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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 전통일부장관,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10주년 기념행사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연구소 세미나 기조강연(2010.12.8)
김대중-민주주의와 평화의 파수꾼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기울인 노력
노벨상위원회는 김대중 대통령이 “수십년 동안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반대하여 투쟁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화해 협력을 통해 냉전의 잔재를 제거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노벨평화상을 수여한다고 밝혔습니다.
[투철한 민주주의자, 민주주의 사상가] 김대중은 지난 날 다섯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 감옥생활, 10년 연금 및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통일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행동하는 양심’으로 헌신했습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보편적인 가치로 인식했습니다. 서구에서는 한 때 아시아는 유교적 전통 때문에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민주주의는 보편적이고, 아시아에도 민주주의 전통과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500년전 “임금이 선정을 베풀지 않으면 백성이 하늘을 대신해 임금을 쫓아낼 수 있다”는 노자의 주장과 한국의 인내천 사상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1990년초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질 때도 김대중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이긴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독재를 이긴 것으로 보았습니다. 전후에 민주주의를 실천한 독일과 일본은 정치 경제에서 성공했지만, 민주주의를 하지 않은 구 소련과 동유럽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한국의 역대 군사정부는 국가안보와 반공을 구실로 군사독재, 권위주의 정치를 유지해왔습니다. 김대중은 거기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웠습니다.
[민주주의자로의 업적] 19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평화적인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였습니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취임하여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힘썼습니다. 노동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였습니다. 정부의 정책 결정, 집행, 평가에 국민 참여의 길을 확대하기 위해 시민단체 활동을 장려하고 참여민주주의를 확대시켰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누구나 합법적인 방식으로 집회와 시위, 결사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인권법을 제정하여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모범적인 인권국가가 되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 피해를 당한 억울한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데도 앞장섰습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명예회복, 의문사 진상규명,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보상, 제주 4.3사건 명예회복에도 앞장섰습니다.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 반독재와 민주화 투쟁에서 비롯된 한과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복지를 인권의 차원에서 바라보며 생산적 복지를 추진했습니다. 또한 굴주림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 비료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햇볕정책 반대자들은 인도적 지원을 '퍼주기'라고 비난했습니다만, 김 대통령은 인도적 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을 북한 인권문제 해결 차원으로 접근했습니다. 4천 가족 2만여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한 것은 김 대통령이 이룬 인권분야의 큰 업적 중의 하나입니다.
[화해와 관용의 정치] 김대중은 군사독재시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박해를 받았지만 대통령이 되어 보복 없는 정치를 실천했고, 모든 정적을 용서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맨 처음 취한 조치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사면 석방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선고를 내린 전 대통령의 사면조치는 국민들을 놀라게 했고, 그의 일부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자신을 납치해 죽이려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화해하고 그의 기념사업을 지원했습니다.
노벨상위원회는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과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불화를 해소하고 화해로 향하게 한 공적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김 대통령의 첫 국빈방문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은 역사 화해를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김대중은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서 “진실로 너그러운 강자만이 용서와 사랑을 할 힘이 있다”고 피력한 바 있습니다. 관용과 화해는 김대중의 원칙이고 신앙이었습니다. 김대중은 관용이야말로 국민을 통합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힘으로 보았습니다. 김대중은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노벨상위원회는 김대중의 관용, 화해, 용서의 정신을 평화상 수상의 한 이유라고 지적했습니다.
[국제적 인권 활동] 김대중은 재야시절부터 서거 직전까지도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의 연금해제와 정치활동의 자유를 위해 계속 지원했습니다. 최근 수치 여사가 연금에서 해제되었지만 수치 여사와 버마 민족민주동맹(NLD)은 김대중을 아시아의 최고 민주지도자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독립을 지원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동티모르인들을 탄압하고 학살할 때 김 대통령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 등을 설득하여 인도네시아 정부군의 철수를 성사시켰습니다. 그리고 400여명의 한국군을 파병하여 동티모르인의 안전을 지켜주는 한편 독립을 지원했습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라모스 호르타 동티모르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동티모르인 10만명의 목숨을 살렸다”고 회고한바 있습니다.
평화사상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평화사상과 통일철학] 김대중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는 서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김대중의 평화사상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의 평화사상은 사상에만 머문 것이 아닙니다. 실천으로 이어진 사상이라는 특색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정치, 남북관계 그리고 대외정책에서 직접 실천해 낸 사상입니다.
김대중의 평화사상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그 핵심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 냉전 종식과 평화체제 확립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 필생의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그의 통일철학은 평화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근 40년 전인 1970년대초, 남북이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고, 힘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며 군사적 대립이 첨예화된 시기에 젊은 정치인 김대중은 전쟁을 반대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통일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반도에 개입해온 미국과 일본, 소련과 중국 4대국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해야 한다는 ‘4대국 안전보장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남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하면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평화 3원칙을 주장한 것입니다. 냉전적 반공논리가 지배하던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김대중은 독일통일 과정을 목격하면서 1995년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으로 그의 평화통일론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가 얻은 결론은 “급격한 통일 보다는 평화공존의 과정을 통한 점진적 단계적인 통일”이었습니다. 그는 통일 보다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긴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남과 북이 화해하고 평화공존하면서 교류 협력하는 '연합'confederation단계를 거치면서 점진적 단계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방면의 교류 협력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경제 통합, 사회 문화 통합을 통해 정치 군사적 통합도 가능할 수 있다는 기능주의적 접근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추진] 김대중은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한 햇볕정책을 추진합니다. 화해 협력 변화 그리고 평화가 햇볕정책의 키워드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를 설득하여 냉전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합니다. 남북관계 개선과 함께 미국과 북한도 적대관계를 해소해야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김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북한 핵이나 미사일문제는 미국과 북한 적대관계의 산물이다. 상호위협감소를 통해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핵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안보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한반도냉전구조를 해체하는 근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면서 대량살상무기 문제도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우리의 제의를 받아드려 한 미 일 3국 공조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게 됩니다. 남과 북은 분단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여 화해 협력을 지향하는 <6.15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합니다. 미국도 북한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로 하는 <미․북공동코뮈니케>를 채택합니다. 그리고 미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국무부장관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합니다. 일본도 일․북정상회담을 통해 외교관계를 수립하기위한 <평양선언>을 채택합니다.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가 되는 평화와 통일 문제가 중점적으로 논의되었습니다. 두 지도자는 무력통일과 흡수통일을 배격하고 평화주의 원칙에 입각한 합의통일에 인식을 같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합제'를 통해 점진적 단계적인 평화통일을 지향하기로 하는 <6.15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게 됩니다.
남과 북이 서로 오고 가고 돕고 나누며, 통일은 되지 않았지만 통일된 것과 비슷한
'사실상의 통일상황'de facto unification부터 실현하자는 것입니다.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실현하여 평화공존하면서 분단으로 인한 겨레의 고통을 덜어주고, 서로 소통하며 변화와 창조의 과정을 통해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김대중의 평화사상은 반세기 남북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넘어 화해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나감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6.15남북공동선언>이 실천에 옮겨지면서 교류 협력이 시작됩니다. 휴전선의 지뢰를 제거하고 민족의 대동맥인 철도와 도로가 연결 운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남북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시범사업인 개성 산업공단이 건설되면서 1백여개 남측 기업에서 4만여명의 북측 노동자들이 남측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위탁가공교역과 관광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남북 당국간 대화는 물론 시민참여의 공간이 열리게 되어 접촉과 왕래(55만명)가 빈번해지고 인도적 지원(년 평균 2-3억달라 규모)이 제공되면서 서로 적대의식이 수그러들고, 긴장이 완화되어 갔습니다. 민족공동체의식과 상호신뢰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남한에 의존하여 경제를 개건하려는 기대를 갖게 되고, 남북경제공동체 형성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분단 고착이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 구축을 당면과제로 내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한반도냉전구조 해체를 추진한 것입니다. 미국, 일본과 북한의 적대관계 해소와 관계정상화를 주장했습니다.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진하고, 우발적 충돌이 전쟁으로 번져갈 수 있는 불안전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협정 체결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편 남북 경제협력을 활성화하고 상호의존도를 제고하기 위해 경제공동체를 추진했습니다. 경제적 접근과 함께 군비통제를 병행할 때 시너지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반도평화를 위해서는 동북아 평화가 필수적이며, 동북아 평화 번영을 위해 북핵문제를 다루어온 6자회담을 모체로 지역 평화 안보 협력체를 구성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미 중 일 러 등 주변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주기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통상 국민의 2/3이상이 햇볕정책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보수진영과 야당의 극열한 반대에 부닥쳤습니다. 이들은 대북 지원은 붕괴가 임박한 북한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며 군사력 증강을 초래하는 것이라며 반대했습니다. 또한 주적인 북한과의 화해와 교류 협력은 국민의 안보의식을 해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보수진영과 야당의 협조 전면 거부에도 불구하고 김 대통령은 이들을 설득하며 인내심을 갖고 극복해 나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통일철학과 화해협력의 햇볕정책은 분단 반세기의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넘어 화해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 놓았습니다. 그는 시작을 해냈습니다. 나머지는 남은 사람들이 채워나가야 할 몫입니다.
맺는 말
3년 전 한국에서는 보수정권이 집권하면서 지난 10년간 진보정부가 추진해온 대북 포용정책은 전면 부정되고, 남북 간의 합의는 파기되다시피 되었습니다. 현 정부는 “先북핵문제 해결 後남북관계 추진”을 주장하며 압박과 제재로 북한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화해 협력의 포용정책을 버리고 북한정권 붕괴를 기다리는 적대적 방관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활기를 띠었던 남북대화와 교류 협력은 중단되었습니다. 북한이 이에 반발하면서 긴장이 조성되고 군사적 해상충돌사건이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10년간 진보정부는 한편으로는 안보테세를 유지하여 평화를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했습니다. 최근 3년동안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으나 결코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난관이 있고 우여곡절이 없지 않겠으나 우리는 김 대통령이 개척한 평화와 화해 협력의 길로 매진할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했던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될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김대중의 위대한 삶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와 정의, 용서와 화해, 관용과 평화를 보게 됩니다. 그의 실천적 삶은 일생을 ‘행동하는 양심’, ‘참여와 실천의 리더십’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작년 6ㆍ15남북공동선언 9주년 강연에서, 한국의 현 정부가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으며 남북관계를 파탄시키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부터 피맺힌 심정으로 호소한다며 “우리가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방관하면 악의 편이다”고 외치며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추구해온 가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그의 유지를 잇고 지키는 일은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를 위한 '행동하는 양심'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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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주최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10주년 기념행사 (2010.12.10, 독일 베를린)
이희호 여사 영상 메시지
존경하는 베를린 자유대학 페리 앙드레 알트 총장님, 앙케 푹스 에버트 재단 이사장님, 그리고 대학 관계자 여러분! 오늘 제 남편인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남편은 1980년 군사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때 때 독일은 제 남편의 구명을 위해 힘써주셨습니다. 폰 바이체커 대통령, 빌리 브란트 수상 등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독일 종교계 지도자들이 제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해주셨습니다. 남편은 생전에 생명을 살려준 독일 친구들의 은혜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은 1970년대부터 한국의 분단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3단계통일론을 제창했습니다. 이 방안은 훗날 ‘햇볕정책’으로 불렸습니다. 남편은 ‘햇볕정책’을 설명하면서 독일 통일의 기반이 된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1993년 잠시 정계에서 은퇴하고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독일 통일 현장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을 위한 독일 지도자들의 지혜를 배웠습니다.
남편은 1998년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여 ‘햇볕정책’을 펼쳤습니다. 분단 이후 처음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2000년 3월 이곳 베를린 대학에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베를린 선언’은 남과 북이 전면적으로 교류협력하자는 선언이었습니다. 남편은 생전에 당시 이곳에서 하신 연설을 자주 회상하셨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기까지 했습니다. 남편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남편은 이러한 남북의 긴장과 대결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세계 평화를 해치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독일에 계신 여러분들께서 남북 당국이 대화하고, 동북아 주변국들이 협력해서 한반도의 상황을 안정시키고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이것이야말로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독일의회 의원님들이 서울 저희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의원님들은 남편을 추모하며 남편을 독일의 가장 큰 친구로, 아시아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평화의 용사로 기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독일분들이 제 남편을 기억해주시는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번 오늘 남편의 노벨평화상 수상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마련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정에 행운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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