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程顥), 정이(程頤)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는 한 살 차이의 형제로 북송대 신유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는데, 이 둘을 보통 '이정(二程)'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장재(張載: 1020-1077)의 조카였으며, 당시 북송 사상계의 대표적 인물들인 주돈이(周敦 : 1017-1013)와 소옹(邵雍: 1011-1077)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따라서 이들 다섯 사람들을 함께 '북송오자(北宋五子)'라고 부르고 북송대 신유학 형성에 기여한 대표적 인물들로 간주하고 있다.
정호와 정이는 서로 형제이지만 기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방식에 관해서도 서로가 독자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어서, 이들의 사상 속에는 공통점과 동시에 현격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이들은 리(理)라는 새로운 철학적 범주개념을 확립하여, 두 사람 다 이를 토대로 고대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개하였는데, 동생 정이가 송대 신유학에 이성주의적 사유를 현창시켰다면, 정호는 관념론적 사유를 발전시켰다.
리(理)라는 개념은 고대 중국사상과 위진(魏晉) 시대 신도가(新道家), 중국불교 등에서도 이미 쓰이고 있다. 그러나 리(理)를 토대로 철학사상을 구축한 것은 이정 형제가 처음이다. 이들의 성찰에 의하면, 리(理)는 인간과 자연세계가 성립하는 보편적 법칙이자 동시에 인간이 사회적으로 실현해야 할 준칙이다. 자연세계의 생성과 소멸과정도 반드시 리(理)에 따르며, 인간사회의 운영원리도 반드시 리(理)에 의거한다. 자연과 인간의 근거자로서 리(理)는 현상세계에서 다양성으로 표현되지만 이들 다양성은 언제나 동일한 통일성을 갖는다. 모든 개체들은 이 리(理)를 구비하고 있으며, 이 리(理)의 측면에서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은 연대를 이룰 수 있다. 말하자면 리(理)는 자연법칙이자 도덕법칙이며, 일반원리이자 개별적인 법칙과 규범이기도 하다.
이정은 또한 이러한 리(理) 관념을 인간이 투철하게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수양론을 제기하면서, '경(敬)'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켰다. 경은 내면적인 사유과정 속에서나 바깥으로 나타나는 행위과정 속에서 언제나 유학의 근본이념, 즉 천리(天理)를 지향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정은 인간의 정신적 태도에서 경(敬)의 상태가 항상 기저에 살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학에 대하여 이정이 제기한 이러한 관점은 북송 초기 신유학의 우주론적 경향을 전환시켜, 유가사상이 성찰해낸 인간의 참다운 본성을 실현해내는 방법과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에 집중적으로 사유하도록 이끌었다. 이로써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중국사상사의 한 장르가 성립되고 이후 동아시아 역사의 전개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정의 지적 편력과정을 보면, 이들도 젊어서는 불교와 도가사상에 심취하였던 적이 있었으며, 당시 지식인들의 관례대로 과거시험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주돈이 등을 통하여 진정한 진리로써 도(道)에 관심을 두게 되고 육경(六經)에 대한 독서를 통해 유학사상에 대한 성찰들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정이 자주 언급하는 '천리(天理)'의 개념은 이들 자신이 스스로 확립한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철학사적으로는 이정의 사상과 주돈이 등의 연관관계가 문제되어 왔다. 이정의 사상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시킨 주희(朱熹: 1130-1200)는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등을 통해서 상호 연관시켜 성리학의 발전을 체계화하고 있지만, 전조망(全祖望: 1705-1755)을 비롯한 많은 후대 학자들은 이정이 당시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를 비롯하여 도가적 색채를 지닌 주장들을 비판하고 수용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정 사이의 차이점에 대하여 말해보면, 먼저 정이가 '리일분수(理一分殊)' 등의 개념으로 리(理)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강조한다면, 정호는 자발적인 생명력의 원천으로써 리(理)의 개념을 강조한다. 정호는 자연적인 생명력이 자연과 인간 모든 곳에 편만하게 스며있음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체험적 성찰을 통해서 타자와 일체가 되는 의식을 내면에 확충하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다. 따라서 정호는 수양론에서도 기질에 의한 장애를 변화시키기 위한 규범적 훈련보다 만물과 일체를 이루는 원천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본성을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둘러싸고 천리(天理)에 대한 객관적인 탐구와 규범적 훈련보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본성에 대한 자각을 더 중시화는 경향은 육구연(陸九淵: 1139-1193)과 왕수인(王守仁: 1472-1529)에게서 다시 주장된다.
한편 정호는 장재와 주고 받은 서신 속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정호는 정서와 욕구를 금욕주의적으로 억제하는 방법을 가지고서는 마음의 참된 안정에 이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천리(天理)에 따라 정서를 자연스럽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이는 '리일분수(理一分殊)'라는 명제를 통해 천리의 동일성과 다양성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천리의 객관성과 공(公)으로서의 특징을 강조한다. 그는 천리를 사욕(私欲)과 대립시켜서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뿐만 아니라 사욕을 제거하는 공부를 동시에 강조한다. 따라서 그의 수양론은 객관적 법칙이자 도덕적 준칙으로써 가지는 천리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는 궁리(窮理) 공부와 함께 사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이의 이런한 관점은 주희에 이르러 더욱 체계화되고 있다.
정이는 또한 {주역}에 대한 주석으로써 {역전(易傳)}을 남기고 있다. 그는 {주역}에 대한 상수학적 이해를 지양하고 유학의 이념과 결부시켜 해석함으로써 {주역}이 유하자들의 수양론에 한 기반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역학사적으로 보면 {주역}에 대한 '의리(義理)'적 해석의 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정이(程頤, 1033년~1107년)는 중국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이다. 형 명도(明道) 정호와 더불어 성리학과 양명학 원류의 한 사람이다.
자는 정숙(正叔). 형인 명도보다 1년 늦게 하남(河南, 현재의 허난 성에 속함)에서 출생하여 이천선생(伊川先生)으로 호칭되었다.
정이천(程伊川) -시
程子曰 天下之英才가 不爲少矣로되 特以道學不明이라 故로 不得有所成就니라.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천하(天下)에 영재(英才)가 적지 않되 다만 도학(道學)이 밝혀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성취한 바가 있지 못한 것이다.
夫古人之詩는 如今之歌曲하여 雖閭里童稚라도 皆習聞之而知其說이라
故로 能興起러니 今엔 雖老師宿儒라도 尙不能曉其義온 況學者乎아 是不得興於詩也니라.
대저 옛사람들은 시(詩)를 오늘의 가곡(歌曲)처럼 마을의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익히 들어서 그 가사(歌詞)를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능히 흥기할 수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노사(老師)와 숙유(宿儒)들도 오히려 그 뜻을 밝게 알지 못하니, 하물며 배우는 자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는 시(詩)에 흥기(興起)하지 못하는 것이다.
古人은 自灑掃應對로 以至冠昏喪祭에 莫不有禮러니 今皆廢壞라 是以로 人倫不明하고 治家無法하니 是不得立於禮也니라.
옛 사람들은 물을 뿌리고 청소하며 응대(應對)하는 것으로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이르기까지 예(禮)가 있지 않음이 없었는데, 지금은 예(禮)가 모두 폐기하고 허물어졌다. 이 때문에 인륜(人倫)이 밝혀지지 못하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法度)가 없는 것이니, 이는 예(禮)에 서지 못하는 것이다.
古人之樂은 聲音所以養其耳요 采色所以養其目이요 歌詠所以養其性情이요 舞蹈所以養其血脈이러니 今皆無之하니 是不得成於樂也니라 是以로 古之成材也는 易하고 今之成材也는 難이니라.
옛사람의 음악은, 소리는 귀를 기르고, 채색은 눈을 기르며, 노래와 읊는 것은 성정(性情)을 함양하고, 무도(舞蹈)하는 것은 혈맥을 기르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모두 없어졌으니 이는 악(樂)에 완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옛날에 인재를 이루기는 쉬웠는데, 지금은 인재를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다."
*** 정자는 정이천(程伊川) 선생을 말하는 것 같다. 伊川선생은 明道선생의 동생이며 주염계의 제자이다. 송나라 성리학의 정통은 정이천 - 양구산 - 나예장 - 이연평 - 주회암[朱子] 로 계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