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착용형 컴퓨터 ‘웨어러블’ 등에서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는 IT(정보기술)업계가 미래의 산업으로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을 지목했다. 가상현실 기술은 게임을 필두로 교육, 의료, 건축, 유통 등에 막대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유수의 IT기업들이 가상현실에 주목하고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실제 시야 위에 프로그램 창들이 홀로그램 입체영상으로 겹쳐 보이는 MS ‘홀로렌즈’의 화면을 가상으로 꾸민 사진
지난해 말, 가상현실 붐을 일으킨 미국 회사 오큘러스와 삼성전자가 협력해 개발한 ‘기어VR’이 공개됐다. 두툼한 고글처럼 생긴 이 기기를 착용하면 기존 3D 입체영상이나 360도 영상의 차원을 넘는 전혀 새로운 영상이 시야를 꽉 채운다. 원근감이 세밀하게 구현돼 다른 세계에 혼자 뚝 떨어진 느낌이 드는 데다, 손을 뻗으면 나뭇가지가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는 게 체험자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세계 최대 SNS(사회관계망 서비스)기업 페이스북은 3월 말 개최된 개발자회의 ‘F8 2015’에서 가상현실 기기 ‘크레슨트 베이’를 시연했다.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처럼 장난감 크기로 재현된 건물과 도로의 영상, 공룡이 사람 머리 위를 성큼성큼 지나가는 영상 등을 보려고 줄이 길게 늘어섰다. 지난해 오큘러스를 무려 23억 달러(약 2조5천억 원)에 인수한 페이스북은 이날 ‘올해를 가상현실의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삼성·페이스북·구글·소니 등 가상현실 시장 눈독
전문가들은 가상현실이 개인용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이은 3번째 혁신의 진원지가 되리라 전망한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큰 변화를 촉발시킬 기반 기술이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이란 사용자가 어디에 있든 순식간에 다른 공간으로 데려다주는 영상기술이다. 같은 맥락에서 페이스북은 가상현실을 ‘순간이동(teleportation)’이라고 지칭했다. 예를 들면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우주, 백두산, 사하라 사막 등을 여행할 수 있다.
유수의 IT기업들이 가상현실을 차세대 먹거리로 지목하고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비디오게임기의 강자 소니는 최근 ‘프로젝트 모피어스’의 시험판을 선보였다. 지난해 9월 처음 공개한 시제품에 비해 화면이 커지고 반응속도는 2배 빨라졌다. 소니 측은 착용자가 머리를 휙 돌렸을 때 화면이 따라오는 속도가 0.018초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내년 상반기 시판돼 비디오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4’와 함께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검색업계 1위 구글은 최근 대규모 가상현실 전담팀을 꾸렸으며, 가상현실 회사 매직리프에 5억4천200만 달러(약 5천900억 원)를 투자했다. 이는 지난해 선보인 간이 가상현실 체험기 ‘구글 카드보드’가 뜻밖의 성공을 거둔 데 따른 것이다. 골판지와 렌즈, 고무줄 등으로 이뤄진 구글 카드보드의 전용 앱은 약 100만 회나 내려받아졌다.
소프트웨어(SW) 분야 부동의 선두 마이크로소프트(MS)는 최근 ‘홀로렌즈’를 통해 가상현실 시장 입성을 선언했다. 차기 운영체제(OS) ‘윈도10’과 연동되는데, 착용하면 실제 시야 위에 프로그램 창들이 홀로그램 입체영상으로 겹쳐 보인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허공에 각종 SW를 띄워놓고 손짓으로 작동시키는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올해 가을쯤 상용화가 점쳐진다.
삼성과 함께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한 애플도 지난해 말 기어VR과 비슷한 형태의 헤드셋 특허를 신청하고, 가상현실 관련 기술자를 모집한 게 밝혀졌다. 오큘러스의 창업자 팔머 럭키는 최근 서울에서 열린 개발자 회의 ‘유나이트 서울 2015’에서 “5~6개 거물기업의 참여는 가상현실 시장의 실패확률이 낮아졌다는 증거”라며 “가상현실 기기용 게임이나 콘텐츠를 개발하려면 지금 당장 도전하라”고 촉구했다.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온몸으로 즐기는 게임 ‘옴니’의 시연 장면. 1시간 동안 옴니를 하면 약 5km를 걷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가상현실의 첫 번째 수혜산업으로 게임을 꼽는다.
게임·교육·의료·영화 산업 등에 혁신 기대
올 초 미국에서 열린 ‘CES(소비자 가전전시회)’의 게임전시장에선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게임사 버툭스의 부스에서 가상현실 헤드셋을 쓴 사람이 게임용 소총을 들고 소형 러닝머신 위에서 연신 걷고, 달리고, 앉았다 일어나며 땀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 설치된 TV에선 진행 중인 게임의 영상이 나오는 중이었다. 시야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즐기는 ‘옴니’ 게임으로, 앉은 채 TV나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버튼을 누르는 기존 게임방식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버툭스 관계자는 “1시간 동안 옴니를 하면 약 5km를 걸어 350∼400칼로리를 태우는 운동효과가 있다”고 소개했다.
전문가들은 가상현실의 첫 번째 수혜산업으로 게임을 꼽는다. 실제 여태까지 가상현실 개발의 초점은 게임에 맞춰졌다. 팔머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비디오게임을 즐기고 싶다는 욕심이 오큘러스를 만들었다”고 회사 설립동기를 털어놓은 뒤 “그래픽카드를 비롯한 각종 하드웨어(HW)가 상향평준화돼 가상현실 게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가상현실은 교육 분야에서도 유용할 전망이다. 예컨대 역사공부를 할 때 책만 볼 게 아니라 조선시대, 로마제국 시대 등으로 직접 여행을 떠난다면 교육효과가 비교도 안 되게 높을 것이 자명하다. 유통 부문도 큰 변화가 예측된다. 상점을 방문하지 않고도 이것저것 옷을 입어보고, 여러 종류의 자동차를 꼼꼼하게 비교 시승한 뒤 구매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군사, 건축, 디자인, 의료, 영화, 공연 등의 분야에도 큰 파급효과가 기대된다. 관건은 즐길 만한 가상현실 콘텐츠를 누가 얼마나 빨리 공급하느냐에 달렸다. 새로운 시장은 대개 초기의 시장 선점자가 주도권을 쥐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마켓스탠드마케츠는 가상체험 콘텐츠 시장규모가 올해 6억7천200만 달러(약 7천300억 원)에서 2020년 15억8천800만 달러(약 1조7천억 원)로 급성장하리라 관측했다.
하지만 아직 해결과제가 남아 있다. 반응속도가 충분히 빠르지 않아 오래 사용하면 멀미가 나기도 하며, 기술적 한계로 인해 화면이 군데군데 깨지기도 한다. 이는 현재 나온 가상현실 기기들의 공통된 약점이다. 완벽한 가상현실 구현을 위해선 전기자극 등으로 실제로 만진 듯한 촉감을 재현하는 ‘햅틱(haptics)’ 기술과의 접목도 필수적이다. 팔머는 “다음 가상현실 기술은 촉각”이라며 “가상현실 세계에서 물컵에 든 물을 마시진 못하더라도 물컵을 들어올리는 일은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