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179강(三十六. 寂靜音海主夜神 -- 第五難勝地善知識) 다. 結酬其問 善男子야 汝問我言호대 汝發心來가 其已久如오하니 善男子야 我於往昔에 過二佛刹微塵數劫하야 如上所說於淸淨光金莊嚴世界中에 爲菩提樹神하야 聞不退轉法界音如來의 說法하고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於二佛刹微塵數劫中에 修菩薩行한 然後에 乃生此娑婆世界賢劫之中하야 從迦羅鳩孫馱佛로 至釋迦牟尼佛과 及此劫中未來所有一切諸佛히 我皆如是親近供養하니 如於此世界賢劫之中에 供養未來一切諸佛하야 一切世界一切劫中에 所有未來一切諸佛을 悉亦如是親近供養호라 善男子야 彼淸淨光金莊嚴世界가 今猶現在하야 諸佛出現이 相續不斷하나니 汝當一心으로 修此菩薩大勇猛門이어다 (8) 重頌解脫義 爾時에 寂靜音海主夜神이 欲重宣此解脫義하사 爲善財童子하야 而說頌言 善財聽我說 淸淨解脫門하고 聞已生歡喜하야 勤修令究竟이어다 我昔於劫海에 生大信樂心일새 淸淨如虛空하야 常觀一切智호라 我於三世佛에 皆生信樂心하고 幷及其衆會를 悉願常親近호라 我昔曾見佛하고 爲衆生供養하며 得聞淸淨法하고 其心大歡喜호라 常尊重父母하야 恭敬而供養하야 如是無休懈하야 入此解脫門호라 老病貧窮人이 諸根不具足이어든 一切皆愍濟하야 令其得安隱호라 水火及王賊과 海中諸恐怖를 我昔修諸行에 爲救彼衆生호라 煩惱恒熾然하고 業障所纏覆로 墮於諸險道어든 我救彼衆生호라 一切諸惡趣에 無量楚毒苦와 生老病死等을 我當悉除滅호라 願盡未來劫토록 普爲諸群生하야 滅除生死苦하고 得佛究竟樂호라 |
다. 결수기문(結酬其問)
오늘은 화엄경 308쪽의 결수기문(結酬其問)이란 대목부터 할 차례입니다. 그 물음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대답한다, 그러니까 모아서 맺어서 그 물음에 대답하는 형식입니다.
저 앞에서 선재동자가 이 선지식에게 어떻게 해서 그런 법을 얻게 됐느냐, 당신이 얻은 법은 어떤 것이냐 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래서 쭉 대답을 했는데 상당히 길고 장황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모아서 요점만을 대답하는 그런 형식이 되겠습니다.
선남자(善男子)야 여문아언(汝問我言)호대 여발심래(汝發心來)가 기이구여(其已久如)오 하니
선남자(善男子)야 아어왕석(我於往昔)에 과이불찰미진수겁(過二佛刹微塵數劫)하야 여상소설어청정광금장엄세계중(如上所說於淸淨光金莊嚴世界中)에 위보리수신(爲菩提樹神)하야
선남자(善男子)야 여문아언(汝問我言)호대, 선남자야, 나에게 물어서 말하되
여발심래(汝發心來)가, 발심한 이래가
기이구여(其已久如)오 하니, 그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하고 물었으니
선남자(善男子)야
아어왕석(我於往昔)에, 나는 옛날에
과이불찰미진수겁(過二佛刹微塵數劫)하야, 이 불찰미진수겁을 지나서
여상소설어청정광금장엄세계중(如上所說於淸淨光金莊嚴世界中)에,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청정광금장엄세계 가운데서
위보리수신(爲菩提樹神)하야, 보리수신이 되어서
문불퇴전법계음여래(聞不退轉法界音如來)의 설법(說法)하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어이불찰미진수겁중(於二佛刹微塵數劫中)에 수보살행(修菩薩行)한 연후(然後)에 내생차사바세계현겁지중(乃生此娑婆世界賢劫之中)하야 종가라구손타불(從迦羅鳩孫馱佛)로 지석가모니불(至釋迦牟尼佛)과 급차겁중미래소유일체제불(及此劫中未來所有一切諸佛)히 아개여시친근공양(我皆如是親近供養)하니
문불퇴전법계음여래(聞不退轉法界音如來)의 설법(說法)하고, 불퇴전법계음여래에게 설법을 듣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
어이불찰미진수겁중(於二佛刹微塵數劫中)에, 그리고 이 불찰미진주겁 중에
수보살행(修菩薩行)한 연후(然後)에, 보살행을 닦은 연후에
내생차사바세계현겁지중(乃生此娑婆世界賢劫之中)하야, 이 사바세계의 현겁 가운데 나서
종가라구손타불(從迦羅鳩孫馱佛)로, 가라구손타불로부터
지석가모니불(至釋迦牟尼佛)과, 석가모니부처님과
급차겁중미래소유일체제불(及此劫中未來所有一切諸佛)히, 그리고 겁[현겁] 가운데에 앞으로 오실 미래의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아개여시친근공양(我皆如是親近供養)하니, 나는 다 이와 같이 친근하고 공양했다.
여어차세계현겁지중(如於此世界賢劫之中)에 공양미래일체제불(供養未來一切諸佛)하야 일체세계일체겁중(一切世界一切劫中)에 소유미래일체제불(所有未來一切諸佛)을 실역여시친근공양(悉亦如是親近供養)호라
여어차세계현겁지중(如於此世界賢劫之中)에, 이 세계의 현겁 가운데와 같이
공양미래일체제불(供養未來一切諸佛)하야, 또 미래 일체제불에게 공양을 해서
일체세계일체겁중(一切世界一切劫中)에, 일체 세계 일체 겁 가운데서
소유미래일체제불(所有未來一切諸佛)을, 있을 바 미래의 일체 제불을
실역여시친근공양(悉亦如是親近供養)호라, 다 또한 이와 같이 친근하고 공양하노라,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시간상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보리수 신이 되어 가지고서 불퇴전법계음 여래의 설법을 듣고 그때에 발심을 해서 이 불찰미진수겁이라고 하는 길고 긴 세월 동안 보살행을 닦았고 그리고 사바세계의 가라구손타불로부터 석가모니불, 현겁의 칠불 등 우리가 보통 들어온 그런 많은 과거의 부처님들께 전부 친근 공양했고 또 앞으로 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에게도 역시 다 친근하고 공양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여기 화엄경에서 부처님이라고 하는 내용은 모든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불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 석가모니불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만 일체 깨달으신 분들을 전부 부처님이라고 해요.
본래 부처님이라고 하는 말은 깨달은 분이란 뜻이지 석가모니란 뜻은 아니에요. 석가모니께서 대표적인 깨달으신 분이기 때문에 깨달음이란 말이 석가모니란 말과 통용으로 쓰이기도 하고 그렇게 왔다 갔다 쓰이기도 합니다.
대개 일체불, 과거불, 미래불, 현재불, 이런 식으로 쓰여 진 것은 석가모니불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일체 깨달은 사람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에요. 어쩌면 공자, 맹자도 포함될 수 있고 노자, 장자도 포함될 수가 있고 임제스님 · 황벽스님 · 달마스님 · 육조스님도 다 포함될 수가 있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 스님 · 모르는 스님 · 아는 거사 · 모르는 보살할 것 없이 깨달으신 분은 다 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말 속에 포함돼요. 그래서 일체불이라고 하면 일체의 깨달으신 모든 불이라는 뜻이에요.
그 부처라는 말 자체가 깨달으신 분이라는 그런 뜻이니까요.
공자 맹자도 포함될 수가 있고 임제스님 · 황벽스님, 우리나라의 원효스님 · 의상스님 · 서산스님 · 사명스님 근래의 모모한 스님들까지도 깨달았다면 다 이 속에 포함 됩니다.
그렇게 봐야지 이게 석가모니불 한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 이런 부분은 해석이 안 됩니다. 도대체가 뜻이 맞지 않습니다.
깨달으신 분이라면 과거 석가모니 이 전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고 석가모니 시대에도 있고 석가모니 이 후에도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있을 수가 있고 그래요. 그런 깨달으신 분들을 친근하고 받들어 섬기고 또 공양을 올리고 거기에서 보리심을 발해서 법문도 듣고 하는 그런 수행의 삶을 살아왔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저 앞 부분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부처님들의 이름을 들어가면서 어느 세계의 어떤 부처님에게서 어떻게 법문을 들었고 하는 그런 소리를 아주 수없이 많이 적어 놨지 않습니까. 아주 많이 적어 놨지요. 여기에서는 뭉뚱그려 가지고 결론적으로 대답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불퇴전법계음여래라고 하는 그 분을 시작으로 해서 지금까지 무수한 깨달은 분들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고 그렇게 해서 보살행을 닦아 왔노라,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시종일관 배우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선지식이에요. 그 사람이 깨달았든지 못 깨달았든지 간에 나에게는 선지식이고, 나에게 선지식이라면 그 분 또한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같은 분은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았잖아요, 석가모니에게는 새벽별도 선지식이에요. 좋은 선지식이라고요.
어떤 스님들은 화장실을 가다가 눈길에 미끄러져서 깨달았거든요, 그럼 눈길도 선지식이지요. 울력을 하다가 돌이 뚜르르 굴러가서 대나무에 탁, 부딪치는 그 모습을 보고 또 깨달은 사람이 있어요. 그럼 그 일이 또 그 사람에게는 선지식이지요. 거기에 무슨 깨달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 따질 필요가 없다고요.
그러면 내 가족이 됐든지 내 이웃이 됐든지 누가 됐든지 간에 나에게 깨달음을 열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선지식이지요.
특히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하는 것을 보면 그 분들이 다 깨달았다기 보다는 별별 사람이 다 있잖아요. 그래서 나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선지식을 부처님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가 있고 꼭 싯달 태자로서 출가해서 깨달음을 이룬 석가모니에 매달릴 까닭이 없어요.
경전도 화엄경 같은 것은 석가모니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에요. 그 뒤에 깨달으신 부처님이 한 거예요. 수많은 깨달은 분이 나왔는데 하필 석가모니 혼자서 다 하란 법도 없고 석가모니보다 훨씬 뒤에 깨달으신 부처님들이 한 거예요. 석가모니처럼 그렇게 부처님이라고 우리가 타이틀을 걸지는 않았어도 어떻게 보면 석가모니보다도 그 시대에 훨씬 잘 적응하는, 그 시대 사람들의 근기에 훨씬 더 맞는 그런 방편과 그런 이론과 그런 지식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이렇게 일러준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다가 보면 웬 부처님이 그렇게 많고 그 부처님이라고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가 하는 궁금증이 이는데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고 깨달은 사람의 대표가 석가모니이니까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하면 얼핏 석가모니불을 생각하기가 쉽지요.
이런 분별을 우리가 정확하게 해야지 안 그러면 계속 혼동이 생겨요. 그래서 수많은 깨달은 이들을 전부 부처님이라고 보면 됩니다. 육조스님 같은 분도 깨달은 분이니까 그분의 어록인 『육조단경』을 경전이라고 부르지만 부처님이라고 막 바로 해도 괜찮아요.
대승경전 중에서 특히 화엄경이나 법화경에 나타나는 많은 부처님들은 수많은 깨달은 분들을 그대로 지칭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여기 보십시오, 석가모니불은 석가모니불이라고 딱 지칭을 했잖아요. 석가모니불과 그 외의 수많은 깨달은 이들을 공양하고 친근하고 받들어 섬기고 해서 지금까지 수행해 왔노라, 라고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 우리가 모르니까 덮어놓고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배울 점이 있는지 없는지 눈 여겨 보는 그런 자세를 가지면 전부 우리에게 선지식이 된다고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선남자(善男子)야 피청정광금장엄세계(彼淸淨光金莊嚴世界)가 금유현재(今猶現在)하야 제불출현(諸佛出現)이 상속부단(相續不斷)하나니 여당일심(汝當一心)으로 수차보살대용맹문(修此菩薩大勇猛門)이어다
선남자(善男子)야
피청정광금장엄세계(彼淸淨光金莊嚴世界)가, 저 청정광금장엄세계가
금유현재(今猶現在)하야, 지금도 있다는 거지요.
옛날에 거기서 부처님을 친견했고 보리심을 발했는데 지금도 있어서
제불출현(諸佛出現)이 상속부단(相續不斷)하나니, 여러 깨달으신 분들이 출현하는데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상속부단이란 말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계속 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도 깨달은 분들이 계속 출현하고 계시겠지요.
여당일심(汝當一心)으로, 그대들은 마땅히 일심으로
수차보살대용맹문(修此菩薩大勇猛門)이어다, 이 보살 대용맹문을 닦을지어다.
이 보살의 대용맹문이라고 하는 말은, 깨달은 사람을 그저 끊임없이 받들어 섬기고 배우고 하는 그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정진이지요. 그게 용맹이 없으면 아주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깨달은 사람을 전부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그런 자세, 뭐 깨닫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면 그건 더욱 좋은 일이지요. 훨씬 좋은 일입니다.
(8) 중송해탈의(重頌解脫義)
이시(爾時)에 적정음해주야신(寂靜音海主夜神)이 욕중선차해탈의(欲重宣此解脫義)하사 위선재동자(爲善財童子)하야 이설게언(而說頌言)
그 다음 중송해탈의(重頌解脫義)라, 이 분이 해탈한 의미를 거듭 게송으로서 이제 설하는데
이시(爾時)에 적정음해주야신(寂靜音海主夜神)이, 그때에 적정음해주야신이
욕중선차해탈의(欲重宣此解脫義)하사, 이 해탈의 뜻을 거듭 밝히고자 하사
위선재동자(爲善財童子)하야 이설게언(而說頌言), 선재동자를 위해서 게송으로 설해 말하기를
선재청아설(善財聽我說) 청정해탈문(淸淨解脫門)하고
문이생환희(聞已生歡喜)하야 근수영구경(勤修令究竟)이어다
아석어겁해(我昔於劫海)에 생대신락심(生大信樂心)일새
청정여허공(淸淨如虛空)하야 상관일체지(常觀一切智)호라
선재청아설(善財聽我說) 청정해탈문(淸淨解脫門)하고, 선재여, 내가 설하는 청정해탈문을 잘 듣고서
문이생환희(聞已生歡喜)하야, 듣고 나서는 환희심을 내어 가지고서
근수영구경(勤修令究竟)이어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수행해서 하여금 성취할 지어다.
여기에서는 구경할 지어다, 마칠 지어다, 성취할 지어다의 뜻이에요. 듣고 나서는 부지런히 닦아서 하여금 성취하게 하라.
아석어겁해(我昔於劫海)에, 내가 옛날 겁의 바다에, 아주 오랜 세월에
생대신락심(生大信樂心)일새, 크게 믿고 즐겨하는 그런 마음을 냈을새
청정여허공(淸淨如虛空)하야, 그 마음 청정하기가 허공과 같아서 상관일체지(常觀一切智)호라, 항상 일체지를 관했노라.
일체지, 모든 것을 다 아는 그런 지혜를 관했노라.
아어삼세불(我於三世佛)에 개생신락심(皆生信樂心)하고
아어삼세불(我於三世佛)에, 내가 삼세의 부처님에게
개생신락심(皆生信樂心)하고, 다 믿고 즐겨하는 마음을 내고,
이것은 참 어려운 거지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깨달은 분에게 믿고 즐겨하는 마음을 내고,
뭐 자기가 못 깨달았으면 상대가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를 잘 몰라요. 그럼 어지간하면 다 믿고 즐기고 받들고 친근하고 공양하면 돼요, 그 가운데는 깨달은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일일이 그것을 분별하자면 분별심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보지요. 어지간히 분별이 된다 싶으면 ‘아, 저만하면 선지식이다’ 생각하고 신락심을 내어야지 그것을 일일이 저울질해서 믿고 행하려면 저울질 하다가 볼 일 다 보지 언제 또 받들어 섬기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진짜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 한 사람을 두고도 그것 저울질 하다가 세월 다 갈 텐데 언제 믿고 받들어 섬기고 할 수 있나요?
그러니까 저 쯤 되어 선지식이다 싶으면 받들어 섬기면 되지요.
개생신락심(皆生信樂心), 다 믿고 즐기는 마음을 내고
병급기중회(幷及其衆會)를 실원상친근(悉願常親近)호라
병급기중회(幷及其衆會)를 실원상친근(悉願常親近)호라, 아울러 그리고 그 모임을 항상 친근하기를 원하노라.
중회(衆會)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의 모임, 그 분의 단체, 그 분의 회상, 이런 뜻이지요.
비근한 예로 오늘날 어떤 큰스님이 계신다고 하면 그 큰스님을 따르는 사부대중의 모임, 그 단체를 모두 다 항상 친근하기를 원하라는 거지요.
거기에 동참하고 또 같이 더불어 수행하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라는 말이지요.
요즘 내 카페가 얼마나 잘 되는지, 개설한지 3개월도 안 되었는데 회원 수가 칠백 명을 넘어섰어요. 어제 그저께는 카페에 딸린 방송국까지 개국했었어요. 이제는 방송까지 된다고요. 깨끗한 법문 소리를 집에 앉아서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참여한 분들이 있어서 피곤해도 아주 신이 납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포교당 열 개를 운영하는 것과 지금 맞먹습니다.
또 그 방송은 전 세계로 다 나갑니다. 옛날에 부처님도 그런 것은 못했어요. 부처님은 마이크도 없었어요. 부처님의 음성은 심원하다고 해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음성이 아주 좋아서 멀리 간다고 했어요. 사실 솔직히 사람의 음성이 멀리 가봤자 얼마나 가겠어요. 멀리 가 봤자 이삼백 미터 밖에 못 가지요. 그것도 사실은 어렵다고요.
지금은 전 세계에 다 가버려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요. 그만치 문명이 발달하다 보니까 그 문명의 발달도 무시 못 하지 않습니까.
육신통 중에 천안통은 앉아서 다 보지요?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채널만 맞추면 앉아서 다 보지요.
천이통, 다 듣지요. 신족통, 금방 한 번 만에 미국까지 가 버리지요.
더욱이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는 하루 만이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10초 20초 만에 중국이고 미국이고 왔다 갔다, 갔다 왔다를 마음대로 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전혀 제약이 없습니다.
밤도 없고 낮도 없고 무슨 공산국가 민주국가,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에 아무 장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경전 상에서 설법하시던 사사무애 거리, 사와 사가 걸림이 없는 무장무애한 이치가 그냥 그대로 가상공간인 인터넷 상에서는 일어나고 있거든요.
그리고 내 나름대로 data를 내어 봤습니다. 신도님들이 불교 단체가 됐든지 절이 됐든지 공부하는 학교가 됐든지 이런 강당이 됐든지 직접 나오는 시간과 날짜를 계산해 보고, 불교 관계 home page나 Cafe에서 경전을 읽고 또 이렇게 법문을 듣고 보고 하는데 투자하는 시간을 계산해 보니까 오히려 후자에 들어가는 시간이 훨씬 많아요.
실지로 몸이 절에 나와서 기도하고 법문 듣고 하는 시간하고를 비교해서 한 달을 계산해 봐요. 한 달을 계산해 보면 이것저것 전혀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여기 저기 같이 하는 사람도 있고 한데 오히려 불교 관련 인터넷에서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요.
정작 절에 나오는 사람 숫자보다 불교 관련 인터넷상에 접속하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 곳에 한 번 들어갔다 하면 하루에 보통 두세 시간씩, 또 더 오래 가는 사람은 너댓 시간씩을 그렇게 보냅니다. 절에 나와서 법회 하고 기도 해봐야 고작 두 시간이라고요.
그러니까 오는 숫자도 요즘은 그 쪽이 더 많고 투자하는 시간도 그 쪽이 더 많아요.
지금은 그런 세상입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 게 세상일이고 일반화 되어 버렸으니 우리가 이런 세상에 안 살면 모르지만 살고 있으니 어떡해요, 우리 같은 사람도 그런 쪽으로 포교를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래서 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신심을 내어 도와준 덕분에 방송국까지 열어서 이제는 법문소리를 깨끗한 음질로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안 나와도 돼요, 법회에 안 오고도 시간만 딱 맞춰 틀어놓으면 따뜻한 방에 앉아서도 다 들을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됐습니다.
이제 조금 더 발전하면 내가 영상으로 방송하는 것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쌍방향 방송을 하면 직접 질문하고 거기서 대답하게 되지요. 시간도 없고 교통도 막히는데 왔다 갔다 할 것 없이 그렇게 공부하는 시대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항상 옛것도 익혀야 하고 새로운 것에도 뒤처지면 안돼요. 의식이 늘 앞서 있어야 해요. 우리 불자들이 앞서 있지 아니하면 누가 앞서 있겠어요. 그러니까 나이니 이런 것을 절대 탓하지 말고 항상 의식이 앞서 있어야 합니다.
인터넷도 별것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인터넷에 들어가는 것을 배워 공부하는 그런 것은 사실 간단하거든요. 세상에 간단한 게 그거에요. 된장국 끓이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게 인터넷 접속입니다.
나는 처음에 밥 할 때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요, 불을 때서 해 보세요. 요즘이야 전기로 하니까 스위치 눌러놓고 시간만 되면 딱 올라와 버리지만 그때는 순 감각으로 하는 거예요. 밥물이 푸르르 넘어도 요거 언제쯤 불을 빼야 할지, 아니면 다 빼야할지 감각으로 익히는 거지요. 그런데 다 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불을 빼도 좀 남겨놓고 빼야 하는 거지요. 불을 남겨 놓는데 그 열기가 어느 정도 되어야만 밥이 제대로 익는 다는 것을 설명은 실컷 들었지만 설명대로 한다고 되나요. 나중에는 느낌으로 알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열 명 분의 쌀을 앉히는 것도 바가지에 쌀을 딱 뜨면, 아, 이거 열 명 먹겠다, 그리고 좀 많다 싶어 사르륵 쏟으면 아, 이거 다섯 명 먹겠다, 하고 그냥 알아져요. 여러분들 그거 도사잖아요. 처음에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처음에는 홉으로 뜨지요, 홉으로 뜨는 것도 뜨기 나름이지요. 고봉으로 뜨면 두 홉 분량이 되지요. 또 밑으로 뜨면 모자라게 되지요. 나중에는 홉으로 뜰 필요도 없어요. 바가지로 싹 뜨면 딱 알아요. 요렇게 무게를 달아봐도 알아요. 물을 부어놓고도 그걸 계산을 백날 해봐도 안 되는 거예요. 손을 이렇게 담궈 보잖아요. 그것도 그런데 안 맞는 거예요. 나중에는 물을 척 부으면 알아요, 볼 것도 없어요. 어느 정도 쌀에는 물이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 그냥 느낌으로 척 알지요. 그렇게 된다고요.
참 어려운 거예요. 밥하기도 어렵고 된장국 끓이기도 어려운데 인터넷 접속은 그보다 열 배 더 쉬워요. 열배보다도 더 쉬워요. 진짜에요. 내가 해 보니까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조금만 마음을 내면 밥하기 보다도 열배 쉽고 된장국 끓이기보다도 열배 쉽다는 생각만 하면 못할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불자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아이구, 나는 나이가 많아서 못 한다, 뒤 쳐져서 못한다.’고 한다면 그건 불교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불교공부 하는 사람은 뭐든지 도전할 수 있고 어떤 희망, 어떤 꿈도 내가 다 이룰 수 있다는 그런 자세가 있어야지요.
우리의 최종목표는 성불인데 성불할 사람이 그까짓 거 못하면 안 되지요. 어린아이들도 다 하는 그것도 못하면 성불은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경전 한 구절 못지않은 이 시대의 중요 사안이라 이야기 나온 김에 권하는 바입니다. 그것도 불교와 연관이 깊습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화엄경의 도리가 그것 아닙니까? 한 먼지 속에 시방세계가 가득하다,
그곳은 정말 먼지 하나 속에 시방 세계가 가득 있어요, 먼지 하나도 아니에요, 먼지마저도 없는데 시방세계가 그 속에 있다고요. 참 기기묘묘한 세상이에요. 나는 그걸 보면 늘 신기해서 죽겠어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한 먼지 속에 시방세계가 있다고 화엄경에서 늘 그렇게 우리가 듣고 배웠지만 실지로 그렇게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니 얼마나 신기하겠어요.
상관일체지(常觀一切智)호라, 항상 일체지혜를 관했노라,
아어삼세불(我於三世佛)에 개생신락심(皆生信樂心)하고, 병급기중회(幷及其衆會)를 실원상친근(悉願常親近)호라, 내가 삼세의 부처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깨달은 사람들에게 신락심을 내고 아울러 그 대중들에게 항상 다 친근하기를 원하노라. 그 모임의 대중들은 다 신심으로 들어오니까 모두 친견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서울에서 내려와 자기 돈 대어서 방송국 시설을 해 주는 그런 것을 보며 이런 경전의 구절들이 그대로 실천이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실원상친근(悉願常親近)호라, 항상 친견하기를 원하고,
아석승견불(我昔曾見佛)하고 위중생공양(爲衆生供養)하며
득문청정법(得聞淸淨法)하고 기심대환희(其心大歡喜)호라
아석승견불(我昔曾見佛)하고, 내가 옛날에 일찍이 깨달은 사람을 보고,
위중생공양(爲衆生供養)하며, 중생을 위하여 공양을 올리고
득문청정법(得聞淸淨法)하고, 훌륭한 법, 청정한 법을 얻어 듣고는
기심대환희(其心大歡喜)호라, 그 마음이 크게 환희했노라.
그러니까 이분, 적정음해주야신이라고 하는 분이 이 대목의 주인공인데 당신이 살아온 그 신행생활에 대한 표현이지요. 그 마음이 크게 환희했다.
상존중부모(常尊重父母)하야 공경이공양(恭敬而供養)하야
여시무휴해(如是無休懈)하야 입차해탈문(入此解脫門)호라
상존중부모(常尊重父母)하야, 항상 부모를 존중하고, 부모를 그리워하고,
불교는 얼핏 보면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지만 항상 부모를 존중한다는 말이 경전에 많이 있습니다. 『부모은중경』 에도 있지요.
공경이공양(恭敬而供養)하야, 공경하고 또 공양을 올려서
여시무휴해(如是無休懈)하야, 이와 같이 하기를 쉬거나 해태함이 없어서
입차해탈문(入此解脫門)호라, 이 해탈문에 들어간다.
부모를 항상 공경하고 공양하고 또 청정법문을 얻어 들어서 그 마음이 환희하고 부처님을 일찍이 친견하고 또 중생들을 공양하고, 또 삼세 모든 깨달은 분에게 신심을 내고, 또 그들을 따르는 무리인 사부대중들을 전부 내가 친근하기를, 같이 동참해서 나도 그 대중이 되기를 항상 원했던 이러한 마음들이 오늘날 적정음해 주야신이 되었다는 그런 말이지요.
노병빈궁인(老病貧窮人)이 제근불구족(諸根不具足)이어든
일체개민제(一切皆愍濟)하야 영기득안은(令其得安隱)호라
노병빈궁인(老病貧窮人)이, 늙고 병들고 빈궁한 사람이
제근불구족(諸根不具足)이어든, 손이 말을 안 듣든지 발이 말을 안 듣든지, 여러 육근 가운데 몸이 불구가 되어 가지고 있는데
일체개민제(一切皆愍濟)하야, 그런 이들을 전부 다 어여삐 여기고 연민의 마음을 내어 구제하고 도와서
영기득안은(令其得安隱)호라, 그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했다, 위안을 주고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그들에게 아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그런 자세를 가졌다, 참 중요한 이야기이지요.
노병빈궁인(老病貧窮人), 늙고 병들고 빈궁한 사람, 그리고 몸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에게 모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서 그들이 어떻게 하더라도 편안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는 조심을 해야 돼요. 그냥 덮어놓고 위한답시고 내 생각대로 내 잣대대로 했다가는 괜히 자존심을 건드려 가지고 안 한 것보다 못한 수도 많아요. 그런 건 잘 생각해서 해야지요. 덥석 표현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대가 마음을 다치지 아니하고 참으로 감사해 할지 이것을 연구해야 돼요, 위한답시고 덥석 자기표현을 해 버리면 오히려 상처를 주는 수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도와 줬을 때도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고 상처받는 사람도 있지요. 또 주는 방법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서 고맙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 그런 점은 신중히 해야 되겠지요.
수화급왕적(水火及王賊)과 해중제공포(海中諸恐怖)를
아석수제행(我昔修諸行)에 위구피중생(爲救彼衆生)호라
번뇌항치연(煩惱恒熾然)하고 업장소전부(業障所纏覆)로
수어제험도(墮於諸險道)어든 아구피중생(我救彼衆生)호라
수화급왕적(水火及王賊)과, 물난리 불난리와 전쟁과,
왕적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이지요.
해중제공포(海中諸恐怖)를, 바다에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일어나는 그런 여러 가지 공포들을
아석수제행(我昔修諸行)에, 내가 옛날 온갖 수행을 할 때에
위구피중생(爲救彼衆生)호라, 위하여 그들 중생들을 내가 구제했노라.
번뇌항치연(煩惱恒熾然)하고, 번뇌는 항성 치연히 불타오르고
업장소전부(業障所纏覆)로, 업장이 얽히고설킨 것으로서
수어제험도(墮於諸險道)어든, 아주 험한 길에 떨어졌다.
그러니까 번뇌가 많아 아주 치연히 불타오르고 업장 또한 많아서 그것 때문에 험도에 떨어졌다는 거지요. 이런 것들을 우리가 살피는 공부를 해야 돼요. 사람 몸 받아서 덮어놓고 앞만 보고 산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들을 살피면서 사는 것, 그런 교육이 사실 필요하지요.
아구피중생(我救彼衆生)호라, 떨어져 있는 중생들을 전부 구제했노라.
적정음해주야신은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참으로 보살행을 제대로 했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일체제악취(一切諸惡趣)에 무량초독고(無量楚毒苦)와
생노병사등(生老病死等)을 아당실제멸(我當悉除滅)호라
원진미래겁(願盡未來劫)토록 보위제군생(普爲諸群生)하야
멸제생사고(滅除生死苦)하고 득불구경락(得佛究竟樂)호라
일체제악취(一切諸惡趣)에, 일체 제악취에
무량초독고(無量楚毒苦)와, 아주 한량없는 매서운 고통과
생노병사등(生老病死等)을, 생노병사 등을
아당실제멸(我當悉除滅)호라, 내가 마땅히 다 제멸하리라.
원진미래겁(願盡未來劫)토록, 원컨대 미래겁이 다하도록
보위제군생(普爲諸群生)하야, 널리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멸제생사고(滅除生死苦)하고, 생사의 고통을 멸제하고
득불구경락(得佛究竟樂)호라, 부처님이 얻으신 그런 구경, 최상의 낙을 얻게 했노라.
그러니까 이런 고통을 받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구제해 주고 결국은 부처님이 누리는 구경락을 얻게 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첫댓글 노병빈궁인(老病貧窮人)이,제근불구족(諸根不具足)이어든,일체개민제(一切皆愍濟)하야,영기득안은(令其得安隱)호라...늙고 병들고 빈궁한 사람이 손과 발이 말을 안 듣든지, 여러 육근 가운데 몸이 불구가 되어 가지고 있는데 그런 이들을 전부 다 어여삐 여기고 연민의 마음을 내어 구제하고 도와서 그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했느니라. 고맙습니다._()()()_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깨달았든지 못 깨달았든지 간에 모두 나의 선지식이고, 그 분은 또한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부처님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연보리님, 명절에 바쁘고 고단하셨을 텐데, 벌써 녹취 올려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_()()()_
나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선지식이고 부처님이다....연보리 님! 수고하셨습니다.._()()()_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시종일관 배우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선지식이에요...고맙습니다. _()()()_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제불 출현이 상속 부단하니 그대는 마땅히 일심으로 용맹하게 보살도를 닦으라
불교 공부하는 사람은 뭐든지 도전할 수 있고 어떤 꿈과 희망도 내가 이룰 수 있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諸佛出現이 常續不斷하니 일심으로 용맹하게 보살도를 닦으라
나무 입법계품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