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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달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씨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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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심장을 겨냥한 이봉창 의사
일왕을 폭사하려다 실패해 그분의 뜻과 업적을 평가 절하 당했던 이봉창 의사.
그런데 이봉창 의거가 있었기에 윤봉길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마치 예수의 사역을 위해 미리 길을 닦아준 세례 요한처럼!
이봉창 그는 누구인가?
[사진출처: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성장기]
1901년 서울 용산에서 이진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적은 경성부 금정(효창동) 118번지이고, 출생지는 경성부 원정2정목(원효로2가) 입니다. 아버지인 이진구는 건축 청부업과 우차 운반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신흥 자본가로, 이봉창이 7~8세 때 집에 소가 5~6마리나 될 만큼 부자여서 주변사람들이 "저 애가 이진구의 아이야!" 라는 부러움을 살 정도였습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이듬해인 1911년에 청엽정(용산구 청파동)에 있던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것이 이봉창의 유일한 정규 교육 학력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일제에 순응하는 '충량한 신민을 양성'할 것을 목표로 한 조선교육령에 따라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 역사를 국사로 가르쳤습니다다. 이봉창은 이러한 식민지 교육의 영향으로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일본에 동화된 '신 일본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봉창이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스니다. 이진구는 성공한 사업가답게 본부인 손씨 말고도 첩을 둘이나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방탕한 삶 때문에 병에 걸려 3년 동안 바깥출입도 하지 못한 채 약값으로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거기에 대홍수로 목재가 떠내려 가고, 집 등기를 갱신해 주겠다는 일본인 이마이에게 속아 집과 두 명의 첩, 집까지 몽땅 날려 버렸습니다.
그 해 이진구는 원정의 집을 팔고 산동네인 금정으로 이사했습니다. 결국 할머니를 비롯한 형 범태 부부와 조카 은임까지 여섯 명의 가족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15년 봄에 원정2정목에 있는 '와다세이도'라는 일본인 과자 가게에 취직해 월 7~8원에 식사 제공 받았지만 말라리아를 앓아 관절염이라는 후유증을 얻었습니다. 과자점에서 1년쯤 지나 월 13~14원을 받는 한강통(한강로) 16번지 '무라타 시게가쓰'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약국의 점원으로 이직하게 됩니다.
[이봉창의사가 일했던 용산역, 사진출처: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이봉창에게 능숙한 일본어 실력은 일본인이 주인인 식민지를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생존무기였습니다. 1919년 8월 용산역 조차계의 시용부(임시직)로 취직하여, 1920년 1월 역부가 되어 일당 94전을 받았고, 2월에 전철수가 되어 한 달에 40~48원을 받았고, 10월에는 연결수로 승진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책임자의 조선인 차별과 이봉창에게 배운 후임이 책임자가 되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5년 동안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았지만 가난한 가정형편과 병든 어머니 때문에 쉽게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이런 차별 속에 방탕한 생활로 인한 외상 술 값이 4~5백 원까지 늘어 그의 퇴직금 80원으로 감당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1924년 4월 14일 스물 네 살의 이봉창은 4년 8개월 간 근무했던 용산역을 사직했습니다.
[청년기]
용산역을 퇴직하고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이봉창은 지역 주민들의 삶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금정에 있는 관왕묘(관우 사당) 보존운동에 참여하였고, 금정청년회 자치부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5월 25일 총독부령 제66호로 <간이 국세 조사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10월 1일 국세 조사를 실시할 때 국세 조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인 인구 총 조사였습니다.
[조카 이은임, 사진출처: 이봉창 평전]
용산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후지하타라는 일본인이 아이를 돌봐줄 여자아이를 구해달라는 부탁에 열일곱 살 조칸 은임을 소개하며 자신까지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결국 이봉창은 희망 없는 현실과 생존을 위해 조카 은임과 함께 1925년 11월 하순 부산항에서 관부 연락선을 타게 됩니다.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에 도착한 이봉창은 '조선인 촌'이라고 불리는 조선인 합숙소에 들어갔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찾았으나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베 철도 우편국 열차계의 모집 포스터를 보고 직업소개소 직원에게 응모 방법을 물어 호적등본과 신원증명서를 받아 우편국에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이라 채용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좌절합니다.
1926년 2월 능숙한 일본어 실력으로 오사카 가스 회사 상용 인부로 취직하며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처음으로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썼습니다. 문창학교를 졸업한 지 11년 만에 간사이 공업학교 야학부에 입학하여 학업과 일을 병행하지만 영양실조로 인한 각기병으로 넉 달 만에 모두 중단해야 했습니다. 외국인이었던 이봉창은 생활 구호 담당자의 도움으로 히가시나리 구의 지케이 병원에 입원하여 석 달 정도 요양했으나 별 차도가 없자, 12월에 효고현 기노사키에서 표구점을 하는 고니시 쇼지로를 찾아가 도움을 받게 됩니다. 1927년 5월 건강을 회복하고 오사카로 돌아와 가스 회사에 복직했지만 친구 동생 병 간호 때문에 회사를 사직합니다.
1928년 2월 친구 김수천의 도움으로 '스미토모 신동소의 아마가사키 출장소'에 상용 인부로 취직했습니다. 이곳에서는 20~30명 중에 한국인은 이봉창 혼자였지만 차별 대우는 받지 않았습니다. 정식 직원은 되지 못했지만 모처럼 안정된 생활과 여유가 생기고 만족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그 해 11월 10일 교토 고쇼에서 천황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이봉창과 최순평 그리고 일본인 노동자 마에다 세이지와 함께 11월 7일 오사카로 출발합니다.
이때 이봉창의 심경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와 왕의 얼굴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처음 깨달았습니다. 자신도 엄연한 '신 일본인'이기 때문에 천황의 얼굴을 봐야만 진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살이 가난한 노동자였지만 돈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천황의 얼굴을 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1월 8일 아침 세 사람은 미쓰비시 은행 앞에 마련된 참관석에 자리했습니다. 이윽고 경찰이 참관객 몸수색이 시작됐고 이봉창의 양복 주머니에서 한글과 한문이 섞인 안부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이 편지를 암호문이나 되는 줄 알고 무작정 임시 경비 본부로 이봉창을 연행하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이봉창은 천황 즉위식 행차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9일 동안이나 감금당하게 됩니다. 이봉창은 유치장에서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나는 별수 없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인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천황 폐하를 뵈려 한 죄로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힌 것이다."
1928년 11월 15일 무죄 석방으로 풀려나 오사카로 돌아오지만, 이봉창을 노동운동을 하는 '주의자'로 의심하며 따돌림이 시작되자 자포자기한 상태로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29년 2월 말 혼마 시게가스의 소개로 오사카 히가시나리 구에 있는 야마노 가노스케 비누 도매상에 취직하며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합니다. 이 당시 조카 이은임은 이석숭과 결혼하였지만 오사카에 살고 있는 조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인이라는 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봉창은 당당하게 본명을 쓰고 살려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옛날과 같은 독립국으로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막연했습니다. 1929년 9월 수금한 100엔을 가지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오사카에서 도쿄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세계대공황이었습니다.
이봉창은 도쿄에서 '마쓰이 가즈오'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공황으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야쿠자 조직에 신세까지 질 정도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1930년 7월 구세군 소개소의 도움으로 혼조 구에 있는 오오키 가방점 외판원으로 취직하였으나 출장 중에 수금한 회사 돈 50~60엔을 사용하고 다시 오사카로 도망쳤습니다.
오사카에 도착하여 일자리를 구하다 우연히 박태산이라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의 제의에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상하이에 우리 한국 사람이 세운 임시정부와 교민단이 있어 영국인이 운영하는 전차 회사에 검표원으로 취직시켜 준다"고 했습니다.
떳떳하게 한국인으로 살 수 있다는 말에 이봉창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상하이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1930년 12월 6일, 이봉창은 오사카 짓코에서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일본에 온 지 5년 만의 일입니다.
[동경의거 전 국제정세]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으로 한중 간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만보산에서 한중 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사건을 일제가 부풀리고 허위 선전하여 한국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살해당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있는 한인들이 중국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였습니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 장교들이 유조호 부근에서 일본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 노선을 폭파하고는 중국군과 비적들에게 죄를 덮어씌웠습니다. 이로써 남만주철도 노선상의 전략 거점들을 장악하는 만주사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은 국제연맹에 원상복귀를 요구했으며,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이사회의 특별위원회가 소집되어 점령지 철수를 결의하였습니다. 국제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여론이 고조되었으나, 일본은 여론을 조작하여 관동군을 지지하고 중국과 서양을 비난했습니다.
만주사변으로 인해 국수주의적인 정우회가 차기 내각을 맡아 천진에 2개 대대, 만주에 1개 여단을 추가 파병하고 금주를 점령하였습니다.
[독립운동]
1914년 4월 출범한 상하이 임시정부는 프랑스조계의 중심인 하비로에 2층집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된 후부터 미국에서 보내오던 지원금이 뚝 끊기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거나 먹고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더러는 변절자가 되어 국내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인 김구 역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동포들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다니는 실정이었습니다.
1931년 1월 어느 늦은 밤, 이봉창은 상하이 프랑스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대한민국임시정부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봉창은 자기소개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지만 조선말인지 일본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밀정으로 의심하고 문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다음날 임시정부를 다시 찾았지만 영국인 전차회사에 취직하려면 영어나 중국어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듣고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할 수 없이 이봉창은 상하이 일본 YMCA를 찾아가 일본인으로 속이고 일자리를 부탁하여 명화철공소 대장장이로 취직했습니다.
철공소 주인은 이봉창을 일본인으로 알고 임금을 후하게 쳐 주어 일당 2엔을 받았습니다. 이는 혼자 생활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이봉창은 임시정부 직원들과 친해지기 위해 술과 국수를 사가지고 임시정부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1층 주방에서 조촐하게 술자리가 벌어져 취중 떠드는 소리가 2층 사무실까지 들렸습니다. 술이 거나해지자 이봉창이 목소리를 높여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이봉창 :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지금까지 뭘 했소?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아직까지 천황도 죽이지 못했소? 내 보기에 일본 천황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인 것 같은데...... 내가 도쿄에 있을 때 천황 행차를 구경한 적이 있소. 그때 만약 내 손에 총이나 폭탄만 있다면 천황을 처치하는 것은 쉬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소."
"천황을 죽인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김구는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상하이로 망명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대담한 발언이었습니다. '이봉창의 계획대로 천황을 죽일 수만 있다면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김구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931년 3월 무렵이었습니다. 김구는 이봉창이 어떤 인물인지 떠보기 위해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김구 :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큰일을 한번 해 볼 생각은 없는가?"
순간 이봉창은 몇 년 전 교토에서 거행된 천황 즉위식과 유치장에 갇힌 일이 떠올라
이봉창 :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에 들어가고 싶은데 연줄을 댈 수는 없을까요? 선생님, 제가 상하이로 온 것은 일본인 행세를 하지 않고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으로서 나라를 되찾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폭탄이든 무엇이든 적당한 무기만 손에 들어오면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건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제 나이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한들 과거 반생 동안 방랑 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서른한 해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 사업에 목숨을 바치고 싶습니다. 선생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이렇게 김구와 이봉창은 대업을 위해 뜻을 모았습니다.
8월 말쯤 이봉창은 다니던 철공소를 그만두고 일본인이 많이 사는 훙커우 지역에 있는 영창공사라는 악기점 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김구와 만난 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폭탄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9월 중순 무렵 이봉창은 김구를 방문하여 재차 폭탄에 대한 확답을 듣고 나서 성능 실험을 해 보고 싶다고 의지를 밝혔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의 나라에서 폭탄 실험을 할 장소를 찾기 힘들 뿐 아니라 폭탄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라 김구는 폭탄의 성능은 자신한다고 이봉창을 다독였습니다.
[김홍일, 사진출처 :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유치장군, 사진출처: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당시 중국 현지에서는 1931년 7월 완바오산 사건과 만주사변이 일어나는 급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김구는 폭탄과 자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우선 폭탄 한 개는 김홍일에게 부탁해 중국군 무기 공장에서, 다른 하나는 김현에게 부탁해 허난성의 유치 장군에게서 구했습니다. 하나는 천황 폭살용으로, 다른 하나는 자살용으로 쓸 계획이었습니다.
폭탄 확보 다음으로 중요한 거사 자금 확보가 문제였습니다. 만주나 일본에 많은 동포가 살고 있었으나 생활이 어려워 도움을 줄 형편이 못 됐고, 결국 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재정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거나 반송되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카고의 ‘김경’이라는 사람이 200여 달러를 모금해 보내왔습니다. 또 하와이의 ‘안창호’(도산 안창호와 동명이인)와 임성우에게서 1천 달러의 자금이 왔습니다. 이렇게 김구는 천황 폭살을 위한 무기와 자금을 모두 확보했습니다. 이봉창을 만난 지 열 달 만이었습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특수 공작을 감행할 비밀 조직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김구를 대장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습니다. 1931년 12월 6일 김구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천황 폭살 계획을 보고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보고에 깜짝 놀라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에 따라 김구의 계획을 승인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입단 사진이지만 조작된 사진이다, 사진출처 :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입단식 실제 사진, 사진출처 :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형에게 보낼 사진, 사진출처: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김구 : "준비가 다 되었는데 언제쯤 일본으로 떠날 수 있겠는가?"
이봉창 : "마침 12월 17일 오후 상하이에서 고베로 가는 우편선이 있으니 그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김구는 허름한 옷 속에서 지폐 한 다발을 이봉창에게 내밀었습니다. 300달러, 웬만한 월급쟁이 석 달 월급에 해당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이봉창 : "저를 어떻게 믿고 이런 큰돈을 주시는 겁니까?"
김구 : "이런 일은 인격 문제이네, 순전히 자네를 믿고 주는 거네."
김구는 이봉창을 데리고 사진관 비슷한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사진관 안은 어두웠지만 탁자 위에는 수류탄 두 개와 선서문 한 장이 놓여 있고, 맞은편 벽에는 사람의 키 높이 정도로 태극기가 세로로 걸려 있었습니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선서문을 읽어 주었습니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국애국단 앞 선서식이 끝나자 김구가 기념사진을 찍고 청진에 있는 형에게 보낼 기념사진을 한 장 더 찍었습니다. 이로써 이봉창의 한인애국단 입단식이 끝났습니다. 김구가 말한 대로, 이봉창은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었습니다.
12월 15일 저녁 무렵부터 폭탄 사용법과 보관법을 김구에게 학습과 폭탄을 던질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도 상의하기 시작했지만 도쿄 지리에 어두운 김구는 거사 장소와 날짜에 대해서 모두 이봉창에게 일임했습니다. 그리고 거사 자금이 부족하면 1~2백엔정도는 추가로 더 송금해 줄 수 있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12월 16일 김구와 저녁 식사를 하고 8원 80전을 주고 이봉창에게 손목시계를 사 주었습니다. 김구는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찍은 사진을 이봉창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사진을 본 이봉창은 너무 희미해 얼굴과 선서문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어 실망하여 사진을 다시 찍자고 제의했습니다. 김구는 나중에 경시청에서 사진을 확대해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할 테니 다시 찍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봉창은 체포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김구는 경험을 토대로 주의사항을 세심하게 일러 주었습니다.
12월 17일 아침, 이봉창과 김구는 최후의 식사를 하고 마지막 축배를 들었습니다.
이봉창 :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김구 : "지금 떠나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걸세. 이승에서는 이것이 마지막이지만 사진으로나마 다음 세상에서 함께하도록 하세."
김구와 이봉창은 중국 사진관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지만 애석하게도 사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일 오후 3시, 이봉창은 고베로 가는 우편선 히카와마루에 올랐습니다. 선객 명부에는 '효고 현 기노사키에 사는 축음기 상인 기노시타 쇼조'라고 자신의 신분을 적었습니다.
[이봉창이 김구에게 보낸 편지, 사진출처: 이봉창의사의 항일투쟁]
1931년 12월 19일 밤8시 상하이로 떠난 지 1년 1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12월 22일 도쿄에 도착했지만 14엔 정도가 남아 23일에 김구에게 1백 엔 송금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습니다. 12월 25일 천황이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는 날이었지만 돈이 없는 데다가 결행하려는 기분도 들지 않아 거사 계획을 포기했습니다. 이후 정체를 숨기고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곽과 여관방을 전전하며 거사 기회를 찾았고, 자신의 출생과 경력 등을 적은 수기를 쓰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구가 이봉창에게 보낸 전보, 사진출처: 이봉창의사의 항일투쟁]
1월 4일 중앙우체국으로 가서 송금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상하이에서 일본 사이에는 전보 우편환을 보낼 수 없다는 대답에, 전보 첫머리에 적힌 '정금'을 '일본 돈'으로 만 생각했는데, 일본 돈이 아니라 "정금은행"이었습니다. 전보와 별도로 정금은행으로 부쳤다는 편지를 여관으로 보냈지만 이봉창이 여관을 옮긴 뒤라 전달이 되지 않아 혼선을 빚은 것입니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 김구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상품은 1월 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시오."
1월 6일 요요기 연병장으로 사전 답사를 했지만 초행이라 실수를 했습니다. 승합차를 타고 운전사에게 연병장 가는 길을 묻자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며 관병식에 참관할 생각으로 헌병 명함을 받아 두었지만 근무로 갈 수 없다며 이봉창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거사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도쿄 시내 지도를 샀습니다. 1월 7일 관병식을 앞두고 도쿄 시내 경비가 삼엄하여 가와사키 시 다마키로 유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검문을 피해 몸을 숨기기도 좋았지만 하라주쿠까지 가는 교통도 편했습니다.
1월 8일 오전 8시 유곽을 나서 8시 50분쯤 하라주쿠역에 도착했습니다. 경비가 심한 요요기 연병장 입구보다는 국철을 타고 근처의 요쓰야역에서 거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아카사카미쓰케 쪽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카사카미쓰케역에서 환궁할 때 거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근처 식당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관병식 중계를 듣고 있는데 관병식이 끝났다는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봉창이 역에 도착했을 때 행렬의 끝이 보이며 저 멀리 다마치의 길모퉁이를 막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허탈감에 몸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로 인부에게 천황의 행차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습니다.
"행령은 다메이케 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지름길로 쫓아가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택시를 타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이동하여 경시청 앞에서 내려 경시청 본관 북쪽 끝까지 달려 도착하였습니다. 수상히 여긴 경찰의 검문을 받았지만 승합차 운전수에게 받은 헌병 조장의 명함으로 무사히 통과하였습니다. 다시 뛰기 시작해 경시청 정문 현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큰 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고, 맨 앞에는 호위 경찰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직 천황의 행렬이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봉창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두세 겹 앞으로 나아가자, 천황 행렬이 이봉창이 있는 사쿠라다문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봉창 의사의 경시청 앞 거사 현장 약도, 사진출처: 이봉창 평전]
이봉창은 사쿠라다문 전차 정류장의 삼각형 안전지대 잔디밭 동남쪽 인도의 거의 중앙 부분에 있었습니다. 이윽고 첫 번째 마차가 다가왔습니다. '천황이 탄 마차라면 황비까지 두 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봉창은 천황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봉창 의사가 던진 폭탄이 작렬하기 직전의 일왕탑승마차, 사진출처: 이봉창 평전]
첫 번째 마차가 지나가고 두 번째 마차가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마차가 천황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마차까지는 어림잡아 10간(약 18미터), 수류탄을 던지기에는 거리가 조금 멀어 보였지만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 마차를 겨냥해 약간 높게 던졌고, 수류탄은 마차 뒤쪽의 마부가 서는 받침대 부근에 떨어졌습니다.
"꽝!" 폭발과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갑작스런 폭발에 놀란 말이 날뛰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45분경이었습니다. 요란한 폭발 소리를 듣고 이봉창은 거사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폭발 소리만 요란했지 수류탄의 위력은 약했습니다. 마차 밑바닥과 타이어가 파손되었을 뿐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혼란을 뒤로한 채 앞서 가던 천황의 마차는 5분 뒤에 궁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경시청에 연행되어 조사실로 가는 이봉창 의사, 사진출처: 이봉창 평전]
"실패했구나!" 이봉창은 당황했습니다. 순간 머리가 멍해져 어떻게 할지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혼다 쓰네요시라는 순사가 얼떨결에 이봉창 뒤쪽에 서 있던 반코트를 입은 쉰 살쯤의 남자를 체포했습니다. 이봉창은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이 아니라 나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봉창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지만, 경찰의 거친 행동으로 입고 있던 코트의 단추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현장에서 바로 경시청으로 연행되었습니다.
만약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이 성능이 좋아 제대로 폭발했다면 천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사 당일 현장 검증에 따르면, 이봉창이 수류탄을 던졌을 때 천황의 행렬은 왼쪽의 경시청 건물을 끼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경시청 앞의 사쿠라다문 전차 정류장 안전지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폭탄 투척 지점으로부터 남쪽으로 18간(약33미터) 떨어진 거리입니다. 김구가 말한 수류탄의 위력 범위인 6, 7간(약11~13미터)을 훨씬 벗어나 있었습니다. 수류탄이 제대로 터졌더라도 천황을 폭살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습니다.
[국내외 반응]
이봉창은 거사 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시청으로 연행되었습니다. 그는 경시청 수사 2과장 이시모리 아사오 방에서 바지 주머니에 있던 폭탄 한 개와 도쿄지도, 현금 등을 내놓았습니다. 일제는 이 의거를 즉시 '불경사건'으로 규정하고 일절 외부와 연락을 차단한 채 도쿄지방재판소의 미야기 나가고로 검사정으로부터 취조가 시작됐습니다. 또한 이봉창의거 관련하여 보도를 금지하고, 특히 범행장소와 폭탄 작렬사실 등은 절대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의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왕을 목표로 하였기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유언비어는 '무서운 전파력'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봉창의거에 가장 긴장한 것은 물론 일본정부였지만, 이에 못지 않게 민감하게 반응한 측은 일제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던 세력들입니다. 의거 이후 이들은 일왕을 대상으로 의거를 일으킨 인물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놀라 자신들의 입장이 난처한 지경에 처하지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의거 발발 직후 일본에 있던 영친왕이 곧바로 일왕을 찾아갔으며,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상애회의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한 여러 고위층을 방문하여 불경범인이 한국인인 데에 송구하다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리고 9일 친일단체 상애회 회원 120명을 소집하여 궁성 입구 니쥬바시에 도열하여 사죄하였습니다. 국내에 있던 친일세력들은 동민회를 중심으로 1월 9일 한상룡․박영철․신석린․조성근․김명준․민대식․박승직 등 35명의 친일파들이 사죄의 뜻으로 근신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봉위문'을 전보로 총리대신, 척무대신, 궁내대신, 조선총독 등에게 보냈습니다.
[심문과 진상 발표 그리고 유해봉환]
거사 당시 수류탄 두 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던지고 나머지 하나는?
그에 대한 대답은 <제2회 신문조서>에서 예심 판사와 이봉창 사이에 오간 문답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바로 왼쪽 주머니에 넣어 둔 폭탄을 다시 던지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그때는 웬일인지 머리가 멍해져서 두 번째 폭탄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잊고 말았습니다."
이봉창은 상하이에서 폭탄 투척 연습을 한 적이 없는 아마추어 독립운동가이자 평범한 노동자였습니다. 일본 경찰은 경시청에 도착할 때까지도 이봉창의 호주머니 속에 또 하나의 수류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연행된 뒤에 이봉창이 스스로 주머니 속에서 수류탄을 꺼냈다고 공판조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출처: 이봉창의사의 항일투쟁,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체포된 이래로 6월 27일까지 9차례에 걸쳐 예심판사의 신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1회 신문은 이름․나이․직업․주거․본적․출생지 등 신상을 확인하였고, 2회 신문은 1월 11일 진행되었는데, 일왕의 목숨을 빼앗을 심산으로 거사를 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월 12일 3회 신문에서는 죽을 각오로 일왕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였지만 폭탄의 위력이 작아 실패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6회 신문에서는 한국독립을 바라게 된 과정을 말하면서, 자신이 결행한 거사가 한국의 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실행된 것이라는 사실도 밝혔습니다. 7회 신문에서는 한민족이 전반적으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여 제일선의 희생자로서 거사를 결행한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9회 신문은 6월 27일 진행되었는데, 이봉창의 진술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상한 점은 8회까지 진술과정에서 한 번도 본명을 거명한 적이 없는 '김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거명한 점입니다. 그런데 이봉창이 김구를 지칭한 것은 오직 한 번뿐으로 진술 뒷부분에 가서는 다시 '백선생'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신문조서에 나타나듯이 이후에도 '백정선'이란 호칭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9회 신문조서의 내용은 이봉창 본인의 진술이 아니라 일제가 위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실수로 추정됩니다.
[사형선고 신문보고 내용, 사진출처: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이봉창은 9월 16일의 구형 공판과 9월 30일의 선고 공판에서 모두 사형을 판결 받았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매일 염주를 만지면서 조용히 재판에 응했습니다.
[사진출처: 이봉창의사의 항일투쟁]
1932년 10월 1일 이봉창의 사형언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김구는 1932년 9월 28일 의거의 경위와 의의, 이봉창의 생애와 약력 등을 담은 장문의 [동경작안의 진상]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글은 10월 9일 중국통신사에 보내졌고 각 신문사에 배포되어, 15일자 상하이의 '신강일보'와 난징의 '중앙일보'에 게재되어 중국인들에게 상당한 파급효과를 일으켰으나 애석하게도 국내신문에서는 그 내용이 전혀 게재되지 못하였습니다.
[평면도 좌측 상단부분이 사형장, 사진출처: 이봉창 평전, 이봉창의사의 항일투쟁]
이봉창은 사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열흘 만인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극비리에 사형되었습니다. 유해는 사이타마현 우라와 시의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임시정부가 환국한 가운데 김구는 일본에서 출옥한 박열에게 이봉창과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박열은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의 '정치범 즉시 석방'에 관한 포고령에 의해 10월 27일 아키다형무소에서 석방된 뒤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발족하고 나라를 위해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반장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이봉창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우라와형무소에서 교회사로 일했던 일본인을 찾아 물어본즉, 우라와형무소 부속묘지에 묻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형무소소장은 유해가 어디에 묻혀있는지 모른다고 발뺌하자 서상한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강경하게 나가자, 교무관을 불러 묻힌 장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신조선건설동맹 청년동맹원 3천 명이 세 의사의 유해를 앞세우고 이봉창이 거사를 일으킨 사쿠라다몬 안으로 들어가 그를 기리는 연설을 하고 애국가를 제창한 후 만세삼창을 불렀습니다. 1946년 4월 20일 세 의사의 유해는 일본 도쿄를 출발하여 5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하였고, 6월 15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추도회가 개최되었습니다. 6월 16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유해를 실은 열차가 도착하였고 수송동의 태고사로 운구되어 불교식 안위식을 갖고 임시 봉안소에 안치되었습니다. 김구가 효창원을 장지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1946년 6월 30일 국민장으로 거행하려 했으나 장마로 7월 6일로 연장하였습니다. 7월 4일 김구는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성명서에서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가 민족 독립을 위한 거사였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세 의사의 유해는 7월 6일 12시 40분 효창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사진출처: 효창공원 직접촬영]
영결식은 오후 1시 김구와 이승만을 비롯하여 오세창․이시영․여운형․김창숙․정인보 등과 각 정당의 단체 대표 등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습니다.
[사진출처: 이봉창의사의 항일투쟁]
이봉창 의거는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에 대해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뜻으로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봉창의 힘]
이날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대신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내각 총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히로히토는 시국이 중대하다는 이유로 내각의 사직서를 반려했습니다.
이봉창 의거는 1931년 9월 만주 침략을 감행하여 오만해진 일본 제국주의가 신년 관병식을 통해 무력적 위엄을 과시하고자 한 '잔칫집'에 재를 뿌린 격이었습니다. 또한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 받던 천황을 향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한국인들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즐겨 받고 있다고 선전해 온 일본의 식민정책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동경의거'가 일어난 그날 저녁 도쿄에서 발신된 통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중국 각 도시의 신문은 바로 다음 날 한결 같이 이봉창 거사를 호의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기관지 성격을 지닌 상해판 <민국일보>는 1932년 1월 9일자에 "한인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적중하지 않았다. 일왕이 열병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저격을 받았으나 불행히 부차가 조금 터졌다.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 이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폭탄이 일왕에게 적중하지 못하여 매우 안타깝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봉창을 '지사', '의사' 라는 표현이 일제의 신경을 자극하였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중국 신문들은 이봉창의거에 동조하는 논조를 보였고 일본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일제가 1931년 9월 18일 심양에서 '유조호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더 나아가 금주를 비롯한 중국 각 지역으로 침략을 확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신문의 논조가 이봉창의거에 더욱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되어 있던 한중 간의 관계가 이봉창의거로 인해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상하이의 <민국일보> 보도 후 상하이 거류 일본인들은 "불경하지 않은가"라며 소요를 일으켰고, 칭다오 일본총영사는 <민국일보>가 이봉창을 '의사'로 지칭한 것이 문제가 있고 내용이 불경하다고 강력한 항의와 함께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은 1월 12일부터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고, 민국일보사에 난입하여 권총을 난사한 것을 비롯하여 중국국민당 시당부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습니다. <민국일보> 사건이 진정되어 가고 있을 무렵 국제도시 상하이에서는 시민 항일운동과 항일집회가 잇달아 열렸습니다. 이를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역이용하기로 합니다.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두 명을 포함한 일본인 다섯 명이 중국인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한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이 중상을 당한 사건을 날조하였습니다. 다음 날 진상을 알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거류민대회를 열어 범인 체포와 손해 배상, 일본에 사과할 것을 결의하여 상하이 시정부에 결의문을 전달하였습니다. 그 후 1월 20일 새벽 일본인 50~60명 정도가 중국인 습격하여 삼우공사 공장 건물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습니다. 이런 중국 내 반일 감정을 역이용하기 위해 일본은 1월 24일 시게미쓰 마로루 일본공사 공관에 불을 지르게 하고 이를 중국인들이 벌인 일이라 몰아붙였습니다. 그날 밤 11시 25분 일본의 제일견외함대 사령관은 상하이를 지키는 전략거점이자 강력한 포대를 자랑하던 갑북에서 중국군과 항일세력이 물러나 상하이에서 후방으로 20km 물러서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중국 측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15분 뒤 일본 해군육전대와 편의대가 갑북으로 침입하여 중국군 방어선을 공격하였습니다. 이것이 이후 34일 동안 펼쳐진 1․18사변, 송호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중국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국민당 정부가 전면전을 원하지 않아 일본의 요구대로 상하이 조계경계선 20km 밖으로 철수하여 휴전하였습니다. 일본군이 거류민 보호 목적을 달성했다는 데 명분을 찾고 침공을 중단하자, 3월 14일부터 상해에 있는 영국영사관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어 국제적인 압력 아래 5월 5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철수, 사변 이전의 상태를 회복한다." 이와 같이 이봉창의거로 인해 '상하이사변'이 일어났고, 4월 29일 천장절에 맞추어 전승기념식을 거행하던 홍구공원에서 상하이주둔 일본군들이 윤봉길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사진출처: 효창공원 직접촬영]
비록 천황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거를 통해 김구와 임시정부는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한동안 임시정부에 냉담하던 미주 동포들이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활동 반경이 넓어졌으며 중국 정부의 지원 하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 준비에 힘을 실어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문헌]
- 제목: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지은이: 배경식, 출판사: 휴머니스트
- 제목: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지은이: 김도형, 출판사: 역사공간
- 제목: 이봉창 평전, 지은이: 홍인근, 출판사: 나남출판
- 제목: 이봉창의사의 항일투쟁, 지은이: 이현희, 출판사: 한국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