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 개조’ 시위학생 연행하는 경찰 ‘원조 닭장차’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경찰버스를 ‘닭장차’라고 부릅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위대가 던지는 화염병과 돌로부터
경찰버스를 보호하기 위해 창문에 철망을 부착했고,
그 모양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하지만 닭장차의 ‘원조’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경찰은 적재함을 개조한 트럭에 시위대를 태워 연행했습니다.
그 모양이 딱 닭장차를 닮았었죠.
사진은 1965년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연행되는 장면입니다.
시위가 거세지자 정부는 그해 8월 26일 서울시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2008년 말 경찰버스 창문을 강화 플라스틱으로 교체하고, 철망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시민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죠.
또 전·의경이 ‘닭’ 취급을 받는다는 경찰 내부의 불만도 많았다고 합니다.
“사치품 양담배 몰아내자” 가면시위
1960년 4·19혁명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 사치를 추방하고
바른 생활을 하자는 취지의 ‘신생활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서울 세종로에서 양담배를 소각하고,
관용차를 시청 앞에 유치시켜 놓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운동은 그해 9월 정부가 불법행위로 규정하며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정치권에서 맑은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자가용을 타지 않고,
요정 출입을 하지 않겠다는 ‘청조(淸潮)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사진은 당시 서울 시내에서 ‘사치품 배격 캠페인’이 열린 모습입니다.
참가자들은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사치품 배격으로 새살림 이룩하자’
‘양담배 근절’ 등이 쓰인 피켓을 든 채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요즘 이런 운동을 펼쳤다가는 국가간 무역 마찰이 일어날 겁니다.
하지만 ‘새살림을 이룩하자’는 문구는 지금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지게 위의 孝心
부모를 섬기는 자식의 ‘효심(孝心)’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지만
효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진은 1960년대 서울 변두리에서 찍은 한 부자(父子)의 모습입니다.
아들이 지게에 아버지를 태우고, 나들이 가고 있네요.
요즘 같으면 자가용으로 모시겠지만 그때는 자동차가 귀했고,
다들 사는 형편이 어려웠으니까요.
지게에 짚단을 깔고, 편안하게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의 표정은 무척 밝지만,
지게 위에 앉은 아버지는 아들이 힘들까봐 몸을 앞쪽으로 밀착시키고,
흔들리지 않으려 발등을 지게다리에 고정시킨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마음은 똑같을 겁니다.
당신들은 힘들어도 자식들은 편안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쥐잡기 캠페인… 꼬리 가져오면 보상금 줘
식량이 부족하던 1950년대 중반부터 ‘쥐잡기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사람이 먹을 식량을 축내고, 병균도 옮기는 쥐를 없애기 위해서였죠.
1970년 통계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 1억 마리의 쥐가 있었으며,
그 쥐들이 축내는 양곡이 32만t에 달했다고 합니다.
정부는 쥐잡기를 독려하기 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표어와 포스터를 공모하기도 했습니다.
또 각 도별 할당량이 배정됐고, 보건소에 잡은 쥐꼬리를 가져가면 보상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1971년 서울시청 앞 거리 풍경입니다.
오른쪽 시청 별관 벽에 ‘3월 25일 오후 7시 쥐약 놓는 날,
다같이 쥐를 잡읍시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본청 건물에 붙은 ‘1조원 달성 특별 저축 강조기간’이라는 현수막도 눈에 띄네요.
당시 재무부에서는 범국민적인 저축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서울역 앞 말달구지… 여유와 낭만 있네요
1950년대에는 소나 말이 끄는 달구지가 주요 화물 운송수단이었습니다.
사진은 서울역 앞에서 말달구지에 타이어를 싣고 가는 장면입니다.
달구지는 화물차처럼 빠르게 물건을 배송할 수는 없지만
넓은 신작로를 느긋하게 걷는 모습에서 여유와 낭만이 느껴집니다.
이 사진을 보니 1970년대에 가수 정종숙 씨가 부른 ‘달구지’라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해밝은 길을 삐거덕 삐거덕 달구지가 흔들려 가네∼’.
6·25전쟁 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호구지책으로 끌던 달구지는
삼륜차가 등장하며 사라졌습니다.
서울 시내에 소와 말이 다녔던 당시에는 도로에
동물들의 배설물이 많았을 텐데 그걸 어떻게 치웠을지 궁금해지네요.
‘단맛보다 추억’…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 그립네요
‘짤깍 짤깍’ 엿장수(고물수집행상)
아저씨의 가위질 소리가 나면 동네 아이들이 골목 어귀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요즘처럼 과자가 흔하지 않던 1950년대에는 엿이 최고의 간식이었습니다.
엿장수 아저씨는 빈병, 헌책, 찌그러진 양재기, 깨진 그릇 등
쓸모없는 폐품을 달콤한 엿으로 바꿔줬죠.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에서 안 쓰는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갖다 주면
비슷한 양이라도 가위로 쳐서 잘라주는 엿가락의 양이 달랐습니다.
아저씨가 기분이 좋으면 길다랗게 쳐줬고, 때로는 야박하게 엿을 주기도 했습니다.
엿장수의 가위는 무디고 날이 어긋나 가위 본연의 자르는 기능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구수한 소리로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