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 무심이 진정한 계정혜 / 대원 큰스님
무념위종(無念爲宗)이라는 말이 있다.
무념, 무심이 곧 본심인데, 중생들의 잡된 번뇌 망상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의 마음이 일체 없어져서
맑고 밝은 마음을 무념, 무심이라고 한다.
무념, 무심이 진정한 계정혜다.
진정한 계를 지키려면 무념, 무심이 돼야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계를 가지고 있는 건 소승계라,
중생이 ‘안한다’, ‘지킨다’ 하는 계다.
그런데, 그래봐야 제대로 지키는 계가 안 된다.
무념, 무심이 되어야 참다운 계정혜를 원만히 항상 잘 이루게 된다.
고기 한 점을 먹는 것도 도를 닦는 사람이 먹는 거 하고,
도를 안 닦는 사람이 먹는 거하고 다르다.
일반 사람들은 남의 목숨을 잡아서 고기를 먹을 자격이 없다.
중생들은 고기를 먹고 중생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도를 닦는 사람은 그 고기를 먹고 열반적정을 만들어 낸다.
최상의 상락아정의 열반을 밖으로 만들어 낸다.
소(牛)라면 자기 고기가 어떤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기를 바라겠는가?
도를 닦는 사람한테 자기 고기를 받치려 하지,
도를 안 닦는 사람, 먹고 썩은 것만
내놓는 사람에게 들어가려고 하겠는가?
본인들이 먹을 자격이 없으면서 도 닦는 사람이 고기 먹는 걸 보면
'스님은 고기 먹으면 안 되는데…' 이런다.
이렇게 눈이 어둡다. 이걸 바로 알아야 되는데 모른다.
잡된 생각으로 살아가는 중생의 업보, 이걸 가지고 생각을 하니까
전도몽상으로 잘못 생각하는 거다.
부처님께서 일곱 집의 밥을 거두는데,
고기라고 안 받고 그러지 않으셨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다 같이 탁발을 하면 주는 대로 받아 드셨다.
탁발하러 갔을 때 도 닦는 부처님의 제자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은 무한한 공덕과 복덕이 된다.
그런데, 도 닦지 않고 망상하고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한테
공양을 주면 그게 무슨 공덕이 되겠는가?
무념, 무심이 돼 있는 도인을 살아있는 부처라고 한다.
일체의 모든 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바닷물 하나가 되듯이,
무심도인에게 공양을 올려서 무심도인이 먹으면
백 가지 잡된 것을 다 부수어서(百雜碎) 순수한 제호가 된다.
그런데, 잘 모르고 이런 저런 말을 하면 큰 구업을 짓는다.
간화선문에서는
"막도무심운시도(莫道無心云是道)하라.
무심유격일중관(無心有隔一重關)이라.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마라.
무심도 한 관문에 막혀 있다."
이렇게까지 말씀했다.
공부를 해가지고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 데까지
다다라야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무념, 무심이 된다.
일체가 떨어져서 없는 무념경계를 완전히 죽은 자리라 한다.
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몸을 한번 뒤집어서 다시 서야
비로소 자유자재할 수 있는 완벽한 부처님으로 탄생되는 것이다.
(학산 대원 스님 역대법보기 강설)
출처: 학림사 오등선원 지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