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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 한국 위빠싸나 선원에서 기념법회가 있었습니다.
이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법문을 했습니다.
법문을 2회에 걸쳐 연재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누구이신가? (1)
오늘 이 법회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신 고따마 싯달타가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해야 이 날을 가장 뜻 있게 기념하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부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란 무슨 뜻이며, 과연 부처는 몇 분이나 되시는가, 또는 어떻게 부처가 되셨는가, 부처가 되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이 부처님께서 몸소 체험하셔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방법을 그대로 경험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부처님은 태어나신 날이 음력 보름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으신 날도 음력 보름입니다. 또한 반열반 하신 날도 음력 보름입니다. 사실 저희가 알고 있는 탄신일인 사월 초파일과는 다릅니다. 물론 출생 연대도 상좌불교와 대승불교가 햇수가 차이가 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발표한 불기를 저희나라에서 계산을 잘못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고치려는 시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전법을 펴신 햇수도 상좌불교에서는 45년으로 기록되어있고 대승에서는 48년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연대나 날짜는 오늘 이 자리에서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탄생의 의미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 생명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의 기준을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호흡과 호흡사이가 생명이 일어났다가 끝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호흡보다 더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무엇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 순간에 죽음과 탄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일이다 뭐다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그 뜻을 되새기기 위해서 이런 기념일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념일은 관념이지만 수행도 관념이 없이는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먼저 관념을 수용하고 다음으로 그것의 실재하는 성품을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래서 기념일을 정하고 그 기념일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고 모든 관념을 배제하면 일종의 극단으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부처도 부정하고 부모도 부정하고 자신도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空)하다고만 주장하기 쉽습니다. 공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조건지어진 것이고 자아가 없다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짧은 순간에 현재는 있는 것이며 여기에 실재하는 현상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말씀을 기록한 빨리어(Paali語) 경전에 근거한 것임을 밝힙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빨리어 경전이 번역되지 않아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래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경전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설과 후대에 제자들이 말한 비불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있는 대승경전은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경전이므로 초기 경전과 다른 면이 많습니다.
부처님 탄신 2500여년이나 되었는데도 빨리어 경전이 번역되지 않았다면 과연 불교국가라고 할 수 있을지 아쉬운 점이 많군요. 이것도 그렇게 조건지어진 인연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늦게나마 일부 번역가들이 개인적인 노력으로 조금씩 번역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분들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기회이므로 꼭 구입하셔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불교국가가 아닌 서양에서는 이미 백년 전에 초기경전을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저희 선원에서도 전법을 위해서 출판사를 만들어 경전과 수행에 관한 자료들을 출판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더라도 그냥 들어주시고 상좌불교의 전통적인 교리라고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수행자의 입장이고 사실 수행자의 입장이라면 이런 것들에 대한 토론은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인도 마다가국의 방언이라고 알려진 빨리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당시에 상류계급은 산스끄리뜨어(Sanskrit語. 梵語)를 사용하였고 빨리어는 서민들이 사용하던 언어였습니다. 빨리어는 문자가 없어 경전은 암송되어서 전해지던 것을 후대에 스리랑카에서 자기 나라말로 표기한 것이 최초의 빨리어 경전입니다.
빨리어로 붓다(Buddha)는 아는 자라는 말입니다. 또는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한문으로 음사한 것이 불(佛)이고 다시 우리말로 부르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이 외에 부처님의 호칭은 여래, 세존, 무상사 등등 모두 열 가지나 됩니다.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는 상좌불교의 소부경전에 있는 불종성경(佛種姓經. Buddhava.msa)에서 모두 25분이 계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과거의 모든 부처가 24분이시고 고타마 싯달타 부처님까지 포함하여 25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경장(經藏)의 장부경전(長部經典. Diighanikaaya)에서는 18분의 붓다 이후에 가장 가까운 시대에 출현하신 일곱 분의 붓다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이 중에 마지막이 우리 시대에 출현하신 고따마 붓다 이십니다.
여기서 붓다의 종류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깨달음의 종류가 세 가지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붓다는 2가지 종류의 붓다가 계십니다. 그러나 더 크게 분류하면 붓다를 아라한이라고 말하기도 하므로 깨달음의 차원에서 보면 3가지 종류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첫째는 삼마삼붓다(Sammaasam-Buddha. 正等覺者)입니다. 앞서 밝힌 25분의 부처가 모두 삼마삼붓다이십니다. 이 말을 아뇩다라 삼막삼보리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삼마삼붓다라는 말은 모르는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완성된 지혜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또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부처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가르침이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찾아서 얻은 실로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밝히신 법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원래 있는 법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6년 동안 고행을 하신 뒤에 이 고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하시던 수행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수행방법으로 수행을 하신 것이 바로 사념처 위빠싸나입니다. 그래서 이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고 숙명통으로 전생을 보시니 자신의 전생의 과보로 인하여 6년간 고행을 했던 것을 알았습니다. 전생에 까싸빠붓다 시절에 붓다에 대한 비난을 한 구업의 과보로 6년이란 고행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역대의 부처들이 계신 것을 알았고 이 부처들이 모두 하나 같이 사념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시대의 부처님만 6년 간 고행을 하셨지 다른 부처님들은 짧은 기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그 법이 살아있는 시대를 정법시대라고 합니다. 이는 팔정도가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팔정도는 계, 정, 혜 삼학을 의미하며 다시 계, 정, 혜 삼학은 사념처 위빠싸나 수행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거듭되는 동안 정법의 시대는 극히 짧고 한정된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정법 하나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붓다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어려운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부처의 정법이 존재하는 시대에 태어나기가 어렵고, 둘째는 태어나서 부처의 정법을 만나기가 어렵고, 셋째는 정법을 펴는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정법이 있는 시기가 얼마나 짧은 가는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붓다는 인간만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사는 31천의 세계에서 수행을 할 수 있는 곳은 인간계 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아나함이 죽어서 가는 천상의 정거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만이 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만이 수행을 통해서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고 지고의 행복인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만이 주어진 삶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힘과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렇지 않은 생명은 모두 자기가 지은 업대로 살아가야 하고 천상에서는 자기가 사는 곳의 수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도를 구하는 자를 보살이라고 합니다. 빨리어로는 보디사따(Bodhisatta. 菩薩)라고 합니다. 보살은 도를 구하는 수행자로서 바라밀 공덕을 쌓습니다. 그리고 사마타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는 않습니다. 정법이 없는 시대에는 사념처 위빠싸나 수행을 할 수가 없어서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법이 있는 시대에라도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수행을 해서 열반에 들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바라밀을 쌓으며 인고의 세월을 삽니다. 고따마 붓다의 무수한 세월은 보살로 살아오다가 선업의 공덕이 가득차 때가 도래하여 부처가 되신 것입니다.
보살의 의미는 부처가 되기 위해 공덕을 쌓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종류의 많은 보살의 의미와 다릅니다. 보살은 단순히 구도자의 입장에 있을 뿐이지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부처가 되기 위해서 바라밀을 쌓는 보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가 지성적인 보살입니다. 이 보살은 외적대상에 대해서 숭배하지 않고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 노력하는 보살입니다. 그래서 명상을 선호합니다. 경전이나 어떤 절대적인 것에 관해서 무조건 따르지 않고 홀로 명상을 통한 지혜로 평온함을 가지고 남을 돕습니다.
둘째가 헌신적인 보살입니다. 이 보살은 믿음과 신앙심이 깊어서 신앙에 대한 확신이 강합니다. 그래서 불상을 경배합니다.
셋째가 활동적인 보살입니다. 이 보살은 언제나 남을 위해서 활동적으로 봉사를 합니다. 봉사를 해서 얻은 기쁨을 행복으로 알고 노력합니다. 또한 남의 비난이나 칭찬에 개의하지 않고 열심히 남을 돕습니다.
보살은 이상의 유형과 이상의 일을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많은 세월을 오직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묵묵히 삶을 삽니다. 그러나 보살의 길로 들어선 이래 부처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코 보살의 길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과연 보살의 길을 걸어서 몇 명이나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현실적인 인식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위빠싸나 수행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아라한입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면 원래 고따마 붓다께서 붓다가 되기 전에는 보살이었습니다. 보살은 단지 구도자의 의미 이상은 아님에도 현재 우리에게 보살의 의미는 상당부분 왜곡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대승불교가 생긴 이래 보살의 힘이 초월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바뀌었던 탓입니다. 이런 보살사상이 태동하면서 대승불교는 민중신앙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이는 인도의 힌두교 교리와 기복적인 중생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창작품입니다. 그래서 대승은 대단해 번성하는 기회를 맞습니다.
둘째는 빠쩨까붓다(Pacceka-Buddha. 벽지불. 獨覺. 緣覺)입니다. 벽지불은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지만 위없는 깨달음의 지혜를 얻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번뇌를 해결할 뿐이지 세상에 법을 펴지 못하는 부처입니다. 홀로 깨달았다고 해서 독각이라고도 하며, 연기법에 따라 깨달았다고 해서 연각이라고도 합니다.
벽지불은 부처님이 계신 시대에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부처님의 정법이 있는 시대에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태양이 하나이듯이 부처님도 한 분이시고 정법도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런 법을 펴는 것도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합리적인 조건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벽지불은 부처님과 같은 삼법인을 깨달았지만 법을 선포하지 않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은자로서 인류를 위해 기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벽지불의 수효는 알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아라한(Arahant. 阿羅漢. 應供. 聲聞)입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에 속합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부처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탐, 진, 치라는 불선업의 번뇌가 모두 불타서 해결된 것은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불타버려서 윤회가 끝나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부처는 아라한과 달리 모르는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 또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분이십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부처님이 선포하신 법에 의해 깨달음을 얻으며,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는 못합니다. 이처럼 아라한은 부처님이 펴신 법에 의해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래서 성문이라고도 하고,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 합니다. 또한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다고 해서 성문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법에 의해 깨달음을 얻은 사리불이나 목련존자 등이 모두 아라한으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분들은 아무리 지혜가 수승해도 사념처 위빠싸나 수행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 한마디라도 부처님의 법에 관하여 들어야 깨달음을 얻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제일 먼저 법을 편 초전법륜경을 들은 다섯 비구들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아라한이 되는 과정은 수다원과 사다함, 아나함이라는 지혜의 단계를 거쳐 아라한이 됩니다.수다원이 되는 과정은 수다원의 도와 과로 구별됩니다. 다시 사다함의 도와 과, 아나함의 도와 과, 아라한의 도와 과라는 단계를 거쳐 완성됩니다. 여기서 도는 지향하는 것이고 과는 열매라는 뜻으로 결과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도는 들어가는 것이며 과는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쉬운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도통했다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열반에는 이렇게 도와 과가 있다는 것이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네 가지 성위가 있다는 것은 모두 부처님에 의해 발견된 것이지 부처님이 만들어 놓은 과정이 아닙니다. 원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런 불가피한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성자가 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질서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어떤 질서라는 틀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일단 열반을 경험한 것으로 빨리어로는 아리야(Ariya. 聖者)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네 종류의 성자가 각기 도와 과를 얻는 것을 사쌍팔배라고 합니다. 이처럼 아라한이 되는 이 네 단계의 성자의 종류는 부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깨달음으로 가는 정신적인 성숙단계로 가는 불가피한 코스에 해당됩니다. 이는 우리의 오랜 무지를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은 단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은 바라밀을 쌓는 무수한 세월의 결정체입니다. 또한 수도 헤아리기 어려운 작은 깨달음을 통하여 더 큰 깨달음으로 갑니다. 만약 누군가가 쉽게 깨달았다면 이미 오랜 동안 바라밀을 쌓고 수행을 하여 열매가 무르익은 결과입니다. 지혜가 성숙된다는 것은 그냥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부터 쉬지 않고 선업을 쌓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절에 있는 탱화에 나오는 무서운 모습을 한 아라한들은 사실 번뇌가 불타버린 순한 양과도 같습니다. 어쩌면 순한 양과도 같다는 표현은 잘못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아라한은 순하거나 순하지 않거나 하는 것들 조차도 사라져버린 분들이십니다. 부처나, 아라한이나 똑같이 번뇌가 불타버린 성자들인데 이 분들에게는 원인과 결과가 없는 무표심만 있습니다. 욕망의 마음이 불타 버린 무표심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을 무섭게 그리는 것은 아라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부처가 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처는 살아있는 생명 중에서 인간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그 시작을 알 수가 없고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태어났는지 상상 할 수도 없는데 이 기간 동안 부처는 겨우 25분에 불과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부처가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는 상상 이상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출현하여 그렇게 되기 어려운 부처가 되려하지 말고 자신과 똑같은 아라한이 되어 번뇌를 해결하라고 법을 펴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법이 있어도 나는 아라한이 되지 않고 부처가 되어야겠다고 서원을 세우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하면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도의 넓은 땅이 모두 바다라고 하였을 때 그 바다에 구멍뚫린 널판지 하나가 떠다닙니다. 그 바다에 거북이 한마리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200년 만에 물위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널판지의 구멍속으로 머리가 나오는 것처럼 인간이 되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31천에 있는 살아있는 생명들의 수효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은 많아야 고작 60억도 못됩니다. 이렇게 수 많은 생명 중에서 인간이 될 확률은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언제 인간으로 태어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태어 났을 때 선업을 쌓아 출세간으로 가야하며 적어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처와 벽지불과 아라한이 되는 조건에는 첫째로 본인이 서원을 세울 때 무엇을 세웠는가에 따라 다릅니다. 이런 일은 서원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선업의 공덕입니다. 바라밀 공덕을 행해야 그 과보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되기를 원한다면 제일 먼저 서원을 세워야 되고, 다음으로 바라밀 공덕을 쌓아야 하고, 그에 따른 합당한 수행을 해야 비로소 이루어 집니다.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최고의 바라밀을 쌓은 과보로 부처로 출현합니다. 부처가 되려는 사람이 많아도 그 중에 가장 수승한 공덕을 쌓은 구도자가 오직 그 공덕의 과보에 의해 부처로 조건지어지는 것입니다.
-계속_
묘원 올림
첫댓글 부처님 오신 날 강의를 아주 잘 들었습니다. 여러가지로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 (__)
부처님 오신 날 너무도 보람 있게 보냈읍니다 묘원 선생님 감사 드립니다. 다음생에도 수행을 할수 있도록 선업을 쌓고 바라밀행을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