기하여 예수님에게서 떨어지고 맙니다.
사실을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해보면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시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셨으니 우리가 열매맺기까지 책임지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십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이나 실수가 드러나면 “너는 이제 소망이 없다.”고 속삭입니다. 어찌하든지 포기하고 예수님에게서 떨어지게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약점이나 실수할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약점이 있으면 도와주시고 실수가 있으면 감싸주시면서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감당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넷째, 세상의 미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사실 지금은 추앙 받는 주님의 종들도 대부분 당시에는 미움 받았습니다. 베드로나 바울도 그랬고, 칼빈이나 루터도 그랬고, 테레사나 슈바이처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던 당시에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지하동굴 카타쿰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미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예수님 안에 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18-25절을 봅시다. 세상 사람들이 신자를 미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속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도 거하고 예수님에게도 거할 수는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세상에 거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예수님에게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세상의 미움 받을 것을 각오하고 믿음의 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세상 사람에게 ‘있어 보이는’삶을 살기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열매, 참되고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