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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풍수|김란식과 먹구니마을] |
자손 없어도 찾는 이 있는 정감록 십승지 |
1836년 김대건이 15세의 나이에 신학 공부를 위해 중국 마카오로 떠날 때 동생 김란식은 겨우 아홉 살이었다.
란식은 12세 때 아버지 김제준이 순교 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힘들게 살아가면서 신부가 되어 돌아올 형을 기다린다.
형과 헤어진 지 10년 만인 1845년 애타게 기다리던 형이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다. 얼마나 기다렸던 만남인가. 그러나 만남은 너무 짧았다. 형제는 1845년 11월과 12월 사이에 경기도 용인 ‘은이공소’에서 만난 게 전부였다.
이듬해 형 김대건 신부가 관헌에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효수되었기 때문이다. 형의 순교 후 김란식의 삶은 더욱 어려워져 어머니와 함께 걸인처럼 살았다.
그러나 잠시 즐거움도 있었다. 신심 깊고 착한 안동 김씨 처녀와 결혼한 것이다. 하지만 세 식구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1864년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오갈 데 없는 그에게 1866년 병인박해로 참혹한 시련이 또 닥쳐왔다. 그는 비교적 박해가 덜한 전라도로 내려왔다. 먼저 이곳으로 내려온 7촌 조카인 김현채 가족 및 다른 신자들과 함께 전북 정읍시 산내면 먹구니란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그곳은 회문산 깊은 골짜기로 초근목피 말고는 먹을 것이 없었다.
땅을 개간하고 조를 심었지만 굶주림을 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몇몇 신자가 굶어죽기도 했다. 김란식은 토종벌을 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나중에 솜씨가 늘어 50통에 이르렀다.
그는 처자식 없이 수도자처럼 홀로 살다가 1873년에 세상을 떠났고, 먹구니마을에서 회문산 정상 쪽으로 1km쯤 떨어진 양지바른 언덕에 묻혔다.
올 2월14일, 눈에 발목이 푹푹 빠지는 이곳을 답사했다. 신태인성당의 김봉술 신부님과 박찬주 사목회장이 동행해주셨기에 찾을 수 있었지, 물어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눈이 쌓였는데도 김란식과 7촌 조카가 묻힌 무덤만큼은 편안해 보였다. 회문산의 험한 산세가 이곳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또 후손이 없는 묘지치고는 관리가 아주 잘돼 있었다.
근처 가리점마을 신자들이 관리를 해온 까닭이다. 아홉 살 때 부모를 따라 가리점마을로 이사 온 정행례(70세) 할머니에 따르면 이미 당시에도 김란식의 무덤을 신자들이 돌보았다고 한다.
흔히 좋은 명당으로 십승지(十勝地)가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이를 잘못 이해하여 이 땅에 가서 살면 크게 잘될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실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십승지란 조선 후기에 지어진 비결서 ‘정감록’에 나오는 용어로 ‘난세에 지도자가 사라져 더는 이끌어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지각 있는 사람은 살고 지각 없는 사람은 죽을’ 시기에 부닥칠 때 피난해야 할 열 군데를 말한다.
따라서 ‘십승지’는 명당발복을 기대할 땅이 아니라 난세의 피난처(保身之地)를 말한다. 김대건 신부 동생 김란식이 박해를 피해 숨어든 정읍 산내면 먹구니마을 역시 십승지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가 살았던 먹구니마을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고 잡목에 묻혀 있다. 고목이 된 감나무들만이 그곳이 한때 마을 터였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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