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이헌상 부대원들과 회문산에서 철수한 전북도당원들
남부군 오백 명이 1년만에 처음으로 목욕하는 인상적인 장면.
빗점골은 수백 남녀 남부군의 혼욕 실화가 떠오르게 하는 개울.
여러 갈래 물줄기가 합쳐지는 그곳 주변능선들이 부채살처럼 퍼진 곳.
긴급상황이면 지리산 어느 방향으로도 피신할 수 있는 천혜의 은신처.
남부군 영화 속 수백명 남녀 혼욕 장면.
남부군 영화의 촬영장소는 덕산계곡이다.
지리산 중심부 빗점골은 남부군 전략적 요충지.
남부군 행적이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는 빗점골.
'이헌상의 최후'를 통해 빗점골에 관해 알아보자.
이헌상.
빗점골 합수내 위 당귀밭 너머 군용 헬기장 옆
고로쇠나무 우거진 도랑길따라 형성된 너덜지대
1953년 9월18일 상오 11시5분 경
3년간 산 생활을 마감한., 이현상.
그후 창경원에 전시되었던 그의 시신
서남 경찰대 최고 책임자가 화장
섬진강에 뿌렸다고 하는 그의 유골.
이현상이 최후를 맞았던 빗점골
한국 현대사에서 그 의미가 크다.
52년 초여름 남로당 간부와 각지구 유격대 사령관 회의.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등 참가.
이른바 5. 25 결정(각도당을 해산하는 대신 지구당 개편안)
1953년 9월 6일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주재 하에 지구당 해체 결정.
이 회의에서 이현상은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고 전해져온다.
빗점골 너덜지대 합수내 흐른바위는 절터골과 산태골을 빚어내는 곳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약력
1906 충남 군산군 군북면에서 남
1925 중앙고보 재학중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
1927 보성전문 법학과에 들어감
해방후 박헌영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남로당 연락부장을 맡음
1948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시작
1951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가 됨
1953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사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영웅, 이헌상.'
'고독한 공화국 영웅,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당시 <남부군>이란 수기를 펴낸 이태(본명 이우태)씨.
조선 인민 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술회하는 말.
우리 현대사에서 이현상만큼 전설속에 가리워 있고
인생 역경이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도 드물 듯.
따라서 그에 대한 의문도 그만큼 강렬하다 할 수 있다.
'아직도 그 족적이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이헌상.'
그는 지리산 첩첩산중에서 활동하다가 생을 마감한 인물.
그의 낡은 이데올로기는 우리사회에서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측근 생존자 몇몇 조차 입을 다물어 묻혀진 존재이다.
그에 관해서는 인물사진 한 장 조차도 변변히 남아 있지 않다.
최근들어 이현상의 실체는 조금씩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은 미흡.
그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거의 없어 구전으로 만 전해져오는 탓.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듯.
당시 토벌대장이던 차일혁 총경(58년 사망)이 남긴 기록에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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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경 잠복중이던 돌격조 중 한조가
갈미봉 방향에서 3명 이상의 남부군을 발견
개인 간격 10m를 두고 남하하는 남부군 감시
15m까지 접근해 일제사격으로 3분 교전끝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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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지구 로동신문>주필로 이현상과 같이 생활한 송영회 씨.
2005년 현재 81세, 경기도 수원시 송영회 씨가 회고한 이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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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비트에서 이현상과 마지막 만남
1952년 9월 18일 오전이었던 것으로 기억.
이헌상은 안색이 썩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헌상 : "지난밤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난 지하로 들어갈 생각이네, 진주로 가겠네."
송영회 : "어떻게든 일본으로 빠져나가 자네를 돕겠네"
내가 아끼던 포킷용 <소련공산당사>와 <일어판 노어사전>
그는 자신이 항상 즐기던 <마도로스 파이프>를 쥐어주었다.
이헌상 :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
송영회 : "싱거운 소리를 다하는군."
'이 사람 마음이 약해진 게로구나.
이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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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
이날 이현상은 동료들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로 내려갔다.
송씨는 뱀사골로 내려간후 이현상이 사살된 소식을 접했다.
비행기에서 뿌려진 전단을 받아 보았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토벌대의 발표는 조작된 것일까?'
'아니면, 이헌상 그가 자살한 걸까?'
일부에서 제기했던 의문점이지만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
이현상은 사망 시 줄선 미제 사지옷에 깨끗한 군용 농구화 차림.
그의 주머니엔 염주가..,수첩엔 한시 몇수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평정 없이 남한의 평정 있을 수 없고,
이현상을 잡지 않고는 지리산이 평정될 수 없다"
이현상 생포를 지시했고, 보고 싶어했던 이승만 대통령
그는 이헌상의 죽은 시신을 끝내 보려하지 않았다 한다.
이현상과 동향인 임영신, 유진산 씨 등등이 사체를 확인.
그 유품은 창경원에 전시되었고 군경 사이에서 공훈 다툼.
내무부장관, 치안국장, 서남지구 전투사령관이 태극무공훈장
이현상은 축지법으로 몇길 담장을 훌쩍훌쩍 뛰어 넘는다는 소문.
그는 실제 토벌대를 농락하 듯 신출귀몰했다고 송씨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래 글은 송씨의 술회를 간단히 편집한 내용으로 원문과는 차이가 있다.
......................( 송씨의 술회 내용 )...........................
한번은 벼랑 끝에 천막을 치고 이현상을 포함해 3-4명이 같이 자는데
새벽녘에 갑자기 총소리가 났어요. 순간 드러누운 채 벼랑으로 굴렀고
한참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현상이 혼자 있더군요, "어떻게 된거냐?"
"밤에 소변보며 뭔가 찜찜해 권총을 빼 들고 엄호사격으로 적을 쫓았어."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산중생활을 오래하다가 보니까
위험을 간파하는 뛰어난 촉각이 온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어요.
같이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자리를 옮기자며 뛰길래
멋모르고 쫓아가 화를 면한 적도 두어 번 있었읍니다.
그는 포로를 살상하지 않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토벌대들은 남부군에 잡혀도 안 죽는다고 알려졌지요.
청년들이 달려와 그 짐을 내려놓기도 했다는 이헌상.
이현상은 1906년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출생.
3백석 부농 이면배의 4남 2녀 중 다섯째(아들로는 넷째).
면장을 지낸 이헌상 아버지의 송덕비.
현재, 금산 대전 간 도로 변에 있다 한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맏형과 둘째 형도 면장일을 보았고,
셋째 형은 6.25 뒤 행방불명, 어머니는 1975년 90세로 사망.
"우리 현상이 죽지 않았다"며 생전에 아들을 기다렸다고 해요.
출가한 누이들은 세상을 떴고 조카들만 서울과 전주에 살지요.
이현상은 부인 경주 최씨와 사이에 딸 무영과 아들 극 남매를 두었지요.
북한 잡지에 극의 입당보증을 김정일이 선 내용을 보아 극은 북한에 생존.
이헌상 부인 최씨도 북한에 있고, 이현상의 호적 상에 34년생 둘째딸 문영.
실제 나이가 73살인 이헌사의 의붓딸 '문영'.
이현상의 고향마을에 지금까지도 살고 있어요.
오갈 데 없는 나를 거두어 주었다고 말하곤 했죠.
지리산에서 이현상의 시중을 들어주던,
20대의 가냘프고 작은 몸매의 <하 여인>
1953년 여름께 산에서 내려와 수용소를 갇혔다가 풀려났다고 해요.
<하 여인>의 아들은 이현상의 자식이며 현재 부산에서 살고 있지요.
<하 여인>과 아들은 그 관계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기를 원해요.
1989년 청주보안 감호소에서 76세에 병사했던 김삼홍
이현상 부대의 정치위원 김삼홍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녀.
이현상의 고향마을 외부리엔 그의 생가와 살림집.
아직 그대로 남았지만 그의 일가는 그곳에 드물고,
그에 관한 기억도 거의 사라져가고 있어요. -중략-
이현상은 53년 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 활동이 무의미하다고 판단.
새로운 지하조직 운동을 하려던 과정에서 최후를 맞은 것 같아요.
이제 이현상은 전설의 영웅이 아닌 역사 속 인물로 생각할 때인 듯.
"남북분단과 전쟁의 비극적 상황에서
그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눈보라치는 산마루에서 우수에 잠긴듯한 이현상
이제 그 의미를 역사가 밝혀야 할 시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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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곳곳마다 만들어지는 남부군 산행코스.
청소년이 혼돈되지 않을만한 민족 역사관이 중요.
'이조 때 비극의 여인들' 환향녀를 두번 죽인 정책.
이제 지구촌에서 공산주의는 북한 외 설 곳이 없다.
통일에 앞서 낡은 이데올로기 희생자들을 포용할 시기.
지금은 남북 민족 화합을 위한 가치관은 세워야 할 시기.
구한말 세계 강대국들의 영역 분활에 뒤흔들린 이조.
다시는 같은 역사가 재현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때.
이헌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숨진 전설적인 인물이다.
토벌군.
지리산의 남부군은 누가 어떻게 토벌했을까?
국국 1군단이 토벌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온다.
백선엽 총사령관이 이끈.. '백야전 전투 사령부.'
.............백야전 전투 사령부...............
6.25 전쟁 중 1951년 11월 지리산 지구
빨치산 토벌을 위해 조직된 전투사령부.
사령관 백선엽의 성을 따 명명된 사령부
미8군 작전에 따라 명명된 'Task force Paik'
'쥐잡이 작전'으로 불리우는 토벌작전을 총괄.
당시 지리산에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인민군들
소위 남부군이라 부르는 유격대 세력이 강했다.
이들 토벌군이 1군단 소속의 수도 사단과 8 사단.
군단장 백선엽, 수도사단장 송요찬, 최영희 8사단장.
1군단 2개 사단 사령부는 지리산 일대 남원에 투입
약 200명의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경찰부대의 지원
치안국 요원, 작전연락, 통신, 심리전 요원 60여 명
미국 군사고문단까지 합류해 작전지역에 병력을 배치
지리산을 소탕한 다음 순차적으로 타지역을 소탕 계획.
수도사단은 해상으로 전라남도 여수에 상륙해
남에서 북으로, 8사단은 육로로 북에서 남으로
각각 지리산을 포위 공격하며 타격 부대의 역할
기존 남서지구 전투사령부(준장 김용배)
경비 연대와 각종 경찰부대는 외곽 부대
목표지역 외곽 빨치산 통로와 도주로 차단
분산 도주하는 빨치산을 섬멸하는 임무.
공군 편대는 인근 사천비행장에서 지원
제1기 작전은 1951년 12월 2일부터 포위망을 형성
압축해 들어가며 지리산 정상까지 1주일 내에 진격
그뒤로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빨치산을 추격했다.
제2기 작전은 12월 19일부터 1952년 1월 6일까지
전주-순천을 잇는 남북선을 중심으로 서쪽은 8사단,
동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해 지리산 외곽 빨치산 소탕.
제3기 작전은 1월 15일부터 개시되어 다시 지리산을 포위
토벌작전이 사실상 마감된 1월말까지 수색 추격 매복 작전
그 결과 1만 9,000명 이상의 빨치산들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이 작전으로 남부군 중심 빨치산 세력은 결정적으로 약화
후방에 '제2전선'을 구축하려던 북한의 전략은 치명적 타격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토벌작전후 탄생한 국군 제2군단의 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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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역사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1910년부터 일제 치하에 저항한 지리산 항일투쟁
갑오농민 지도자 및 독립 운동가들이 은둔했던 곳.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민중 들에게 새로운 희망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
민중들의 희망과 의지와 달리 남북이 분단되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제물로 희생되어 갔다.
남한 단독정부 주도 세력은 민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를 따를 것을 강요.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좌익으로 몰아 탄압.
해가 갈수록 탄압의 강도가 날로 거세지자
그를 피해 사람들은 지리산 속으로 숨어든다.
그들 중에는 먹고살려 싸웠던 자도 있었고,
자유롭고 해방된 사회를 꿈꾸던 자도 있었고,
해방이후 농민, 노동운동에 앞장선 자도 있었다.
통일국가를 열망하던 민족주의자
또는 철저한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그들은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공통점.
그러나, 공통된 '빨갱이' 누명을 쓰고 총알받이
그에 강력히 맞서 침묵만 지키지 않던 민중 세력.
그들은 점점 하나의 지리산 산사람들로 뭉쳤다.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가정 사실화되자
비합법인 무장 투쟁으로 대항하는 야산대를 조직
남한 단독선거를 저지하는 1948년 2.7 구국투쟁
같은 해 제주 4.3 민중 항쟁을 일으켰던 야산대.
1948년 10월 여수, 순천에서 봉기한 무장군인들
조직적 항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유격전구를 형성
광양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왕시루봉 문수골에 첫발
1948년 10월 25일 김지회 등이 이끈 14연대 반란군.
그 이틀 뒤 총성이 울리고 지리산은 피로 물들었다.
지리산 속에서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긴 김지회부대
1949년 4월 9일 뱀사골 반선전투에서 결국 궤멸.
그렇지만 다른 지역 빨치산들이 지리산으로 집결
북한 공산당 정권의 지원을 받아 점점 세력이 확산.
1949년 6월에 평양에서 조국전선이 결성되자
7월부터 무장투쟁을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전개
인민유격대가 편성되며 각 지구별 3개 병단을 편성
제1병단은 오대산지구,
제2병단은 지리산지구,
제3병단은 태백산지구.
6월부터는 북한에서 남파된 유격대 2,400명 가세
남한에서의 빨치산 무장투쟁은 한층 확대되었다.
1950년 군경 동계 토벌작전으로 빨치산 활동이 주춤
그러나, 지리산을 비롯한 경북, 전남에서 무장 투쟁
지리산 빨치산은 1월 1일 화개면에서 국군 70명 기습
3일 화개 지곡 산청 오곡 네 곳을 공격
군경 특수부대 요원 70여 명을 사살했다.
1950년 4월 한 달 동안 교전횟수는 1,423회.
사살된 군경은 2,868명. 빨치산이 탈취한 무기
박격포 3문과 기관총 2문, 소총 220 여 정 등등.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과 군경이 싸울 때
북한은 남조선 해방명분으로 6월 25일 남침
이때 지리산 빨치산들은 인민군과 협동작전
대표적인 부대는 지리산의 이현상 부대,
경남 산청지구 햠양지구 지리산 유격대,
전남 영광군 서해안과 화순 일대 유격대,
경남 백운산과 산청 하동 남해안 유격대.
그러나 곧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자
자기 도내의 산악 지대로 다시 이동해
북한 노동당 지휘를 받아가며 무장투쟁
1951년 5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 6개 도당회의
이헌상은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하고
총사령관 이헌상이 지리산에 총지휘본부를 설치
부사령관은 이영회가 맡고 조개골에 거점 확보
이른바 남부군 '남반부 인민유격대'가 조직된 것.
그뒤 빨치산과 군경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1951년 7월 이후에는 전선이 38선에서 교착상태
그러자 남한은 전방 국군 병력을 후방으로 배치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빨치산의 영역은 점점 산악지대로 좁혀졌다.
지리산 빨치산에 대한 군경 토벌작전 5단계
그중 1951년 12월부터 1952년 2월 겨울 작전
1951년 11월 26일 남원에 설치된 백야전 사령부
4기로 나누어 지리산 인근의 빨치산을 집중 공격
1951년 11월말 이전까지는 9,247명이던 빨치산
백야전사 작전이 끝난 1952년 3월말에는 2,431명
그들은 총에 맞아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고, 산속에서 굶어 죽어갔다.
겨울을 보낼 때마다 급격히 줄었고
활동 지역은 지리산 회문산, 속리산,
운장산, 백운산, 덕유산 등지로 고립.
전쟁이 끝난 1953년 9월 지리산에는 800여 명
9월 18일 이현상이 의신마을 빗점골에서 사살
11월 28일 의령경찰서를 기습하고 오던 이영희
산청에서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던 경찰에게 사살
그밖 간부들도 1953년 12월에서 이듬해 5월에 피살
1954년 5월 국군의 작전이 끝났을 때
조국출판사, 삼승부대, 남원군당 뿐.
이들마저 1955년 후반 대부분 소탕.
1956년 12월 31일 경 43명의 빨치산 생존자.
지리산 일대 빨치산의 무장투쟁은 끝이 났다.
1만 수천여 명에 이르는 빨치산과 죄없는 군경,
지리산에 산 죄로 학살된 산청, 함양, 거창 양민들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당시 서울 대학생들을 따라 총 메고 들어온 여자들
예쁜 아가씨들은 산골 마을의 아가씨들은 아니었고
그당시 대학에 다녔다면 거의 부유층 집구석의 딸들.
산속에서 수없이 죽었다는 지리산 주민들의 증언.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주민 하재호(1942년 생) 씨.
........
맥아더.
.........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UN군 최고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
적을 한반도 만주 국경까지 몰아내는데 성공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만주폭격과 중국 연안봉쇄, 대만 국부군 사용을 주장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사령관 지위에서 해임
귀국 후 레밍턴 랜드 사장으로 취임,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에 속하여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기도 함
1964년 4월 워싱턴 D.C.에서 사망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약력............................
1950년 6.25전쟁 발발, 국제연합군(UN) 최고 사령관
인천 상륙작전 지휘로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
1988년 1월 미국 아칸소주 리틀콕 출생
1903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수석졸업
1917년 제 42단의 참모진에 배속
1918년 준장으로 진급
1920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
1925년 소장으로 진급
1928년 미국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직 역임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 육군 대장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
1937년 퇴역
1941년 7월 현역 복귀, 미국 극동군 사령관, 필리핀 근무
1942년 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 대일작전 지휘
1942년 뉴기니작전을 비롯한 반격작전 전개
1945년 7월 필리핀 탈환,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됨
1950년 6.25전쟁 발발, UN 최고 사령관 인천상륙작전 지휘
1951년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으로 4월 사령관 지위에서 해임
1952년 레밍턴랜드사 이사회 회장 역임
1964년 4월 워싱턴 D.C.에서 사망
................................................
...........
원산폭격
...........
1950년 6.25 당시 원산 평양은 미공군 폭격 대상.
B - 29 폭격기 12대가 원산의 군사 요충지를 폭격.
원산 앞바다에 수많은 기뢰를 투하하여 항구를 봉쇄.
인천상륙작전 당시 적을 따돌리기 위해 폭격.
하여, 원산폭격 기합은 끔찍했던 원산폭격에서 유래.
철모 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뻗친 채 뒷짐을 쥔다.
B - 29 폭격기 형태와 유사한 기합 자세가 원산 폭격.
미 공군의 원산폭격과 국군과 UN군의 태백산맥 봉쇄.
북상하던 빨치산은 퇴로가 차단되자 덕유산에서 남하.
지리산에 숨어 전세가 역전되기를 기다리며 유격투쟁.
그러나, 이헌상은 믿었던 북한으로부터 버림받는다.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뀐 때문이다.
북한은 패색이 짙어지자 빨치산 지원도 사실상 중단.
이헌상은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이헌상을 믿고 지리산으로 후퇴 은닉한 빨치산.
북한은 그 책임을 이헌상에게 전가했던 것 같다.
남부군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된 이헌상.
북한 공산당에게서도 버림받았던 '고독한 영웅'
그 근본적 원인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덧 말.
6.25 이후에도 1968년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북한 해군에게 피격, 나포되자 원산폭격을 하려 했었다.
그러나, 고집불통 외골수 북한 당국에게 통하지 않았다.
...............
인천 상륙작전.
...............
1950년 9월 UN군이 인민군 후방을 타격한 작전.
1950년 6·25전쟁 이후 남진을 계속했던 인민군
UN군 참전으로 120 마일 전선은 낙동강에서 교착
UN군은 인민군 배후에서 공격해 전열의 허리를 단절
인민군 병력과 장비를 섬멸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 첫 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1단계 9월 15일 06시 한미해병대가 인천 월미도 점령.
2단계 남한 해병대와 미군 보병 및 해병사단 인천 상륙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해 인천항 주변을 완전히 점령.
3단계 남한 해병 2개 대대, 미 1해병사단 19일 한강 도하
26일 정오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으로 작전 완료.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 작전을 계획했을 때,
미군 수뇌부는 동경회의에서 크게 반론을 제기
인천 조수 간만의 차이와 항공지원이 어려운 탓.
결과적으로 맥아더가 주장한 작전은 대성공
당시 맥아더 원수가 설득한 말이 인상 깊다.
"북한군 지휘관들도 당신들과 같이 훌륭한 장군이다.
여러분이 인천상륙작전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북한군의 장군들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것이며,
따라서 인천은 방비가 소홀할 것이다.
고로, 이 허점을 친다면 성공할 수 있다.
사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덧 말.
인천 상륙작전 이후 38선 퇴로까지 차단한 UN군.
지리산에 고립되어 남부군 유격투쟁을 이끈 이헌상.
그 자신도 더 이상의 유격투쟁은 무의미하다고 인식.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았던 이헌상.
스스로 죽음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오봉마을.
지리산 동북쪽 경남 산청과 함양 경계지점
오봉계곡 중간쯤, 깔때기 모양의 분지 속
해발 500m 오봉마을은 농사지을 땅이 없다.
고로쇠 수액, 토종꿀, 산나물, 약재 채취로 생활.
가족단위 자연체험 여행객들의 정감어린 쉼터 마을
왕등재 늪지에서 1km 아래이고 구형왕릉과도 가깝다.
하늘 아래 첫동네 오봉마을은 산청군 오지.
눈내리는 날엔 차량통행도 힘든 산골 마을.
방곡리 위령탑엔 언제나 참배객 한 명 없다.
대전~ 통영 국도 생초IC로 나와 화계리쪽으로 좌회전.
화계에서 경호 중고교를 지나 방곡리 추모공원 이정표
추모공원 지나 가현교 갈림길에서 화림사 오봉마을 이정표
'하늘 아래 첫동네' 경남 산청군 금서면 오봉리.
오봉마을은 산 깊고 물 맑지만 하늘이 작고 둥굴다.
사방에서 뻗어내린 다섯 산봉우리에 싸여있는 분지.
해발 500~600m에 숨어있는 산청의 대표적인 오지마을.
예전엔 장 보려면 새벽에 나가 별 보고 돌아왔다.
지금은 계곡따라 시멘트 길도 났고 전기도 들어온다.
하지만, 휴대폰은 무용지물이고, 인터넷은 꿈도 못꾼다.
12가구 20명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오봉마을 주민들.
해 뜨면 일어나고 배가 고프면 먹고. 개울에서 목욕.
하루 하루 무슨 요일인지 잘 모르고, 뉴스도 어두운 편.
'원두막에 누우면 하늘로 빨려 들어갈 듯..'
집채만한 바위 위에 얼기설기 엮은 원두막 풍경
윙윙거리는 벌소리, 소리치듯 흐르는 계곡 물소리
농사지을 땅도 없어 절로 청정 지역이 된 오봉마을.
고로쇠물, 산나물, 토종꿀, 흑염소 등.
특산물 채취로 생계를 잇는 마을 주민들.
산골마을에 어울리지 않은 세련된 집들도 몇채
대부분 요양을 하기 위해 들어온 외지인의 주택.
2개월만에 만들었다는 이장 집 안방은 뜨끈 뜨끈.
황토를 바르고 대나무로 마감해 자연을 끌어들인 집.
방안에는 산에서 채취한 약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당귀, 오가피, 땅두릅, 거름나무, 오미자, 웅지, 등등.
대나무 옷걸이도 운치 있고.
부엌에서 흐르는 개울물도 멋.
제멋대로 들어와 제맘대로 간다.
마을 초입 염소막 아래 외딴집은 지난 여름 태풍에 반파.
오봉마을에서는 유일한 초등학생 병윤은 염소막 주인 아들.
스물아홉 청춘때 산에서 만난 부인과 신혼살림 차렸기 때문.
전기도 없어 촛불 켜고 알콩달콩 살았었다는 최씨
"안개낀 날은 어린애 만한 도깨비불이 돌아 다녀요."
저녁 밥상에 토종꿀 곶감까지 맛보라며 내민다.
전기 없이 살던 시절이 더 행복했었다는 그의 말.
문명과 가까워질수록 욕심이 더 많아진다는 그의 말.
자연을 닮은 그가 있어 다시 찾아가고도 싶은 오지.
그러나, 토박이는 이장과 80세 넘은 할머니 한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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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딴 오지마을에 토박이 주민이
단 두 사람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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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마을 아래 방곡리는 1951년 참사의 현장.
불행하게도 마을로 돌아와 살 원주민이 없었다.
1951년 음력 1월 2일 원주민들은 모두 사라진 탓.
그후 주민들은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1951년 산청 함양사건' 합동묘역 추모공원.
1951년 토벌군이 4개 마을 주민 705명을 학살한 사건.
훗날 진실이 밝혀져 그들을 달래는 위령탑과 추모공원
가락국 구형왕릉도 방곡리 추모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양민학살은 또 다른 사건.
지리산이 품고 있는 가슴이 아픈 사건들 중 하나.
- 1951년 음력 1월 2일 함양 산청 사건-
산청 함양 양민학살사건은 51년 2월 8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할 당시 였다.
국군 제 11사단(화랑부대·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에 의한 주민학살 사건.
모두 지리산의 동쪽 하늘 아래 첫동네 마을들.
산위에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시간을 아는 두메산골
가현 방곡 점촌(산청 금서면) 서주리(함양 휴천면) 4곳
양민 705명이 떼죽음을 당하고 3 마을 133가구가 잿더미.
남원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중령) 보11사 작전명은 '견벽청야’
3대대(대대장 한동석 대위) 7~11일 수행한 학살작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