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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의 봄나들이
이득우
어느 따뜻한 봄날, 홍화紅花는 규암窺岩 나루에서 배를 타고 수북정水北亭 강허리를 돌아 낙화암落花岩 쪽으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부소산扶蘇山 기슭에는 고란사皐蘭寺를 찾아가는 향춘객享春客들이 무리를 지어 걸어가고, 강뚝 서편에는 나물 캐는 처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강물도 쉬어 가는 수북정 강허리엔 한가로이 앉아 낚시대만 바라보고 있는 강태공들의 벙거지 쓴 모습이 꼴불견인데, 둑넘어 규암들에서 농부가가 바람결에 들려온다.
홍화는 자그마한 돛단배에 기대앉아 좌우 풍경을 바라보며 시원한 강바람에 턱을 밀어올려 보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부여팔경夫餘八景을 떠올리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흘러간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배는 벌써 수북정을 옆으로 끼고 낙화암이 멀리보이는 곧은 물길을 가르고 있었다.
규암진귀범窺岩津歸帆
수북정청람水北亭晴嵐
규암나루로 돌아가는 돛단배
수북정에 감도는 가물가물한 아지랑이
팔경 중에 손꼽히는 두 곳을 지나간 샘이다. 홍화는 다시 세 번째로 떠오르는 경치를 생각해 보았다.
백마강침월白馬江沈月
백마강에 잠긴 달
강물에 잠긴 달을 감상하려면 달밤에 나와야 하는데, 밤에는 문밖에 나올 수 없는 직업이니 지금은 마음으로나 그리는 수밖에 없다.
홍화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고 있는데, 나지막하게 보이던 낙화암 절벽이 가까이 갈수록 점점 커져 보인다.
배가 이윽고 낙화암 턱밑에 이르자, 올려다 보이는 절벽이 마치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데 바위틈 사이사이엔 예쁜 철쭉꽃들이 제철을 맞아 한창이다.
‘낙화암이 팔경 속에 빠질 리는 없는데 어떤 모습으로 들어가던가..! 옳거니, 이제야 생각이 나는구나.’
낙화암숙견落花岩宿見
낙화암에 잠든 두견새(소쩍새)
밤새워 목매어 울다 지친 소쩍새는 새벽옄에 피를 토하고 잠이 든다고하던데, 지금은 어느 바위틈에서 잠들어 있을까. 두견새 흘린 피가 철쭉꽃(두견화)에 물들어 저렇게 붉게 물들었다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닌가보다.
‘그렇구나, 밤에는 두견새가 울고 낮에는 두견화가 바람에 나부끼며 꽃처럼 떨어져간 삼천궁녀들의 넋을 달래주고 있는지도 모르지.’
홍화는 고개 아픈 줄도 모르고 낙화암에 핀 두견화를 바라보며 깊은 시름에 잠겨있었다.
어느 가지는 활짝 피어있고, 어느 가지는 벌써 시들어 낙화로 떨어지고, 어느 가지는 이제 겨우 뾰족한 꽃망울만 살며시 내밀고 있다.
홍화는 철쪽꽃을 삼천궁녀들의 넋에 비유하고도 싶고 기생인 자신을 끌어다 붙여보고도 싶은 충동을 느끼며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마침내 두견화란 철쭉꽃의 예쁜 이름을 부르며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두견화의 예쁜 얼굴이 화신化身처럼 보이는지 미소진 얼굴에 정답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문 홍화問 紅花
문이암간두견화問爾岩間杜鵑花
하사반개반미개何事半開半未開
바위틈에 피어있는 두견화야, 말 물어 보자
어찌하여 반은 피고, 반은 아직 피지 않고 있느냐?
이 때 두견화가 홍화에게 대답하기를
답 두견화答 杜鵑花
제개제락환무미齊開齊落還無味
유대후인차제래唯待後人次第來
모두 한꺼번에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어버리면 오히려 재미가 없어서
두고두고 찾아오는 님을 생각해서 이렇게 차례차례 피고지고하지요.
홀아비의 사정은 과부가 아는 것처럼 한번에 못다 피고 두고두고 피고지는 두견화의 안타까운 속사정을 홍화는 알 것만 같았다.
이윽고 사공은 뱃머리를 돌리더니 낙화암 기슭에 있는 선착장에 밀어넣는다. 홍화는 배에서 내려와 바위길을 걸어 올라가다가 멈추어 서서 강바람에 흩어지는 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잠시 강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손을 뻗치면 닿을 만한 곳에 물위로 솟아있는 바위 끝이 보인다. 옛날에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란 바위다.
홍화는 다시 몸을 돌려 걸어 올라간다. 비탈길을 조금 기어오르니 오른 쪽으로 고란사가 보인다.
고란사효종皐蘭寺曉鐘
고란사의 새벽 종소리
새벽에 울려퍼지는 고란사의 종소리!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이는 팔경 중의 하나다. 모처럼 나온 나들이라선지 시간은 왜 그리 빨리 가는지. 한곳에 오래 머무를 시간이 없다. 지나는 곳마다 미련이 뒤 따르는 홍화는 고란사를 떠나려니 시 한수가 떠오른다.
이 시는 호서 기생湖西 妓生 취선翠仙이 지은 것으로 그녀의 호는 설죽雪竹이다.
백마강白馬江
만박고란사晩泊皐蘭寺
서풍독의루西風獨倚樓
용망운만고龍亡雲萬古
화락월천추花落月千秋
해가 저물어 고란사를 찾았네
서풍에 홀로 서서 누각에 기대니
용은 죽고 없는데 구름은 만고에 흐르고
삼천궁녀는 가고 없는데 달은 천년을 비추네.
용은 이미 소정방이 낚고 없으며 구름은 여전히 떠다니고 삼천궁녀들은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져간 후 소식이 없는데 달빛은 예나 다름없이 비추고 있구나.
‘지금까지 오경五景을 거친 셈인데 나머지 삼경三景은 어디어디를 치더라.’
하고 홍화는 곰곰이 생각하며, 부소산 기슭을 터벅터벅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그렇지. 부소산이 들어가고, 구룡평야가 들어가고, 백제탑이 빠져서는 아니되겠지.’
부소산모우扶蘇山暮雨
구룡평낙안九龍平落雁
백제탑석조百濟塔夕照
구슬피 내리는 부소산의 저녂비
구룡평야에 내려앉는 기러기
백제탑에 비치는 석양빛
혼자서 좀 쓸쓸하긴 했지만, 홍화는 백제의 옛터를 돌아보고 몸담고 있는 홍각紅閣 「기생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규암나루를 다시 건너며, 여류시인 신녀柛女라는 여인이 지은 시 한 수를 마음속으로 읊어보았다.
낙화도落花渡
작숙화개상하가昨宿花開上下家
금조내도낙화도今朝來渡落花渡
인생정사춘래거人生正似春來去
재견개화우낙화纔見開花又落花
어제는 꽃이 핀 마을에서 자고
오늘 아침은 꽃이 지는 강물을 건너네
인생은 오가는 봄과 같은 것
피는 꽃을 보고 또 지는 꽃도 보네.
참고: 낙화도落花渡-꽃이 지는 강을 건너다.
재견纔見-겨우 ...을 보다.
인생은 마치 오가는 봄과 같아서, 아침에 핀 꽃이 저녁에 시들어 모진 바람에 낙화로 흩어지 듯 아름다운 시절은 삽시간에 지나간다. 그래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울고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며 애환을 달래는 노래가 절로 나오는 걸까.
그 후로 홍화는 여류시인들이 남기고 간 시들을 감상하며 여가 있는대로 마음을 불태우곤 했다.
강남곡江南曲
인언강남낙人言江南樂
아견강남수我見江南愁
년년사포구年年沙浦口
장단망귀주腸斷望歸舟
남들은 강남의 즐거움을 말하나
나는 강남의 수심을 보고 있네
해마다 이 포구에서
눈물로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이 시는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지은 시로, 그녀는 선조宣祖 때의 여류시인이다. 본명은 초희楚姬, 호는 난설헌. 허균許筠의 누이로 천재적인 시재詩材를 지니고 있었다.
다음에 나오는 시도 허난설헌의 시이다.
빈여음貧女吟
수파금전도手把金剪刀
야한십지직夜寒十指直
위인작가의爲人作嫁衣
연년환독숙年年還獨宿
바늘을 잡으니
밤이 추워 열손가락이 빳빳하네
사람들의 시집갈 옷을 짓고 있으나
해마다 나는 홀로자고 있네.
다음은 이원李媛의 시로 그녀는 임진왜란 때 순절했다.
근래안부문여하近來安不問如何
월도사창첩한다月到紗窓妾恨多
약사몽혼행유적若使夢魂行有跡
문전석노반성사門前石路半成沙
임이여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달이 창에 비칠 때마다 한스럽기만 하네요
만일 꿈길이 자취가 있다면
임의 문앞 돌길이 모래가 되었을 것을
다음은 정주定州 기생 취연翠蓮의 시다. 자는 일타홍一朶紅이며 가무歌舞에 능했다.
영절당삼춘令節當三春
향수일일신鄕愁日日新
학사풍류객學士風流客
금작공귀인今作空歸人
봄이 돌아와 꽃이 피니
생각나는 것은 임뿐
임은 풍류객이라
돌아오지 않는 무정한 사람
다음은 조선 중종 때 여류시인 부안扶安의 명기名妓 가생佳生의 글이다.
증취객贈醉客
취객집나삼醉客執羅衫
나삼수수열羅衫隨手裂
불석일나삼不惜一羅衫
단공은정절但恐恩情絶
술취한 임이 옷자락을 잡았네
옷자락이 손길 따라 찢어지네
한낱 비단옷은 아까울 것 없지만
정이 끊어질까 두렵기만 하네
다음 허난설헌의 시다.
규원閨怨
월루추진옥병공月樓秋盡玉屛空
상타노주하모홍霜打蘆洲下暮鴻
요금일탄인불견瑤琴一彈人不見
우화영락야당중藕花零落野塘中
텅빈 방에 가을이 저물어 가니
서리 내린 강언덕에 기러기가 날아가네
거문고를 타고 있으나 듣는 이 없고
연꽃이 못 가운데 떨어지고 있네.
다음은 황진이黃眞伊의 시다
봉별奉別 소판서세양蘇判書世讓
월하정오진月下庭梧盡
설중야국황雪中野菊黃
루고천일척樓高天一尺
인취주천상人醉酒千觴
유수화금영流水和琴泳
매화입적향梅花入笛香
명조상별후明朝相別後
정여벽파장情與碧波長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서리를 맞고 들국화가 피었네
다락이 높으니 한 자만 높이면 하늘이 닿을 듯하고
사람이 취하니 술을 천 잔이나 마신 듯싶네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에 싸늘하고
매화꽃은 피리소리에 젖어 향기롭네
내일 서로 이별한 뒤에는
우리의 정은 저 강물처럼 이어져야지
다음은 시대미상의 진주기생晋州妓生 억춘憶春의 글이다
상안추한성霜雁墜寒聲
적막과산성寂寞過山城
사군고몽파思君孤夢罷
추월조창명秋月照窓明
기러기 소리 찬 바람결에 들리더니
멀리 산 너머로 떠 가네
임 그리던 꿈을 깨니
가을달이 창에 비치고 있네
홍화는 순서도 없이 이런 시 저런 시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생기고부터는 마음이 흩어지다가도 스스로 차분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반포오反哺烏
사유친재당士有親在堂
감지빈불구甘旨貧不具
미금역감인微禽亦感人
누락임오포漏落林烏哺
집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선비로써
고기 한 첨 못사드리니 가난이 원수로다
새도 어미를 먹여 살리는데
숲속에 있는까마귀를 보면 눈물이 난다.
위의 시는 박장원朴長遠이 썼는데, 광해에서 현종대의 사람으로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 문신으로 시호는 문효文孝다.
까마귀 이야기가 나오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생각난다.
오유반포지효烏有反哺之孝
구유삼지지례鳩有三枝之禮
까마귀는 어버이에게 은혜를 갚아 효도를 할 줄 알고
비둘기는 어버이 보다 세가지 밑에 있는 예절을 알고 있다.
추사秋思
고연생광야孤烟生曠野
잔월하평무殘月下平蕪
위문남래안爲問南來雁
가서기아무家書寄我無
연기는 들 가운데에 피어나고
달은 지평선으로 넘어가네
남쪽에서 날라오는 기러기야
우리 집에서 오는 편지는 없느냐.
위의 시는 양사언楊士彦이 지었다.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來다.
註: 평무平蕪-넓은 들(지평선)
기아무寄我無-나에게 부쳐온 편지가 없느냐
사랑閨情
유약래하만有約來何晩
정매욕사시庭梅欲謝時
홀문지상작忽聞枝上鵲
허화경중미虛畫鏡中眉
오겠다는 약속은 어찌하고
뜰에 핀 매화가 시들어도 오지 않네
웬일일까 나뭇가지에서 까치소리가 들리더니
헛일인 줄 알지만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이나 해놓고 기다려보자.
위의 글은 옥봉 이씨玉峯李氏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조원趙瑗의 부실副室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했다.
추향秋香
이도창강구移棹蒼江口
경인숙노번警人宿鷺飜
산홍추유술山紅秋有述
사백월무흔沙白月無痕
강어구에 배를 띄워 노를 저으니
놀란 새들이 퍼럭퍼럭 날아가네
단풍든 산으로 가을이 물드니
달밝은 밤의 강모래 희기도 하다
위의 글은 장성 기생長城妓生 추향秋香이 지었다.
야몽夜夢
향로천리장鄕路千里長
추야장어로秋夜長於路
가산십왕래家山十往來
첨계유미호詹鷄猶未呼
고향 길은 천 리나 먼데
가을밤은 그 길보다 더욱 길어라
꿈 속에서 고향 길을 열 번은 다녀왔는데
아직도 닭은 울지 않고 있네
위의 글은 이양연李亮淵(1771~1853)이 지었다. 자는 진숙晋叔, 호는 임연臨淵이다.
증경주태천상인贈慶州泰天上人
아여유수무귀거我如流水無歸去
이사부운임왕환爾似浮雲任往還
여관상봉춘욕모旅館相逢春慾暮
자동화락남정반刺桐花落湳庭斑
이 몸은 물과 같아 한번 가면 못 오는데
그대는 구름 같아 마음대로 오가는구나
서로 만나 그리는 정에 봄이 저물었는데
엄나무 꽃잎이 떨어져 뜰에 가득하구나.
남구만南九萬1629~1711의 시.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충文忠. 자동刺桐-엄나무.
(풍류천리/이득우 문경출판사 pp48~6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