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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의배(李義培)
[생졸년] 1576년(선조 9)∼1637년(인조 15) / 향년 61세
조선시대 전라좌수사, 안동부사, 공청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자는 의백(宜伯).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한양군(同知中樞韓陽君) 이흥준(李興俊)이고, 아버지는 장령(掌令) 이흡(李洽)이며, 어머니는 여흥 이씨(驪興李氏)로 예조판서 이우직(李友直)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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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사(節度使) 이의배(李義培) 신도비명(神道碑銘) - 최석정(崔錫鼎)
지난 숭정(崇禎)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에 청인(淸人)이 동쪽으로 침범하여 와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거둥하였다. 적병이 두어 겹으로 포위하고 팔도의 원병(援兵)이 기세만 바라보고 달아나 숨었을 때에 공청도 절도사(公淸道節度使) 이의배(李義培)공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국난(國難)을 구제하러 달려갔다.
군사를 이끌고 죽산 산성(竹山山城)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알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 신하의 충성과 용맹이 어찌 이의배만한 자가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며 칭찬하였다.
그 이튿날 남한산성으로 떠나는데 군사가 반도 나가기 전에 갑자기 적병을 만나 선봉장 이차형(李次衡)ㆍ이근영(李根永) 등이 모두 전사하고 적의 기병이 널리 가득하여 전진할 수 없었다. 영남의 근왕병(勤王兵)이 장차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를 기다려 성원(聲援)으로 삼고자 하여 드디어 죽산으로 돌아가 지켰다. 머물러서 전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경솔히 전하다가 좌절당하면 군기(軍機)를 매우 그르칠 것이니, 그 계책이 옳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영남의 군사가 일제히 이르자 경상좌도 절도사(慶尙左道節度使) 허완(許完)과 경상우도 절도사 민영(閔栐)과 함께 광주 쌍령(雙嶺)으로 나가 세 곳으로 나뉘어 진쳤는데, 적이 먼저 좌군(左軍)을 범하므로 군중(軍中)의 화포(火炮)를 일제히 쏘자 적이 조금 꺾였다.
이윽고 군사가 실화(失火)하여 수십 수백 인이 한꺼번에 타죽어서 세 진(陣)이 다 놀라 동요하고 패하여 흩어지매 적이 기세를 타고 다가왔다. 비장(裨將) 안삼오(安三五)의 하인 귀복(貴福)이 말을 바쳐 타기를 청하니, 공이 꾸짖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면 죽음이 있을 뿐인데, 말은 타고 어딜 가겠는가?” 하였다.
공이 범 갖옷을 입고 진 앞에 버티고 서서 적을 향해 화살을 쏘는데, 지위가 높은 무관은 다 달아나고 비장 이억(李檍)과 영노(營奴) 조축생(曺丑生)만이 남아서 조축생이 화살을 바쳤다. 이윽고 공이 힘이 다하여 땅에 쓰러져 드디어 죽고 이억과 조축생이 따라 죽고 두 절도사도
함께 죽었는데, 이때가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 정월 3일이다.
안삼오 등이 산으로 달려 올라가 패주한 군사와 함께 공이 적을 쏘는 것을 바라보고 유심히 보며 감탄하다가 전사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 발을 구르며 슬피 부르짖었다. 공의 손자 한흥공(韓興公) 이여발(李汝發)은 나이 16세였는데, 병란을 피하여 섬에 있다가 패전한 소식을 듣고 서숙(庶叔) 이간(李稈)ㆍ당숙 이육(李稑)과 함께 샛길로 쌍령의 싸움터에 가서 시체를 찾았으나 못 찾았다.
그 다음 달에 조축생의 아내가 싸움터에 가서 지아비의 주검을 찾아냈는데, 우연히 공의 시체가 두어 걸음 사이에 있는 것을 보고 쑥을 끌어다 덮고 목패(木牌)에 써서 그곳을 표시한 다음 돌아와 한흥공에게 알렸다. 한흥공이 친척 두어 사람과 함께 가서 보니, 얼굴과 수염, 머리털은 손상된 데가 없고 오직 왼쪽 복부 밑과 겨드랑이 사이에 각각 화살 하나씩을 맞았는데, 옷과 겉옷은 다 벗겨가고 다리 아래에 흰 명주 행전(行纏)과 푸른 비단 끈만이 아직 있었다. 드디어 관(棺)을 받들고 돌아가 덕산(德山) 봉명동(鳳鳴洞)의 해좌(亥坐)인 묏자리에 장사하였다.
공의 자(字)는 의백(宜伯)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가정 선생(稼亭先生) 이곡(李穀)과 목은 선생(牧隱先生) 이색(李穡)이 그 선조이다.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이 조선조에 들어와 판서(判書)가 되었고, 이분이 이계전(李季甸)을 낳았는데 한성 부원군(韓城府院君)이고, 이분이 이우(李堣)를 낳았는데 대사성(大司成)이고, 이분이 이장윤(李長潤)을 낳았는데 통정 대부 현감(縣監)이고, 이분이 이질(李秩)을 낳았는데 진사(進士)로서 벼슬하여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으며, 이분이 이지훈(李之薰)을 낳았는데 생원(生員)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이식(李埴)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아주군(鵝州君)이며, 할아버지 이흥준(李興畯)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한양군(韓陽君)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이흡(李洽)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고 찬성(贊成)에 추증되었고 아흥군(鵝興君)이다. 어머니 여흥 이씨(驪興李氏)는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우직(李友直)의 딸인데, 만력(萬曆)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 12월 22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의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고 감찰(監察)로 옮겼다. 이때 왜구가 겨우 철수하였으므로 연해(沿海)의 수령(守令)을 선발할 즈음이어서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대신(臺臣)이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논계(論啓)하여 체직(遞職)되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복제(服制)가 끝나고서는 시사(時事)가 날로 글러 가는 것을 보고 벼슬할 생각을 끊고 반정(反正)의 밀모(密謀)에 참여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반정한 처음에 책훈(策勳)되고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천 부사(明川府使)에 제수되었다. 역적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서 인조가 공주(公州)로 갔을 때에 공의 아들 이목(李穆)이 외숙(外叔)인 부원수(副元帥) 완풍 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를 따라 송도(松都)에서 적을 막았으나 군사가 패하여 적이 서울을 함락시켰다.
이목이 적의 정세를 탐지하려고 몰래 성안으로 들어갔는데 적에게 붙은 자가 잡아서 고하였다. 이괄이 군사로 위협하여 항복시키고 또 쇠채찍으로 무릎을 때리며 완풍군이 있는 곳을 물었으나 욕하고 굽히지 않으니, 드디어 죽였다. 공이 북방 고을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프고 분하여 직무를 다스리지 못하므로 조정에서 그 벼슬을 갈아서 돌아가 장사를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오르고 인동 부사(仁同府使)에 제수되었다.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에 한천군(韓川君)에 봉해지고 공청도 병마절도사(公淸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고 또 김해 부사(金海府使)에 제수되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에 가의 대부(嘉義大夫)에 오르고 이듬해에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얼마 안 지나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옮겼다.
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판서 민성징(閔聖徵)이 감사(監司)였는데 곧 공의 매부이므로 친척 사이라는 혐의 때문에 갈렸다.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에 제주 목사(濟州牧使)와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다 갈려서 부임하지 않고 다시 공청도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청인(淸人)이 틈을 엿보므로, 공이 완풍군에게 말하기를, “저들의 기병과 우리 보병은 형세가 서로 대적할 수 없으니, 예비할 방도로 미리 마군(馬軍)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양정(良丁)을 뽑아 기병으로 삼아서 기예를 시험하고 진법(陣法)을 연습하여 사변에 대비하였다.
이듬해 12월에 변방의 경보가 갑자기 이르자 공이 군사를 모아서 장차 행재(行在)로 가려 하였는데, 감사가 새로 뽑은 마군(馬軍)을 빼앗았고 먼 고을의 군사는 갑자기 미처 와서 모이지 못하므로 근방의 속오(束伍)를 겨우 수천 명 급히 모았다. 공이 집안일을 아우에게 부탁하고
가족을 시켜 흰 명주 행전을 만들어 푸른 비단 끈으로 바지 안 피부 닿는 데에 매어 붙였다.
사람들이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싸움터에 가면 죽을는지 살는지 알 수 없으니, 뒷날 전사하여 언덕이나 습지에서 뒹굴 때에 이것을 표지로 삼고자 한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이는 공이 평소에 결심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공이 별세하고 65년 뒤인 신사년(辛巳年, 1701년 숙종 27) 5월에 나 최석정이 대신(大臣)으로서 어연(御筵, 임금이 신하를 만나는 자리)에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충절을 포상하는 것은 나라의 좋은 법입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 쌍령의 싸움에서 허완ㆍ민영ㆍ이의배, 세 절도사가 함께 순절(殉節)하였는데, 허완과 민영 두 사람은 이미 증직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으나 이의배만은 아직 포상받지 못하였습니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 하성(下城)한 처음에 조정에서 도독(都督) 진홍범(陳弘範)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실정을 밝혔는데, 신의 선조 고(故) 상국(相國) 최명길(崔鳴吉)이 자문을 지었습니다. 세 사람이 전사한 실적이 그 가운데에 매우 분명히 갖추어 실려 있습니다.
이의배에게는 공신에 대한 관례로 증직한 것이 있었더라도 따로 포상하여 증직하는 것이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 뒤에 좌상(左相) 이세백(李世白), 우상(右相) 신완(申琓),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여(李畬), 형조 판서(刑曹判書) 엄집(嚴緝) 등 제공(諸公)이 번갈아 아뢰었는데,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부자가 사절(死節)한 일은 세상에 드문 것이니, 이의배는 의정(議政)에 추증하고 사제(賜祭)하며 자손을 녹용하라. 이의배 부자와 허완ㆍ민영ㆍ조축생은 모두 마찬가지로 정려(旌閭)하라.” 하였다.
공은 처음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한천 부원군(韓川府院君)에 높여 추증하고 겸대(兼帶)도 규례대로 추증하였으며, 예관(禮官)이 치제(致祭)하고 유사(有司)가 의물(儀物)과 작설(綽楔, 정문(旌門))을 갖추어 그 문에 쓰기를, ‘충신 모관(某官) 이의배와 충신 모관 이목의 문’이라 하였다.
하루 안에 부자가 모두 밝은 은전(恩典)을 받았으니, 성조(盛朝)에서 충성을 표창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도리가 이때에 이르러 유감이 없었다. 이억(李檍)도 증직하고 정려하였다. 공은 풍채가 단정하고 중후하며 성품이 인자하고 과묵하였다. 지조가 확고하여 평소에 나태한 모습을 짓지 않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여 입는 의복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무과로 벼슬하였을지라도 서사(書史)를 좋아하여 여가에 ≪논어(論語)≫를 5백 번 읽었다. 전라도 절도사로 있을 때에 군무(軍務)에 관하여 서장으로 아뢸 일이 있으면 조목조목 들어서 아뢴 것이 매우 많았는데, 하리(下吏)를 시켜 집필하게 하고서 입으로 전달하되 말을 끊지 않았으며 말의 조리가 해박 통달하였다.
윤황(尹煌)공이 이때 전주 부윤(全州府尹)이었는데, 자리를 같이하였다가 나가서 남에게 말하기를, “무장(武將)이면서 글에 능통하리라 생각지 못했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되 술에 취해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하였다. 여섯 번 절도사를 맡고 세 번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가는 곳마다 청렴하고 재능이 있는 것으로 일컬어지고 다 비석을 세워서 덕을 사모하였다.
아내는 종성(宗姓)인 이씨(李氏)인데, 제주 목사(濟州牧使) 증 영의정(領議政) 이경록(李慶祿)의 딸이고 완풍군(完豐君)의 누이이다.
덕과 용모를 겸비하였고 식견과 도량이 넓고 컸으므로 완풍군이 국가에 일이 있을 때마다 계책을 물었는데, 부인이 도운 것이 많았으나 끝내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만력(萬曆) 무인년(戊戌年, 1578년 선조 11년)에 태어나서 78세를 누렸고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부인은 아들 이목(李穆)을 낳았고, 측실(側室)에서 네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아들은 이간(李稈)ㆍ이내(李)ㆍ이비(李秠)ㆍ이유(李秞)이고, 딸은 조완기(趙完琦)의 첩이 되었다. 이목은 처음에 판관(判官)에 추증되고 뒤에 아들이 귀히 됨으로 해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한원군(韓原君)에 높여 추증되었으며, 현령(縣令) 김희온(金希溫)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이여발(李汝發)을 두었다.
이여발은 무과로 벼슬하여 여러 번 주(州)와 절도사를 맡고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는데, 훈련 대장(訓鍊大將)ㆍ어영 대장(御營大將)에 두루 제수되었고 승습(承襲)하여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다. 이간의 세 아들은 이여필(李汝苾)ㆍ이여일(李汝一)ㆍ이여흘(李汝屹)이고, 딸은 이두벽(李斗璧)에게 시집갔다.
이내의 딸은 심상한(沈相漢)에게 시집갔다. 이비의 아들은 이여평(李汝平)이고, 두 딸은 심수징(沈壽徵)ㆍ정계(鄭綮)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유의 두 아들은 이여빈(李汝彬)ㆍ이여창(李汝昌)이고, 세 딸은 이두집(李斗集)ㆍ목창민(睦昌敏)ㆍ김이제(金以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조완기의 아들은 조지변(趙之汴)이다. 한흥군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이기하(李基夏)는 무과로 벼슬하여 이제 훈련 대장이 되었고 승습하여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증손(曾孫)ㆍ현손(玄孫)은 다 적지 못한다.
아! 신하가 평소에 관록을 먹으면서 누구인들 충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으랴마는, 변난(變難)을 당하고 사생(死生)에 임하여 목숨을 버리고 변하지 않는 자는 대개 또한 드물 것이다. 공이 적에게 분개하고 국난을 막느라 백인(白刃)을 밟되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겼고, 한원군(韓原君, 이목(李穆))은 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아서 부자가 전후에 용기를 일으켰으니, 청사(靑史)에 빛나는 것이 있다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열렬한 장군은 뭇 사나이 중에서 특출하니, 국난 위해 목숨 버리고 자기 몸을 잊는 것이 곧 그 축적(蓄積)한 것이로다. 오랑캐가 날뛰어 국운(國運)이 크게 어려움을 당하니, 한 조각 남한산성에 달려가 문안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공이 호서의 군사를 거느리고 분개하여 떨쳐 일어나, 갑옷 입고 지친 몸 채찍질하여 피눈물을 씻으며 스스로 맹세했도다.
군사를 거느리고 일제히 달려서 쌍령에 나아가 진을 쳤는데, 적을 만나 서로 부딪치자 군사는 줄어도 기세는 강했도다. 화살은 부러지고 창은 꺾어지고 해와 별은 어두워지니, 애달픈 우리 세 장수가 모두 흉봉(兇鋒)을 당하였도다. 충성과 용맹을 임금이 포상하여 영예로우니, 백세(百世)토록 풍도(風度)를 흠모하여 어엿이 생전과 같으리라.
임금이 은혜로운 말씀을 내려 증직하고 정려하였는데, 세월이 오래 될수록 더욱 뻗어나가니 때가 기다림이 있는 듯하도다. 공의 자손이 이어서 대장이 되어, 집안이 대단히 빛났으니 선행(善行)의 끼친 복을 하늘이 정함이로다. 덕산(德山)의 높다란 곳은 굳센 넋이 묻힌 곳이니, 좋은 말을 명각(銘刻)하여 한없는 후세에까지 분명히 드러내노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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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節度使韓川君李公神道碑銘 - 崔錫鼎 撰
昔在崇禎丙子。淸人東猘。仁祖幸南漢。敵兵圍之數匝。八路援兵。望風奔竄。時則有公淸節度使李公義培提孤軍赴難。引兵入竹山山城。報聞行朝。上曰。朝臣忠勇。豈有如某者乎。爲之嗟賞。其明日。發向南漢。軍未半出。猝遇賊兵。前鋒將李次衡,李根永等皆戰死。賊騎遍滿。不可前進。聞嶺南勤王兵且至。欲待此爲聲援。遂還保竹山。有以逗遛不進爲言者。上曰。輕進見挫。則甚誤軍機。其計未爲不可。及嶺南軍齊到。與慶尙左節度許完,右節度閔栐。偕進廣州之雙嶺。鼎足而陣。賊先犯左軍。軍中火砲齊發。賊少挫。已而軍中失火。數十百人。一時燒死。三陣皆驚擾潰散。賊乘勢進薄。裨將安三五,僕人貴卜進馬請騎。公叱之曰。事至此。惟有死耳。乘馬何之。公衣虎裘。立陣前射賊不已。諸將佐皆亡去。獨裨將李檍,營奴曹丑生在。丑生奉矢。俄而公力盡仆地。遂死之。檍與丑生從死。兩節度亦同死。時丁丑正月三日也。安三五等跳上山。與潰軍望見公射賊。注目嗟歎。及見其戰沒。莫不頓足悲號。公之孫韓興公汝發年十六。避兵在海島。聞敗報。與庶叔稈,堂叔稑。間道赴雙嶺戰場。求體骸不得。其明月。丑生妻往戰場。求得夫尸。偶見公體在數武間。捽蓬蒿以掩之。書木牌識其處。歸告韓興。韓興與親戚數人往視之。面貌鬚髮無損。惟左腹下及腋間。各帶一箭。衣裘盡被脫去。獨脚下白紬行纏及靑綿絛尙在。遂奉喪歸葬于德山鳳鳴洞亥坐原。公字宜伯。系出韓山。稼亭先生穀,牧隱先生穡。卽其先也。良景公種善。入本朝爲判書。生季甸。韓城府院君。生堣。大司成。生長潤。通政縣監。生秩。以進士仕。封韓城君。生之薰。生員。贈左承旨。卽公高祖也。曾祖諱埴。僉知中樞。贈吏曹參判鵝洲君。祖諱興畯。同知中樞韓陽君。贈左贊成。考諱洽。司憲府掌令。贈贊成鵝興君。妣驪興李氏。禮曹判書友直之女。萬曆丙子十二月廿二日生公。己亥。登武科。拜宣傳官。轉監察。時倭寇纔撤。擇沿海守宰。除保寧縣監。臺臣以年少啓遞。戊申。丁外艱制畢。見時事日非。絶意求仕。與聞靖社密謀。癸亥改玉。初策勳陞通政。除明川府使。賊适擧兵反。仁祖狩公州。公之子穆。隨舅副元帥李完豐曙。禦賊于松都。師潰。賊陷京師。穆欲探賊情。潛入城。附賊者執以告。适以兵脅降。且以鐵撾。撾膝問完豐所在。罵不屈。遂殺之。公在北郡聞喪哀慟。不能理官事。朝廷遞其職。俾歸觀葬。俄陞全羅左水使。又除仁同府使。庚午。封韓川君。拜公淸兵馬節度使。又拜金海府使。辛未。陞嘉義。明年。拜全羅兵馬節度。官滿。爲五衛都摠府副摠管。出爲黃海兵使。未幾。移節關西。又拜咸鏡南道兵使。閔判書聖徵爲監司。卽公之妹壻。以親嫌遞。乙亥。拜濟州,廣州牧使。皆遞不赴。再授公淸節度。時北人伺釁。公謂李完豐曰。彼騎我步。勢不相敵。備豫之道。當先治馬軍。遂簽得良丁爲騎兵。課技藝鍊陣法以待變。其明年十二月。邊警猝至。公聞變聚兵。將赴行在。監司奪新簽馬軍。遠邑兵倉卒不及來會。急收傍近束伍僅數千。公以家事屬其弟。令家人作白紬行纏。以靑綿絛爲繫。於袴內親膚以着。人問之。公曰。將臨陣。死生不可知。他日原隰。欲以此爲識。卒如其言。此可見公之素定也。公歿後六十五年辛巳五月。錫鼎以大臣。入侍御筵啓曰。褒尙忠節。有國之令典。丙子雙嶺之戰。許完,閔栐,李義培三節度俱殉節。許閔兩人已贈職。錄用子孫。而義培獨未蒙褒美。丁丑下城初。朝家移咨于陳都督弘範。以暴小邦情實。臣先祖故相臣鳴吉承命譔咨文。三人戰亡實跡。具載其中甚明。義培雖有功臣例贈。宜別有褒贈。上允之。其後左相李世白,右相申琓,吏曹判書李畬,刑曹判書嚴緝諸公交口上陳。上下敎曰。父子死節。世所罕有。李義培可追贈議政。賜祭錄子孫。義培父子及完,栐,丑生。並一體旌閭。公初贈兵判。至是加贈議政府領議政韓川府院君。兼帶如例。禮官致祭。有司具儀物棹楔。題其門曰忠臣某官李義培,忠臣某官李穆之門。一日之內。父子並膺昭典。盛朝表忠崇節之道。至是無餘憾矣。檍亦贈職旌閭。公風儀端重。性仁慈簡默。志操堅確。平居不設惰容。雅尙淸素。被服如寒士。雖以跗注進。好書史。居憂。讀論語五百遍。其爲節度湖南。有軍務狀聞事條奏甚多。令下吏執筆口授。不絶辭。辭理該暢。尹公煌時爲全州尹。同坐出語人曰。不謂武將而能是。好飮酒。未嘗有酒失。六任閫寄。三典州郡。所至以廉能稱。皆立碑思德。配宗姓李氏。濟州牧使贈領議政慶祿之女。李完豐之妹也。德容兼備。識度弘遠。完豐每値國家有事。輒詢訪計策。夫人多贊助。而終不以語人。以萬曆戊寅生。享年七十八。祔葬公墓。夫人擧一男穆。側室四男一女。稈,䅘,秠,秞。女爲趙完琦妾。穆初贈判官。後以子貴。加贈戶曹判書韓原君。娶縣令金希溫女。有一子汝發。以武科進。累典州梱。官至知中樞府事。歷拜訓局御營兩大將。襲封韓興君。稈三男汝苾,汝一,汝屹。一女適李斗璧。䅘一女適沈相漢。秠一男汝平。二女適沈壽徵,鄭綮。秞二男汝彬,汝昌。三女適李斗集,睦昌敏,金以濟。趙完琦一男之卞。韓興有四男三女。其長胤基夏。亦以武進。今爲訓鍊大將。襲封韓城君。曾玄不盡記。噫。人臣平日食官祿。孰無願忠之心。及遭變難臨死生。授命不渝。蓋或鮮馬。若公之敵愾捍艱。蹈白刃如歸。洎韓原罵賊不屈。父子立慬前後。可謂有耀靑史矣。銘曰。
烈烈將軍。百夫之特。殉國忘身。乃其蓄積。狄人猖獗。天步孔艱。一片漢山。奔問無人。公帥湖西。慨然投袂。擐堅策羸。
頮血自誓。協師齊驅。進次雙嶺。遌賊相薄。兵疲氣勁。矢折戈摧。日星晦蒙。哀我三帥。倂罹兇鋒。惟忠惟勇。聖褒則榮。
百世欽風。凜乎如生。王錫恩言。贈官表閭。久而彌伸。時若有須。公有孫仍。繼受旌銊。門戶赫奕。善慶斯騭。德山峨峨。
毅魄攸藏。銘于好辭。昭示無疆。<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