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구른다 / 김정화
구른다. 창밖 벚나무 사이로 바람이 구른다. 나무에서 내려온 바람을 타고 낙엽이 흐르고 마른 흙이 날린다. 사방이 요동치는 것을 보니 봄이 저만치 오고 있나보다. 봄은 왈츠를 추듯 부드럽게 오거나 폐부를 찌르면서 아프게 다가오기도 한다. 봄볕이 할미꽃 목덜미에 윤기를 내고 젊은 여성의 킬힐 소리를 경쾌하게 만들지만, 춘풍이 구르기까지 나무의 뼈가 아프고 강물의 살이 아팠음을 어찌 모르랴.
움츠렸던 마음속까지 봄빛이 헤집고 들어온다. 허기도 멎게 하고 가난도 잊게 해준다. 덩달아 묻어 둔 옛사랑도 끄집어 보고 떠나버린 인연도 추억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봄을 타고 싶어한다. 그 봄을 타면 어디로든 날아오르거나 굴러갈 수 있을 듯하다. 보리밭에 달래 움이 돋는지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다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립고, 젊음만 믿고 덜컥 결혼하던 스물한 살 고향 친구의 봄날 패기가 떠오른다. 또한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아서 가슴에 큰 돌을 얹고 풀밭에 누웠다던 옛 시인도 생각나는 계절이다.
사방이 구르니 나 혼자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봄은 제 발로 오겠지만 그보다 먼저 봄을 맞으러 가고 싶다. 공자는 먼 곳에서 친구가 오는 것만 해도 반갑다고 했는데 봄을 찾아 나서는 것은 더더욱 기쁜 일이다. 봄꽃을 만나고자 홀로 강가를 거닐며 시를 읊조린 두보도 있지 않았는가. 자연은 겨울에 옷을 벗고 봄에 걸치지만, 사람은 반대로 두꺼운 겨울옷을 봄에는 벗어 던진다. 계절의 흉내를 내느라 한 박자 뒤따라가는 우매한 인간이니 입춘의 봄바람이 좀 추우면 어떤가.
봄은 향기에서 온다지만 나의 봄은 소리에서 온다. 매화나 라일락보다 물소리가 먼저다. 해동하는 강물 소리를 귀에 담으면 갈대숲 물닭을 만나고 귀향하는 새들의 함성도 들을 수 있다. 봄은 풀리는 계절이다. 봄에는 사람의 굳은 마음도 봄물처럼 녹아내린다. 그 소리가 진정한 봄의 소리다.
내가 봄마중을 가는 곳은 낙동강 둘레길이다. 을숙도 강변길이나 둔치도 황톳길이나 해포도 나루터를 따라 홀로 걸으면 숨겨둔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제맛이 난다. 잊고 싶은 이야기는 묻어두고 하고 싶은 말은 흘려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곳에서 까치발로 서면 내 고향 마을이 보이니 온종일 걸어 다녀도 지루하지 않다.
모처럼 찾은 낙동강은 고요하다. 재첩이 그득하게 흐르던 물줄기는 모래섬의 갯내음과 함께 내가 어릴 때 발을 담갔던 고향 샛강도 흘러들었을 것이다. 강물은 둥글게 수평선을 펼쳐놓았고 을숙도 모래톱 새들도 목덜미를 날개에 얹고 잠이 들었다.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을 지켜보니 신기하게도 을숙도의 을(乙)자와 무척 닮았다. 나는 이곳에만 오면 을숙도(乙淑島)라는 현재 이름보다 잘 숙(宿)자를 붙인 옛 이름 을숙도(乙宿島)가 그립다. 새들이 잠자고 쉬어가는 섬. 겨울 철새가 날개깃을 내리고, 나그네가 발길을 멈추고, 봄날도 기지개를 켜는 곳, 나도 잠시 몸을 내려놓는 곳이다.
오늘은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이른 봄을 만나기로 한다. 강변을 돌아 모래톱의 새들을 탐조하는 선로를 택했다. 겨우내 웅크렸던 강물이 구른다. 봄물이 풀린 강물 색은 산호 빛이다. 배 아래에는 거울을 펼친 듯 강변 풍경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건너편 승학산에서 건너오는 산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그림자 산등성이 사이로 씨알 굵은 붕어가 지느러미를 털고 튀어 오른다. 이 강에서 봄이 태어나고 달이 건져지고 사랑도 솟고 문학도 길어 올려진다. 뱃전에 몸을 기대면 강물이 아래로 흐를수록 봄은 역류하여 푸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강변에 바짝 뱃머리를 댔다. 모래톱에는 툰드라의 봄을 찾아 떠날 채비를 하는 큰고니들이 노을빛을 받고 섰다. 새들의 고요. 저 무한한 광경에 비하면 복잡한 인간사는 아무것도 아니다. 반쯤 몸을 잠그고 있던 갈대숲이 흔들거리니 뿌리에서 올라오는 갈대청에 풋기가 번져난다. 한창 봄을 밀어내고 있는 중이다. 갈댓잎은 겨울 내내 서로 몸 비비며 다독이고 찬이슬을 털어주며 봄날을 기다렸을 게다. 한파를 이겨낸 줄기마다 봄 강의 숨소리가 들어 있다. 그 깨어나는 봄의 피리 소리에 나는 귀를 씻는다.
봄이 구른다. 강물과 바람이 만난다. 미나리, 창포에 연둣빛 움이 돋고 꽃망울이 햇빛에 튀는 소리를 듣는다. 좀개구리밥의 겨울눈이 물 위에 떠오르고 봄까치꽃이 꽃불을 피워낸다. 봄에는 모든 게 부푼다. 사람의 마음도 둥글어지는 계절이다. 이러한 봄이 굴러 다시 내게로 왔다.
봄을 탄다. 올봄에는 나도, 구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