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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屛山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으며,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과 그의 셋째 아들 ' 수암 류진(修巖 柳袗) '을 모신 서원(書院)으로 하회마을과는 화산(花山 .. 꽃뫼)을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위치하고 있다.
서원(書院)은 본래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風岳書堂)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다. 이 서당은 읍내(邑內) 도로변에 있어 시끄러워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선조(宣祖) 5년인 1572년에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에 의하여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이 서당은 임진왜란으로 소실(燒失)되었다가 1607년에 재건되었다.
태백물과 변변천이 몸을 섞은 뒤 안동(安東)과 풍산(豊山)들을 적신 낙동강은 제법 몸에 살이 붙어 큰물이 된다. 물이 커지면 마을과 건축물의 규모도 커진다. 이곳에 하회마을이 있고 우리나라 최고의 서원 병산서원(屛山서원)이 낙동강 변에 자리잡고 있다. 낙동강은 옹골지고 암팡진 천변걸작(川邊傑作)들을 빚은 뒤 이곳에 이르러 화룡점정하듯 하회(河廻)와 병산(屛山)을 마지막으로 빚고 하류로 향하게 된다.
낙동강은 풍산들 끄트머리에 오면 우뚝 솟은 화산(화산 .. 꽃뫼)를 만나게 된다. 꽃뫼따라 크게 휘돌아 흘러가는데 그 모양이 바닥에 축 늘어진 문어 머리모양 같다. 꽃뫼 동쪽에 병산서원이 있고 물길따라 쭉 내려가면 10리 정도 떨어진곳에 하회마을이 있다. 병산서원 가는 길은 아직도 흙길이다. 걸어서 오라는 메시지인 것 같은데 차로 오더라도 천천히 오라는 뜻일게다. 차가 달리면 뽀얀 먼지가 나부낀다. 그래도 걸어서 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덜 미안한 마음이다.
병산서원의 전신(前身)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 풍산 류씨 '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으로 ' 읍내 도로변은 공부하기에 적당치 않다 ' 고 생각한 류성룡이 1572년(선조 5)에 이 곳 병산으로 옮겼다. 풍악서당은 임진왜란 때 병화(兵禍)로 소실(燒失)되었으나, 광해군 1610년에 류성룡의 제자인 정경세(鄭經世) 등 유림들의 공의로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다시 설립되었다. 1629년에 아들 류진(柳袗)이 추가로 배향(拜享)되었고, 1863년 (철종)에 '병산(屛山) '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불구하고 훼절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으로 가려면 예전에는 육로(陸路)로 걸어가거나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넜는데, 요즈음은 버스까지 들어가는 찻길을 주로 이용한다. 그래도 옛 맛을 되씹고 하회마을과 병산서원과의 관계를 제대로 알려면 하회마을에서 논밭을 가로질러 산을 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옛 오솔길이 갖는 맛이 좋고, 산 너머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나 그 앞의 모래사장과 솔밭이좋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의 유래
고려시대, 안동의 풍산현에 ' 풍악서당 '이 있어 지방 유림(儒林)들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였었다. 이후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시절 홍건적의 난(紅巾賊의 亂)이 일어나 공민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그곳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난리 중임에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이때 공민왕은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 ..호패와 땅)을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이후 약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주위가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것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서애 류성룡이 부친상을 당하여 하회(河廻)에 와 있을 때 유림들은 그 일을 류성룡에게 의논하였다.
서애 류성룡은 그 문의를 듣고 병산(屛山)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였고, 유림들은 류성룡의 뜻에 따라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당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서당을 다시 중건하였고(1607년), 사당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복례문(復禮門)은 병산서원의 정문이고 .. 만대루(晩對樓)는 교육을 위한 강당이나 정자의 역할을....서재,동재(西齋,東齋)는 학생들이 기거하는 곳이며...입교당(立敎堂)은 강당 및 원장의 교무실 역할을 ..장판각(藏版閣)은 여러 도서를 보관하는 곳이며 .. 존덕사(尊德祠)는 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사당 .. 전사청(典祀廳)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祭物)을 준비하는 곳 ..고직사(庫直舍)는 서원의 노비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병산서원의 구성
흔히들 우리나라 건축의 특징을 주변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고 하지만, 그 조화(調和)란 이미 있던 자연(自然) 환경을 읽어내어 거기에 합당한 건축을 어떻게 잘 앉히고 배치하는 가에 달려 있다. 병산서원을 구서하는 건물 자체는 제향을 지내는 사당과 학문을 돈독히 하며 심신을 정진하는 강당(講堂), 재사(齋舍) 등 건물들로 되어 있어서 여타 서원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이 병산서원은 성리학적(性理學的)인 원칙에 바탕을 둔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러한 건물들은 자연(自然)과 하나가 되는 빼어난 공간감(空間感)을 보여주고 있다.
병산서원은 강당군(講堂群), 사당군(祠堂群) 그리고 고직사군(庫直舍群)의 세 영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일직선상에 놓여야 할 강당군과 사당군의 중심축이 일치하지 않고, 강당군과 고직사군을 옆으로 나란히 배치하고, 그 사이의 높은 위치에 사당군을 배치하였다.강당의 동쪽(동재의 위쪽, 고직사 출입문 왼쪽)과 사당 앞쪽에 형성된 마당은 이 세 영역을 매개하는 공간으로 절묘하게 맺어지고 있다. 평소에는 강당군에 속하여 서비스동선으로 이용되고, 제례(祭禮)때에는 사당군에 속하여 참배객들이 도열하는 의례용 공간으로 변한다.
서원 전체는 비대칭(非對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세 영역은 개별적으로는 거의 완벽하게 대칭으로 구성되었다. 좌우와 상하가 뚜렷한 강당군(講堂群), 신성한 사당군(祠堂群)은 물론 하인(下人)들의 공간인 고직사군(庫直祠群)마저도 사대부의 살림집인 뜰집 유형을 차용하여 좌우대칭으로 구성하였다.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설립 초기인 16세기 초반도 아니고, 급증기인 18세기 이후도 아닌, 서원이 사설(私設)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은 17세기 초반에 지어져 서원의 배치(配置)나 구성(構成)에서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빼어난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우리나라 서원건축의 백미(白眉)라고 일컬어진다.
병산서원 앞에 선다. 남도의 꽃 배롱나무가 빨갛게 피었다. 서원 전체가 온토 붉게 물들었다. 병산서원은 입학하는 날처럼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약간의 긴장감을 준다. 복례문(復禮門) 앞에도 배롱나무가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다. 설렘과 긴장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유지시켜 준다. 아무런 여유없이 불쑥 문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허망할 일 아닌가.
복례문에서 보면 만대루에 오르는 계단길이 마치 입교당(立敎堂)까지 이어진 것 처럼 보인다. 누마루 밑에 이르면 자세를 곧 낮추게 되고 겸허한 마음으로 서원 앞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일순간 조였던 몸과 마음이 풀린다. 그대로 만대루에 오르기라도 하면 풀썩 주저앉게 된다. 복례문 앞 배롱나무 길에서 만대루까지 이 짧은 길은 극적 변화가 일어나는 최고의 길이다.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
퇴계 이황 (退溪 李晃)은 ' 서워(書院)은 성균관이나 향교 등 관립 교육기관과는 달리 산천의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을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 '고 말하였는데 병산서원만큼 이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흥준은 "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현이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다 "라고 극찬하였다.
복례문 복례문
복례문은 병산서원의 입구이다. 복례(復禮)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 극기 복례위인 (克己 復禮爲仁) '에서 따온 말이다. 즉 나를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감이 바로 인(仁)이라는 의미이다. 서원의 입구에서부터 예(禮)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는 뜻으로 복례문(復禮門)이다.
서원(書院)의 일반적 구조
1543년 주세붕(周世鵬)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을 기폭제로 전국으로 퍼져 나간 서원은 그 구조가 거의 공식화(公式化)되었을 정도로 아주 정형적이다. 크게 先賢을 제사지내는 祠堂과 교육을 실시하는 講堂 그리고 원생들이 숙식하는 기숙사로 이루어진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문집(文輯)의 원판을 수장하는 장판고(藏版庫),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그리고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으로서의 누각(樓閣)과 뒷간이 있으며, 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고사(庫舍)는 별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들의 배치방법 또한 정형화되어 있는데...南北 일직선의 축선상에 외삼문(外三門), 누각, 강당, 내삼문(內三門), 사당을 일직선상으로 세우고, 강당 앞마당 좌우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강당 뒷뜰에 전사청과 장판고를 두며 기와돌담을 낮고 반듯하게 두른다. 사당과 강당은 구별하여 내삼문 좌우로 담장을 쳐서 일반인의 출입을 막는다. 강학 공간은 선비정신에 입각하여 검소하게 단아하게 처리하여 단청(丹靑)도 금하고, 공포(拱包)에 장식을 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당은 그 권위를 위하여 단청도 하고, 태극문양을 그려 넣기도 한다.
이곳 병산서원은 열려 있다.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열려 있다. 병산서원에 둘러쳐 있는 담은 서원과 외부를 나누는 역할을 하지만 만대루(晩對樓)에 오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만대루에서는 담은 더 이상 외부(外部)와의 영역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낙동강 강물은 담을 넘어 만대루로 그대로 들어온다.
병산서원의 공간 운영
병산서원 또한 위와 같은 전형적인 서원배치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병산서원은 단순히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하여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이 빼어난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 안으며 배치하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배치인 것이다. 병산서원이 낙동강 백사장과 병산(屛山)을 마주하고 있다고 하여 그 것이 곧 병산서원의 정원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를 건축적으로 끌어들이는 건축적 장치를 하여야 이 자연공간이 건축공간으로 번환되는 것인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만대루(晩對樓)이다.
병산서원의 개개의 건물은 이 만대루를 향하여 포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만대루에 중심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 병산서원 배치의 슬기로움이 있는 데... 병산서원의 중정(中庭)이 갖는 기능을 만대루의 누마루가 차출함으로써, 만대루는 건물 전체에서 핵심적 위치로 부각되었다. 한마디로 앞마당의 기능이 약하고, 누마루의 기능이 강화된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입교당 立敎堂
입교당(立敎堂)은 병산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講堂)이다. 원래의 명칭은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렀다. '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 '는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으로 가루는 5량(량)이다. 강학당(講學堂)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의 경의재(敬義齋) 등 세 부분으로 나뉜다. 양쪽 방에는 온돌을 들이고 중앙의 강학당은 3칸의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퇴마루가 마련된 명성재(明誠齋)에는 병산서원의 원장(院長)이 기거하였으며, 서쪽의 경의재(敬義齋)에는 이른바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구성은 대칭적이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향과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두 건물은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마루로구성되어 있다. 강당 쪽의 방은 학생회장 격인 유사(有司)의 방이고,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藏書室)이다. 2칸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다. 동재(東齋)에는 상급생들이, 서재(西齋)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대칭적으로 놓인 동재와 서재는 기하학적으로 대칭이 아니다. 강당과 서재는 직각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동재는 안으로 벌어진 채 놓여졌다. 또 서재와 강당은 모서리가 서로 맞물려 있지만, 동재는 강당과 모서리가 덜어져 있다. 결국 강당과 서재는 닫힌 관계이지만 강당과 동재는 열려있는 관계가 된다. 이것은 서원 마당에 들어온 사람들의 동선을 강당 동쪽의 사당 앞마당으로 유도하기 위한장치인 것이다.
동재, 서재 東齋, 西齋
입교당 立敎堂
입교당(立敎堂)은 중앙의 대청이 강당(講堂)으로 사용되었으며, 좌우(左右)에 방이 있는데 좌고우저(左高右底)에 의거하여 左側의 방은 서원의 원장(院長)이 기거하였으며, 명성재(明誠齋)라 이름하였고, 우측(右側)의 방과 대칭이지만 툇마루를 두어 약간의 차별을 두었다. 우측의 방을 경의재(敬義齋)라 하였으며 서원의 부원장의 방이나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아궁이는 1.8m의 기단 양끝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데 건물의 전면(前面)에 있는 것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입교당은 서원의 중심건물인 강당이다. 양쪽에 온돌방을 들이고,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동쪽방인 명성재(明誠齋)는 서원의 원장실이고, 서쪽 방 경의재(敬義齋)는 부원장실이자 교무실이다. 명성재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방을 줄였다. 원장 혼자서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면서 원장실의 권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강당의 대청마루는 강회 공간이다. 원장이 대청의 가운데 앉고, 동재생들은 대청 동쪽에, 서재생들은 서쪽에 앉는다. 원장석에 앉아 바라보는 병산(倂山)의 경관은 병산서원 최고의 장면이다. 만대로 높이와 위치도, 동,서재의 규모도 이 지점에서의 경관에 맞추어져 있다.
입교당 대청에 앉아 내다뵈는 만대루와 병산(屛山)과의 중첩된 이미지가 적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점이 일품이다. 게다가 낙동강의 비단 물줄기를 애정스럽게 껴안고 늠름하게 서 있는 병산(屛山), 그리고 희고 고운 백사장을 넉넉히 비워두고 은자(隱者)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이 수려한 자연의 풍광을 만대루 마루 위에 앉아보고 있노라면 자연(自然)은 이미 마음 안에 머물게 된다. 건물 자체만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잘 다듬어진 건축과 그것이 놓여진 자리에서 생길 수 있는 가장 예민한 상태의 균형이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입교당은 높고 커다란 기단 위에 놓여 있다. 기단 양끝에는 과장될 정도로 커다란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바로 위의 온돌방의 난방을 위한 시설이다. 이같은 기단의 구성은 허(아궁이) - 실(기단) - 허(아궁이)의 순서로 구성되었다. 반대로 건물 부분은 실(방) - 허(대청 마루) - 실(방)의 순서이다. 입교당은 이와 같은 수평적인 조합과 아래 위로 허-실의 수직적 조합도 일어난다.
장판각 藏板閣
서원의 교재와 목판을 보관하던 곳으로 화재로 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외딴 곳에 세웠으며, 습기를 예방하기 위하여 윗부분에 통풍구를 만들었다. 현재 목판 등은 이 곳에 없고 국학진흥원 장판고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판보의 소장량이다. 따라서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 된다.
존덕사 尊德祠
고려시대부터 사림(士林)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風岳書堂)을 풍산현에서 선조(宣祖) 5년인 1572년에 유성룡(柳成龍)이 안동(安東)으로 옮겨오면서 병산서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607년 유성룡이 타계(他界)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유림들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위하여 1613년 광해군(光海君) 5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후 광해군(光海君) 12년인 1620년에 유림(儒林)의 공론에 따라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모시고 있던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 인조(仁祖) 9년에 별도의 ㅟ패를 마련하여 이곳 존덕사(尊德祠)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을추가로 배향하였다. 1863년, 철종 14년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신문(神門)이라고 하며, 서원(書院)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된다.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는 문(門)이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不淨)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향사례(享祀禮)에서 신문(神門) 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가 된다. 집례를 맡은 임원들은 신문(神門)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일반 학생들은 앞마당에서 참관하여야 한다.
유교식의 교육에는 반드시 선현(先賢)들에 대한 제사가 포함된다. 그리하여 서원에는 사당(祠堂)이 있는데, 그 전체 구조는 향교(鄕校)와 같다. 공부하는 강당이 가운데에 있고, 기숙사는 강당 양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사당(祠堂)은 강당 뒤에 있는데 이러한 구조가 여느 향교와 같다는 것이다. 일한 서원(書院)들은 자기들이 표본으로 하고 싶은스승을 모셔야 하니 이 스승의 연고지에 세우게 된다. 이러한 서원은 후에 폐단이 일어난다. 한 사람의 스승을 중심으로 모였던 사람들 사이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세력 확장을 위한 근거지로 서원이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사청 典祠廳
향사(享祀) 전날 미리 제사상을 준비하는 건물로 평소에는 제기(祭器)와 여러 제례용(祭禮用) 비품을 보관한다. 이 곳은 제향공간 가까이에 위치하며, 제기고(祭器庫)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그 위치는 사당 영역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또한 제수를 마련하는 고직사(庫直祀)와도 연락이 잘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와 전사청을 잇는 쪽문. 일반적으로 전사청은 사당 안에 있는 것이지만 병산서원에서는 밖에 따로 있으며 이렇게 쪽문으로 연결된다.
사인교 四人轎
복례문 곁에 사인교(四人轎)를 보관하는 곳..소위 차고(車庫)이다. 가마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래시대의 기와에 가마 모양의 무늬가 있고,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서도 화려한 가마 위에 앉아 있는 부인의 그림도 있어,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병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위의 가마가 당시 사용하던 가마는 아닐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국보(國寶) 내지는 보물로 지정될 만한 가치가 있을터이니...그러나 저 위치에 저렇게 보관되었던 것 만큼은 사실일 듯... 유성룡이 살던 하회마을에서 이 곳 병산서원까지는 꽤나 먼 거리..가마를 메던 노비들의 땀이 묻어 있는 듯
만대루 晩對樓
서양(西洋) 집들과 우리의 옛 집이 다른 점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自然)을 대하는 방법이다. 공간(空間)의 배치로만 보아도 서양의 집들은 거의가 중심지향형(中心志向形)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건축을 보면 대개가 방(房) 자체가 홑겹으로 그냥 자연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 변화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 우리 건축이 갖는 지적(知的) 감성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하회(河廻)마을 끝자락에 있는 병산서원은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군데군데 늙은 소나무가 서 있는 하얀 모래밭, 그 사이로 느릿느릿 흘러가는 강물, 오랜 세월의 이끼가 그림처럼 묻어 있는 절벽, 그 틈 사이로 어렵사리 뿌리를 내려 애절하기까지 느껴지는 관목들, 그 너머 푸른 하늘, 그 모든 것들은 서원의 앞마당으로 끌어 당겨 놓은 듯하다.
어느 날, 어느 때라도 그곳에서 앚아보는 풍경은 사람을취하게 만든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우람한 건물인 만대루(晩對樓)는 멀리서 보면 카랑카랑한 선비의 기질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맞은편 입교당(立敎堂)에서도 주변 풍광을 향한 시야(視野)를 전혀 가리지 않고 시선의 한끝에 이건물을 잡아둠으로써 주변 경관을 한 품격 더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만대루의 아름다움은 건물의 위용보다는 자연스러움이다. 누마루 아래를 내려서면 휘어진 그 모습 그대로의 굵은 기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다. 목재를 새로 다듬지 않아 각기 다른 모습이다. 인공(人工)의 냄새는 전혀 없다.
백제성루 (白帝城樓) ...두보(杜甫)
취병의만대 翠屛宜晩對 푸른 병풍처럼 펼쳐진 산수는 늦을 녘에 마주 대할만 하고
백곡회심유 白谷會深遊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이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
병산서원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가르치고 배우는 곳인 강의동(講義棟)과 사당(祠堂) 그리고 하인들이 머무는 곳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우리의 관심은 강의동 건축이 구성하는 공간의 아름다움이다. 강의동은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지는데, 네 개의 건물이 마당을 감싸고 있다.
밖에서 보면 중첩된 기와지붕이 만드는 풍모가 경사진 지형(地形)과 잘 어울려 있지만 가만히 보면 만대루(晩對樓)라는 누각(樓覺)의 길이가 다른건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과도하게 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 이랬을까 ? 이 의문은 마당에 들어가 입교당(立敎堂)에 낮아 보면 절로 나오는 탄성과 함께 풀리게 된다.
앞산 병산(屛山)이 만대루(晩對樓) 가득 들어와서 마당의 한 쪽 벽면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만대루는 거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둥만 남기고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병산(屛山)을 그 속에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 크기가 마당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길이어야 하는 까닭에 긴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병산서원이 낙동강 백사장과 병산을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병산서원의 정원이 되는것은 아니다. 이를 건축적으로 끌어들이는 건축적 장치를 해야 이 자연공간이 건축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인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만대루이다.병산서원의 개개 건물은 이 만대루를 향하여 포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만대루에 중심이 두어져 있는 것이다. 서원에 출입하는 동선을 따라가보면 만대루의 위상은 더욱 분명해진다.
외삼문을 열고 만대루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서원의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시위하듯 서 있는 동재와 서재를 옆에 두고 돌계단 올라 강당 마루에 이르게 된다.여기서 뒤를 돌아 올라온 쪽을 향하면 홀연히 만대루 넓은 마루 너머로 백사장이 아련하게 들어오는데, 그 너머 병산의 그림자를 다 받아낸 낙동강이 초록빛을 띠며 긴 띠를 두르듯 흐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만대루에서의 조망.. 그것이 병산서원 자리잡음의 핵심인 것이다.
사찰의 경우에도 법구(法具) 등을 보관하는 루(樓)가 있다. 사찰의 루(樓)는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구심적 (求心的) 경관구조(景觀構造)이나, 서원(書院)은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원심적(遠心的) 경관구조(景觀構造)로서 그 경관구조가 다르다. 이 곳 병산서원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매우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서원의 경내로 들어 와서 밖을 보면 바깥의 자연과 一體가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은 선비정신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만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이 제목 백제성루(白帝城樓)의
"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마루를 받치고 있는 24개의 기둥들은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인공(人工)이 가해진 맛을 현저히 줄였으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병산서원의 꽃 만대루(晩對樓) .. 이 텅 빈 누각은 인공적(人工的)인 건축과 자연(自然)사이의 매개체이다. 비록 서원 안에 있으나 그 시각적인 소속은 외부(外部)에 속한다. 만대루는 외부 경관에 대한 시각적 틀이다. 강당 대청 가운데 원장(院長)의 자리에 앉으면 수직적으로 만대루의 기둥이 전면에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屛算)의 풍경을 쪼개어 7폭 병풍을 방불케 하고, 수평적으로 만대루의 마루바닥과 지붕 사이로는 낙동강의 흐름이 보인다. 마루 밑 아래층으로는 대문이 시야(視野)에 들어 온다. 정확한 계산에 의하여 山의 우뚝함, 강물의 흐름과 사람의 통행을 독자화시켰다. 인공 건축물인 만대루가 비어 있음으로서 자연(自然)을 가득 담아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누마루를 오르는 나무 계단... 큰 통나무를 도끼질로 서너 곳 잘라내어 계단으로 삼았다. 그 자연스러운 느낌과 발을 디딜 때의 독특한 촉감은 그저 짜릿한 흥분과 감동 그 자체이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도 정(釘) 질 한번 주지 않은 생긴 모양 그대로이다. 본래 그곳에 있던 돌ㄹ같은 느낌을 준다.
기둥을 일부러 주춧돌의 한 쪽 귀퉁이에 세우기도 한다. '건물은 그냥 자연의 일부'라는 우리 조상들의 건축의식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생각이 빚어놓은 때문인지그 오래된 건물의 목재에 또 다시 파란 새싹이 돋아날 듯 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만대루 건축의 백미는 아무래도 누워서 보는 들보의 물결이다. 앞마당의 낙동강을 건물 천장에 옮겨 걸어 놓은 듯 가늘게 일렁이고 있다. 눈이 시리도록 앉아서 지켜보던 그 강물을 누워서도 즐기려 한 것일까.
만대루(晩對樓) 건축미(建築美)의 백미는 아무래도 누워서 보는 들보의 물결이다. 앞마당의 낙동강을 건물 천장에 옮겨 걸어 놓은 듯 가늘게 일렁이고 있다. 눈이 시리도록 앉아서 지켜보던 그 강물을 누워서도 즐기려 한 것일까 ?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병산서원을 빠트릴 수 없는 것..그 이유는 바로 만대루(晩對樓)가 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의 이름은..... 누마루 아래를 내려서면 휘어진 그 모습 그대로의 굵은 기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다. 목재를 새로 다듬지 않아 각기 다른 모습이다. 인공(人工)의 냄새는 전혀 없다.
병산서원의 건축적 질서는 하늘처럼 항상 고요하며 시공(時空)으로 지속되는 중용(中庸)과 같이 위압하지 않는 순서와 친화(親和)의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생명적 체계는 이곳 만대루로 인해 완성된다. 병산서원은 ' 배산임수(背山臨水) '하여 안산(按山)과 멀리 있는 조산(朝山)을 관망하는 일반 서원과 달리 앞산이 막고 있어 답답하고, 급히 흐르는 강물로 인해 지기(地氣)가 쌓일 틈이 없는 터라고 한다.
그러나 동,서재(동,서재)의 툇마루와 만대루의 빈 공간(空間)은 7칸이나 무한공간이 되어 병산(屛山)을 없는 듯 비어있게 산음(山陰)으로 시야를 맑게 틔우고, 누마루의 높은 곳에서 강물을 내려다보고 산을 마주하게 하여 높은 산을 낮게 만드는 건축으로 자연을 완성한다.
또한 정면에서는 강직하나 측면에서는 곡직한 기둥 위에 떠 있고 만대루의 좌,우를 가려서 끝이 보이지 않게 한 수평의 빈 공간 사이로 낙동강은 천강(天江)이 되어 공중으로 흐른다. 강물은 잔잔하게 흘러서 도도하며 천지(天地) 저 밖으로 아득히 흘러 태연(泰然)하다. 이곳에서는 구속되지 않는 것이 구속(拘束)이다. 병산서원은 구속됨으로 소리조차 없이 자유롭다.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비어 있고, 양 옆으로도 연속적 허(虛)의 체계를 이룩하여 모든 곳에서 텅 비어 속박하는 체계를 느낄 수 없다.
백제성루 (白帝城樓) 두보(杜甫)
취병의만대 (翠屛宜晩對) 푸른 병풍처럼 둘러 쌓여있는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백곡회심유 (白谷會深遊)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이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에서 따온 말로, 병산서원 맞은 편의 깎아지른 절벽인 병산(屛山)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군데군데 늙은 소나무가 서 있는 하얀 모래밭, 그 사이로 느릿느릿 흘러가는 강물, 오랜 세월의 이끼가 그림처럼 묻어있는 절벽, 그 틈 사이로 어렵사리 뿌리를 내려 애절하기까지 느껴지는 관목들, 그 너머 푸른 하늘, 그 모든 것들을 서원의 앞마당으로 끌어 당겨 놓은 듯.. 이것이 만대루이다.
못 하나 사용하지 않았다
병산서원의 진정한 가치는 우선 주변을 감싸고 있는 빼어난 자연환경에 있다. 갓 피어나려는 꽃봉우리 같은 화산(花山. 꽃뫼)을 뒤로 하고, 절벽같이 펼쳐진 앞의 병산(屛山)을 마주 보며, 그 사이로는 넓은 백사장과 유유히 굽이치는 낙동강을 대하고 있다. 그러나 경치 좋은 곳이 비단 이 곳뿐이겠는가 ? 병산서원의 훌륭함은 빼어난 경치들을 서원(書院)의 안으로 극적으로 끌어들인 데 있으며, 건물과 건물들, 건물과 외부 공간의 자연스러운 조직과 집합적인 효과에 있다.
문엄창태죽영당 (門掩蒼苔竹影堂) 문에는 푸른 이끼 덮였고, 대나무 그림자 마루에 비치는데
율화향동오풍량 (栗花香動午風凉) 밤꽃 향기 한 낮의 서늘한 바람에 움직이네
인간지락무타사 (人間至樂無他事)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 별로 없으니
정좌간서일미장 (靜座看書一味長) 고요히 앉아 책 읽는 재미 가장 유장하네.
정면 7칸, 측면 2칸의 우람한 건물인 만대루는 멀리서 보면 카랑카랑한 선비의 기질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맞은 편 입교당(立敎堂)에서도 주변의 풍광을 향한 시야를 전혀 가리지 않고 시선의 한 끝에 이 건물을 잡아 둠으로써 주변 풍광을 한 품격 더 높혀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의 스승인 서애 류성룡을 위하여 이 서원을 짓는데 앞장 선 제자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안목에 감탄할 뿐이다. 만대루의 아름다움은 건물의 위용보다는 자연스러움이다. 누마루 아래를 내려서면 휘어진 그 모습 그대로의 굵은 기둥이 건물을 떠 받치고 있다. 목재를 새로 다듬지 않아 각기 다른 모습이다. 인공(人工)의 냄새는 전혀 없는 것이다.
만대루 건축미의 백미는 누마루에 누워서 보는 들보의 물결이다. 앞마당의 낙동강을 건물 천장에 옮겨 걸어 놓은 듯 가늘게 일렁이고 있다. 눈이 시리도록 앉아서 지켜보던 그 강물을 누워서도 즐기려 한 듯... 만대루에 오르면 솔숲 너머 너른 백사장이 펼쳐지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에는 짙푸른 병산(屛山)이 병풍(屛風)치듯 서 있다. 가깝고 먼 풍경이 해 질녘 한 폭(幅) 수묵화(水墨畵)로 어우러진다. 시간이 멈춰선 것 같은 풍경이다.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도 못질 한번 주지 않은 생긴 모양 그대로이다. 본래 그 곳에 있던 돌같은 느낌이다. 주춧돌로 쓰기에는 황당하리만큼 큰 돌을 두기도 하고, 기둥을 일부러 주춧돌의 한 쪽 귀퉁이에 세우기도 한다. 기둥과 주춧돌 사이가 맞지 않으면 그냥 나무쐐기를 박았다.건물은 그냥 자연의 일부..라는 우리 조상들의 건축의식을 그대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깉은 생각이 빚어 놓은 때문인지 그 오래된 건물의 목재에 또 다시 파란 새싹이 돋아날 듯 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위용(威容)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더 큰 매력인 만대루 .. 굵은 기둥은 휘어진 모습 그대로, 다듬지 않은 목재는 질서 없이 제각각이지만 오히려 조화스럽다. 기둥받침인 주춧돌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크기와 모양이 각기 다르다. 기둥과 주춧돌의 크기나 틈이 맞이 않으면 자연스레 나무쐐기를 박기도 하였다. 자연(自然)을 최대한 끌어들이되 건축 자체에서도 인공(人工)의 손길을 거의 배제한 것이다. 차경(借景) 기법을 적용하고 인공(人工)을 가미하지 않은 만대루는 ' 건물은 자연의 일부 '라는 전통 건축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흥준의 서원 비교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 이언적 (晦齋 李彦迪)의 안강 옥산서원(玉山書院)은 계류(溪流)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活氣가 없고, 남면 조식(南冥 曺植)의 덕천서원(德川書院)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려 있지만 건물의 배치 간격이 너무 넓어 허전한 느낌이 많으며, 한훤당 김굉필 (寒暄堂 金宏弼)의 현풍 도동서원(道東書院)은 공간의 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 되는 것이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는 불견풍수(不見風水)라는 말이 있다. 풍경을 일부러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온갖 풍경을 자기 방(房) 앞으로 불러다 이런저런 이름도 붙이고 이런저런 없는 사연도 만들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제와서 무슨 소리이냐고 물을 것도 같다. 하긴 그렇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풍수(風水)에 명당(名堂)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명당만을 잡아 고른다면 굳이 풍경을 외면(外面)하는 건축적 수법이 생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견풍수(不見風水)는 ' 명당(名堂)이 아닌 자리에서 어떻게 불리(不利)한 입지(立地)를 극북하는가 '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생적(自生的) 노력이다. 우리는 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 눈을 해치기도 하지만 너무 강한 빛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닷가에 지은 집들은 바다 쪽을 향해 창(窓)을 내지 않는다. 태양이 너무 눈부신 것처럼 바다는 너무 크고 강렬한 수평적(水平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 강렬한 대상들이 인간의 심리(心理)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대하여 정량적(定量的)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만, 임상적으로는 대개 증명이 된 사실이다.
불견풍수 不見風水
안동(安東)의 낙동강가에 화산(花山)을 뒤로 하고, 병산(屛山)을 마주하고 있는 병산서원은 이 거대한 자연(自然)의 존재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건축의 가장 극적(劇的)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화산(花山)의 산세(山勢)가 낙동강과 만나는 완만한 비탈면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그 경사지(傾斜地)를 십분 이용하여 만대루(晩對樓)의 밑을 지나 입교당(立敎堂)과 만나 사당(祠堂)의 정점에서 느끼는 고조(高潮)되는 공간감(空間感)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게 계획되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이 발걸음을 좌우(左右)로 흩어지게 만든다면, 병산서원은 빨려들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빨려들다가 입교당(立敎堂) 마루에 앉아 강(江) 건너펴의 병산(屛山)을 바라보면 왜 만대루(晩對樓)가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병산(屛山)은 병산서원과 너무 가깝다. 너무 가까워서 그것은 산(山)의 형체가 아니라 어둠의 그림자처럼 풀려 있다. 잉크처럼 풀어지는 그 어둠이 낙동강변을 타고 집으로 스미는 것이다. 만대루는 그 풀려 들어오는 어둠을 다시 산의 형태로 돌려놓는 장치로 작동한다. 불견풍수(不見風水)가 이렇듯 절묘하게 작동한 예는 더 없다. 그 결과 병산서원은 입교당(立敎堂)의 판벽으로 뚫린 문을 통해 만나는 뒤란의 빛과 동재와 서재의 마당 그리고 만대루를 통해 보이는 병산(병산)과 낙동강의 풍경을 마치 빛과 어둠의 수묵(水墨)에 수놓인 담채화(淡彩畵)처럼 펼쳐 놓는다. 진경(眞景)이 그대로 병풍 속에 들어가 있다.
병산서원을 수식(修飾)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은 ' 국내 고건축(古建築)의 백미(白眉) '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 만약 아름다움의 요소가 있다면, 그 아름다움의 극치(極致)를 이곳 병산서원에서 맛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하기에 병산서원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한국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에 대하여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건축물 자체의 양식이나 화려한 꾸밈, 기법 등은 일단 미루어두어도 좋다. 우리 전통 건축에는 집의 기능과 미(美)의 효과를 극적으로 높여주는 ' 차경(借景) '의 기법이있다. 자연의 풍경을 건축을 구성하는 일부로 수용하였던 조상들의 지혜이다.
병산서원의 건축적 아름다움은 그동안 수없이 회자되었다. 그 중 잘 알려진 견해라면, 유홍준교수의 글을 들 수 있다. 그는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을 배경으로 하여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이 빼어난 강산(江山)의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하였다는 점에서 건축적, 원림적(園林的) 사고(思考)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고 평가하였다.
그의 말처럼 병산서원은 서원(書院)과 마주보는 병산(병산)과 낙동강 백사장(白沙長)을 마치서원의 정원처럼 끌어안고 있어 얼핏 보아도 호쾌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니 이같은 효과는 서원과 산(山) 그리고 백사장이 단지 마주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경관을 건축적으로 끌어안기 위한 건축적 장치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유홍준교수는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서원 맞은 편 강 건너 병산(屛山)과 서원이 앉은 화산(花山)의 대치를 지적하였다. 우뚝 솟은 병산과 달리 단조로우면서도 완만한 수치로 상승하는 화산(花山)의 대조(對照) 그리고 위로 추켜올리듯 지어진 사당(祠堂)과 강당에서 내려다보이도록 낮은 공간에 지어진 만대루(晩對樓)가 차경효과(借景效果)를 거두게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 강당(講堂)에서 낮은 곳에 보이는 만대루는 뒤편 풍경을 하나의 배경으로 끌어안게 되며, 직접 누마루에 올라서면 가운데 강물과 백사장이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우뚝 솟은 병산(屛山)은 마치 병풍을 두른 듯 장쾌한 기운을 연출하고 있다.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 난 곳 못 왔더니 / 백발이 된 오늘에야 만대루에 올랐구나 /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펼쳐 있고 / 강물은 소리내어 밤낮으로 흐르누나 / 지나온 세월 말을 타고 달려 온 듯 / 우주(宇宙)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 평생에 이런 경치 어디 가서 다시 보랴 /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머슴들의 뒷간
화장실 전문가도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은 이 변소를 최고의 명작(名作) 뒷간으로 꼽고 있다고 한다. 달팽이 울타리에 하늘이 열린 그리고 변소의 뛰어난 기하학적(幾何學的) 구성과 발을 딛고 앉는 목판의 모양은 여성의 그것을 연상케하는 조상들의 해학(諧謔)이 두드러진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놓았는데, 그 모양새를 따라 ' 달팽이 뒷간 '으로 부르고 있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 달팽이 뒷간 '은 유생(儒生)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400여 년 전 병산서원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 전해진다.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흔히 ' 나무 백일홍 '이라고 부른다. 백일홍(百日紅)처럼 꽃이 석달 열흘 가기 때문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처럼 ' 열흘 가는 꽃 없다 '는 말이 무색하다. 하지만 한 꽃이 오래 피는 것이 아니라 쉴 새 없이 피고 진다. 계절까지 넘나들며 서원(書院)과 정자(亭子)와 절 마당을 걷고 싶은 곳을 꾸며 준다.
서원의 건물들은 질박하기 짝이 없다. 겉에서 보기에는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선비들은이런 것에 개의하지 않았다. 선비들의 이러한 고결한 정신을 보여주는 사물이 하나 더 있다. 서원에는 반드시 심는 나무가 있다. 꽃이 백일 동안 붉다고 해서 이름이 백일홍(百日紅)나무로 불리는 나무이다. 배롱나무라고도 한다. 왜 이 나무를 서원에 심었을까? 이 나무는 껍질이 아주 얇아 마치 없는 것과 같다. 속이 다 비치는 것 같다. 옛 선비들은 이 나무의 모습처럼 살 것을 다짐한 것이다. 속이 다 들여다 보이니 겉과 속이 다를 수 없다.
하회(河廻)마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을 거슬러 동쪽으로 3km 남짓 떨어진 강변 언덕에 병산서원이 있다. 서원(書院)으로 들어서는 잔디밭부터 배롱나무들이 꽃떨기를 매달았다. 서원(書院) 안 배롱나무도 담 너머로 드리워 바깥 구경을 하고 있다. 한 여름 배롱꽃은 작렬하는 햇살을 못이겨 빛바랜 것처럼 보인다. 꽃빛은 한결 선연하다. 하지만 사람을 달뜨게 하는 화려함이 아니다. 눈과 마음을 씻어주는 화사함이다. 배롱나무들 사이로 대문이 서 있다. 여염집 문간처럼 수수한 복례문(復禮門)이다.
병산서원의 건축적 아름다움의 절정은 단연 만대루(晩對樓)이다.아니, 그보다도 우리나라 목조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때 만대루를 결코 제외할 수 없다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만대루라는 이름은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 취병의만대 / 백곡회심유 .. 翠屛宜晩對 / 白谷會深裕'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 구절은 '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山水)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그윽하게 즐기기 좋다 '는 뜻으로, 병풍처럼 깎아지른 병산(屛山)의 풍광을 아주 적절하게 대변하고 있다.
두보(杜甫)의 시(詩)처럼 만대루에서 바라보면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물과 백사장은 눈부시고, 모래밭 가운데 드문드문 서 있는 노송(老松), 깎아지른 절벽이 말 그대로 한 폭(幅)의 동양화(東洋畵)를 연상하게 한다.
병산(屛山) 너머의 푸른 하늘은 덤이다. 느릿한 강물은 옛 선비의 마음을 마음을 한결 여유롭게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모든 풍경들이 만대루에 올라 오래도록 강물을 바라보거나, 내리는 비를 바라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이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해 전달한다는 것은 단연코 불가능하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