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차산 이야기
개로왕은 어디서 죽었을까?
개로왕은 비유왕의 맏아들로 근개로왕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455년 9월 비유왕이 정변으로 살해되자 백제 조정은 내분으로 인해 심한 혼란을 맞는다. 개로왕 즉위년 12월 고구려가 공격해오자 신라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침락을 막았으며, 십년이상의 내분 끝에 개로왕이 한성을 접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에 가담했던 장수들은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이들 중 후에 개로왕을 생포하는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그들 중 하나로 판단하고 있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협공을 가하자는 제의를 하였으나 고구려의 방해로 북위와의 협상은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첩자를 파견하여 개로왕으로 하여금 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도록 부추겨 백제의 군사력을 떨어뜨린 후, 급습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첩자노릇을 한 자가 바로 승려 도림(道琳)이었으며 마치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것으로 속여 백제에 잠입하였다.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를 무척 좋아하였는데 바둑의 고수였던 도림은 그 점을 이용하여 개로왕에게 접근하고, 개로왕을 부추겨 비유왕 능을 조성케하고 궁실과 성을 새로 짓도록 하여 국고는 비고, 민심은 개로왕에게 멀어지게 되었다.
서기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은 7일간의 공격 끝에 한수 남쪽의 북궁인 풍납토성을 함락하고, 남궁에 머물던 개로왕은 과거 백제 장수였던 재징걸루에게 잡히게 되었다. 걸루는 개로왕을 사로잡자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일어나 개로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 죄목을 따졌다. 죄목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아마도 개로왕이 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걸루의 혈족과 그 측근들을 대거 죽인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개로왕은 걸루에 의해 한수 북쪽 아차성으로 압송되고 그곳에서 장수왕에게 수모를 당한뒤 참형에 처해진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은 죽은 그의 시신을 백제에 돌려주지 않았기에 개로왕의 시신은 비석도 없는 상태에서 아차성 근처 어느 산비탈에 묻혀 졌을 것이다. 그 정확한 곳은 알 수 없으나 명색이 일국의 왕의 죽음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나 짐작할 수 있다.
아차산 보루와 관련된 고대기사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조로 백제의 한성 함락기사를 다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인 475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 :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백제의 왕도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고구려의 대로(對盧 : 벼슬 이름)인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성 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개로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사로잡혔다. 과거 개로왕의 신하였다가 고구려에 망명한 장수 재증걸루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여기에서 북성은 한강 남안의 풍납토성(風納土城)으로, 남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아차성은 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추정되며, 개로왕이 본래 백제 신하였던 걸루에게 ‘아차성 아래’에서 죽음을 맞았음을 알수 있다.
<백제본기 원문>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 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 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先是 高句麗長壽王 陰謀百濟 求可以間諜於彼者 時 浮屠道琳應募曰 “愚僧旣不能知道 思有以報國恩 願大王不以臣不肖 指使之 期不辱命” 王悅 密使譎百濟 於是道琳佯逃罪 奔入百濟 時 百濟王近蓋婁 好博 道琳詣王門 告曰 “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 王召入對碁 果國手也 遂尊之爲上客 甚親之 恨相見之晩 道琳一日侍坐 從容曰 “臣異國人也 上不我疎外 恩私甚渥 而惟一技之是效 未嘗有分毫之益 今願獻一言 不知上意如何耳” 王曰 “第言之 若有利於國 此所望於師也” 道琳曰 “大王之國 四方皆山丘河海 是天設之險 非人爲之形也 是以四之國 莫敢有心 但願奉事之不暇 則王當以崇高之勢 富有之業 人之視聽 而城郭不葺 宮室不修 先王之骸骨 權於露地 百姓之屋廬 屢壞於河流 臣竊爲大王不取也” 王曰 “諾 吾將爲之” 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於其內作宮樓閣臺 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是以倉庾虛竭 人民窮困 邦之 甚於累卵 於是 道琳逃還以告之 長壽王喜 將伐之 乃授兵於帥臣 近蓋婁聞之 謂子文周曰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避難以續國系焉” 文周乃與木滿致·祖彌桀取 木·祖彌皆複姓 隋書以木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至是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萬年再曾·古皆複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之 桀婁·萬年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論曰 楚明王之亡也 公辛之弟懷 將弑王曰 “平王殺吾父 我殺其子 不亦可乎” 辛曰 “君討臣 誰敢讐之 君命天也 若死天命 將誰讐” 桀婁等自以罪不見容於國 而導敵兵 縛前君而害之 其不義也甚矣 曰 “然則伍子胥之入鞭尸何也” 曰 “楊子法言評此 以爲不由德 所謂德者 仁與義而已 則子胥之 不如公之仁 以此論之 桀婁等之爲不義也 明矣”
《 21(475)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四道]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이에]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危懼] 혹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하여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에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였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나기가 늦은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上]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한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 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하였다.
도림이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萬年) [재증(再曾)과 고이(古)는 모두 복성이었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本國人]이었는 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하였었다.
사론(史論) : 초(楚)나라 명왕(明王)이 운땅으로 도망하였을 때에 운공신(隕公辛)의 아우 회(懷)가 왕을 시해하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평왕(平王)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 신(辛)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토죄(討罪)하는 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이니 만일 하늘의 명에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할 것인가 ”
걸루(杰婁) 등은 스스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였는데도 적병을 인도하여 이전의 임금을 결박하여 죽였으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다. 이르기를 “그러면 오자서(伍子胥)가 영(逞)에 들어가서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한 것은 어떠한가 ” 하니, 이르기를 “양자법언(楊子法言)에 이를 평하여 ‘덕(德)에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것은 인(仁)과 의(義)일 뿐이니 자서(子胥)의 사나움은 운공의 어짊만 같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논한다면 걸루 등의 의롭지 못함은 명백한 것이다.》
아차산 4보루는 누가 축성하였나?
보루나 성곽은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정기간 토목공사로 구축된 것이므로 현재 남겨진 보루는 초축세력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아차산 일대에서 조사된 고구려유적은 군사요새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봉우리 정상을 중심으로 입지하고 있다. 주변지역 특히 한강 남안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를 조망하기 위한 것으로 이들 보루군은 아차산과 용마산 줄기를 따라 2줄로 배치되어 있으며, 보루들 사이의 거리는 400~500m 가량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인데, 구의동 보루 발굴 당시 유적 아래쪽 능선에 목책 구덩이로 보이는 시설이 확인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각 보루는 목책(木柵) 등의 시설로 서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일부 유적들 사이에는 소규모 석축이 남아있기도 하다.
이렇게 입지상 강남의 중심지를 향하고 있고, 고구려 토기편 외에 발견되는 유물이 거의 없으며, 같은 구조의 구의동 보루와 아차산 제4보루의 형태유적이 고구려의 중심지인 집안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고 사용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차산 보루의 성격과 주변 관방체계
삼국시대의 군사편제에 대한 문헌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구의동 보루의 경우 군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류와 취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철솥이 그대로 방치된 점으로 보아 적군의 기습으로 주둔군이 전멸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차산 보루는 이와 달리 무기와 철부를 수습하여 철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차산 4보루는 구의동보루에서 직선 거리로 5km가량 떨어진 산악지형으로 도보로 약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따라서 구의동 보루가 적군에게 기습을 받은 것을 확인하고 무기와 장비를 수습하여 퇴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이를 바탕으로 무기의 수에 따라 주둔한 군사의 수를 추정하면 구의동 보루에는 10명 주둔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무기류는 당시 개인 소지품으로 무기류의 수량이 결국 이곳에 주둔한 군사의 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의동에서 출토된 무기류는 철도2자루, 철모9점, 철부(유공부)4점, 철촉 1.300여점이다. 이때 개인 무기로 추정한 것은 철도, 철모, 철부인데 고구려 벽화고분에 그려진 무사들의 경우 칼(鐵刀)를 차고 있으면서 철모(鐵)를 들고 있으므로 철도는 군사의 수를 세는데서 제외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철부는 형태상 공구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아차산 4보루의 경우 40여점의 유공철부(단조철부)가 출토되었으나 횡공부(橫 斧)는 2점만 출토되었고, 유공철부와 횡공부는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양상으로 출토되고 있어 유공부는 근접전을 제외하면 무기로서의 효용이 떨어지므로 제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구의동 보루에 주둔했던 군사는 9명으로 대략 1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군사 수는 『신당서』의 내용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즉 『신당서』 제50 병지에 보면 고대부대의 최소단위는 10명으로 이를 ‘화’라 했으며, 다음 ‘대’는 ‘화’를 다섯 개 합친 것으로 50명으로 구성되었고, 대의 다음 단위는 단으로 단은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있다.
또한 『삼국사기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도 상양왕23년조에 수양제가 113만의 대군으로 고구려에 침입할 때 내린 조서(詔書)의 기사를 참고 할 수 있다.
『… 帝親授節度. 海軍上將亞將各一人上, 騎兵四十隊長,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 團各有偏將一人.…』
이 기록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입할 때 수의 군대 편제를 적고 있는데 각 군에 상장과 아장이 1명씩 있고, 기병은 40대인데 각 대는 100명이고, 10대가 1단이 되었다. 보졸은 80대 인데 4단을 만들었으며, 단마다 편장 1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기록이 중국의 경우를 기록한 것이어서 그대로 고구려 군대의 편제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고구려에도 이러한 부대 편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과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최소9명, 최대13인으로 즉 대략 10여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구의동보루는 10명 정도 단위의 부대가 주둔했던 전초기지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차산 4보루는 둘레 210여 m, 성벽내부에 모두 7기의 건물지, 13기의 온돌 설치가 되어 있으며, 온돌 하나 또는 두기가 하나의 단위을 이루고 있으며, 온돌 주변에는 할석을 1~2줄 쌓아 방형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토기류가 온돌 주변의 방형공간 내부에서 출토된다. 즉 온돌시설 중심으로 하나의 부대단위를 이루며 취사행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온돌시설을 포함한 방형 구획의 면적은 대체로 15평내외의 규모이다. 그런데 구의동 보루의 온돌을 포함한 실내 면적이 14평 가량되므로 아차산 4보루의 온돌시설을 포함한 방형 공간에도 같은 수의 군사가 생활했다고 할 수 있다. 아차산 4보루에는 모두 10개의 온돌을 포함한 방형공간이 구획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최소부대단위가 10개정도 주둔하고 있었으며, 100여명의 군사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근 까지의 아차산 일원의 조사 성과를 통해 보면 이들 각 보루에는 10명(구의동 보루), 50명(홍련봉 1보루), 100명(아차산 4보루, 시루봉 보루)의 단위로 군사들이 주둔하였으며, 아차산 일원에 주둔했던 전체 군사의 수는 2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차산 일원은 의정부와 양주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마지막이며 이 산 줄기 좌우에는 중랑천과 왕숙천을 낀 비교적 넓은 평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요인을 고려해 볼때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3만~5만명 가량의 군사가 이동하기는 어려우며 많은 수의 군사들은 중랑천이나 왕숙천 변의 평지를 따라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일대 보루군 개관
보루는 보루성으로도 불리며,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낮은 봉우리에 쌓은 소형 석축산성으로, 산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군사시설을 말한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출토유물이나 축성방법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 유적으로 보이며, 분포지역으로 볼 때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유역을 진압한 후 신라와 백제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6세기 중반까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정세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중랑천과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이 유적은 홍련봉 1·2보루와 아차산 1·2·3·4·5보루, 용마산 1·2·3·4·5·6·7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보루 등 17개의 보루로 이루어지는데, 그중 일부를 제외한 10여 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들 고구려보루는 현재 남한에 집중 분포하는 고구려 관련 유적으로서 당시 고구려 군사시설의 면모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고구려는 한동안 몽촌토성에 군대를 주둔시키다가 6세기초 무렵 진지를 한강 이북으로 후퇴시킨 뒤 아차산 일대에 보루를 쌓고 한강과 중랑천, 왕숙천 유역을 감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국경지대 요새의 구조와 성격은 물론이고 국경 방위체계, 군 편제 등을 규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고구려의 남하 과정,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대치와 관리방식, 영토분쟁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유적이다.
최근 조사된 홍련봉 1보루에서 당시 고구려 궁궐 등에 사용된 기와 등이 나왔고 수락산보루 일대에서는 철제 마구와 고구려 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차산보루에서는 고구려 건물터, 돌널무덤, 온돌, 토기,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아차산의 자연환경
아차산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쪽과 구리시 서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흔히 서쪽의 용마봉, 북쪽의 망우산 및 봉화산 등 주변 산지를 포함하여 아차산이라 부른다.
아차산의 남쪽에는 서울의 젖줄이라 불리는 한강이 흐르고 있고, 맞은쪽 한강 남안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아차산 서쪽으로는 중랑천, 동쪽으로는 왕숙천이 흘러서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이들 강 유역은 저평한 충적 평야가 비교적 넓게 발달해 있다.아차산은 해발 285.8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나, 용마봉(해발 348m)과 함께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아차산에서는 한강 이남의 전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으로 는 멀리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아차산 일대는 고대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아차산 일원 고구려 보루의 입지도 이러한 지리적, 지형적 이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차산의 유적현황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아차산과 용마산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고 있는 것들과 한강변에 인접한 것들의 두 부류로 나뉘며, 모두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곳에 입지하고 있다. 한강변에 인접한 보루는 구의동 보루가 유일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뚝섬 근처의 자양동 일대에도 보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중랑천 하구에서 아차산 자락에 이르는 한강변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보루들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강변의 보루들은 아차산 능선의 보루들보다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 능선의 보루들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봉우리의 정상을 중심으로 입지하고 있는데, 이는 주변 지역, 특히 한강 남안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를 조망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보루는 아차산과 용마산 줄기를 따라 두 줄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지형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형상 아차산 능선에서는 서쪽의 중랑천변을 조망하기 어려우며, 반대로 용마산 능선에서는 동쪽의 왕숙천변을 조망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차산 동서의 평지를 관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열의 보루를 축조해야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루 사이의 거리는 400~500m 가량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인데, 각 보루는 목책(木柵)이나 석축 등의 시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 보루군의 특징
성벽 내부의 평탄지에는 군용 막사로 이용된 여러 기의 건물과 저수 시설 및 배수 시설 등이 설치되었는데, 구의동 보루의 경우는 수혈식 건물이 1채 축조되었으며, 그 내부에 방형 저수 시설과 온돌 및 배수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차산 고구려 보루 출토유물
아차산 4보루에서는 모두 26개 기종 538개체분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류는 모두 실생활용이며, 각 기종별 출토량에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 유적이 폐기된 후 다른 세력에 의해 점유된 바가 없으므로 거의 당시의 토기상을 반영한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출토된 토기류는 주로 온돌유구 주변에서 출토되었다. 기능상 저장용, 운반용, 조리용, 배식용 등으로 구분되는데 대형옹류나 직구옹류는 저장용, 양이부장동옹류는 운반용으로 분석된다. 시루류는 조리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동이류와 광구호류 및 이부호류는 조리 준비용으로, 완료 및 종지류, 반류와 구절판, 접시류는 배식기용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종별 출토 빈도를 보면 옹류가 가장 많고 장동호류, 호류, 접시류, 동이류 순인데 호나 옹류가 전체의 30%가 넘는다.
토기의 표면에 문양이 시문된 예는 아주 적으며, 일부 문양이 있는 경우는 모두 암문에 의한 횡선문이나 격자문, 연속고리문 등이다. 또한 접시류와 완류 및 동이류에 여러 내용이 담김 명문이 음각된 것이 있어 유적 성격과 관련한 중요한 정보가 되고 있다.
철기류는 1식의 투구를 토함하여 총 319점으로 무기류, 마구류, 농공구류, 용기류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외에 용도불명의 철기가 다량 포함되어 있다. 무기류는 197개체로 전체 철기류중 39%에 해당한다. 이중 공격용 무기에 해당하는 大刀, ?(창 끝부분 장식), 철도끼(橫孔斧), 낫(鎌), 화살(鐵鏃), 등이다. 특히 철촉은 날아갈 때 소리가 나도록 고안된 명부가 표현된 삼익형철촉도 출토되었다.
방어용무기로는 찰갑과 철주가 출토되었다. 찰갑은 여러 점의 찰편들이 흩어진채로 확인되었는데 6개의 건물지에서 모두 확인되며 그중 6호 건물지에 가장 많이 밀집되어 출토되었다.
철제용기류의 소유는 매우 한정되어 있는 기물이어서 출토량 보다는 존재 자체가 의미가 있는데 완형은 한 점도 없고 일부 편만 남아있다. 이점은 구의동 보루에서 완형의 철제 항아리(壺와) 솥(釜)이 아궁이에 걸린 채로 출토된 점과는 크게 대조되는 사실로 아차산 4보루와 구의동 보루의 폐기 사항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기타 각 범주에 속하지 않는 용도미상의 철제품 등이 있으며, 이중 쇳물 등이 굳으면서 형성된 슬래그 등은 2호 온돌과 관련이 있어 간이 대장간으로서의 2호 온돌의 성격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다량의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용도에 따라 저장용, 조리용, 배식용, 운반용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대부분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된 실용기이다. 접시를 비롯한 배식기에는 문자를 새긴 것도 있다.
기타 와전류
많은 양은 아니지만 벽돌과 기와류가 출토되었는데, 벽돌은 구의동 보루에서만 출토되었으며, 기와류는 홍련봉 1보루에서만 출토되었다. 기와 표면의 색은 붉은색이나 회색을 띤다.
기왓등의 무늬는 대부분 꼰무늬(?文)이며, 길이 방향으로 시문된 것이 일반적이다. 기와 내면에는 기와 제작과정에서 사용된 포흔(布痕)이 찍혀 있으며, 이른 시기 기와의 특징인 모골흔(模骨痕)이 뚜렷하다. 특히 홍련봉 1보루에서는 다량의 기와와 함께 연꽃무늬 수막새가 3점 출토되어 당시 기와나 와당이 주요한 시설에만 사용되는 점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하다.
아차산 보루의 사용과 폐기
아차산 일원의 보루들은 출토 유물의 연대와 역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551년에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폐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발굴 성과를 비교해보면 보루의 폐기된 양상에는 뚜렷한 차이가 발견된다. 한강변에 입지한 구의동 보루의 경우 조사결과 온돌 아궁이에 두 개의 쇠솥이 걸려 있었으며, 다량의 무기류가 원래 위치에 놓인 채 완형으로 출토되었으며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그러나 아차산 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능선상의 보루들의 경우에는 아궁이에 쇠솥이 없었으며, 파손된 무기 몇 점을 제외하고는 무기류가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그리고 화재의 흔적을 전혀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 종합해보면 구의동 보루는 갑작스런 기습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보루에 주둔했던 병사들은 겨우 일부가 도망가거나 전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아차산 능선상의 보루에 주둔하던 고구려군은 구의동 보루를 비롯한 한강변 보루들이 공격당하자 쇠솥과 무기류 등 주요 장비를 거두어 철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이들 보루 중 일부는 7세기 이후 신라군에 의해 재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땅 속에 묻혀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의미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는 한강을 경계로 한 고구려의 최남단 방어 기지의 역할을 하였으며, 대략 500년을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어 백제군의 공격이 있었던 551년에 폐기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 이들 각 보루에는 10명(구의동 보루), 50명(홍련봉 1보루), 100명(아차산 4보루, 시루봉 보루)의 단위로 군사들이 주둔하였으며 , 아차산 일원에 주둔했던 전체 군사의 수는 2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보루의 입지와 와당이 출토된 기와 건물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보아 중심 부대는 홍련봉 1보루에 주둔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차산 고구려 보루에서의 전쟁
서기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풍납토성을 함락하고,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인다. 그후 장수왕은 남녀 포로 8천 명을 잡아 돌아가고 고구려군 일부는 몽촌토성에 주둔하면서 아차산 일원의 보루를 구축하고 지속적인 한강유역의 점거 및 남진을 시도한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한강 유역으로 북상하자, 500년 무렵에 고구려군은 몽촌토성을 버리고 한강을 경계로 아차산 일원에 보루에서 대치한다. 한강을 경계로 대치하던 고구려군은 551년 나제 연합군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임진강 방면으로 이동하게 되고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은 폐기된다.
고구려의 남진정책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소수림왕(小獸林王) 때부터 추진되었다. 이보다 앞서 371년 소수림왕의 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이 평양성에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의 군대와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소수림왕은 이 때부터 백제에 깊은 원한을 가지고, 즉위 초부터 백제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즉위 4년 후인 375년 드디어 백제를 공격해 수곡성(水谷城)을 빼앗은 뒤, 376년과 377년에도 백제를 공격하고, 같은 해 백제의 3만 대군을 물리쳤다. 소수림왕의 뒤를 이은 고국양왕(故國壤王) 역시 백제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본격적인 남진정책이 이루어진 것은 고국양왕의 아들인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때부터이다. 391년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즉위 이듬해인 392년부터 적극적으로 백제공략에 나섰다. 그해 7월 친히 4만 군대를 이끌고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황해도 지역을 공격해 1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10월에는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백제의 수군기지인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해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이에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은 여러 번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오히려 광개토대왕이 이끌고 온 군대에 의해 백제군 8,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하였다. 396년에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의 수도를 공격해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 내는 등 총 58개 성과 700여 마을을 빼앗았다. 399년에는 아신왕이 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해 5만의 대군을 출병시켜 가야 지방까지 진격해 왜군을 물리쳤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남진을 중단하고 북벌에 나서 만주는 물론, 한반도 북부 전역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만들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413년 즉위한 장수왕(長壽王)은 다각적인 외교를 통해 안정을 이룩한 뒤, 국내성(國內城) 일대에 기반을 둔 귀족세력의 약화와 경제적 기반을 확대할 목적으로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으며 백제와 신라로 진출하기 위해 455년 백제를 공격한 뒤, 승려 도림(道琳)을 첩자로 보내 백제의 국력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어 475년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도망치는 개로왕(蓋鹵王)을 붙잡아 죽였다. 이로 인해 백제는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장수왕은 나아가 서해의 해상권마저 장악하고 백제와 남조(南朝)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417년에는 신라의 왕위계승에 개입해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을 옹립하고, 신라와는 평화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신라가 백제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자 468년 신라를 공격해 실직주성(悉直州城)을 빼앗고, 481년에는 미질부(彌秩夫:지금의 포항시 흥해읍)까지 진출해 7개의 성을 빼앗았다. 장수왕이 죽은 뒤에는 문자왕(文咨王)이 497년 신라 우산성(牛山城)을, 512년에는 백제 가불성(加弗城), 원산성(圓山城)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후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6세기 이후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까지 이러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고구려의 남진 루트
한강유역에는 구의동보루와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유적이 있는데 이들 유적은 구릉의 정상부나 산능성상의 봉우리에 입지하고 있어 군사요새로 손색이 없다. 출토된 토기류의 편년에 따르면 이들 유적의 상한 연대는 5세기 중엽경으로 추정되고 이 시기에 이미 고구려 군사들이 한강 북안에 주둔하고 있었음이 추측된다. 이러한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경에 걸친 고구려의 남진은 임진강유역과 한강 유역에 걸친 두 개의 방어선을 뚫고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임진강하구의 관미성이나 적성의 칠중성에서 양주를 거쳐 중랑천과 왕숙천을 끼고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한강 북안에 이른 고구려 군은 일시적으로 한강을 사이에 놓고 백제와 대치하였다. 구의동보루나 아차산일대의 고구려유적과 바로 맞은편에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풍납토성에서 한강 남안을 따라 삼성동 토성에 이르는 구간에 백제의 토루가 구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가 일시에 한강 이남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임진강 이남 지역을 확보하고 일정기간 북안의 구의동과 아차산 일원에 주둔하며 백제와 한강을 사이에 놓고 대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으며, 475년 한강을 건너 남안의 한성백제 중심지를 차지하게 된다.
고구려의 한성 점령은 몽천토성에서 출토되는 고구려토기의 존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몽촌토성에서 출토되는 사이장경옹이나 원통형삼족기 등 특수한 형태의 토기의 존재나 고구려식 온돌건물지 등의 존재를 통해 볼때 몽촌토성에도 고구려군이 주둔하였으며, 구의동보루나 아차산일대의 주둔하던 군사보다 비중있는 인물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성을 함락한 후 고구려 군은 몽촌토성에 주둔하였고, 아차산 일원의 보루들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상황이 유지되다가 6세기 중반 나제연합군이 한강유역으로 북상해옴에 따라 다시 아차산 일원의 보루들이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강을 중심으로 다시 대치하였다고 보아진다.
아차산 4보루 구조 및 시설물
건물지 : 성벽 안쪽의 평탄면에는 7기의 건물이 축조되었다. 원래는 외곽의 성벽이 모두 이 평탄면과 같은 높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 유적의 평면은 남북으로 70m, 동서로 30m 가량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채의 건물지 중 가장 남쪽의 1기를 제외하면 모두 남북방향으로 성벽의 장축방향과 일치하게 축조되어 있으며, 장방형 평면을 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가장 남쪽에 있는 건물지부터 북쪽으로 1호에서 7호 건물지로 명명하였다. 7채의 건물은 모두 장방형의 평면을 하고 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돌과 점토를 섞어 쌓은 담장식 벽채이고, 그 위에 맞배지붕을 덮었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너비 10m, 길이가 45m나 되는 대형 건물지이다.
1호 건물지의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支都兄」명 접시와 함께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류가 출토되었으며, 8호 온돌의 아궁이에서는 철제 투구 1점이 거꾸로 뒤집힌 채 출토되었다. 또한 이 건물지는 이 유적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아차산 제3보루와 연결되는 통로 쪽에 축조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이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기거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2호 건물지 : 하나의 독립된 건물이라기보다는 1호 건물지에 딸린 부속건물의 성격이 있다. 이유는 유적에서 확인된 건물 중 규모가 가장 작고, 내부에는 온돌과 같은 시설이 확인되지 않으며, 건물의 남벽이 1호 건물의 북벽과 붙어있기 때문이다.
건물의 기초는 다른 대부분의 건물과 마찬가지로 치석된 석재를 이용하였으며, 벽체는 점토와 할석을 섞어 쌓은 담장식 벽체로 추정된다. 지붕 구조는 건물의 배치상 한쪽으로 경사진 지붕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구조상 남벽이 1호 건물의 북벽과 붙어있기 때문이다. 출입구는 서남모서리, 즉 1호 건물의 북서모서리 근처에 있는데, 이 지점에는 할석을 깔아서 만든 기초시설이 확인되며, 이 위에서 문비석 1점이 출토되었다. 2호 건물지의 규모는 동서 길이 7.2m, 남북 폭 3.7m 가량이며, 건물내부에서는 비교적 많은 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3호 건물지 : 이 유적에서 가장 큰 건물지로 규모는 남북으로 45.9m, 동서로 12.4~13m에 달한다. 건물의 평면형태는 전체적으로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나 동벽과 서벽 일부는 훼손되어 없어진 상태이고, 동벽의 일부는 지반의 침하로 인해 밖으로 약간 휘어진 상태이다.
이 시설 북서쪽 밖으로 1기의 온돌이 경사진 면을 이용하여 축조되어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건물의 서벽 기초시설과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에 3호 건물의 벽체 시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암거식 구조의 기능이 문제인데, 아직 이런 구조의 건물기초가 확인된 바도 없으며, 또한 암거식 구조의 입구와 출구 또한 확인되지 않아서 기능에 대해 추정할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는 상태이다.
건물의 지붕구조 : 이 건물의 벽체는 치석된 화강암 석재를 이용한 기초석렬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벽체를 따라 기둥구멍이나 기둥을 세웠던 흔적도 없으며, 주변에 많은 양의 할석이 무질서하게 깔려 있었던 점으로 보아 벽체는 할석과 점토를 섞어 쌓은 담장식 벽체였음이 분명하다. 또 건물 내부에는 건물의 중심 축을 따라 기둥구멍과 초석이 남아있는데, 초석은 1·2호 저수시설 사이와 강당 중앙에 각각 1기씩 남아있다.
기둥구멍은 1호 온돌과 1호 저수시설 사이에 6개가 있는데, 동서방향으로 2줄3열이 배치되어 있다. 기둥구멍은 지름 30~50cm, 깊이 50cm 내외이며, 초석은 지름 50~70cm, 두께 25cm 내외이다. 이들 기둥구멍과 초석은 보를 받치던 주 기둥의 초석과 주공으로 생각되는데, 45.9m에 달하는 건물의 보를 받치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의 평면배치를 보면 폭 6m 이상의 저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기둥을 세울 수 있는 공간은 8~10m 보다 작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이 건물의 내부에는 중심축을 따라 5개 정도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으며, 벽체의 구조를 감안할 때 지붕은 맞배식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된다.
저수시설 : 3호 건물지 내부에서 2기가 확인되었는데, 규모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구조는 동일하다. 2기 모두 암반풍화토를 파내고 바닥과 벽에 뻘을 발라 방수처리를 하였다. 따라서 이들 2기 모두 물과 관련된 시설이 분명하다. 그런데 유적이 위치한 곳은 아차산의 정상으로 자연샘이 나는 곳은 아니므로 유적 아래쪽의 계곡에서 물을 길어와서 저장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2기 모두 음용수를 저장하기 위한 용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각 유구별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호 저수시설 : 3호 건물지 내부 1호 온돌 남단의 N2W1, N2E1, N1W1, N1E1 그리드에 걸쳐 있는 남북으로 약간 긴 방형수혈이다. 조사 전에 이 지역은 잡목이 우거져 있었는데, 잡목을 제거하자 1호 온돌보다 약간 낮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웅덩이 형태를 한 지형이 노출되었다. 따라서 물을 저장하던 시설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N2W1 그리드의 동쪽 경계를 따라 남북방향으로 폭 2m의 트렌치를 설치하여 굴토하였다. 그 결과 저수시설의 서북 모서리와 북벽 및 서벽·남벽이 확인되었다.
2호 저수시설 : 1호 저수시설 남쪽의 S1W1, S1E1, S2E1 그리드에 걸쳐 있는 방형의 저수시설이다. 유구가 위치한 일대는 역시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웅덩이 형태를 하고 있어서 1호 저수시설과 같은 형태의 유구로 판단하고 S1W1 그리드의 동쪽 경계선을 중심으로 남북방향의 트렌치를 넣어 유구의 윤곽을 확인하고 S1W1 그리드 쪽을 바닥까지 하강하여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이 유구 역시 암반풍화토를 방형으로 굴토하고 바닥과 벽체에 뻘을 채워 방수처리한 저수시설임이 확인되었으며, 반면에 1호 저수시설에서와 같이 뻘을 채우기 위해 통나무를 쌓은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구의 규모는 1호 저수시설에 비해 다소 작은데, 뻘을 채우기 전 수혈의 규모는 남북 495cm, 동서 430cm, 깊이 310cm 이며, 뻘을 채우고 방수처리를 한 이후의 규모는 남북 350cm, 동서 310cm, 깊이 240cm 가량 된다. 물이 가득 찼을 경우 채워진 물의 양은 26㎥가량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인 규모는 작으나, 바닥과 벽체에 채운 뻘의 두께를 얇게 하여 저수용량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온돌시설
아차산 제4보루에서는 모두 13기의 온돌이 조사되었다. 조사된 온돌은 2호 온돌 1기를 제외하면 모두 건물 내부에서 확인되고 있어서 취사 및 난방을 주요 목적으로 설치한 시설임을 알 수 있다. 13기 모두 납작한 할석으로 벽을 쌓고 뚜껑 돌을 얹은 후 점토를 바른 외고래 온돌이며, 평면 형태에 따라 직선형과 ‘ㄱ’자형의 두 종류로 대별된다. 굴뚝은 온돌 고래의 한쪽 끝에 설치되어 있는데, ‘ㄱ’자형의 경우는 장변에 설치되어 있다.
1호 온돌 : 3호 건물지 내부 가장 북쪽에 위치한 ‘ㄱ’자형 온돌로 동서방향의 장변 길이는 6.4m, 남북방향의 단벽 길이는 2.8m 가량 된다. 발굴 당시 온돌의 뚜껑돌은 모두 제거된 상태였으며, 벽체 주변에 는 벽체와 뚜껑에 발랐던 점토 덩어리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점토 내부에는 짚을 섞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또한 연통을 세우기 위한 기초시설의 동쪽 중앙에 쐐기 모양의 할석 하나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와 있고 그 좌우에는 납작하고 면이 고른 석재를 하나씩 세워서 마무리하였는데,이는 사용 중 굴뚝 밑에 쌓이는 재를 밖에서 쳐내기 위한 시설인 것으로 보인다. 굴뚝 기초시설의 바닥은 납작한 석재를 한 겹 깔았는데, 다른 곳에 비해 20cm 이상 깊어서 사용 중에 재가 쌓일 수 있도록 하였다. 출토된 토제 연통의 높이는 80cm이며, 연통의 구조로 보아 이 위에 다른 연통이 올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궁이는 단변의 동벽에 설치되어 있는데, 다른 온돌과는 달리 두 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2개의 아궁이모두 좁고 긴 판석 2매를 좌우에 세우고 그 위에 하나의 이맛돌을 얹은 형태인데, 규모는 폭이 40cm, 높이는 35cm 가량 된다. 아궁이 옆 온돌의 단변이 끝나는 지점에 할석을 둥글게 돌려 만든 지름 65cm 가량의 공간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불씨를 저장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온돌의 규모는 장변과 단변을 합할 경우 전체 길이는 9.2m에 달한다. 온돌 고래의 내부 폭은 장변이 40~50cm, 아궁이 쪽의 단변이 60cm 가량 되고, 온돌 고래의 외부 폭은 장변이 70~80cm, 단변이 90cm 가량 되며, 현재 뚜껑이 제거된 상태의 높이는 35~40cm 가량 된다. 굴뚝을 세우기 위한 방형 기초시설은 폭 140~170cm 가량이며, 굴뚝 내부는 원형으로 지름 60cm, 깊이 60cm 가량 된다.
이러한 규모는 온돌의 골조에 대한 것이며, 사용 중에는 이 위에 짚을 섞은 점토를 발라 마감하여 사용했으므로 사용 당시 온돌의 규모는 이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온돌은 3호 건물의 북벽 및 동벽과 바로 연접해 있어서 건물 벽체에서부터 바로 점토로 마감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당시 온돌의 폭은 150cm, 높이는 60cm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수시설
모두 4기의 배수시설이 확인되었는데, 대체로 건물 내부에서 나오는 물을 밖으로 빼내기 위한 것인데, 5호 온돌 동쪽에 설치된 1호 배수구는 3호 건물 동벽과 6호 건물 서벽 사이에 설치된 배수로와 연결되어 성벽 쪽으로 빠지도록 설계하였다.
1호 배수시설은 3호 건물지 내부 5호 온돌구획의 동북 모서리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진행하다가 3호 건물의 동벽 바로 밖에서 다른 배수로와 만나 성벽 쪽으로 이어진다. 4기의 배수시설 중 가장 구조가 잘 남아있는데, 판석을 이용해 벽을 세우고 그 위에 뚜껑을 덮은 암거식이다. 물을 버리는 집수구는 5호 온돌구획의 북동쪽 모서리 바로 바깥쪽에 설치하였는데, 길이 40~60cm 가량의 판석과 할석 5개를 둥글게 돌려 5각형 공간을 만들고 바닥에는 작은 자갈을 깔아 놓았다. 배수시설의 폭은 70~80cm 가량 된다.
2호 배수시설은 3호 건물지 위치해 있으며, 1호 저수시설의 바로 서쪽에 해당된다. 이 배수로는 3호 건물지의 서벽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남쪽 끝은 6호 온돌 구획의 서북모서리 부근에서 서쪽으로 휘어져 건물 밖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 배수시설은 발굴조사전에 이미 뚜껑이 제거된 상태로 벽석의 일부가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집수시설도 거의 파괴된 상태였다. 이는 1호 저수시설과 관련된 배수시설로 추정된다. 배수시설 의 폭은 85cm 가량 되며, 남아있는 배수시설의 총 길이는 600cm 가량 된다.
3호 배수시설은 1호 건물지 북동쪽 석축의 하단에 설치되어 있으며, 1호 건물에서 사용된 물을 배수하기 위한 것이다. 배수시설은 석축과 나란히 동서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서쪽 끝은 직각으로 꺾여서 1호 건물지 석축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연결부위의 명확한 구조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진행방향으로 보아 1호 건물지 내부의 8호 온돌 동쪽에 집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방향 배수시설은 구조가 잘 남아 있는데, 판석으로 벽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길이 70cm, 폭 45cm, 두께 15~20cm의 판석을 덮은 암거식 배수구이다. 현재 남아있는 배수시설의 총 길이는 520cm, 폭은 80cm, 높이는 50cm 가량 된다
4호 배수시설은 3호 배수시설의 반대편인 서쪽에 설치되어 있으며, 1 2호 건물과 5호 건물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 배수로는 1호 건물 서벽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2호 건물의 서벽 북단까지 진행되다가 직각으로 꺾여서 5호 건물의 북벽을 따라 서쪽으로 약간 진행하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서 계속된다. S6W3 그리드의 배수구는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전체 길이는 1,220cm, 폭은 50~60cm 가량 된다.
고구려보루 구조와 특징
고구려의 관방유적 중에서 발굴조사를 통하여 전모가 밝혀진 유적은 한강유역에 위치한 몽촌토성(夢村土城) 내에 위치한 고구려유적(高句麗遺蹟) 및 구의동보루(九宜洞堡壘)와 아차산 제4보루(峨嵯山 第四堡壘) 등에 지나지 않지만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각 보루들의 경우도 이와 대동소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몽촌토성(夢村土城)
몽촌토성에서 조사된 고구려의 온돌건물지(溫突建物址)는 토성(土城)의 서남지구 고지대의 판축대지(版築臺址), 장방형건물지(長方形建物址), 적심건물지(積心建物址) 주변에서 조사되었으며, ‘ㄱ’자형 온돌 고래와 굴뚝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이 온돌 건물지는 층위상으로 보아 이 일대에서 가장 늦게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온돌 건물지의 범위는 3.1×3.7cm 가량 되며, 얇은 판석으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판석을 덮은 후 점토를 발라서 마감한 구조를 하고 있다.
구의동유적(九宜洞遺蹟)
구의동 유적(九宜洞遺蹟)은 1976년과 1977년 화양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華陽地區 土地區劃 整理事業)을 위해 발굴조사 되었다. 한강(漢江)을 남으로 연하고 있는 해발 53m의 구릉 정상에 위치한 이 유적은 원형의 성벽을 쌓고 내부에 주거시설을 설치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벽채는 흙과 판자로 마감하였으며, 지붕에도 역시 흙과 판자를 덮었다.
주거시설은 타원형으로 깊이 60~70cm 가량의 수혈이며, 내부에는 집수광(集水壙)과 배수로 및 온돌시설이 있고 바닥의 일부에는 벽돌이 깔려 있었다. 유적은 직경 14.8m의 성벽(둘레 약 53m)과 그 내부의 직경 7.6m의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할석(割石)을 7~8단 쌓고 그 위에 천석(川石)을 6~8단 쌓은 것이 보통인데, 위로 가면서 안으로 기울도록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100cm 내외이고 가장 높은 곳은 185cm에 달한다. 한편 이 성벽의 남쪽 두 곳에 네모나게 밖으로 돌출된 곳이 있는데, 이들 돌출부는 동서로 긴 장방형을 하고 있으며, 외곽부는 할석을 3~4단 계단식으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우고 있다. 이 돌출부 시설은 원보고서에는 보강용 시설로 보고 있으나, 방위상 한강 이남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가리키고 있어서 雉와 같은 기능을 하던 시설로 보인다. 또한 이 돌출부와 북쪽으로 대칭되는 것에 한 변이 310cm 되는 석단(石壇)이 1개소 있는데, 바깥쪽은 할석으로 네모나게 쌓고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
이 석단의 기능에 대해서는 별다른 자료가 없으나 전투시에 사용할 투석용 재료를 모아놓은 곳일 가능성이 있다. 내부의 수혈주거지는 직경 7.6m의 원형수혈(圓形竪穴)로 남쪽에 폭 1.7m, 길이 2m의 방형으로 튀어나온 곳이 있으며, 이곳이 수혈바닥보다 놓아서 출입시설로 생각된다. 수혈의 깊이는 60~70cm가량 되고 벽채는 길이 13~14cm, 폭 7~8cm, 두께 0.6~0.7cm의 판재를 돌려 세우고 짚 따위를 섞은 흙으로 미장하였다. 벽채를 따라 22개의 주공(柱孔)이 확인되었고 주공의 간격은 70~80cm로 대체로 일정하였다.
수혈의 내부시설로는 배수시설과 온돌시설이 있는데, 온돌시설은 수혈의 동북부에서 남북으로 길게 설치되어 있었으며, 할석을 40cm 높이로 세우고 그 위에 50~80cm 가량의 판석을 덮고 짚을 섞은 흙으로 틈을 채운 구조를 하고 있었다. 화구(火口)로 생각되는 온돌의 남쪽 끝에는 철부(鐵斧)와 철호(鐵壺)가 걸려 있었고, 온돌의 바닥에는 소토와 회백색흙이 깔려 있었는데 이들 燒土는 철부(鐵斧)와 철호(鐵壺)가 있는 곳이 가장 두껍고 불쪽 끝으로 갈수록 얇아져서 실제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배수시설은 수혈의 동북쪽 모서리에서 시작하여 서남부의 축석부로 수혈 벽선을 따라 둥글게 휘어 있는데, 수혈내부는 폭 40cm, 깊이 15~20cm 정도로 점토를 파내었지만 수혈외부는 할석과 판석을 써서 만들었으며, 축석부 밑으로도 계속되었다. 한편 수혈의 내부 중심부에는 폭 1.5m, 깊이 2.4m 가량의 광(壙)이 있었는데, 보고서에 의하면 원래는 폭 2.7m, 깊이 2.3m의 광을 파고 바닥과 벽에 30cm 가량의 회색점토를 깔고 그 내부에 폭 1.5m의 광(壙)시설을 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수혈 내에 있는 토광(土壙)의 용도는 물을 저장하던 시설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 4보루
해발 285.8m의 작은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뻗은 아차산 능선의 가장 북단에 해당된다. 이 봉우리는 남북으로 긴 말안장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가 약간 들어가고 양쪽 끝은 두 개의 작은 봉우리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장서원형(長恕圓形) 지형의 둘레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경사면을 따라 3~20단의 石築 城壁(석축성벽)을 쌓아서 보호하였으며, 정상부의 평탄지에 온돌시설(溫突施設)을 한 건물지(建物址)가 배치되어 있다.
성벽(城壁)은 유적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데, 자연지형의 경사도에 따라 부분적으로 높이를 다르게 하여 정상부는 평탄면을 이루고 있다. 즉, 유적 중에서 가장 높은 남쪽은 1~2단 정도로 낮은 성벽을 쌓았으며, 가운데 경사가 급한 부분은 20여단의 석축을 쌓아 올렸다. 성벽의 규모는 남북 77m, 동서 25m, 둘레는 210m 가량 되는데, 전체적으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을 쌓은 석재는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화강암을 이용하였으며, 밑에는 큰 석재를 놓고 위로 갈수록 약간씩 작은 석재를 쌓았는데, 위로 가면서 조금씩 들여쌓아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석재의 크기는 정면 넓이가 20~30cm, 정면 높이는 15~25cm, 길이는 30~50 cm 가량 된다.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내렸으나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의 경우 11단으로 높이는 2m 가량 되며, 원래는 20단 정도가 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럴 경우 높이는 4m 가량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성벽 남서모서리 부분과 동벽 중앙부에 사방 5m 가량 튀어나오게 쌓은 부분이 있는데, 일종의 雉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의 산성, 아차산 4보루에서 발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