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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과 맞닿은 초록빛 물결의 고창 청보리밭. 이삭이 황금빛으로 익기 전의 보리를 뜻하는 청보리가 지금 절정의 풍경을 만든다./고창군청 제공 |
하루가 다르게 산천이 변한다. 갈색의 나뭇가지들이 이제 푸른 잎을 한껏 머금었다. 신록(新綠)의 물결이다. 청초하고 마냥 싱그럽다.
이 봄날 푸르름의 정수를 맛보기 위해 전북 고창군 공음면을 찾았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미당 서정주의 고향 고창 땅은 지금 초록빛 바다란 말이 딱 알맞다. 겨우내 언 땅을 딛고 피기 시작한 보리들이 빼곡히 자라나 초록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약동하는 생명의 발돋움이 절로 느껴지는 색채다.
5~6년 전부터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알려진 이 곳은 최근 일반인들도 즐겨 찾는 나들이 명소가 됐다. 게다가 올해는 처음으로 군과 마을 주민이 합심해 지난 4일부터 다음달 16일까지 보리밭 축제도 열고 있다. 따사로운 푸른 하늘을 이고 광활한 대지에서 출렁이는 보리 물결, 바람결에 실려오는 풀내음. 봄의 삼박자가 빚어내는 싱그러운 축제다.
푸른 빛이 물결을 이루는 보리의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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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도 이제 즐겨찾는 봄철 나들이 코스다 |
고창 공음면 들녁을 가득 메운 보리밭 면적은 무려 20여만평. 야트막한 구릉 지대에 물감이라도 쏟아 부은 듯 녹색 물결이 끝없이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넓은 보리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보리는 이제 연두색의 이삭을 막 피우기 시작해 연초록과 진초록이 아름답게 어울렸다. 이맘때부터 시작해 보리이삭이 황금빛으로 익기 직전인 5월초까지가 절경이? 봄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보리밭을 거닐며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아이들은 보리 피리를 만들어 부르며 뛰어논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가곡 ‘보리밭’의 한 소절이 절로 마음 속에서 떠올라 흥얼거린다. 녹색의 시원함으로 세상의 피로를 씻어낼 것만 같은 목가적 풍경이다.
몇 십년 전에는 이런 얘기가 배부른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곡식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익지않아 배고픔에 떨어야 했던 이른바 ‘보릿고개’. 그 시절을 아픔을 겪은 이들에겐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이젠 보리는 배고픔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을 뜻하는 푸른 빛깔로 다가온다.
귀농의 꿈이 이뤄진 학원농장
고창군이 보리밭 명소로 이름을 얻은 것은 사실 얼마되지 않았다. 고창읍성이 보리 ‘모(牟)’자 들어가는 ‘모양성’(牟陽城)으로 불릴 만큼 옛날에는 보리밭이 가득했지만, 보릿고개란 말이 없어진 지는 것과 때를 같이 해 이곳도 돈 안되는 보리 대신 수박이나 인삼을 주로 심었던 것.
다시 보리밭으로 바뀐 것은 바로 학원 농장 때문이다. 20여만평 중 13만평이 학원농장 소유로, 고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아들인 진영호(57)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금호그룹 이사로 지내다 어릴 적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귀농해 일군 터전인지라 그 사연이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들인 이 땅에서 노닐던 진씨는 제대로 이 곳을 가꿔 보겠다는 꿈으로 대학도 농대에 진학했고 졸업 후 곧바로 농장 경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의욕만으로 경험부족을 뛰어넘기는 역부족이어서 좌절을 먼저 맛봤다. 이후 영농의 꿈을 접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92년 다시 낙향, 마침내 어릴 적 꿈을 실현했다. “마음 한켠에 계속 남아 나를 재촉하는 농사에의 꿈을 이겨낼 수가 없었어요.” 햇빛에 그을은 그의 피부는 영판 농투성이다.
진씨가 보리를 주작물로 선택한 것은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 이곳의 보리밭은 그냥 씨만 뿌리면 저절로 자라 알곡으로 영근다. 농약이 전혀 필요없다. 수박 등의 작물을 대단위로 키우기 힘들어 보리를 택했는데 뜻하지 않게 ‘관광 명소’라는 보너스를 얻었다.
하지만 넘어야할 산은 또 있다. 보리는 대부분 술 제조의 원료로 쓰이는데, 정부의 보리 수매는 올해로 마지막이다. 내년부터 자립적인 생존 경쟁에 나서야 하는데 수익성이 밝지 않다. 때문에 보리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 개발이 한창이다. 보리 라면, 보리 냉면, 보리 과자 등등. 지금 보리밥 축제장에 가면 이 제품을 볼 수 있다.
6월 보리를 수확한 후에는 이곳에 다시 메밀을 심어 가을에는 메밀밭이 또 장관을 이룬다. 봄 보리밭, 가을 메밀밭으로 계절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싱그럽게 넘실거린다.
농장에는 보리밭 외에도 카네이션을 재배하는 5,000여평의 화훼농원과 대추, 밤, 은행나무 등이 심어진 과수원이 있다. 마로니에게 우거진 인근 숲길은 아름다운 산책길로 유명하다. 농장 한켠에는 진의종 전총리를 기념하는 ‘백민 기념관’도 자리잡고 있다. 농원에서는 민박할 수 있는 방도 갖춰져 있다. (063)564-9897
/고창=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고창, 고인돌이 2,000여기 '동양최대 군락지'
선운사 뒤 동백나무숲 장관…읍성주변 철쭉도 지금 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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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위에 늘어선 고인돌. 봄 향기와 함께 선사 시대의 역사를 느껴보는 색다른 산책코스다. |
고창은 보리밭 뿐만 아니라 선운사, 고창읍성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게다가 봄 내음이 짙어가는 요즘은 도처에 봄꽃이 만발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하루만에 모두 돌기에 빠듯하다. 보리밭과 함께 둘러 볼 곳을 소개한다.
선운사 동백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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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의 봄도 빼놓을 수 없는 나들이 코스다. |
1,500여년 전 백제 시대에 창건된 고찰 선운사는 고창 제일의 명승지다. 선운사 진입로에서부터 벚꽃이 만개해 관람객의 넋을 빼놓는다. 이곳의 최대 자랑거리는 천연기념물 제 184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 대웅전 뒤에 높이 6㎙, 수령 500년 안팎의 동백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맘 때 꽃망울 터뜨려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선운사 관리사무소 (063)561-1422
선운사가 자리잡은 선운산도 푸른 옷을 입고 등반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해발 400㎙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은데다 경사가 완만해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선운산 도립공원 관리사무소 (063)563-3450
고인돌 유적
고창은 또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의 집단 밀집 지역이다. 85곳 이상에서 2,000기 이상이 분포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 군락지다. 특히 447기가 밀집된 고창군 아산면 죽림리와 상갑리 일대는 2000년 인천 강화군, 전남 화순군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됐다.
고인돌은 모양에 따라 북방식인 탁자식과 남방식인 바둑판식 등으로 나뉘는데, 전북 고창군에는 두루 분포해 있어 동북아 고인돌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푸른 초원 위에 늘어선 고인돌을 구경하는 탐방로는 색다른 분위기를 주는 산책 코스. 코스는 모두 6개이며 문화해설사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고인돌공원 관리사업소 (063)563-2793
고창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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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고창읍성. 철쭉이 만발하면서 읍성의 예스러운 멋이 더욱 살아나고 있다. /고창군청 제공 |
고창읍성은 1453년(단종 원년)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둘레 1684㎙의 석성으로 성곽의 원형이 제대로 보존돼 곳이다. 성안에는 관아만 있다. 주민은 성밖에 살다가 전란 때에만 이곳으로 대피했다. 성 안에는 24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전쟁 등으로 대부분 파괴됐다가 1970년대 이후 동헌, 객사 등 12채의 건물이 복원됐다.
성 주변은 요즘 철쭉이 피기 시작해 성곽과 어울린 풍치가 일품이다. 성안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등이 우거져 자연공원이 따로 없다. 성내 동헌 뒤 소나무숲에는 축성 당시 심었다는 거대한 소나무 두 그루가 위용을 뽐낸다. 1930년대 한 스님이 심었다는 맹종죽(중국 원산의 관상용 대나무) 숲도 볼 만하다. 읍성 앞에는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 고택과 판소리박물관이 있다.
고창군청 문화관광과 (063)560 - 2227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고창가는 길
서해고속도로 고창IC에서 나와 우회전, 15번 지방도를 타고 무장면으로 간다. 무장리에서 우회전 796번 지방도 타고 공음면 쪽으로 가다 표지판을 찾으면 된다.
묵을 곳
학원농장에서도 묵을 수 있고, 고창 시내나 선운사 입구에도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다. 고창읍 인근에는 석정온천(063-564-4441) 리조텔도 있다. 흔치 않은 게르마늄 온천으로, 이곳에서 피로를 씻고 머물러도 좋다.
먹거리
고창의 최고 먹거리는 선운사 인근의 인천강에서 잡히는 ‘풍천장어’다. 풍천(風川)은 바닷물이 강으로 들어올 때 바람과 함께 들어온다고 붙여진 이름.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히는 장어라는 얘기다. 선운사 인근을 비롯해 고창 어디서나 풍천장어집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