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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1-13)
할렐루야! 지난 한 주일 동안 무더운 날씨가 계속 되어졌는데, 아무 탈 없이 잘 지내셨습니까? 건강하십니까?
오늘 설교제목이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입니다.
지금 우리의 소망이 있다면, 복된 소낙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면 더위도 물러가고, 바짝바짝 타 들어가던 논과 밭을 보면서, 염려하며 걱정했던 농부들의 근심도 어쩌면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복된 소낙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은 소낙비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갈급하고 사모하는 심령에도 복된 은혜의 소낙비가 필요한 때입니다.
한 정신병자가 밤에 몰래 백화점에 침입했습니다. 밤새도록 장난질을 했습니다. 가격표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붙인 것입니다. 만원 자리에는 100만원자리를 붙여놓고, 200만원자리에는 5천원 붙여놓고, 자기 마음대로 장난을 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백화점 문을 열고 손님을 받았는데, 손님들이 들어와서는, 이상한 눈빛도 없이, 그냥 엉터리 가격표를 보고, 그대로 물건을 사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은, 고난과 영광을 가장 절실하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 최고 통치자의 영광을 누렸기도 했지만, 왕이 되기까지, 그리고 왕이 되고 난 이후에도, 그가 겪은 고통과 시련은 다른 왕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왕의 추적, 블레셋과의 싸움, 압살롬의 반역 등, 헤아리기 어려운 시련과 고통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다윗에게 그것을 이겨낼 비결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7절 말씀이 바로 그 비결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이 한 구절 속에 다윗의 신앙과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왜 다윗은 자신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었을까요? 본문 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이유는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다윗은 4절에서, 두 가지를 알게 해 달라고 고백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종말과 연한입니다.
세계의 종말이 있고, 우주의 종말이 있고, 국가의 종말이 있는 것처럼, 개인도 종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햇수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시편 90:10절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울고 있던 어린 시절에는, 시간이 마치 기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가더라. 그런데 내가 꿈을 꾸며 이야기하던 소년 시절에는, 빠른 걸음처럼 지나가더라. 내가 청년이 되어 젊음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때에는, 마치 뛰어가는 것처럼 지나가더라. 내가 장년이 되어 힘과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뛸 때에, 마치 구름처럼 날라가더라. 이제 내 머리에 흰 서리가 앉고 노인이 되자, 이미 나에게서 지나가버린 것을 알았다. 그래서 60이 넘자 1년이 새롭고, 70이 넘자 한달이 새롭고, 80이 넘자 하루하루가 새롭도다.”
참 묘한 말 같이 여겨지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영국 런던 대영 박물관에 가면, 고대인들의 시체를 모아 놓은 미라 전시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시체를 썩지 않도록, 방부 처리를 할 정도라면, 왕이거나, 왕족, 귀족, 그리고 부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천년이 지난 지금 미라를 들여다보면, 흉물스럽고 소름끼치는 해골에 마른 뼈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권력도, 부귀도, 영광도, 세상도, 인생도 끝이 있다는 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연약함입니다.
왕이 왜 연약합니까? 강자 중에 강자, 가진 자 중의 가진 자, 누리는 자 중의 누리는 자, 지배자를 지배하는 자가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연약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여러분! 인간은 질그릇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금방 깨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을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사 45:9)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후 4:7)고 했습니다. 인간을 질그릇으로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질그릇 같이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 손에 있는 재물, 내가 왕으로서 쌓아놓은 부귀와 보화, 사실 이것들이 내 손에 있지만 언제 내 손을 떠날는지 모르는 것들이구나. 나는 언제 깨어지지 모를 질그릇같은 존재이구나.”
바로 이러한 사실을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여러분! 다윗은 자기 자신을 연약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39편을 보면, 다윗이 이 내용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시로 쓸 때에는, 나이가 꽤 들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맨 마지막 13절을 보면,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인생 노년에 쓴 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라는 말을 보면, 다윗이 지금 병상에 누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 하나님 앞에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내가 죽기 전에, 나의 건강을 다시 한번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다윗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젊음과 힘이 사라지고, 나이 들어 병을 앓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다시 일어서게 될지, 다시 일어서지 못할지,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병색이 깊어지자, 은근히 좋아했습니다. 하나같이, 원수들은 건강하고, 형통하여, 병든 다윗을 비웃으며 돌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이는 들고, 몸은 병들어, 대응할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잘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울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향해, 저주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입을 꼭 다물고 참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의지할 자입니다. 하나님, 나를 받으시옵소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여러분! 사람이 병이 들면, 세상을 보는 눈도, 조금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몸 하나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몸 하나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내 계획, 내 생각, 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병상에서 새삼스럽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왕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면서, 굉장한 인생을 산 것 같은데, 나의 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별 것 아니구나. 한 뼘뿐인 인생,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똑같겠구나.”
다윗은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다윗은 인간의 연약함을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연약하고 미련한 인간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울 힘이 없는 인간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이유는 인간은 허무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5-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셀라)” 아멘.
한 뼘 길이만한 존재, 없는 것 같은 존재, 그림자 같은 존재, 헛된 일로 소란한 존재, 재물을 쌓아도 누가 거두고, 누가 쓸는지 모르는 존재, 이것이 다윗이 본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허무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그토록 허무한 존재로 본 것은 절대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비교하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위대한 존재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작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영원한 시간 앞에 서면, 내 일생은 점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기에, 다윗은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었습니다.
참 오래된 노래이지만, 김수희라는 가수가 부른 “애모”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 앞에만 서면 작아집니까? 힘이 있는 사람 앞에서, 돈이 많은 사람 앞에서, 돈 앞에서 작아지십니까? 물론 그럴 때가 많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이나 권력이나 돈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점점 작아져, 나라는 존재가 없어져 버릴 때, 그때부터 하나님은 나를 점점 키우시고, 성장시켜 주시고, 강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작고 허무한 존재이기에,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늙고 병 들었을 때에만 연약하고 허무한 것일까요? 5절을 보면,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이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특별히 가정 사역을 열심히 하시는 아주 저명한 목사님인데, 이분은 대학 시절 테니스 선수였습니다. 그 당시 야망이 있다면, 대학별 경기에서 테니스 챔피언이 되어, 학교 진열장에 트로피를 세워놓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임스 돕슨”이라고 새겨진 트로피를 몇 개 세워, 자기 이름이 그 학교에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어떤 사람이, 그 트로피를 자기에게 소포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포에는 이런 작은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쓰레기장 옆을 지나가다 보니 트로피가 하나 있어서 우연히 꺼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그래서 너무 아까운 것 같아 당신에게 소포로 부칩니다. 학교가 재건축을 하면서 당신 트로피를 전부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나서 이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당신 삶의 모든 트로피는 누군가에 의해 버려지게 될 것이다.”
여러분! 젊다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건강하다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성공했다고 큰 소리를 치지 마십시오. 건강하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쓰러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건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을 보면,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 하나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돈을 모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는 사람은 그런 은혜를 받습니다. 재물은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펴기 위해서는, 재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 많이 느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돈이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재물과 관련된 성경 구절이 2,300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비유 38개 중 16개가, 재물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그렇고 보면, 거룩하신 예수님은 돈 이야기를 참 많이 하셨습니다. 그만큼 돈, 재물,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갖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이 벌기를 원합니다. 많이 모으기를 원합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부자되세요”입니다.
어떤 순례자가 순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광야 길을 가고 있는데, 인가는 눈에 뜨이지 않고,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멀리 인가가 한 채 보였습니다. 순례자는 그 집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갔습니다. 그 집은 사람이 살지 않고, 여기저기 벽이 허물어지고, 거미줄이 처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밤이슬을 피하기 위해, 순례자는 한 방을 대충 치우고, 피곤한 몸을 눕혔습니다. 그런데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옆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라, 문틈으로 옆방을 들여다보니, 광야에 살고 있는 도깨비들이, 다 옆 방에 모여 무슨 의논들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놀란 순례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 도깨비들을 좀 쫓아 주시옵소서!”
그 소리를 들은 도깨비들은 도망가기는커녕, 순례자 옆에 다가와 그의 흉내를 내며,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란 순례자는, 성경을 꺼내어 큰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도깨비들도 어디서 성경을 가져오더니, 따라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순례자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깨비들도 순례자를 따라 찬양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도깨비들을 쫓아야 되겠는데, 쫓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순례자는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쳤을까요?
“지금부터 헌금을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순례자 옆에 있던 도깨비들이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답니다.
신명기 12:5-7절을 보면,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목회자가 말씀을 전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이 물질에 관한 설교라고 합말니다.
조금 전에 읽어드린 말씀 가운데, 7절만을 보면, 아무 부담이 없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얼마나 좋은 은혜의 말씀입니까? 듣기 좋은 축복의 말씀입니까? 그러나 7절의 이러한 놀라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5-6절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5-6절 말씀을 들으면, 누구나 부담이 됩니다. 거룩한 부담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싫으십니까? 좋으십니까?
“부자되라”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갑절의 복을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갑절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돈을 모으는 것은 좋으나, 거기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돈은 모으면 모을수록, 마음이 계속 거기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게도, 돈을 모으면, 좋은 일을 많이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재물을 쌓으면 쌓을수록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의 약점이요, 무서운 위험이요, 유혹이요, 덫입니다. 또 한 가지 취약점은,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내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내 손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6절을 보면, “재물을 벌지만, 그 재물을 누가 쓸지 모르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번 돈, 여러분이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땀 흘리며 벌었는데, 다른 사람이 다 써 버리거나, 한 순간에 없어져 버린다면,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가 버리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일컬어진 록펠러가 죽었을 때, 한 기자가 그의 변호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록펠러씨는 재산을 얼마나 남기셨습니까?”
얼마나 남겼을까요? 변호사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 남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가져 갈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남긴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져 갈 수 없는 것이 물질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땀 흘려서 돈을 버시고, 모은 돈,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그리고 선한 일에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갑절의 복을 받아, 축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이유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아멘.
감옥 안에 있는 죄인을 아무런 조건없이 풀어 주는 특별사면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장도, 국회의장도, 참모총장도, 국무총리도 특별사면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를 사하는 특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인이 사함받고 구원받는 길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을 보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고, 허무한 존재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노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임종을 앞둔 인디언 추장이, 세 아들을 불러 모은 후 “내 후계자를 결정해야겠다. 너희들은 저 산 위로 올라가 가장 멋진 선물을 한 가지씩 구해 오도록 해라. 가장 훌륭한 선물을 가져온 자를 후계자로 삼겠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첫째 아들은 산 정상 협곡에서 자란 희귀한 꽃을 가져왔고, 둘째 아들은 비바람에 닳아진 희귀한 돌을 가져왔지만, 셋째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산꼭대기에서 산 너머에 펼쳐진 마을을 보았습니다. 푸른 초장, 수정 같은 호수, 저는 그 마을을 아버님께 선물하고 싶습니다.”
추장은 “네가 우리 부족의 추장이다”라며, 셋째 아들의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
오늘은 6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느 덧 일년의 반이 벌써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지나가 버린 날을 세어보면서, 후회하지 마시고, 미련을 갖지 마시고, 앞으로 살아갈 날을 바라보며, 좋은 일들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더욱더 큰 소망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3절을 보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1:21절을 보면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소망을 둡시다.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영원한 곳에 소망을 두둡시다. 산 소망을 가집시다. 세상 소망, 썩을 소망, 무너질 소망, 사라질 소망에 속지 맙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는 동안, 힘들 때도, 어려울 때도, 연약할 때도, 고독할 때도, 무언가 앞길이 막혀 답답할 때도, 언제나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감으로, 매순간마다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교훈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인생은 손으로 한 뼘 잴 정도 밖에 되지 않으며, 주님 앞에는 없는 것 같다고 고백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합니다. 그러므로 이 덧없는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우리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