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9월 14일 토요일]
『대동야승』 제8권 [해동야언 Ⅱ] 무오당적 (戊午黨籍) 허후
○ 허후(許詡)는 영의정 허조(許稠)의 아들로서, 대대로 충효의 집안이다. 부친이 죽고 그 모친을 공양함에 있어 어머니의 안색을 살피면서 봉양하였다.
세종조에 벼슬하여 20여 년간 몸을 삼가고 말을 조심하였다. 갑자 을축 연간에 허후가 경기 감사로 갔는데, 그때 마침 큰 흉년이 들어서, 기전(畿甸) 간에 한 포기 풀도 없고, 백성은 아사 지경이었으나, 수령들이 구제할 도리가 없었다.
허후가 봉사(封事)를 올리어 경창(京倉)의 곡식을 풀어서 구휼하자고 청하였지만, 왕이 윤허하지 아니하자, 허후는 궐정(闕庭)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애통해 했다. 그러자 그 좌우에 있던 사람도 따라서 흐느꼈다.
고례(古例)에 흉년이 들어 주현창(州縣倉)을 풀어 굶주린 백성에게 주려면 먼저 감사가 호조(戶曹)에 보고하고, 호조는 왕에게 알려서 윤허를 얻은 다음에야 곡식을 내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발급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에 많은 백성이 아사하게 되는지라. 허후가 건의하기를, “감사나 호조는 모두 대신인데, 반드시 호조에 공문으로 알리자면 백성이 그 은택을 입는 것이 더디오니, 신은 호조에 알리지 아니하고 편리한 대로 창고를 열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이에 경창의 곡식을 운반하여 들에 노적해 놓고, 겸하여 의창(義倉)을 열어서 죽을 쑤어서 진휼하여 구제하였다.
또 상서하기를, “전라ㆍ충청도의 곡식을 옮겨서 식구를 계산하고, 토지를 요량하여 양식과 종자를 주어 백성들이 힘입어서 농사에 힘쓰게 하자.” 하였고, 또, “서산 기슭의 수목이 울창한 곳에 산나물이 풍성히 나는 것을 기다려서 백성들에게 채식을 돕게 하자.”청하였으니, 모두 허후의 힘이었다.
4월이 되어 군현(郡縣)을 순행할 때에 보리가 익으려는 것을 보고 이삭을 취해 오게 하여 맛보고 이르기를, “보리가 이미 결실을 맺었으니, 너희들 백성이 살았도다.” 하니, 그가 백성을 근심하는 것이 이같이 깊었다.
그 해 가을은 과연 큰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은 어느 집 할 것 없이 그 송덕(頌德)의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였다. 그 가사가 속되고 야비하여 기록하지 못하나, 대개 자기들을 살려준 은혜를 노래한 것이다. 이 일이 보고 되니, 왕이 듣고 감탄하여 마지아니하였다. 그 후 문종에게 벼슬하여 신하의 직책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문종이 죽을 때에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들에게 유주(幼主)의 보호를 부탁하였는데, 그때 허후는 우참찬(右參贊)이었다.
광묘(세조)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중국에 고하려 하자, 허후가 광묘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재궁(梓宮)이 빈소에 있고, 어린 임금이 국사를 담당하여, 대신들은 아직 우왕좌왕하며 백성들도 의심하고 있는 이때, 공자(公子)는 이 나라의 종신(宗臣)인데 나라를 떠나서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하니, 광묘가 따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계유년에 광묘는 비밀히 권람(權擥)ㆍ한명회(韓明澮)와 정란(靖亂)을 꾀하여 먼저 김종서를 그 집에 가서 죽였다. 그때에 왕(단종)은 부마 정종(鄭悰)의 집에 있었는데, 밤에 광묘가 그 집 문밖에 가서 왕에게 고하기를, “김종서가 모반하므로 일이 급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고 삼가 이미 죽였나이다.” 하니, 왕은 그때 나이가 어린지라, 놀라며 일어나서 말하기를, “그러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되오. 숙부는 나를 살려주오.” 하니, 광묘가 대답하기를, “이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이 모두 처치하겠나이다.” 하고, 즉시 상전에서 대신들을 패초(牌招)하고 한편 무사로 문을 지키게 하여 입문하는 자에 따라서 그 당파를 가려서 제거하게 하니,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이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이 이때에 죽음을 당하였으나, 허후는 이전에 중국에 가는 것을 만류한 일이 있으므로 이때 화를 면하였다.
허후가 불려 들어가 좌석에 얹으니 술을 내고 풍악을 연주하였는데, 그때 재상 정인지(鄭麟趾)와 한확(韓確) 등은 손뼉을 치며 희희낙락하였지만, 허후는 홀로 초연(愀然)히 앉아 즐기지 아니하고, 또 고기를 먹지 아니하므로 광묘가 그 연고를 물었다. 허후가 조부의 기제사라고 칭탁하였는데, 광묘는 핑계인 줄을 알면서도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이윽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머리를 시중(市中)에 매어 걸게 하고, 또 그 자손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자, 허후가 말하기를, “그 사람들이 무슨 큰 죄가 있어 머리를 매고 또 그 처자를 살육하려고 합니까. 나와 김종서 사이는 교분에 신의가 있는 사이도 아니므로,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오나, 인(仁 황보인) 같은 이는 제가 평소부터 그 사람을 살펴 알거니와, 결코 모반 할 리는 없습니다.” 하니, 광묘가 이르기를, “네가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이냐.” 하니, 허후가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조정의 원로들이 한날에 모두 죽었으니,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족하거늘 어찌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있겠소.” 하면서, 곧 눈물을 흘리며 우니, 광묘가 심히 노하기는 하였으나, 그 재덕을 사랑하여 죽이려고 하지는 아니하였는데, 이계전(李季甸)이 극구 참소하여, 허후를 외지에 귀양보냈다가 필경은 목매여 죽였다.
허후가 죽은 후에 조정은 모두 변하였고, 함길도 절도사 이징옥(李澄玉)이 배반하여 여진족에게로 가려다가 판관 정종(鄭宗)에게 잡혔고, 또 백성들에게서는 소란한 헛소문이 떠돌았다.
한편 동서 주민과 경기도 백성들은 떼로 모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어떤 사람은 가산을 땅에 묻고, 혹은 배에 싣고서 서울로 올라가려 하니, 하루에도 네다섯 차례나 경동(驚動)하나, 관리도 능히 그를 금하지 못하였다. 이에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는 자는 죽이는 데 그치고, 그릇되게 전파한 자는 나누어 귀양보낸 뒤에야 평정되었다.
처음에 허후가 승선(承宣)의 배명을 받았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는데, 그 부친인 허조(許稠)만은 근심하는 빛이 있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아니하므로, 어떤 사람이 그 연유를 물으니, 허조가 답하기를, “천도(天道)는 가득하면 덜어냄을 부르고 겸허하면 더함을 받게 되는 것인데, 나는 세상에 공덕도 없이 지위가 인신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또 내 아들이 승선이 되었으니, 이는 멀지 아니하여 허씨의 집안에 화가 일어나리라.” 하였는데, 이때를 당하여 허후가 죽은 뒤에 그 아우며 조카가 모두 금고(禁錮)를 당하였으니, 과연 그 말이 징험이 되었도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