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예레미야 33:1-13
오늘 본문 예레미야 33장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게 함락되기 1년 직전에 예레미야가 받은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 말씀은 유다의 멸망을 눈 앞에 두고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않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성벽이 뚫리고 성전은 불탑니다.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놋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최후를 맞습니다.
모세오경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역사라면, 예레미야를 포함한 예언서는 이스라엘의 '해체와 파국'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비극의 근본적인 이유를 예레미야서가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밌는 사실은 예레미야서의 본질적인 메세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라는사실입니다. 이 ‘회복’은 ‘지금의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는 단편적인 희망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로에게 반드시 멸망할 것이고 ‘70년’ 후에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70년은 두 세대가 지난 후입니다. 당대의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사라지지 않고 이루어 질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 메세지가 오늘 본문에 정확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예레미야의 메세지가 쉽지 않지만,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지 고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에 대해 정의가 여러곳에 여러곳에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9:24에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 17:10에 ‘나 여호와는 심장을 감찰하며 페부를 시험하’는 분, 32:27에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분’으로 정의를 합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정의는 이어서 나오는 말씀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33:2절에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는 여호와’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원어상으로 '만들다', ‘형성하다’, ‘굳건하게 하다’라는 동사가 점진적 순서대로 정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완전케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는데, 지금도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완벽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을 신약의 말로 표현하면 에베소서의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엡3:9)’ 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런 하나님의 큰 경륜을 의미합니다. 단편적인 약속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세상을 창조하시며 세우신 목적을 완전하게 이루시는 것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성공하거나 고난을 겪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이루시려는 더 큰 목적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일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그 경륜 속에 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은밀한 일’입니다. ‘은밀 하다’는 말은 원어로 '요새화되어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접근 불가능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다시 에베소서에서 복음을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3:9)’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시겠다고 하신 크고 은밀한 일은 세상에서 겪는 그 일들 너머에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시작하여 이루가시고 있는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계획과 목적입니다.
주전 586년, 남 유다는 눈앞에서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며 왕은 눈이 뽑혀 죽임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비참한 현실과 절망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으면 응답하겠다고 하신 것는 조건적 응답이 아니라, 절망속에서 유일한 소망과 같습니다. 부르짖음과 응답은 조건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부르짖을 대상이 있다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고통으로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절망과 좌절이라기 보다, 부르짖을 수 있는 대상 하나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완전한 해답을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다음구절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절망의 상황에 있는지 아십니다. 우리의 상황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욱 아십니다.
(4-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먼저 간과하지 말 것은 현실 인식입니다. 막연히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희망을 말하기 전에, 4-5절에서 '현재의 비극’의 이유를 명확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지금 현재 상황의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 이 상황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하십니다.
유다는 바벨론을 무찌르겠다는 의지로 성벽 안에서 맞서 싸웠지만, 결과는 패배와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읍이 시체로 가득 찬 무덤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셨다는 것은 '보호의 거두심'을 의미합니다. 그 원인인 악행 곧 죄는 착한일 했는가? 나쁜일을 했는가? 그런 단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500 여년 역사는 죄의 상태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들로 채워졌습니다. 죄의 결과는 참혹합니다. 우리에게서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우리는 죄의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의 의도와 노력과 바램과 다르게 피할 수 없이, 우리는 현재 죄의 상태에 있고 그 결과들 속에있습니다. 그 인식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부터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은, 실패로 부터 회복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용서와 사함 그리고 깨끗게 하심입니다.
(6-9)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당장 바벨론 군대의 칼과 기근에 죽어가는 시체들로 성읍이 채워지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33:5) 속에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미래를 보여주십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 거리에 다시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 신부의 소리, 성전에서 감사 찬양을 드리는 소리가 들리게 될 것이라는 ‘기적적인 회복'입니다. 정치적 해방이나 영토 회복이 아니라, 근본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모든 문장의 주어는 '내가'입니다. "내가 치료하고, 내가 돌아오게 하며, 내가 정하게 하고...". 너가 무엇을 하고, 너가 어떻게 하고, 너가 어떻게 되면이 아니라, 하나님인 내가 하겠다는 것은, 이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황폐해지고 무덤 같이 되지만,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다시 회복하게 하십니다.
(10–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 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가 살 곳이 있으리니 그의 양 떼를 눕게 할 것이라 산지 성읍들과 평지 성읍들과 네겝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면과 유다 성읍들에서 양 떼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10절에서 13절은 앞서 선포된 '크고 은밀한 일'(33:3)과 '근본적인 죄 사함'(33:8)이 백성들의 실제적인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보여 줍니다. 13절에 나열된 '산지, 평지, 네겝, 베냐민 땅, 예루살렘 사면'은 유다 왕국의 전체 행정 구역이자 지리적 영토를 총망라한 것입니다. 이 모든 땅이 바벨론에 의해 짐승조차 살 수 없는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곳이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 성전에서 찬양하는 소리"(11절)라는 청각적 이미지로 그려집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마음에 평안을 주겠다"는 추상적인 위로를 하지 않으십니다. 철저히 파괴된 그 구체적인 지명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시며, 그 잿더미 위에 다시 일상이 재개되는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핵심은 33장 15절에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에서와 같이 유다 왕조의 회복입니다. 그 ‘회복'의 메시지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잡게했습니다. '70년'이라는 기한이 정해졌다는 것은,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끝나지 않고 이루진다는 것을 보며 살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현세에서의 삶의 포기나 무조건적인 고난만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일상을 영위하고 평안을 구하는 현세적 삶'을 긍정했습니다. 심판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되, 그 현실 한복판에서 집을 짓고 평안을 구하며,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이스라엘의 파국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겹쳐집니다. 때로는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무너지는 고통의 시기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삶의 본연의 모습과 대면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죄악이었듯이, 우리 개인과 사회의 탐욕과 죄악을 대면해야 합니다. 실패의 한복판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과 정의와 믿음과 인내로 사는 것입니다. 결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완전히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정체성이 성공 여부가 아니라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언약'에 안전하게 보장되어 있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생존자들이 70년 뒤의 회복을 보지 못하고 죽어갔지만,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언약을 앞당겨 오늘을 살아내라는 것이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참여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과정 가운데 놓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밀하신 일과 목적을 알게 하여주옵소서.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과 소망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레미야는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이라고 정의합니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시 멸망해가는 유다에게 하신 예언은 무엇이며,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4.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유다의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작성 : 조광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