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아래는 제가 댓글로 달았던 글입니다. 아래의 글은 예언에 관한 저의 소견이 담겨 있습니다.
개혁주의 마을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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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도 달라스 구약학 교수였던 잭 디어 교수의 초기 종교개혁사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늘 날 장로교도의 선조였던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들이 예언을 했다는 것을 1차 역사적 자료에서 논증하고 있더군요. 우리가 잘 아는 존 낙스와 1643년 웨스터민스터 총회를 위한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대였던 사무엘 러더포드 또한 예언을 했고 자신의 예언에 대한 원칙 또한 기술해놓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했던 예언은 웨인 그루뎀이 정의한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주신 것을 말함"입니다. 여기에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유추할 수 있는 위로, 격려의 말, 마음의 죄를 드러냄 그리고 미래에 이루워질 일을 말함이 포함된다고 그루뎀은 주장을 하고 있고요. 암튼 더 많은 성경적, 교회사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예언의 은사가 계시의 종결성을 위협하는 것이 위험한 만큼 위의 그루뎀이 정의한 예언의 은사를 무시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Christian Hedonism으로 인해 개혁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는 존 파이퍼이지만, 그가 왜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지 생각해볼 필요 또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은사 중단론자인 리차드 개핀과 은사 지속론자인 웨인 그루뎀의 논쟁에 그루뎀의 손을 들어준 PA에 소재하는 Wester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번 포이트리스의 주장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생명의 말씀사에서 번역 출간한 「부흥」의 제11장 “부흥의 결과”에 나오는 내용(p.180 중간부분) "그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예언의 은사가 주어지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문자 그대로 장래를 예고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문자 그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대면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학식과 지식을 가지고 성령을 소멸하는 심각한 위험에 처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 사례들을 여러분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언의 현상들, 장래를 예언하는 이러한 능력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여러 가지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은사를 가진 한 목사를 알고 있는데1904년과 1905년 부흥의 때에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은사가 후에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부흥이 지속되는 동안에 그 사람은 그의 교회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미리 예언했습니다. 한 번만 아니라 아침 마다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새벽 두시 반에 잠에서 깨어 그날 일어날 일에 대한 직접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현상들의 또 다른 부분입니다.” 위의 발췌한 글은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견해입니다.
4. (아래의 글은 한 회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4:1) 그리고 그 예언의 특징은 웨인 그루뎀이 정의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마음에 즉각적으로 주신 것을 말함"입니다. 이 정의는 다음의 말씀에서 추출한 교리입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고전 14:29)" 예언이 기존 장로교단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이성적인 능력만을 요구하는 설교라면 다른 이들이 분별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예언은 하나님께 마음에 주신 즉각적인 것들을 담고 있으니 위의 사역 방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토론에서 중요한 용어 정리가 된 듯 하니 본론으로 들어가지요.서두에 제가 인용했던 말씀에서 보시면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님이 의문을 제시한 복음으로 사는 삶에 관계성이 명제적으로 깊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언이 복음으로 사는 삶에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이에 관련하여 두 가지 관계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그러나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고전 14:24-25)" 그러니까 사역 대상자들의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회개하게 되는 기능을 예언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칼빈의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바로 성화라는 정의에 부합한 삶을 살게 하는 예언의 순기능입니다.
찰스 스펄젼 또한 강해설교를 하는 동안 예언의 은사가 드러난 적이 있었지요. 성령께서 설교를 하는 가운데 강권하셔서 돈 몇 푼을 아끼기 위해 주일에 세탁소를 닫지 않는 사람의 불신앙을 꾸짖었고 그것을 들은 세탁소 주인은 돈의 최소 단위까지 정확하게 스펄젼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을 보며 회개한 적이 있었지요. 저는 강해 설교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가 이에 더 나아가 교회의 덕을 위의 예처럼 세운다는 것이지요. 이런 덕을 세우는 것이 없었다면 굳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의 스코틀랜드 총대인 사무엘 러더포드가 예언의 은사에 대한 principles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겠지요. 2.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지하고 바라보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내재적인 죄성으로 인해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들에 쉽게 갇히게 되는 우를 범하여 복음으로 사는 삶을 놓치기도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초월성에 집중하도록 예언이 돕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토론이 근본적으로는 고전 13:10 "온전한 것"에 대한 입장의 차이라는 것을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온전한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하는 로이드존스나 존 파이퍼 그리고 유수의 개혁 신학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떻신지요? 위의 근본적 입장이 정리가 되신다면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이 말씀이 주의 명령으로 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노파심에 첨언합니다. 저는 계시의 종결성을 믿습니다. 그리고 강해설교가 정경성이 없는 것과 같이 예언 또한 정경성이 없는 사람의 말임을 믿습니다. 웨인 그루뎀이 그의 조직신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예언에 대한 챕터를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그는 이 예언에 관한 부분 말고는 다른 모든 주제들은 개혁주의와 함께 하고 있으니깐요. 그래서 한국의 장로교단들에 그의 조직신학을 교재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저는 신사도 운동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리적인 강해설교의 우위성을 저 또한 믿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혁 교리와 은사지속론을 함께 가르치는 존 파이퍼가 주장하는 개혁된 복음주의를 지지합니다. 이상 감사합니다.저도 님이 바람직하게 보시는 삶에 따른 혹은 교리적인 청교도 회심론의 우선성을 지지합니다. 그래서 윗 댓글에도 이에 상응하는 강해설교의 우선성을 강조했고요. 다시 말해서 저의 소견은 강해설교 혹은 회심 전도설교를 통한 회개를 중심 축으로 두고 표적이나 기적에 의한 회개로의 초청을 열어두자는 의견입니다. 님이 강조하신 회심의 객관성과 주관성의 균형을 위해서요.이렇게 열어놓는 것이 신앙이 주관화가 될 수 있다는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그분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사무엘 러더포드의 예언에 대한 견해와 그가 성경적 예언을 주장했지만 신앙의 주관화의 위험도 피했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자들이 찬사를 던지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앙의 객관성 가운데 작성했던 실례에 대해 반박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5. "말씀의 정경이 확정된 이후, 존 후스, 위클리프, 루터처럼 장차 일어날 일들을 예고했는데 실제로 그 말대로 이루어진 특별한 사람들에 대한 계시가 있다. 우리 스코틀랜드의 경우에 조지 위샤트는 비튼 추기경이 살아서 앤드류 성의 성문을 나오지 못할 것이며 또 치욕스럽게 죽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람이 화형되는 모습을 지켜보던 창문 너머에서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낙스는 그랜지 경이 교수형을 당할 것을 예언했고, 데이빗슨의 예언은 그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영국에서도 많은 거룩한 설교자들이 이러한 일을 행했다."(Sameul Rutherford, A Survey of the Spiritual Antichrist. Opening the Secrets of Familisme and Anatinominisme in the Antichristian Doctrine of John Salarmarsh(London: no pub,. 1648)) 위는 역사적 1차 자료입니다. 이 출처의 저서에서 러더포드가 예언에 관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전 달라스 구약학 교수였던 잭 디어 교수도 그의 저서 <Surprised by the Voice of God>에서 위의 러더포드의 역사적 문헌을 인용합니다.
6. 제가 앞서 언급드렸던 러더포드의 성경적 예언의 principles는 다음과 같이 그는 제시했습니다. "1. 그것들은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다. 2. 그것들은 경건한 사람들이 발언한 것이다. 3. 이러한 계시들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예언이 성경의 권위와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4. 그들은 자기의 예언에 복종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Ibid, 43ff.) 이것이 한국 장로교회의 선조들의 역사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저는 큰믿음교회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특히 바울의 서신을 쓸 때 도왔던 천사가 저서를 집필할 때 도왔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계시의 종결성을 위협하는 발언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다보니 위에서 언급드렸던 개혁된 복음주의 진영에 노출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존 맥아더의 Strange Fire 집회 이 후 은사 지속론과 은사 중지론 사이의 토론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저도 그 토론에 관심을 갖다가 교회사의 1차 자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비교분석 하게 되었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저는 개혁주의 마을 분들과 같이 개혁주의를 추구하다가 이 은사의 부분만 견해를 은사지속론 쪽으로 기울
있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존 파이퍼를 위시한 은사지속론 쪽에 무게가 실리는 상황입니다. 특히 파이퍼는 공적인 인터뷰에서 자신은 고전 13장의 "온전한 것"이 주의 재림이라고 해석하며 그러므로 은사들은 지속된다고 주장했고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인정했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교리적 강해설교의 우선성과 중심성은 파이퍼도 강조하고 있지요
직감이라는게 인간에겐 있습니다. 성령안에서도 그런것들이 올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예언혹은 예언의 은사라고 할순 없다고 봅니다
미래를 예언의 은사가 있다면 한개도 틀리면 안되는데 신사도파들 그냥 확율적으로 맞고 틀리고 합니다.
그리고 진짜 예언의 은사가 있다면 정말 궁금해하는 국가적이슈등은 다들 궁금해하자만 아무도 예언하지못합니다.
구약에서도 개인의 사사로운장래를 점치듯 하는 예언은 없었습니다.
예언은 계시를 풀어내는것입니다
결국 지금은 성경으로 풀어가는것입니다.
다만 미래예측은 지식등으로 할수 있지만 이또한 예언의 은사가 아닙니다ㅡ
예언을 받고싶고 알고싶어하는것은 결국 불신앙이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grace 성경은 예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1Co 14:29 KOR)",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1Co 14:32 KOR)" 예언이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분별하라고 지시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에 대해 전 트리니티 조직 신학교수인 웨인 그루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만일 예언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죄가 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렇게 하라고 명함으로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 역사상 어느 누구도 교사로서 틀지 않은 강해설교를
@제자 하지 못했던 것과 같이 예언하는 자들도 틀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무분별한 예언들은 심판으로 그들이 대가를 받겠지요.
@제자 님이 언급했던 것처럼 성경에서 명시하고 있는 예언함을 불신앙으로 폄하하신다면 개혁주의 선조인 사무엘 러더포드, 존 낙스, 마틴 로이드 존스, 존 파이퍼가 불신앙자들라는 말씀입니까?
@제자 미래를 알고싶어서 예언기도를 받은자들이 불신앙적 행위라는 뜻입니다
@제자 님이 염려하는 것을 개혁주의를 공부하는 저 또한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웨인 그루뎀은 그의 조직신학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러한 마음을 주셨다라고 표현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grace 그렇다면 예언의 부정적인 기능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기능을 교회사적 신학적으로 논해야 이 토론의 균형성을 갖추지 않겠습니까? 저 또한 점쟁이처럼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욕심으로 예언을 받는 자들은 불신앙적이라 생각합니다
@제자 그루뎀을 개혁주의라 하지 않더군요.
그리고 요즘 하나님의 음성듣기가 그루뎀식인데 그냥 자기 생각들을 주로 그렇게 표현하더군요 .
@grace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들 사이에서도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그루뎀을 제외하고 논해보록 하지요. 물론 그루뎀의 조직신학을 사용하는 장로교단의 신학교들에 대한 의문이 가지만요. 그렇다면 사무엘 러더포드와 로이드 존스와 존 파이퍼에 대한 님의 견해는 어떠십니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선조인 존 낙스의 예언에 대한 기록을 제시해드릴 수 도 있습니다.
@제자 그리고 주제 토론방에 걸맞게 자료나 문헌을 가지고 토론에 임해주십시오. 누가 이랬더라는 식의 토론 방식은 지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자 9시반 오전예배드리고 지금 다시 교회로 가야합니다. 나중에 다시^^
@grace 한국은 오전이군요... 그래도 이렇게 답변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복된 주일 되셔요.
@아나니아 감사합니다. 저도 선입관 없는 토론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님이 언급하신대로 은사지속론자들이 "계시"라는 용어를 넓은 의미를 사용하는 것을 은사중단론자들이 많이들 오해를 한다고 개혁주의자들이 존경하는 D.A 카슨이 지적을 하더라고요. 물론 저는 넓은 의미로도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긴 합니다. 정경의 완성과 계시의 종결은 저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니깐요. 아무튼 유명한 개혁주의자들의 2차 자료들을 전달하는 수준이 아닌 무엇보다도 성경과 1차 자료들을 가지고 기본 전제들을 잠시 내려놓고 사유하며 토론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중에 어떤 강한 확신같은것도 올순 있지만 이또한 예언이 아니고 그런 확신안와도 오직 주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믿은 것이 참신앙입니다.
제자님은 예언에 대하여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읍니다.
예언이 틀릴수도 있으니 맞으면 좋고 틀리면 말고, 이러한 생각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라도 틀리면 목숨을 걸었읍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가 내가 그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것을 내 이름으로 감히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한다면 그 선지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셨느니라."
예언은 틀리면 자기 목숨과도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혈님.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구 반대편에 있다보니 답변이 늦는 것 양해부탁합니다. 아나니아님의 말씀처럼 저는 "신약의 예언"이 "계시 (정경의 완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성경적 근거는 두 가지만 일단 드리겠습니다. 1.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1Co 14:29 KOR)"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1Co 14:32 KOR)": 보혈님께서 위의 저의 글을 자세히 보셨다면 제가 이미 위의 말씀으로 신약의 예언의 은사가 정경을 완성하기 위한 계시를 위해서만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파악하실 수 있으셨을겁니다. 왜냐하면 위의 말씀처럼
예언이 가르침의 은사처럼 단지 은사이기에 사도는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서로 서로 예언을 점검하는 사역적 안전장치를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가르침의 은사가 실행되는 강해설교에 있어서는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예언의 은사 실행되는데 있어서는 틀릴 가능성을 열어두지 못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두 번째 성경적 근거를 다룬 후에 살펴보도록하죠. 2.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1Co 14:37 KOR)": 여기서 우리는 신약의 선지자가 사도의 권위에 귀속이 된다는
것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언의 은사가 있는 자들이 틀릴 수 있고 이를 오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인 자신이 작성한 글만이 "주의 명령" 즉 정경성을 갖는 계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바울의 글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의 쏟아져나오는 예언들을 분별하라고 사도는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에서의 선지자 혹은 예언자의 계시를 전달하는 권위가 신약에서는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사도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지요. 그러므로 이 사도성, 즉 사도가 기록한 신약 성경(계시)에 가르침과 목양을 하는 목사와 교사와 복음을 전하는 자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주시는 것을 말"
하는 예언하는 자들은 권위적 귀속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직분과 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비교 검토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혈님이 언급한 100% 적중해야하는 예언의 기준은 구약의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신약의 "사도"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역사에 유일무이한 정경을 완성하는 계시를 담당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직분인 목사와 교사 복음을 전하는 자 그리고 선지자 (예언하는 자)는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와 같은 권위가 없기 때문에 바울도 목사인 디모데에게 진리를 올바르게 분별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는 사도성이 없는 디모데가 가르침의 은사에 있어서 틀릴 수 있다는 바울의 염려이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구약과 신약의 계시의 절대성과 탁월성을 서신 내내 강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맥락으로 (불연속성의 관점으로) 보신다면 신약의 예언의 은사도 정경을 완성하는 계시가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는 주의 메세지가 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 장로교의 선조들인 존 낙스와 사무엘 러더포드 예언의 은사를 통해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겪었던 스코틀랜드 초기 장로교회를 위로하고 극복할 힘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혈님. 신약과 구약의 직분과 은사에 대한 불연속성과 연속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 없이
성급히 적용하시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성경 해석학 원리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인 스코틀랜드 초기 장로교도인 존 낙스와 사무엘 러더포드 그리고 스펄전과 로이드존스를 안이하고 위험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존 파이퍼를 위시한 개혁주의 그룹 또한 님으로인해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개혁주의 마을 형제분들. 토론의 맥을 위해 게시물들을 따로 올리지 마시고 이곳에서 저를 반박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토론 가운데 주께서 함께 주시길 바랍니다.
제자님의 답변을 읽고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언의 성격이랄까, 계시로서 예언을 말하고 있지 않읍니다.
일반적 은총 즉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는 하나님,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호흡을 주시고 영을 주시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듯 보입니다.
불신자 세계 속에서도 신기한 체험으로 얼마든지 고백 될 수있는 간증으로서의 수준입니다.
@보혈 님이 말씀하신 일반적 은총보다는 저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17세기 청교도들은 특히, 매튜 미드는 <유사 그리스도인>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역사를 "성령의 특별적 사역"이라고 표현을 했고 은사를 베푸시는 역사를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님의 언급한 일반 은총을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라는 맥락으로 이해를 해도 되겠는지요? 그렇다면 님도 예언의 은사가 "정경의 완성을 위한 계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반적으로 주시며 오늘날에도 유효한 영적 은사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는지요?
@제자 제자님의 의견을 잘 접수하였읍니다.
유사 그리스도인을 설명하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입니다.
의견을 공유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교도들이 예비적은총 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했읍니다만, 성경적 구원과는 구별되고 거리가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