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서울역,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곳
변한 곳도, 변하지 않은 곳도 많은 서울역을 가다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울역은 서울의 관문(關門)이었다.
관문은 국경이나 경계에 설치하는 문을 의미하지만 어떤 곳을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중요한
길목을 의미하기도 한다. 첫 문장에서 관문은 서울역이 서울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임을 의미한다.
(2021. 09. 15) 옛 서울역 역사. 지금은 전시 공간인 문화역 서울 284가 되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물론 지금은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서울로 올 수 있다.
서울이 동서남북으로 넓어진 지금은 강북 한가운데에 있는 서울역이 아니더라도 이용할 거점이 많다.
하지만 자동차나 비행기가 대중화되기 전의 서울역은 서울에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서울역은 고향으로 가는 출발역이기도 하다. 지금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손쉽게 표를 끊을 수 있지만 추석과 같은
명절만 되면 기간을 미리 정해 귀성 열차표를 현장에서 예매해야 할 때가 있었다. 당시 뉴스에서는 서울역에 표를 구하러
모인 인파의 모습을 비춰주곤 했다.
남대문역에서 경성역으로, 그리고 서울역으로
서울역의 명칭은 남대문역이었다.
원래는 1900년에 경인선의 서울 도심 구간이 개통되며 남대문정거장으로 시작했다.
남대문역이 1923년에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며 서울을 대표하는 기차역이 된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역 역사(驛舍)를 도쿄역에 버금가는 역을 만들기 위해 서양식으로 건축한다.
지금도 서울역 광장 오른편에 남아 있는 ‘문화역 서울 284’ 건물이다.
남대문 정거장 전경.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경성역 전경.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네오 르네상스 양식인 이 건물은 1925년 9월에 준공되었다.
서울역 자료에 의하면 스위스의 루체른역을 모델로 하여 디자인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루체른역은
1971년 화재로 많이 손상되었다. 이 화재 후 루체른역 복원을 위해 관계자가 서울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경성역은 해방 후 1947년에 서울역으로 명칭이 다시 바뀐다.
전쟁 때는 철로와 시설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복구되어 서울의 관문 역할을 계속 수행한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서울역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면 ‘무작정 상경’이라는 단어가 눈에 많이 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서울로 올라온 미성년자들을 다룬 기사들이다.
그중에는 꿈을 좇아 새로운 출발을 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례도 많았다.
무작정 상경한 여성을 향락업소에 넘기는 인신매매범들의 활동 공간도 서울역 일대였다.
그래서 서울역에 가출 청소년을 계도 하는 경찰까지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의 서울역 전경. (출처: designersparty 페이스북)
더 좋은 일자리와 자녀 학업을 위해 가족 모두 상경하는 사례도 많았다.
기자 가족도 그중 하나다. 기자의 가족은 1960년에 부모님과 형제들의 고향인 경상북도 상주를 떠나 서울로 왔다.
“동틀 즈음 상주역에서 기차 타고 김천역으로 가서, 한참 기다린 후에 기차 갈아타고 또 한참을 가서야 서울역에 도착했지.
서울 집에 가니 해 질 녘이었는데 새벽에 트럭으로 떠난 이삿짐과 아버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더라고. 그렇게 서울은
먼 곳이었어.”
70대인 기자 누나의 증언이다. 서울역은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도착역이고 지방으로 가는 출발역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이 이용한 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은 곳이기도 하다.
민자 서울역사 그리고 문화역 서울 284
서울역은 많이 변했다. 늘어나는 기차 이용객을 옛 서울역 역사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민자 역사가 들어서고, 옛 서울역 역사는 전시장이 되었다.
한국 철도의 중심지였던 옛 서울역 역사는 1981년에 사적 284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인 관계로 사람의 왕래가 잦은 역사의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복원 과정을 거쳐 전시장으로 변신해 2011년에 ‘문화역 서울 284’로 다시 문을 열었다.
(2021. 09. 15) 옛 서울역 중앙홀. 지금은 전시 공간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9. 15) 옛 서울역 역사 천장의 스테인드 글라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예전에 매표소가 있었던 중앙홀, 일반 승객이 기차를 기다렸던 삼등 대합실, 조금은 비싼 기차표를 끊은 승객들을 위한
일이등 대합실 등이 전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중앙홀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각 대합실을 꾸민 장식들이 복고스러운 모습을 연출한다.
경성역은 이동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근대 문물을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 곁 티이루움에 들렀다. (중략) 여기 시계가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것이 좋았다.
(중략)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 나오는 경성역과 관련 있는 대목들이다. ‘티이루움’은 아마도 티룸(tea room)일 것이다.
경성역 입구에 걸렸던 시계, 파발마(擺撥馬)는 정확하기로 유명했다.
지름 160cm의 파발마는 1970년대 후반까지는 한국에서 가장 큰 시계였다.
(2021. 09. 15) 옛 서울역 역사에 걸린 시계. 예전에는 파발마로 불렸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이상(李箱)이 메뉴를 고른 식당은 아마 옛 서울역 2층에 있던 '서울역 그릴'이었을 것이다.
현재는 서울역 식당가로 옮겼는데 1925년부터 영업한 레스토랑이라고 한다.
현 서울역 역사는 아울렛과 함께 있다.
지금도 사람이 없지 않지만 코로나19 창궐 전에는 쇼핑객과 승객들로 무척 붐볐을 구조다.
매표소와 대합실, 그리고 승강장은 예전 시설과 매우 다르다. 하지만 여행을 앞두고 설레는 승객들의 모습은 같은 듯하다.
며칠 후면 추석이라 서울역은 지방으로 가고 서울로 오는 사람들로 한껏 붐빌 것이다.
(2021. 09. 15) 서울역 대합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9. 15) 서울역 승강장.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변하는 듯 변하지 않는 서울역 풍경
서울역 광장 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각종 종교를 포교하는 사람들, 정치적 주장을 외치는 사람들,
서울역 광장을 안방 삼은 노숙자들, 그리고 코로나19 선별 검사소에 줄지어 선 시민들.
9월 어느 날 찾은 서울역 광장은 예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문화역 서울 284 근처에는 우뚝 솟은 동상이 있다. 강우규 의사 동상이다.
그는 1919년 9월 남대문역에서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1920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2021. 09. 15) 강우규 의사의 동상.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9. 15) 옛 서울역 고가도로. 지금은 보행도로인 '서울로 7017'이 되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강우규 의사 동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고가도로가 지난다.
예전에는 차량이 이용했지만 지금은 보행로가 된 ‘서울로7017’이다.
1970년에 준공된 서울역 고가도로는 안전문제로 철거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보행자를 위한 시설을 만드는 것으로 재활용되었다.
명칭에 들어간 ‘7017’의 의미는 “1970년에 만들어진 고가도로가 2017년에 다시 태어나고,
1970년대 차량길에서 17개의 사람길로 재탄생하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17m의 고가”라는 다소 긴 의미를 담고 있다.
서울역 건너 관문빌딩의 1970년대 초반 모습. (출처: designersparty 페이스북)
(2021. 09. 15) 현재의 관문빌딩.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한편 1950년대 사진에서, 그리고 60년대와 70년대 사진에서도 나온 건물이 아직 그대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문빌딩이다. 간판만 다르고 건물 구조는 그대로다. 이 건물을 잘 아는 사람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관문빌딩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서울의 관문 서울역 앞에 있는 건물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서울역과 그 주변은 수십 년을 거치며 많이 변한 듯하지만 그대로인 곳도 아직 많다.
어쩌면 주변의 높고 화려한 건물들과 비교해 낡고 초라해 보이지만 질곡의 역사를 지켜본 증인으로서의
경륜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수년 후에는 이곳도 지금 모습이 사진 속에서나 남아 있는 곳으로 바뀌지 않을까.
첫댓글 근대사를 공부 하고 갑니다
와
옛날 서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