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가로 충주월악산 미륵대원지로 가는 길 부터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드리우는 장대한 가로수길로 드라이브 명소길 같았다.
산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고 굽이 굽이 고개길 같은 길로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첫 고갯길의 불교사원 길임음 드러내고 있었다.
미륵대원지로가는 길 입구부터 월악산의 신비로운 기암괴석과 함께 유려한 산봉우리들이 굽이치며 매우 아름다웠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언덕아래로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감싸며 비닐하우스를 이루고 신비로운 기암괴석이 비추어 미륵대원지로 가는 발걸음을 설레이게 했다.
미륵대원지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왕자였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 갈 때 이 지역을 지나면서 미륵리에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
사적 제317호로 이 절터는 동쪽으로 하늘재 서쪽의 지름재 사이의 분지에 위치한다.
고대 문화의 통로 하늘재로 가기전 석실사원 미륵대원지로 수안보면 미륵리에 위치한 미륵대원지는 충주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하늘재 초입에 위치한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 있어 불교 사찰 역할 뿐 만 아니라 군사,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을 짐작한다.
지금도 이 일대가 미륵리로 불리고 있어 석굴사원의 이름은 미륵대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많은 유물들이 고려시대 화려했던 절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특히 석불에 둘러싼 "ㄷ형" 석실은 경주 석굴암의 조영의사를 따른 것으로 원래 조각상이 끼워져 있었으나 몽고 침입시 절이 불타면서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연이 삼국유사 왕력편 아달라 이사금조에 계립현은 미륵대원 동쪽의 고개이다라고 한 걸로 보면 이 사찰은 일연 당시 미륵대원으로 불린 듯하다.
그런데 1970년 후반 부터 1990년대초 까지 발굴조사에서 미륵당이라고 표기된 기와가 출토되어
석조 여래 입상이 위치한 석굴사원은 미륵당 이름의 사원으로 추정된바 있다
그 인근에 위치한 숙박시설인 원터는 미륵대원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대는 절의 기능과 숙박시설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립령을 사이에 두고 충주에는 미륵대원을 문경 관음리에는 관음원을 마련하여 고개를 넘기전에 쉴수 있도록 배려한 것 이다.
미륵대원의 창건과 페사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석탑,석등 유물과 발굴결과 고려 초기에 창건하여 조선 후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사찰의 특징은 남향으로 배치한것과는 달리 북향을 하고 있다.
북쪽 송계계곡 방향으로 자연지세를 따른 배치로 보인다.
석실을 쌓은 후 부조상을 배치하고 목조지붕을 얹어 전체적으로 석굴암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석굴에 배치된 부조상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고 대부분 훼손되었다.
고려 대몽 항쟁기 몽고군이 경상도로 내려갈때 석굴을 불태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는 당간지주,석조귀부(거북받침돌), 사각 석등,석등,석조보살좌상,오층석탑,석조여래입상등이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의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낸다.
간대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 있는데 간대 윗 면에는 2중의 원각선을 양각하였다.
지주는 윗부분 바깥면에 6엽 연화문을 양각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통일신라시대보다 상대적으로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고려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석조귀부는 충북 유형문화재로 암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다듬다 미완성인 상태로 둔 듯한 거북 받침이다.
거북 등 위에 두 마리 새끼가 새겨져 있다.
귀갑문은 생략하였고 죄측 어깨부분에 작은 거북이 두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사찰의 좌측에 북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받침이다.
충북 유형문화재인 미륵대원지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으로 고려수도인 개성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평면 사각 석등으로 기단과 간주석,상대석,옥개석 등이 4각을 이루고 있다.
화창은 4개의 원형기둥을 세워 만들었는데 4각 석등은 고려시대 개경일대의 사찰에서 확인되는 개경의 석등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양상을 살필수 있는 예이다.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석등이 함께 공존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충북 유형문화재인 석등은 평면 팔각의 석등으로 하대석과 간주석,상대석,화사석,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8각형 신라 석등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
하대석은 4각형이며 윗부분에 연꽃을 새겼다.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양련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을 두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충북 문화재 자료인 석조보살의 좌상은 원래는 석조여래입상을 감싸고 있는 석실에 끼웠던 상으로 여겨진다.
미륵보살일 가능성이 높다.
보물인 미륵리 오층석탑은 현지에 남아 있는 자연암반을 깍아서 받침돌과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는 고려 시대의 석탑이다.
보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높이 10.6m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으로 고려초기에 다수 만들어진 거불의 한 예이다.
얼굴을 빼고 전체적으로 돌기둥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얼굴이 유난히 하얘서 영험한 부처로 통한다.
미륵대원지 절터 옆에는 충주 미륵리 원터로 미륵대원지 창건과 더불어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곳에 원을 별도로 세워 운영되었다.
이 원터는 고려초기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립령로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시대 조령이 개통되면서 미륵리의 원의 기능은 점차 상실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 고개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에 자리했던 이 원터는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지였다.
산봉우리가 드리우는 "ㄷ자형" 석실에 자비로운 석조여래입상과 오층석탑이 맑은 하늘에 불도의 불탑처럼 타오르는것 같았다.
오층석탑의 경사진 낙수면으로 인상적이였다. 팔각석등으로 석조여래입상과 석실이 비추고 돌계단위 5층석탑으로 고즈녁했다.
석실로 가기전 석교다리로 하천이 흐르고 북쪽방향으로 석굴암 같은 석실로 자비의 손길로 타올랐다.
원터의 기초석만 남아있는 잔디로 단풍나무가 드리우며 신비로운 적막의 그림자로 가득한 역사 유적지로 빛났다.
미륵 대 원터를 마주하며 하늘재로 가는 길의 석교다리로 초록물결이 드리우며 역사의 그림자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미륵대원지를 지나 하늘재로 이어졌다.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는
국가유산청 지정 문화재인 명승 제49호로
문경 관음리와 충주 미륵리를 잇는 옛 고개길이다.
신라 아사달 이사금(3년) 서기 156년에 개통되었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이 있다
이는 위나라 최초의 고갯길 개척 기록이다.
죽령보다 2년 앞선것으로 우리나라 최초 고갯길이다.
이곳은 고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고구려가 남진할 때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신라가 북진할 때 충주지방을 확보하는 통로였다.
실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시기는 진흥왕 6세기 중엽이어서 이 일대의 소국이 하늘재를 개척한 사실을 신라 역사에 편입시킨것으로 보기도 한다.
19세기 중엽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계립령과 인근의 조령,이화현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김정호가 활동할 당시에 계립령은 이미 오래전 페쇄된 상태였다.
임진왜란시 일본군은 조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왔다.
하늘재는 죽령과 더불어 고대부터 남북의 문물이 교류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화 화랑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수 있다.
계립령은 시대마다 이름이 달랐는데 고구려는 마목현,신라는 계립령,고려시대에는 대원령으로 불렀으며 대원령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한울재가 되는데 조선시대에는 한훤령,한훤령이 한원령,하늘재로 바뀌었다.
즉 백두대간을 축으로 남한강 중상류지역에 위치한 한반도의 중심 중원은 나라의 중심 천하의 중심이라
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이 일대는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이 있던 자리이며 이후 신라 진흥와때 영토를 확장 시킴으로써 국원소경이 설치되었고 경덕왕때 이르러 중원경이라 불리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충주로 개명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즉 서로가 앞다투어 차치하려던 땅이다.
그 이유는 물과 길 사람이 만나 월악산 지역의 지릅재와 하늘재로 이어지는 계립령과 남한강 수운을 통해 신문화와 문물이 교류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였다.
하늘재로 가는 초입부터 시원한 물줄기의 계곡이 흘러 내리며 매우 상쾌했다.
기암괴석의 산봉우리들이 펼쳐지는 매우 맑은 계곡으로 목재 아치형 다리를 이루며 옛 길의 정감 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