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7장 부자생(不自生)
[原文]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解釋]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오래되었다. 천지가 영원하고 오래된 것은 스스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오래토록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니 그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버리니 그 몸을 얻는다. 이는 사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그 사심을 이루었다 한다.
[解 說]
노자 도덕경의 7장의 핵심적인 말은 부자생(不自生)이다.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오래된 이유는 부자생(不自生), 즉 스스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스스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Jehovah), 즉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고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요 4:34, 5:19,30, 6:38, 8:28, 7:18, 14:10). 이는 마치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이 자기가 없는 삶을 사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은 스스로 살아가시지만 일단 그 하나님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나서 그는 스스로 살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고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는 그 안에 무사야(無私耶), 즉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살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삶이 바로 장생(長生), 곧 영생(永生)의 삶이다.
하늘과 땅이 부자생(不自生)하여 장생(長生), 곧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 것과 같이 성인(聖人)도 부자생(不自生)하므로 장생(長生), 곧 영생(永生)의 삶을 산다. 노자가 여기서 장생(長生), 즉 ‘길고 오랜 삶’이란 생물학적 삶(헬라어로 Bios)이나 육신의 삶(헬라어로 Psuche)의장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헬라어로 Zoe)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서의 새롭고 진실된 참 삶으로서의 영원한 삶을 말하는 것이다. 새 사람으로서의 참 삶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삶, 즉 스스로 사는 삶인 자생(自生)을 그만둘 때 가능하다.
새 사람으로서의 참 삶은 그의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므로 자신의 원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로 살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고 한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삶, 즉 스스로 사는 삶인 자생(自生)을 그만두는 삶, 즉 부자생(不自生)의 삶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노자가 말한 후기신(後其身)의 삶, 즉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삶과 외기신(外其身)의 삶, 즉 자기를 버리는 삶과, 무사(無私), 즉 자기를 비우는 삶이 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영존시키는 길, 즉 성인의 길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고 할 때의 자기인 ‘자생(自生)’, ‘후신(後身)’, ‘외신(外身)’, ‘무사(無私)’는 ‘작은 자기(small self)’, ‘자의식으로 도사리고 있는 자기(self-conscious self)’, ‘이기적인 자기(egoistic self)’, 즉 에고, 곧 자아(ego)이다. 자아를 앞세우지 않고, 부정하고, 버릴 때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자기인 ‘신선(身先)’, ‘신존(身存)’, ‘성기사(成其私)’는 ‘큰 자기(large self)’, ‘자기라는 의식마저도 없는 활달한 자기’, ‘남을 위한 존재로서의 자기’, 즉 혼(psuche)이다. 혼(psuche)+죄(sin)=자아(ego). 자아(ego)-죄(sin)=혼(psuche). 성서에서의 혼(psuche)을 불교에서는 “참나”라고 말하고 있다.
‘작은 자기(小我])’, 즉 ‘자아’, 곧 ‘에고’를 진정한 자기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해서 그 꿈을 키워 보려하다가는 ‘큰 자기(大我)’, 즉 ‘혼(psuche)’, 곧 ‘참나’를 잃어버리게 되고, 반대로 이런 작은 자기, 즉 ‘자아’, 곧 ‘에고’를 앞세우지 않고 부정하고 비우면 큰 자기, 즉 ‘혼(psuche)’, 곧 ‘참나’를 찾게 된다.
예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자아)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혼)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혼)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눅 9:23-24)하였다. 이 구절에서 자기(자아)와 목숨(혼)이 교대로 쓰이고 있다. 자기(자아: self)-죄(sin)=혼(psuche)=목숨. 혼(psuche)+죄(sin)=자기(자아). 자기(자아: self)는 이기적(selfish)이다. 이기적인 자기(자아)는 무사(無私)가 아니라 사(私)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날마다 작은 자기, 즉 ‘자아’, 곧 ‘에고’를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말하고 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자기(자아), 즉 ‘자아’, 곧 ‘에고’를 죽이고 자기(자아), 즉 ‘자아’, 곧 ‘에고’를 부인하면 큰 자기, 즉 ‘혼(psuche)’, 곧 ‘참나’를 찾아 구원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자기(자아)를 부인하는 삶이 바로 외기신(外其身)의 삶, 즉 자기를 버리는 삶과, 즉 자기를 비우는 삶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복 많이 받아 남보란 듯이 잘 살고, 내세(來世)에서도 죽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한 것, 말하자면 ‘제 목숨’, 지금의 ‘작은 자기’가 잘되고 영속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자기를 구원코자 하면 참 자기를 잃을 수밖에 없고, 작은 자기를 버릴 때 큰 자기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하였다. 자기를 높이는 것이 바로 후기신(後其身)의 삶, 즉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삶이다. 자기(자아) 중심의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기 위하여 일부러 낮추거나 남의 앞에 서기 위해서 일부러 뒤에서는 얄팍한 공리적 계산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자아)를 누르고 극복한 사람은 영적으로 위대한 이기는 사람이다. 이기는 사람(overcomer)이란 다름 아닌 자기(자아)를 누르고 극복한 사람이다. 이기는 사람(overcomer)이란 자기(자아: self)를 넘어 온(over come) 사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즉 “자기(자아: self)없음”도 마찬가지다. ‘나’, 즉 자기(자아: self)라는 것은 허상(image), 즉 우상(idol)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 자가(자아)는 온갖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므로 자가(자아)에서 해방을 얻어 자유하라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자가(자아)에서 해방을 얻어 자유하는 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다. 해탈(解脫), 즉 풀고 벗어버림이란 욕심으로 인하여 자가(자아) 속에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고 벗어버려 자유함을 얻고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유학(新儒學)에서도 무사(無私), 무욕(無慾) 등을 말하고 있는 데, 모두 참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아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비우는 것이 나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모든 종교들의 기본적 지침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If you die before you die, you will not die when you die)”란 말은 참으로 명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언임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에 옳기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노자는 7장의 마지막에 “이는 사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그 사심을 이루었다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인의 ‘사심 없음’이 ‘사심 이룸’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인의 ‘사심 없음’이 ‘사심 이룸’이라는 것을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에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성인의 마음이 무욕이라고 이르는 것은 청정적멸(淸淨寂滅)하여 노자나 부처님처럼 욕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성인의 마음은 깊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는 까닭에 단지 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심을 거들떠 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깊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여 자기 자신의 욕심을 거들떠 볼 겨를이 없는 자는 반드시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므로 성인은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자기 자신의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요순(堯舜)의 마음이 아니다. 잠시라도 천하를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맹(孔孟)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보통 사람의 사심(私心)은 나, 즉 자기(자아: self)를 위하는 것이지만 성인의 사심(私心)은 나, 즉 자기(자아: self)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天下)를 위하는 것이다. 성인은 자기(자아: self)를 버리고 천하를 얻음으로 사심을 이룬다. 이것이 범인과 성인의 차이점이다.
첫댓글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른다지요? 진정한 성도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