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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해진 민심(1) : 조선의 명판결
이천손을 고발하다
1786년 6월 11일 서울 남부에 사는 사노(私奴) 김득복이 한성부에 발괄을 올렸다. 발괄은 고소장의 한 종류이다. 득복은 자신의 아버지 김도흥이 어제 6월 10일 액정서의 별감(하급 서리) 이천손에게 매를 맞아 11일 오전에 죽었다고 고발했다. 이에 한성부에서는 남부에 명령하여 즉시 검험을 실시하고 이천손은 형구를 채워 엄히 가두어두도록 했다.
정조는 분노했다. 관청의 공무를 담당한 서리가 미천한 백성을 죽였기 때문이다. “액례(하급서리와 관청에 소속된 노비들)로서 민간에서 멋대로 소란을 피우고 사람 목숨을 해친 자는 조정에서 처벌함이 상천보다 등급을 더하는 법이다. 설령 용서해야 할 때라도 아주 신중해야 한다. 이천손은 나이는 어리고 집안은 의역(醫譯)을 업으로 삼는데다 지각도 없어 겨우 사람 모습만 갖추었으니 연전에 어주(御廚)에서 꿩을 훔쳤던 사건을 보면 형편없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이놈의 행실은 이미 승지가 자세히 조사하고 검토하였으니 정원에 출입하는 자라면 누가 모르겠는가. 게다가 그 조사한 문안은 전해지면서 대단한 얘깃거리가 되어 시험문제에 나오기까지 했다. 비록 손을 대었다는 어제가 곧 관청에 입번하는 날이었다고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일이 액례에 관계되어 있으므로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대전별감이 살옥의 범인이라는 것은 관청이 세워진 이래 들어 보지 못한 일이다. 이렇게 궁궐의 기강이 형편없게 되었으니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니다. 손을 댄 곡절과 때려죽인 근본 이유를 아울러 살해당한 사람의 내력과 함께 경들이 내일 아침이 되거든 회의를 열어 상세히 조사・보고하라.”
정조가 이천손을 형편없는 놈으로 치부한 것은 그가 일전에 왕실의 꿩고기를 훔쳐먹은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간의 사정은 <일성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783년(정조7) 겨울 이천손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주방에 숨어들어 꿩을 훔쳐 먹었고 당시 정조는 꿩을 훔쳐 먹은 이천손을 용서했다. 법을 너무 각박하게 쓰면 도리어 백성들을 지나치게 압박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법은 다스리는 도구인데 더러 다스릴 필요가 없는데 다스리면 법이 도리어 무용지물이 된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는 속담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 너무 각박하면 도리어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게 됨을 경계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작은 물고기를 삶는 것처럼 한다고 비유한 것은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 이렇게 조사하는 것이 어찌 한 마리 꿩 때문이겠는가. 다만 일이 액례와 관계되고 명색이 어공(御供)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정을 살펴보면 모두 잗다랗기 짝이 없다. 그 죄를 논하고 그 형률을 고찰하면 경들의 주장이 옳지만 나(정조)는 이 문제를 매우 관대하게 용서해 주고자 한다.”
정조는 왕실의 주방에서 꿩을 훔쳐먹은 서리 이천손을 너그럽게 용서했다. 그런데 다시금 이천손이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된것이다.
이영규가 살해했다
득복의 고발이 있은 다음 날(6월 12일) 본 사건의 진실은 밝혀졌다. 득복의 아버지 김도흥은 이들 부자의 주인 이영규에게 구타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범인은 이천손이 아닌 이영규인데 왜 득복은 이영규를 직접 고발하지 않았던가? 이는 조선시대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할 수 없듯이 노비는 주인을 고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주인을 고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득복은 이영규 대신 평소에 원한을 품었던 액정서 별감 이천손을 범인으로 고발했다. 득복은 이천손을 살옥사건에 얽어넣어 고통을 받도록 하는 동시에 조사과정에서 이천손이 아닌 이영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사형을 받도록 할 계획을 꾸민 것이었다. 주인을 살인사건의 정범으로 고발하게 되면 노주(奴主)의 명분을 해쳤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를 피하는 동시에 숙원이자 이미 꿩을 훔친 전과가 있었던 이천손에게 살인범의 누명을 씌워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과연 치밀하게 계획된 무고사건이었다. 형조는 이상의 사정을 조사하여 정조에게 보고했다.
“옥사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처음에 이천손이 술에 취하여 먼저 소란을 피운 일로 김득복과 서로 유감을 품고 싸움을 시작했습니다만 아버지 김도흥이 죽게 되자 애당초 관련도 없었던 이천손을 범인으로 고발한것입니다.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주인을 고발한다는 혐의를 면하려던 것이었습니다. 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증인 부전과 김선재를 신문하여 이영규가 무슨 일로 분을 품고 김도흥을 발로 차 죽였는지 분명해졌습니다. 지금 서울 남부에 엄히 신칙하여 즉시 검험을 행하도록 했습니다. 이천손은 처음에 서로 힐책한 데 불과할 뿐 김도흥의 죽음과는 전연 관련이 없는데도 김득복이 범인으로 지목하여 처벌받도록 할 계책에 빠져 난데없이 무고를 당한 것입니다. 이천손의 노복인 이진복 역시 이천손은 전연 관련이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천손을 우선 풀어주셔야 합니다.”
법조문을 연구하라
정조는 사노 득복의 무고 계획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사노가 주인을 살인죄로 처벌받게 하려는 뜻으로 이천손을 끌어들이는 등 그 의도가 매우 흉악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형조에 다음과 같이 엄중하게 하교했다.
“주인과 노비의 구분은 하늘과 땅처럼 분명한 것이다. 능멸하고 범하여 윤리와 기강이 이렇듯 무너지면 사람은 사람다울 수 없고 나라는 나라다울 수 없다. 우리 조정이 제도를 세움에 있어 오로지 교화를 높이고 기강과 윤리를 세우는 정사에 힘써왔다. 지금 사노 김득복의 옥안을 보았는데 절반도 읽기 전에 두렵고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교화가 자취를 감춘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 최근 몇 년 이래로 조정이 문란해지고 명분과 위엄이 무너져 기강을 범하고 분수를 무시하는 일이 서로 이어지니, 조만간 서로를 몰락시키는 데 이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번 옥사는 강상을 어지럽힌 커다란 변고이다.
노비와 주인의 분수는 양반이나 천민이 다를바 없다. 종이 주인을 증인으로 세우는 일도 오히려 국법에서 금하는데, 주인이 노비의 무고를 받았다면 종에게 어떤 벌을 주어야 하겠는가. 대개 고발한 것은 살옥사건을 성사시키려는 의도였고 옥사를 성사시킨 것은 주인을 죽이려는 계획이었다. 주인을 죽인 죄는 강상윤리를 저버린 일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 비록 다행히 옥사가 성립되지 않고 증언이 이루어지지 않아 살해하려던 흉악한 음모는 이루지 못했지만 고발한 득복을 무겁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경들이 엄하게 신문한 후 의정부에 보고하라. 또 의정부에서 상세히 논의하여 처결함으로써 한편으로 윤리와 기강을 보존하고 한편으로 명분과 교화를 세워야 할 것이다.”
정조는 노비가 주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 후 교묘하게도 이를 실천에 옮긴 득복의 처사를 알고 경악했다. 그리고 노주 간의 명분이 무너졌다 해도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6월 12일 정조는 노비가 주인을 모살하거나 하급서리나 공노비가 관장(官長)을 능멸하는 사례를 엄하게 처벌하기 위해 어떤 법률을 적용할지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다.
“내가 본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대들의 의견을 구하고자 한다. 공노비 등 천한 자들이 관장을 몰라보고 심부름하는 종들이 집주인을 두려워하지 않아 빈한한 사족들이 능멸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는 강한 자들을 억누르다보니 지나쳐서 도리어 이러한 완악한 무리들을 키우는 폐단을 만든 결과이다. 이러한 완악한 무리들을 처벌할 분명한 형률이 애초에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매번 공상(工商)과 천례들이 5품 이상의 관리를 모욕하거나 머슴이 가장을 욕했을 때 처벌하는 형률을 끌어다 유배형으로 감형했다. 그런데 근래 형률의 적용에 유사한 비슷한 조문을 끌어다 적용하지 못하도록 하자 결국 이 두 조문도 사실상 폐기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천한 자가 귀한 이를 능멸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사태를 앞장서서 유도한 것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지난번 <대전통편>을 증보할 때에 이러한 사건들을 처벌할 조문을 의논하여 정하려고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를 의논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왕위에 있는 자가 법률을 만든 뜻이겠는가. 경들은 법전을 참고하고 대신들과 의논하여 이러한 범죄를 처벌할 기준을 정해 첨부하여 윤허를 받도록 하라.”
대신들의 의견수합
며칠 후인 6월 14일 형조의 관리들을 비롯한 대신들은 의정부에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고, 형조는 그 결과를 수합하여 보고했다.
“영의정 정존겸은, ‘지난번 상인과 공노비 등이 5품 이상의 관리를 욕하고 고공이 가장을 모욕하는 데 대한 법조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대개 유사(有司)가 제대로 거행하지 못함을 질타한 것이지 법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공노비가 관장을 업신여기고 사노가 주인을 능멸하고 상놈이 사족을 욕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경국대전>과 <대명률>에 여러 조항이 있으니, 전례대로 조율하여 처벌함이 합당할 듯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영돈녕부사 홍낙성은, ‘상천이 조관과 사대부를 능욕하는 것은 <대명률>과 <대전통편>의 여러 조문을 참작하여 품계에 따라 등급을 더해서 장형과 도형으로 처벌하고, 비부(婢夫)가 처(妻)의 상전을 모욕하는 것은 머슴에 대한 율을 참조함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판중추부사 이복원은, ‘조례가 관장을 모욕하고 심부름하는 노비가 가주를 능욕하고 상놈이 사대부를 욕하는 것은 본래 이에 해당하는 율이 있으니, 그 정상과 범죄의 경중에 따라 비추어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상 신들이 형률을 상고하건대, <경국대전> 등을 참조하여 참작하면 될 뿐 새로 만들 필요는 없겠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기왕의 법조문을 잘 활용하면 될 뿐이라는 신료들의 범범한 논의결과를 접한 정조는 화를 냈다.
“경들의 보고를 읽어보니 서리와 백성을 상천과 공노비와 뒤섞어 논하고 비의 남편을 머슴이라 칭하였으니, 법조문의 이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도 법조문을 잘 활용하면 된다고 하니 가당키나 하겠는가? 신료들의 의견이 근거한 바가 없지 않겠지만 내 생각에는 단지 법전을 때에 따라 줄이고 늘리면 된다는 말로 들린다. 속담에 이른바 ‘숙녹피대전(熟鹿皮大典)’이라는 것이다.” 정조는 신료들의 견해가 가죽을 가로로 늘리면 일(日)자가 왈(曰)자가 되고 세로로 늘리면 왈자가 일자가 된다는 의미의 사슴가죽 법전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정조는 율문의 취지와 적용에 관해 섬세하게 연구하고 조문을 백성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졸(吏卒)로서 5품 이상의 관장을 욕하는 자는 장백에 처하니, 6품 이하부터 품계가 없는 경우의 관리들에 대해서는 장 몇 대를 쳐야 하겠는가? 차례차례로 줄이면 장차 10대에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혹 다른 관청의 관장을 모욕한다면 또 어떻게 처벌해야 하겠는가? 경들이 이른바 ‘잘 활용’ 운운한 것은 문제가 될 단서가 없겠는가. 천례는 전・현직 관리를 막론하고 사대부를 향하여 욕할 경우 장형과 도형에 처하니, 이졸이 본관의 관장을 욕하였는데 가령 사리에 너무도 어그러진 경우가 있으면 또한 공상과 천례를 장과 도에 처하는 율을 인용해도 되겠는가? 그렇다면 터무니없이 적용할 뿐이니, 경들이 말한 참조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조정 신하들이 일찍이 법률을 읽어 본 적들이 없으니 의견이 이처럼 구차하다. 형조판서는 다시 여러 대신의 집에 나아가 문의하고, 재차 경들의 의견을 갖추어 보고하라.”
또한 정조는 정리된 내용을 전국에 알리도록 했다.
“소민(小民)과 상천은 율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쉽게 법을 범하니, 이제 의견을 정리하여 법을 내걸고 알려야 죄짓기를 두려워하고 형벌을 피하는 효과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종이 주인을 고발한다면 죄가 사형에 이르고 욕할 경우도 같은 율을 적용할 것이다. 이처럼 율령은 인명과 관계된 것이니 거듭 잘 알려야 할 것이다. 경들이 율문 가운데 귀인과 천인, 종과 주인 사이에 분수를 범하고 기강을 멸시하는 데 관계되는 것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방방곡곡에 반포하도록 하라.”
득복의 자백
사건 발생 후 득복은 의금부의 감옥에서 수년을 지내게 되었다. 강상에 관련된 범죄이므로 의금부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1789년(정조13) 1월 24일 형조는 득복을 재차 신문했다. 득복은 주인을 모해할 생각이 없었다고 호소했다. ‘저는 무식한 상놈으로 다만 저의 아비가 졸지에 죽은 것만을 애통히 여기고 주인을 고발하는 것이 극형에 해당되는 줄 생각지 못하여 어리석게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으니 속히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저는 열 살 전부터 상전 댁에서 자랐으니 노주(奴主)의 은의가 부자와 다름없었습니다. 평소 터럭만큼이라도 원망을 품은 일이 없었으니 어찌 모해하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이밖에 다시 아뢸 말이 없습니다.’
득복의 공초는 이전과 다름 없었다.
정조는 계속 신문하여 주인을 모해하려던 계획을 자백받도록 했다.
“삼강의 인륜은 엄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다. 나라에는 임금과 신하가 있고 집에는 종과 주인이 있다. 신하이면서 임금을 범하면 역신이 되고, 종이면서 주인을 범하면 역노(逆奴)가 된다. 조금이라도 이와 유사하다면 윤리와 기강을 무시한 것이니 의도 유무를 굳이 따져 볼 필요가 없다. 더구나 교화가 날로 타락하고 세속의 풍습이 날로 야박해져서 장차 사람의 타고난 본성과 사물의 이치가 금수의 영역으로 떨어지게 될 지경이니, 이 어찌 조정에서 범범하게 간과할 수 있겠는가. 지금 재차 공초하면서 비록 상전에게 은혜를 입어 원망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다는 말로 변명하였지만, 이른바 상전의 이름이 이미 그의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시에 악의가 없었고 지금에 와서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더라도 주인을 고발한 것은 주인을 고발한 것이니, 어찌 용서할 만한 단서가 있겠는가. 다시 엄히 형추하여 바른대로 고한 공초를 받아 법률에 비추어 처단하도록 하라.”
마침내 형조는 득복으로부터 모살의 자백을 받아 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후에야 정조는 최종 판결을 내려 득복을 유배형으로 감형했다.
“득복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반드시 그 상전을 모함하려는 데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자취를 따져 보면 어찌 사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기강이 날로 어지러워지고 습속이 날로 야박해지니 말할 것도 없다. 종과 주인의 구분은 군신의 관계와 다를 바 없으니, 죄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고문과 감옥에서 고통을 겪었으니 그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망녕된 죄를 징계하기에 충분했다. 득복을 차율로 감형하여 유배하도록 하되 집에 보내 병 치료가 끝나면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다산은 노주의 명분을 엄격하게 강조한 정조의 판결을 칭송했다.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여 사죄에 처하도록 계획했다면 명백한 ‘모살죄’로 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본 사건을 설명하면서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여 살옥사건을 만들어 계획적으로 죽이려 한 것이다. 근본 원인은 원수를 갚으려던 것이고 실인은 구타였다.”고 하고, 마지막에 짤막하게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득복은 미천한 자의 가노(家奴)이다. 주인이 자신의 아비를 죽이자 주인을 관아에 고발하여 살옥 사건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왕의 유시(諭示)가 이처럼 엄했던 것이다.” 다산 역시 주인을 모살하려는 득복을 엄중 처벌하고자 했다. 때문에 정조가 득복의 자백을 끝내 받아내었다고 해석했다. 주인을 모살하려는 의도만으로도 강상 윤리에 어긋나는 큰 범죄였음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와 다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에는 사족을 모살하고 주인을 능멸하려는 이른바 ‘상놈’들의 시도가 끊이질 않았다. 시체를 이용하여 주인을 무고하는 일마저 점차 늘고 있었다.
흉악해진 민심(2) : 조선의 명판결
성희룡 이야기
지난번 우리는 득복이라는 한 노비가 주인을 살인에 연루시켜 계획적으로 죽이려 한 사건을 보았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타인을 무고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심지어 시체를 이용한 사기극마저 벌어졌다. 18세기 후반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이 옥(1760~1812)은 성진사(成進士) 일화를 그의 책에 수록했다. 이 옥은 세상의 퇴락을 한탄했지만, 연고없는 시체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살인자로 만든 후 돈을 뜯는 신종 사기 수법은 증가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인류가 생긴 지도 벌써 오래 되었다. 간교한 일이 날로 치열하고 거짓 행위가 날로 들끓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세상에 이런 일마저 생겼다. 밤이 깊자 굶어 죽은 시신을 짊어지고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주인을 급히 불러 일부러 그의 노여움을 충동시킨다. 결국에는 서로 붙잡고 격투를 시작한다. 그 후 그는 “주인놈이 나의 둘도 없는 벗을 죽였네.”라고 외치며 죽은 시신을 내놓고 장차 관가를 찾아 고발하려 한다. 주인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하고 중한 뇌물을 허비하고서야 일이 바야흐로 가라앉게 된다. 그야말로 험악한 일이다. 그러나 지극히 삼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간사한 놈일지라도 그꾀를 팔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러므로 속담에 “세 명의 귀인(貴人)을 사귀기보다 내 한 몸 삼가는 게 낫다”고 하였으니, 다음 소개하는 성 진사가 그러한 사람이다.
성희룡(成希龍)은 경상도 상주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집이 애초부터 넉넉하였다. 흉년을 만나 식객(食客)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여러 종이 금방 밥상을 들고 나온다. 한 종이 달음질치며, “어떤 누더기를 걸친 비렁뱅이가 오더니 까마귀 병아리 채듯이 앗아갑니다.”고 했다. 이에 성희룡은 “아마 주린 모양이니 주어 버리도록 하라.”고 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종이 또 뛰어와서, “비렁뱅이가 그릇까지 망태에 넣어 가려고 합니다요.”라고 했다.
성희룡은,“그냥 두거라.” 하고는 그 비렁뱅이를 앞에 불러 오도록 했다. 비렁뱅이는 도리어 싸울 듯한 얼굴 기색이었다. 성희룡은, “그릇을 가져다가 팔아먹으려는 건가?”라고 물었다. 비렁뱅이는 “그러구말구.”라고 답했고, 성희룡은 “그렇다면 내게 팔도록 하게.”라고 점잖게 타일렀다. 그러자 비렁뱅이는 “천오백 냥에서 조금이라도 깎는다면 팔지 않겠소.”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성희룡은 서슴지 않고 돈 일천오백 냥을 내어주었다.
비렁뱅이는 한참 주인 성희룡을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가더니 그의 아내를 불러들이며 말하기를, “이 분은 사람이 아니고 부처님이시야.”라 하고는 자신이 가져온 망태기를 풀어 죽은 아이 하나를 꺼내 놓고서는 “내가 그릇을 훔치고 도리어 수천냥을 달라고 덤벼들면 보통은 반드시 나를 몰아칠 터이니, 그가 만일 나를 도둑으로 몰아칠 경우 나는 곧 이 죽은 아이를 꺼내놓고 그를 위협하여 중한 뇌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소이다. 그런데 이제 당신의 행동을 보니 계교를 이룩하지 못하겠소. 이건 정말 당신이 몸을 삼가는 힘이 있는 까닭이니 모든 것을 사과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돈과 그릇들을 던져 버리고 가 버렸다. 성희룡은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이 옥은 화서외사(花漵外史)의 평론을 빌려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만일 성 씨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옥사(獄事)가 반드시 성립될 것이요, 옥사가 성립된다면 요즘 법을 맡은 이들은 반드시 ‘의옥(疑獄)’이라 하여 여러 해를 두고 판결하지 못할지니, 성 씨의 처지로선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아아, 슬프다. 만일 애초부터 서문표(西門豹)와 같이 밝은 사람이 법을 맡았다면 저 비렁뱅이는 감히 이런 짓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서문표는 춘추전국시대의 인물로 송사를 잘 해결하기로 유명한 청백리였다. 이 옥은 조선후기에 법을 집행하는 사또들이 법조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다 사기꾼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 성희룡을 살인범으로 잡아다 고문할 것이요, 이를 피하려고 성희룡은 결국 사기꾼에게 수천냥의 돈을 뜯길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 옥은 당시의 세태를 신랄하게 폭로했다. 살옥사건이 제대로 판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먼저, 서문표와 같은 사또들이 없어서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남을 속여서라도 이익을 보려는 자들의 탐욕이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다양한 속임수들
이 옥은 시신을 빌미로 살인죄를 덮어씌우려고 무고하거나 아니면 돈을 뜯어내는 극악한 풍속을 소개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탐욕스러움을 고발했다. 사실 역사상 언제나 사기꾼이나 탐욕스러운 자들은 있었다. 가령 조선전기의 학자 강희맹의 유명한 이야기집인 <촌담해이>에 나오는 ‘어리석은 상놈의 첩 빼앗기’를 보자. 한 선비의 이야기다. 그는 예쁜 애첩이 있었다. 하루는 첩이 고향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므로 그는 남녀 간의 음사(淫事)를 모르는 종놈으로 하여금 첩을 호행토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여러 종들을 불러 “너희들은 옥문(玉門)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여러 종들은 웃으면서 대답치 않았는데 한 어리석은 종놈이 나타났다. 그는 겉으론 어리석은 듯하나 속으론 엉큼한 자였다. 그가 답하기를 “그것이야 바로 양미간에 있습지요.”라 했고 이를 믿은 선비는 그로 하여금 첩의 호행을 맡도록 했다. 첩과 종이 집을 떠나 한 큰 냇가에 당도하였는데 첩은 종으로 하여금 말안장을 풀고 잠깐 쉬도록 했다. 그 동안 종은 벌거벗고 개울 속에서 미역을 감거늘 첩이 종놈의 양물을 보고 말았다. 이에 서로 간통했다는 것이다.
강희맹은 태사공을 인용하여 논평을 붙여두었다. ‘사람을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 아주 간사한 사람은 충신처럼 보이고, 진짜 사기꾼은 신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종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로 선비가 법도로써 가정을 바르게 하고 일찍부터 간사한 이를 분별하였다면 어리석은 종이 가정을 더럽히고 어지럽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강희맹의 말대로, 평소에 선비는 법도에 맞춰 수신하고 이를 통해 간사한 자를 꿰뚫는 눈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겉으로 어리숭한 척하지만 실은 간교한 꾀를 가진 자들이 덕성을 갖추고 양심적인 자들을 골탕 먹이고는 도리어 속은 자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하는 일이다.
조선후기에는 이익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자조의 글들이 유독 많아졌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남을 속여 이득을 보는 사기꾼들의 이야기(소설)가 크게 증가한 일이다. 양반이 몰락하여 상천이 되고 반대로 상천과 공상(工商)들이 부를 축적하여 양반의 지위를 노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신분사회의 해체와 변동 과정에서 반상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혼란을 틈타 타인의 목숨과 재산을 노리는 무고와 사기가 증가했다. 권력있고 부유한 사람들을 사귀는 것보다 차라리 향촌에서 몸을 낮추어 처신하는 편이 좋다는 세속의 유행어는 저간의 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양반이나 서민들을 골탕먹이는 사기꾼들의 이야기는 유행처럼 민중들 사이에 번져나갔다.
김선달 이야기
다음에 소개할 김 선달은 대표적인 사기꾼이다. 그는 시체를 이용하여 남을 속이는 조선후기 사기꾼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야기는 1980년대에 강원도 영월에서 채집되었지만 이러한 유형의 전설은 이미 18세기부터 전국에 걸쳐 유행하고 있었다. 강원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들어보자.
“옛날에 김 선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술도 잘 먹고 노름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는 사람인데, 어디 나가면 그저 한 보름도 되고, 한 달도 되고 열흘도 되고 그저 이렇게 나서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는데, 그렇게 하다보니 자기 마누라가 그 행덕이 좀 수상하단 말이야. 예이, 이것을 어떻게 좀 알아봐야 되겠단 생각으로다가 하루는 자기 마누라에게, “이 사람아, 나는 오늘 가서 한 사오일 돼야 올 터이니 그런 줄 알게.” “예, 다녀오세요.” 그래, 이 사람이 자기 집을 떠나가지고서는 한 오 리쯤 가서 술집이 있는데, 좋은 방석에 앉아서 술을 먹구서 거나하게 취해서 놀다가, 석양 편에, 그저 해 막 넘어 갈락말락할 때 자기 집에 떡 도착한즉 들어 와 보니깐에 자기집에는 저녁을 하는 모양인데, 지붕 위에 연기가 모락모락 난단 말이야.
보아한즉 자기 마누라는 부엌에서 저녁을 짓는 것 같고, 문 앞에는 남자 신이 하나 놓여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보니 요새로 말하면 동장이라는 사람이 아, 술에 곤드레만드레가 돼서 그만 떨어져 드러 누워 있단 말이야. 윗목을 쳐다 본 즉 술상을 걸게 채려 놓구서 주전자도 있고 술잔도 그저 난잡하게 있단 말이야. 김 선달이 역시 동장이란 사람을 의심했단 말이지. 자기 마누라와 관계가 되는 걸 의심을 하구서. 그래 허리띠를 풀어가지고서는 모가지를 이렇게 묶어 가지고 바짝 졸랐다. 그 놈을 슬며시 놓고서는 안방 문을 열고, 마누라를 불러. “여보게, 여보게.” “왜 그래요?” “이 사람아 이웃 동장이 왜 여기에 와 자는가?” “아이고, 그런 게 아니라 당신 간 후로다가 동장님이 술을 한 되 받아 오라고하여 술을 받아다 줬더니만 그걸 잡숫고 그만 아마 취한 모양이래요. 거 자요?” “어, 어 자는 게 아니라 죽었네.” 이런단 말야. “아, 자네 들어 와 보게.
동장이 죽었네.” 별 수 없어. 자네가 이 한밤에 한 삼경 되거들랑 골짜기에 올라 갈 것 같으면 상산봉이 있는데, 자네 이고 가든 지고 가든 자네가 이 시체를 가지고 가서 묻고 오게. 만약 거까진 갔다가라도 사람 인기척이 나거들랑은 되루 그 시체를 짊어지고 내려오게. 거 묻다 보면 큰일나네.” “아이, 그럼 그럭하죠.” 밤중을 기달려가지구선 참, 인제 마누라가 시체를 짊어지고 올라간다. 남 모르게스리 가만히 가는데 지구두갔다, 메고도 갔다, 이고도 갔다, 그 험한 길을 그저 더듬거리고 올라 가, 떡 올라가 중턱에 올라가서 시체를 내려 놓고 땀을 닦다 보니 상산봉에서 “에헴” 소리가 난단 말여. 아, 이런 망할 놈의 인기척 소리, 이제 그대로 메고 내려왔단 말이야. 그건 왜 그런고 하니 김 선달이 마누랄 지켜보고 먼저 상산봉에 올라 가 있다가 기침을 한거지. “아이고, 우째 왔는가?” “아이, 그런 게 아니라 당신 말대로 막 시체를 내려놓고 보니까 상산봉에서 기침 소리가 나서 할 수 없이 왔다.”고. “잘했네. 자, 그럼 인제 밤은 이슥했는데 이를 어떻한단 말인가? 그러나 참 상말로 니 내한테 괘씸해. 이 시체는 내가 처분할테니 다시는 그런 일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아이고, 그저 다신 그런 일이 없겠습니다.”
그래가지고, 김 선달이 시체를 메구 동네 한 오리쯤에 있는 심 판서 집에 갔네. 아주 부자라 그 동네는 전부 땅과 집이 그 사람의 것인데, 심 판서네 문 앞에다 시체를 세워놓고서는, 그 참 심 판서로 말하면 판서 노릇을 했기 때문에 그 동네 인근지처에는 누구든지 심 판서 나리, 심판서 나리 하지 어데서 심 판서 이름을 못 불렀단 말야. 근데 시체를 세워 놓고는 김 선달이 “심 판서, 심만섭이 집에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단 말야. 심 판서가 사랑방에 있다 들으니 어떤 놈이 이름을 막 부른단 말이야. “여봐라. 저 놈을 가서 잡아 들여라.” “예.” 종놈들이 쫓아 나오니 문 앞에 어떤 놈이 있단 말야. 그저 발길로 디리 차고 몽둥이로 이리 치고 저리 치고 막 차고 노니, 툭 건드리는데 대번에 죽었단 말야. 이 놈들이 가서 만져 보니 죽었단말야. 큰일났지. 심 판서한테 와서, “큰일났습니다.” “뭐이 큰일났냐?” “아, 하도 분해서 이리 저리 발길질하고 때리다 보니 죽었습니다.” “아, 이 놈들아 붙들어 들이랬지 누가 죽이랬냐?” 아, 가만 생각해 보니 큰일났단 말야. 종들은 그 심부름은 했지, 죽이라고 죽인 거는 심 판서가 시켜 죽인 기란 말야. 큰일났지.”
끝없는 농간
“그런데 그때 김 선달이 조금 먼 거리 으슥한 데서 지키고 섰었어. 다 그 광경을 봤단 말야. “심 판서 나리, 집에 계십니까?” 아, 금방 집에 그런 광경을 당했는데 어떤 놈이 또 찾아오니 아, 대답도 못하고 암 말도 안하고 있지. 또 인제, “심 판서 나리 계십니까?” “뉘기요?” “저! 올씨다. 예, 아무 데 사는 김 선달이 올시다.” “아이고, 들어오시게.” 심 판서가 생각해 보니 김 선달이 내막을 알고 들어 온 것 같단 말야. “심 판서 나리.” “왜 그러는가?” “저희 동네 동장이 있지 않습니까?” “동장이 바로 이 너머 가면 술집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아, 있지.” “거서 종일 나하고 놀았습니다. 노는데 그 동장이 심 판서 나리와 뭔 혐의가 졌는지 아주 뭐, 욕을 합디다.
심판서 이 놈, 만섭이란 놈, 이놈 나쁜 놈, 이놈을 가서 당장 결단내야 된다고. 그래서 오늘 저녁 나리네 집에 온다고 해서 난 여기 와 있는 줄 알고 왔습니다.” 이런단 말야. “심 판서 나리와 무슨 혐의가 졌습니까?” 심 판서가 생각해보니 때려눕힌 거는 동장이고 김 선달이 내막을 알고 들어온 것 같단 말야. “이 사람아, 사람 살리게.” “사람은 왜 살리라고 합니까?” “아, 그런 게 아니라 자네 알다시피 여기서 지근지처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이 놈 저 놈 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 그러시구 말구요. 심 판서 나리를 어느 사람이 이놈 저놈 합니까? 어, 그게 될 말이 아닙니다.” “내, 얘기하다시피 아, 어떤 녀석이 글쎄 아닌 밤중에 와서 ‘만섭이, 만섭이’ 하면서 이름을 부르길래 내가 아주 분하기 짝이 없어 하도 분해서 종들을 불렀네. 불러서 붙들어 들이라 했지 이놈을, 아, 그런데 이놈들이 그만 사람을 죽였네.” “사람을 죽이다뇨?” “자네가 나를 살리게.” “아이쿠,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우리 동네 동장인데 얘길 해서 속히 내일 아침 매장을 해야지, 그게 될말입니까? 전 갈랍니다.” 아, 김 선달 이놈이 부득부득 일어나려고 한단 말여. 심 판서는 선달의 두 손을 바짝 쥐고서, “이 사람아, 날 살려 주게.” “아이, 살리다뇨?” “자네, 내 말 듣게. 자네 알다시피 아무데 한 이십 마지기 아주 좋은 논이 있잖은가?” “내 상답(上畓)을 줄 끼니, 자네가 그걸 가지구서 자네 소유로 하구서 일절 말을 내지 말게.” “에이, 안 됩니다. 아, 저야 말을 안 내지만 심 판서 나리 입에서 만약 말이 나온다면 저조차 공모가 됩니다.”
“아, 이 사람아. 내한테서 말이 나올 리가 있는가? 이봐, 사람 살리게.” 심 판서는 궤짝문을 열더니만 논 이십 마지기 문서를 덜컥 내 놓고는, “자네 이걸 가지구서 이만하면 자네 그저 농사지어서 평생 먹고 지낼 테니까 자네 입에서만 아무 말도 말게.” “그저 내야 뭐, 입을 닫겠습니다만 심 판서 나리가 단단히 주의하십시오.” “아이구, 이사람아. 내가 말할 리 있는가?” 그런데 김 선달이 “그 시체는 어떻게 할….”이라고 해. “이 사람아, 자네 어떻게든 수완이 있으면 그 시체를 갖다가 처분해 줬으면 내가 밭 몇 마지기를 더 줌세.” “아, 그럼 그러시죠.” 그래 또 문서를 받아 가지구선 나와서 보니 시체를 묶어 처박아 감춰놨어.
김 선달이 시체를 어깨에 딱 메고선 동장 집으로 향했다. 동장이 늘 술을 먹구 그저 밤중에도 들어오고 새벽에도 들어오고 해서, 그만 동장 마누라는 아주 원수로 취급한단 말야. 아주 진절머리를 대는데 그 내막을 김 선달이 알고 있었지. 문 앞에서, “문 좀 열어 줘. 문 좀 열어줘.”하니, 이 동장 마누라는 대답도 안하고 ‘또 술먹고 난리를 하네.’ 하면서 안 열어준다. “난 문 안 열어 주면 목매달아 죽을 것이여.” 김 선달이 목소리를 흉내낸단 말여. 그런데 동장 마누라는 죽든지 말든지 가만히 있어. 이때다 싶어 김 선달이 동장의 시체를 새끼줄로 묶어 문앞에 매달아 놨다.
으슥한 데 가 숨어서 보니 동장 마누라가 방에서 나와 삽짝을 탁 열어, “아, 이런 망할 놈 봤나.” 동장이 그만 목을 매달아 축 늘어져 죽었단 말이야. “아이고, 내가 왜 문을 안 열어 줘서, 문을 열어 줬으면 이런 광경을 안 당하는데” 하고 대성통곡을 해. 김 선달이 숨어 있다가, “에헴” 기침을 하고 나타나서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 “아, 어제 저녁에 글쎄 밤중에 와가지구 문을 열어 달래기에 내가 안 열어 주니, ‘문을 안 열어 주면 목매달아 죽겠다.’고 하더니 이런 광경을 당했구먼요.” “아이구, 진작 문을 열어 주시지, 참.” 김 선달은 유유히 사라졌지. 날이 새고 동리 사람들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당일로 장사를 잘 지냈지. 김 선달은 논밭 문서 가지고 그저 일평생 호의호식을 했다지 뭐.”
이야기가 끝나면, 청중들은 한 바탕 웃으며 심 판서를 조롱한 김 선달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예부터 전해오는 우리네 이야기들 가운데 이런 종류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다. 소소한 이야기지만 당시의 속태(俗態)가 묻어 있다. 간교한 사기담의 증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