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을축년(1925년) 대홍수 이야기로 시작 하셨습니다.
1925년 여름 을축년 대홍수. 역사상 가장 큰 홍수로 한강을 덮친 수재(水災)였다.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1억 300만원의 재산상 손실과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대참사(大慘事)였다. 당시 봉은사 주지 청호학밀(晴湖學密, 1875~1934)스님은 708명의 인명을 구하는 선행으로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정인보, 오세창, 이상재 선생 등이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발간해 스님의 뜻을 기렸을 정도. 청호스님의 삶을 행장 복원 차원에서 정리했다. <불괴비첩>과 일제강점기 신문 내용을 참고했다.
“보시를 행하여 무쟁삼매 경지 얻었노라”
1915년 ‘을축년대홍수’ 708명 인명 구제
오세창 정인보 등 ‘불괴비첩’ 선행 기려
○…청호스님 행장에서 을축년 대홍수를 빼놓기는 힘들다. ‘봉은사의 미거(美擧)’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의 위급한 상황과 스님의 선행을 짐작할 수 있다.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주지 라청호씨는 목선(木船) 3척을 주선하여 부리도(浮里島)민 114명을 구호하여 자기 절에 수용하고, 18일에는 목선 두 척을 사서 잠실리(蠶室里) 주민 218인을 구하는 등 현재 봉은사에 수용된 자만 404인이라더라.”
당시 한강에는 물난리로 떠내려 온 사람들이 느티나무에 매달려 “살려 달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사중 재산을 털어 인명을 구조하는데 앞장선 청호스님이었다.
○…훗날 스님의 공적비가 세워졌는데, 관련 기사에는 당시 상황을 더욱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본산 봉은사 주지 라청호씨는 을축년 대홍수 때에 자신이 홍수 상에 출장하야 뱃사공에게 명하야 배 한번 나가서 인명을 구조해오는 자마다 돈 10원씩을 주기로 하야 그때 구제된 자가 708인에 달했음으로, 그 구제를 당한자 중 동부면 신장리 사는 리준식씨외 수씨의 발기로 2개월 전부터 ‘라청호을축홍수구제기념비’를 기공하야 오던 중 수일 전에 준공되었음으로 지난 27일에 제막식겸 피로연을 대본산 봉은사내에서 거행했다더라.”
○…<불괴비첩>에는 청호스님의 선행을 칭송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하여, 무쟁삼매의 경지를 얻었노라”(오세창) “본래 그것(대홍수때 사람을 구한 일)은 불교의 진리이다. 다만 인연에 따랐을 뿐인데 유별나게 공덕이 있는 것이라 말할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로써 세상 사람들을 감흥케 하였으니 만치 이 일을 드러 내어도 좋을 것이라 생각되어 굳이 사양치 않고 이 글을 적는다.”(정인보)
이밖에도 이용직, 이상재, 경운스님, 김규진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글을 남겼다. 이에대해 스님은 ‘괴사(愧事, 부끄러운 일)’란 글을 통해 겸손함을 보였다.
“여러 대인(大人)들은 그 포상이 실지에 지나쳐서 값진 시와 글과 글씨와 그림으로서 상자에 가득하니, 이것은 참으로 산승(山僧)을 편달하고 격려하여 장차 어떤 경우를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게을리함이 없이 더욱 분발하라는 뜻임을 알수 있다.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어찌 얼굴 붉어지지 않을 수 있으리오.”
○…청호스님 법문이나 어록이 온전하게 전하지는 않는다. 다만 <불괴비첩>과 <불교> 에 게재된 내용과 당시 신문 ‘모임난’에 소개된 것이 전부이다. 당시 기사를 보면 스님이 1921년부터 1923년까지 각종 ‘불교강연회’에서 활발하게 설법했음을 알수 있다. 강연회 명칭과 개최 시기, 주제 등을 살펴보면 스님이 지녔던 생각의 일단이 보인다.
남아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조선불교대회 주최 불교강연회(1921년 12월25일, 불교와 문화의 향상) △조선불교대회 강연회(1922년 7월5일, 불교의 삼요소) △ 불교대회 설교회(1922년 8월15일) △조선불교대회 강연회(1922년 8월25일, 不思議) △불교대회 강연회(1922년 10월22일) △조선불교대회 강연회(1923년 4월5일, 조선불교의 서광) △불교협성회 강연회(1923년 4월20일, 불타의 광명) △조선불교대회 주최 강연회(1923년6월25일, 신앙에 대하여).
○…<불괴비첩>에 실린 스님의 법어는 악을 짓지 않고 정진하면 모든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적극적으로 불타의 가르침에 의해 계(戒)로써 몸을 닦아 10악을 짓지 아니하면, 우리의 이 중생계에는 자연히 병고액난(病苦厄難)과 같은 일체의 재앙이 그칠 것이다. 이는 곧 개인이 육체상의 구제를 받는 것이 되지만 동시에 이 우주 간의 뭇 생명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된다.”
○…봉은사 주지를 세 차례 역임한 스님은 봉은사 사세(寺勢)를 확장하는데 적극적이었다. 1914년에는 사찰 인근의 황무지 9만9173㎡(10정보)를 개간하여 쌀 200석을 거두어 들였다. 또한 1915년에는 임야 52만5619㎡(53정보)를 측량해 봉은사 정재(淨財)로 삼는 등 사찰 외연을 넓히는데 앞장섰다. 스님의 이 같은 노력으로 봉은사는 전답과 임야를 합쳐 무려 66만1157㎡(20만평)에 이르는 사유지(寺有地)가 생겼다고 한다.
○…1918년 동대문 밖 감로암에 머물던 스님은 변화무쌍한 인심을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 무심한 세상사를 따끔하게 경책한 ‘감로암으로 옮겨서(移居甘露庵)’란 제목의 한시이다. “세상사 공평치 않음이 너무나 싫구나 / 하루 아침에 텅 빈 절간이 웬 말이냐 / 손님 맞으려 해도 접대할 게 없음이 부끄럽구나 / 하지만 저기 샘물 맑음 있음에야”
○…젊은 시절 양양 명주사에 머물며 정진하던 어느 날이다. 은사스님이 법상에서 법문을 하고 있었는데, 신도에게 일본군이 월운스님을 체포하려고 산을 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청호스님은 곧바로 은사스님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자리를 피하도록 했다. 은사 월운스님은 급히 법상에서 내려와 산길을 따라 몸을 피했다. 곧 이어 들이닥친 일본 헌병은 월운스님이 없는 사실을 확인하고 청호스님을 다그쳤다. “어디 갔느냐. 바른 대로 말해라.” 청호스님은 한동안 뜸을 들인 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셨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헌병은 부리나케 달려갔다. 물론 은사스님이 간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알려 주었다.
○…조선불교 수호를 위해 만해.석전스님과 함께 임제종을 설립했던 경운(擎雲)스님은 청호스님 진영에 상찬(像讚)의 글을 남겼다. “넓고도 깊은 진리 사자후 하니, 항상 수많은 청중이 경단에 둘러 있고, 때로는 불자(拂子)를 세워 묵묵히 앉았더니, 진리의 꽃 난간에 만발해도 아랑곳 않더라”
행장 /
봉은사 주지 3차례 지내
‘일본 협조’ 비판 받기도1875년 1월26일. 경기도 고양 뚝섬(지금은 서울)에서 태었다. 부친 나윤천(羅允天)과 모친 원씨(元氏)의 둘째 아들로, 속명은 나재철(羅在哲)이었다. 법명은 학밀(學密), 법호는 청호(晴湖). 오은(五隱)이라는 아호를 쓰기도 했지만, ‘나청호 화상’이란 이름으로 많이 불리었다.
12세 되던 해 “출가하지 않으면 오래살기를 바라지 말라”는 말을 듣고 양양 명주사로 입산했다. 은사는 월운(月運)스님. 1889년 명주사에서 성담(性潭)스님에게 사미십계를 수지하고, 1897년에는 평창 월정사 용허(龍虛)화상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같은 해 월정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했다.
어린 시절 고향의 한문서당에서 <통감(痛鑑)> <대학(大學)> <맹자(孟子)> <논어(論語)> <중용(中庸)>을 수료했다. 출가 후 명주사 일봉(日峯)강백 문하에서 사미과 초등과정을 졸업하고, 예천 용문사 혜옹(慧翁)스님에게 중등과를 공부했다. 이어 고성 건봉사 대강백 진하(震夏)스님 문하에서 고등과를 마치고, 같은 강원의 초우(草友)스님에게 수의과를 수료했다. 1911년 봉은사 선시(選試)에 합격해 대교사(大敎師)가 됐다.
1908년 조선불교 원종 감사부장을 맡았으며, 1912년.1915년.1924년 세 차례 봉은사 주지를 지냈다. 1924년에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로 선임됐다. 1925년 7월 다수 인명을 구조하여 칭송을 받았지만 총독부에 협조하여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다. 1934년 음력 7월20일 봉은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60세. 법랍 49세. 당시 신문에는 “광주 대본산 봉은사 주지 라청호 선사는 지난달 29일에 별세하였음으로 2일 정오에 수송동 각황사에서 본말사 승려가 집합하여 영결식을 거행한다고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각황사는 지금의 조계사
김영환 대령의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한국전쟁에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지킨 김영환장군
공군창설 7인 간부의 일원이었던 김영환 장군은 6·25가 발발하자 T-6 훈련기를 조종하여 저공비행으로 적 전차와 차량에 폭탄과 수류탄을 던지는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 큰 공을 세웠다. 또 한국 공군 최초로 10명의 동료와 함께 무스탕 전투기를 미 공군으로부터 인수해 전투기 조종사로서 수많은 전공을 거뒀다.
그는 해인사가 인근 빨치산과 북한군 패잔병에게 점령된 상태이던 1951년 8월 현지에서 전투를 치르던 경찰부대의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미 제5공군이 해인사 타격을 지시하자 편대장으로 출격했다. 타격 지점인 해인사 상공에 이르자 김 장군(당시 계급은 대령)은 순간 적으로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떠올리고 공격을 멈추고 기지로 귀환했다.
그는 명령 거부의 질책에 “영국 사람들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팔만대장경은 한국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 아닌가? 수백 명의 적들 때문에 한국만 아닌 인류의 유산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고 당당히 대답했다.
김 대령은 다시 무전기를 잡았다. “전대, 해인사 뒤의 적 보급기지만 공격하고 기지로 돌아간다.” 갑작스런 귀환 지시를 모니터링 하던 비행단에서 추궁이 날아왔다. “왜 해인사를 타격하지 않는가?” “빨치산 몇 명 죽이기 위해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불태울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귀관의 지금 행동은 항명이다.” “제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
그는 공군 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보급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1년 어느 날 그가 친형 김정렬 장군 집에 들렀을 때 형수가 만들어준 머플러를 받아 맨 것이 공군 ‘빨간 마후라’의 시작이다.
휴전 이후에도 전투조종사 양성 등 공군 전력 향상을 위해 헌신했던 김 장군은 1954년 3월 5일 F-51 전투기를 조종해 사천에서 강릉기지를 향하던 중 악천후로 추락해 34세로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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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영환 공군 준장. ⓒ 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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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을 지킨 ‘빨간 마후라’가 59년 만인 내년 2010년에 문화훈장을 추서받게 됐다.
지난 14일 오전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서는 6.25동란 중 해인사 공습 명령을 거부하고 팔만대장경을 지킨 고 김영환 공군 준장을 기리는 호국추모재가 열렸다.
조계종 종정 도림 법전 대종사와 총무원장 자승 스님, 최구식 의원, 김태호 경남지사 등이 참석한 이날 추모재에서 유족 대표인 김태자씨는 “해인사 스님들과 고인의 전우들의 성원으로 매년 호국추모재를 거행하고 특히 내년 추모재엔 문화훈장을 추서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씨는 고 김영환 장군의 친형인 고 김정렬 전 국무총리의 딸로 고인의 조카이다.
김씨와 윤응렬, 이강수씨 등 공군 예비역 장군들, 해인사 측은 김영환 장군의 목숨을 건 팔만대장경 수호가 일부에 의해 왜곡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10여 년이 넘게 전사(戰史)를 감토하고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차일혁 총경은 유명한 아드님 때문인지 요즘도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입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으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 분은 지금 들어도 전설적인 일화를 여럿 남겼습니다. 가극 '눈물의 여왕'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분이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듣고 한 말이 "이 절을 태우는데 하루면 충분하지만 다시 지으려면 천년도 부족하다"는 명언입니다. 전쟁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용기로는 감히 하기 힘든 말일텐데 말입니다
첫댓글 마음에 담을수 있도록 많은 자료 올려주셨네요.기신론 공부는 다시 책이라도 볼수있는대 이런 자료는 도반님에 도움이아니면 다시 볼수없겠지요
너무 많은 도움를 주시니 이잰 공부 하는대 의지가됨니다...너무고맙고요....다음 성지순례는 광주군 봉은사 로갔어 덕높어신 청호 스님깨 고개숙여 삼배 라도 드렸어면 !...
부처님 법 만남이 감사 할 따름입니다.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