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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회 간화선 읽기
이희익 대선사 2009년 8월 19일 현대불교신문에는「내가 만난 선지식, 법시사 편집장 이희익 대선사」라는 글이 실렸다. 일본대학日本大學 철학과哲學科를 졸업하시고, 1925年 일본 임제종臨濟宗 묘심사파妙心寺派 경성별원京城別院에 출가하셨던 종달宗達이희익李喜益1 노사님에 대한 기사였다.
<법시法施>는 1972년 조흥은행장 정종원 거사님께서 명자그대로 “진리의 베풂”을 위해서 창간한 잡지다. (중략) 이희익(1905~1990) 선사는 상임이사로 법시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법시>에 글을 쓰다 보니 막역한 처지가 되어 자주 만나 공양도 하고 차도 마시게 되었는데, 그의 모습은 일본 선종 그대로였다. 일본에는 임제종과 조동종 두 가지 선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조동종은 위빠사나를 중심으로 한 묵조선黙照禪이고, 임제선은 간화선看話禪을 배경으로 한 화두선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선에 관심은 많았어도 실제 선에 대한 이론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선사께서 <신심명信心銘> <증도가證道歌> <십우도十牛圖)> <좌선의坐禪儀> 등 선종 4부록을 내고 또 <임제록臨濟錄>을 발간하여 직접 강의를 함으로써 선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게 되고 삿된 길, 마군이 길을 막게 되었다.2
필자는 이 기사를 읽으며 특히 ‘그의 모습은 일본 선종 그대로였다’라는 구절에서 2004년 안성 도피안사에서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 필자는 2003년 화두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춤>을 1년 만에 투과하고 이듬해 2004년 초 <공수파서두空手把鋤頭>라는 화두를 참구 하고 있을 때였다. 선도회 동계 철야용맹정진 자리였는데, 좌담회 중 필자가 “우리가 하는 선은 일본선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에 대해 지도 법사이셨던 법경法境 법사님은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떤가,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의 정치 철학을 인용하시면서, “꾸준히 공부해 보십시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회상하고 있다. 이때 내가 한 질문은 선도회 종조宗祖이신 종달 노사님이 일본 임제종 스님이셨다는 이력履歷3과 ‘부처님 오신날’ 관련 한 TV프로그램에서 숭산 노사님이 하신 ‘일본 선은 사다리선’이라는 말씀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알듯 모를 듯한 화두와 무언가 서늘하면서도 통쾌한 선문답에 대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 선도회에 입문을 하였지만, ‘일본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선도회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의 조계종과 일본의 임제종의 차이는 무엇일까? 조계종에서는 화두를 하나만 참구하라는데 선도회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에서는 자유롭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의문들은 선도회 수련을 하면서 서서히 사라졌는데, 선도회는 간화선 수행에 대한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화두 경계 또한 뚜렷하여 그때까지 오리무중이던 선사들의 선문답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화두에 대한 의혹을 떨칠 수 있었고 화두에 집착하지도 않게 되었다.
선방에 가서 한 철만 나도 도인을 자처하고 선사들 근처에 갔다가 한 말씀만 들어도 한 소식 얻은 것처럼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선사를 만나면 쥐죽은 듯 조용히 앉아 귀를 기울인다. 옛날에 전혀 듣지 못한 소리를 듣고, 보지 못한 경계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까만 장삼에 황금빛 찬란한 낙자4를 매고 단정히 서 있으면 10대 스님처럼 보이지만 다실에 앉아 정좌하고 앉으면 백년 수행자처럼 그 모습이 의젓하다. (중략) “사람마다 신발을 바르게 정리하는 모습은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습의習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신 손님들의 신발을 나란히 정리하여 나갈 때 편이하게 신을 수 있도록 정리해 놓으시는 이희익 스님, 항상 조심스럽게 법도에 맞게 말하며 털끝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아니했던 대선사의 향취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5
활안 스님의 말씀에 동감하며 이제는 지도하는 입장이 되어 당시 가졌던 의문들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해보려고 한다. 또, 자주 받는 질문 중에 하나인 선도회 화두는 왜 많은지에 대한 답도 제시할까 한다.
일본이라는 단어 아직 수행이 덜 된 탓인지 ‘일본’하면 우선 부정적인 생각부터 떠오른다. 일본에 가보고 나서야 그런 선입견들을 많이 버렸지만, 이웃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은 껄끄럽고 아무래도 정이 가지 않는 나라이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대부분 앞서있다 보니 그들의 기술을 도입하고 그들의 방식을 따르고 배우면서도, 과거에는 우리가 너희들 보다 앞섰다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남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고 싶은 욕망을 타고 난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위신’을 갈망한다고 하였던가?6
긴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일본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내내 뒤져 있었다. 문명의 변방에 있었던 일본은 대부분 우리를 통해 문물을 받아 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 이후 일본은 세계 은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여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였고, 우리보다 서양 문물을 접할 기회도 많았다.7 19세기 들어 미국이 일본 근해의 고래를 잡아가기 위해 개항을 요구하게 되는데,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고 평화를 구가하던 절대 권력 막부는 한 번 겨뤄보지도 못하고 미국 흑선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 사건이 명치유신明治維新8의 기폭제가 되어 일본의 근대화가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치유신으로 봉건제를 타파한 일본은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헌법을 제정하고, 토지제도 개혁 등을 추진하였으며, 화폐, 금융, 재정제도 및 근대적 교육제도의 도입을 서두르게 된다. 전통산업이었던 섬유산업을 구미기술과 결합, 수출상품으로 육성하면서 거기서 얻은 외화를 중화학공업육성에 투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럽 선진 국가들로 부터 교사, 기술자를 초빙함과 동시에 이들 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기술 및 경영능력을 도입하여 산업화도 적극 추진하였다. 영국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19세기 들어 벨기에를 비롯한 프랑스, 독일로 퍼져나가는데,9 19, 20세기 들어 미국과 더불어 일본 역시 놀라운 성공을 거두면서 일찌감치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10
반면 우리나라는 조선 말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두 번의 외침을 막아 내었을 뿐 아니라, 그런 굴욕을 용납하지 못하는 선비의 나라였고 명분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성리학性理學11의 나라였다. 명분名分과 정권政權의 상관관계가 거의 없는, 칼이 곧 명분이며 무력이 곧 정권이었던 일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나라였던 것이다.12 그래서 근대화가 늦어지게 되는데, 이런 자신감은 척화비에 잘 나타난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나와 나의 자손들은 경계하라.”13
그러나 그러는 사이 열강들은 발달한 문명과 과학기술, 그리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고, 이미 중국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그 칼날은 조선을 겨누게 될 상황이었다.14
당시 우리나라에도 선각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학사상에 뿌리를 둔 개화사상이 박규수(朴珪壽, 1807~1877)에 의해 강위(姜瑋, 1820~1884),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유대치(劉大致, 1831~ ?) 등으로 이어져 개화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1874년에는 개화당을 결성하여 자주적 근대국가의 기초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마는데, 개화사상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켜 국왕을 인질로 삼는 등 너무 급진적으로 추진하다가 개화에 찬성하던 온건개화파까지도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19세기말 열강의 침탈에 맞서 싸워야 할 개화세력 또한 일시에 몰락하였다.15
한편으로 생각하면 긴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이 누렸을 우월감에 비한다면 근대 우리의 불행은 잠시 걸음을 멈춘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중국 황하문명 (양사오 문화, 앙소仰韶 문화)보다 1,000년이나 이른 요하문명 (훙산 문화, 홍산紅山 문화)을 일으킨 민족으로,16 한반도로 내려와 자리 잡은 뒤로는 마한(영산강 지배세력)에 이어, 가야가 일본을 지배 경영하였고, 고구려와 백제도 오랜 동안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백제 무령왕이 일본 왜왕(일본 천황)이었다가 백제왕이 되었다는 데에 이르면 우리가 먼저 식민지 경영을 했었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 서게 된다.17
한국과 일본의 명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는 1982년 미국에서 제작된 공상 과학 영화이다. 미래에 대한 불길한 암시와 인간의 존재 및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데, 배경이 201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다. 마지막 세계 대전 이후, 가공할 핵무기로 불모지가 되어버린 도시는 이제 푸른 자연은 찾아 볼 수 없고 끊임없이 산성비가 내리고 스모그가 짙게 깔려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LA 마천루에 걸려있는 대형 스크린에선 일본여인이 광고모델로 등장하고 도시의 간판과 네온싸인은 모두 일본어나 한자로 되어 있었다. 일본여인을 전광판에 등장시킴으로서 미래에는 첨단기술의 나라 일본이 세계를 주도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고, 당시 미국에서 커져가고 있는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제작될 당시만 해도 일본이 미래 세계를 재패할 것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 아사히신문은 ‘주식회사 일본이 망했습니다.’ 라는 제하에 ‘일본 파산’ 시나리오를 보도했다. 천문학적 인플레이션 상태에 돌입한 짐바브웨나, 연간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 대비 12.7%를 넘어선 그리스처럼, 일본이 10년 안에 거덜 난다는 내용이다. 지금 일본은 국채 발행액이 나라 전체 연간 수입을 초과하고 있고, 2010년 말에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망라한 일본 정부 전체의 공적 채무가 949조 엔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주요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GDP의 2배(약 1.97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거기다 일본은 인구의 20%가 노인인 노인국가이다. 1위를 달리던 조선업이 우리에게 그 자리를 내 준 것도 노동집약적인 조선업을 지탱할 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일본을 이끌던 자동차나 전자 산업 등 첨단 기술 산업 또한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일본은 전망이 불투명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라로 전락해 가는 중이다. 이삼십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그리 만만한 나라는 아니다. 국제통화기금의 통계수치에 따르면 일본은 이미 연속 20년간 세계 최대 채권국의 부동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18 대외對外채권액에서 대외채무를 뺀 순대외채권이 3조 달러에 이르러, 2등인 중국에 비해 약 두 배에 이른다. 이는 한국 한 해 총생산의 두 배 이상 되는 액수이다. 일본이 근래 들어 무역적자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무역흑자를 보아온데다, 일본인은 저축을 많이 하여 그 돈이 해외투자로 전환됨으로써 세계 최대의 對外채권국, 일본을 만든 것이다. 이자 수익만도 엄청나 순채무국인 우리나라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하다.19
제조업이나 과학적인 기반에서도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데, 얼마 전 우리는 두 번이나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데 실패했지만, 일본은 이미 1970년, 4번의 실패 끝에 성공하였고,20 2007년에는 달 탐사 위성 ‘가고야’를 달에 보냈다. 일본은 이 가고야 위성을 통하여 자전 공전을 하는 달이 왜 항상 같은 면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 면) 만을 지구를 향하고 있는지 밝혀내었고, 달 표면의 크레이터 수를 세어서 그럴 듯한 지구 생명의 우주기원설까지 일부분 증명해내기도 하였다.21
불교에 있어서도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불교 종주국이다. 우리의『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저본底本으로 지금 세계 불교학계에서 활용하고 있는『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을 펴내었고, 팔리어 경전을 일본어로 번역한『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도 간행하였다. 경전 간행 뿐만 아니라 석지현 스님이『벽암록』해설서를 쓰면서 ‘주석서는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고 일본에만 집중적으로 있는데 50종이 넘는다.’라고 하셨을 정도로 불교 연구 또한 우리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2010, 11년 동국대학교에서 열렸던 간화선 국제학술대회에서 일본 불교를 말하는 학자는 많아도 한국 불교에 대해 논하는 석학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I. 임제종 간화선 수행체계
사다리선 한국에 들어와서 선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불교 수행을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오래 되어 뚜렷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한국 조계종 참선 수행 모습과 일본 임제종 간화선 수행 및 입실점검 모습, 그리고 선도회 같은 재가자들의 선 수행 모습 그리고 선무도 등이 소개되었던 것 같다. 이 프로에서 숭산행원(崇山行願, 1927~2004) 노사님은 한국 조계종 간화선과 비교하여 “일본 임제종 간화선은 사다리선”이라는 말씀을 또렷이 기억한다. 필자는 그때 그 말씀이, 숭산 노사님이 일본의 선불교를 돌아보고 선지식들을 만나본 체험을 통하여 느끼신 바를 피력하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다리선’이란 말은 이미 송대宋代부터 있었던 것이었다.
송대에는 임제종 간화선과 조동종 묵조선이 “선종禪宗 이대감로문二大甘露門”이라 하여 당시 선종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서로 경쟁하는 입장에서 각 종파는 자기들이 육조六祖의 정통이라고 주장하였다. 임제종 양기파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22 선사는 묵조선을 고목무심枯木無心 또는 무위무사無爲無事의 외도선, 소승선이라고 비판하면서, ‘묵묵히 좌선 중심의 일행삼매로 불법 전체를 구현한다는 조동선풍은 아무런 지혜의 활동과 사회성이 없으며, 중생구제의 보살도 정신이 부족’23하다고 비난하였다. 반면에 당시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24 선사로 대표되던 조동종에서는 깨달음을 기대하는 간화선은 바보 같은 대오선待悟禪이며 학습선學習禪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천연자성심天然自性心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 미오迷悟의 망념이 없는데, 또 다시 깨달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미 부처인데 또 다시 부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승 원오극근의 교시를 따라 古人의 화두를 參看하는 간화선을 ‘하나의 공안을 통과(透過)하고 또 다른 공안을 투과하는 사다리 형식의 선’이라 하여 제자선梯子禪(사다리선)이라고 비하하였던 것이다.25
임제종 승려들은 조동의 선법을, 수행자로 하여금 이미 깨달았다고 믿으면서 우쭐대며 망상 속에 빠져있게 하는 일종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선, 즉 ‘무사선無事禪’이라고 비판했다. (중략) 즉 조동 선법은 정적靜寂하고, 깨달음이 아닌 정신적 고요함만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지관타좌는 육조혜능六祖慧能이 점오漸悟로서 거부했던 ‘마음의 거울을 닦는’ 종류 같은 선풍禪風이라고 비판한다. 조동종 승려들은 그들대로 임제종의 접근법을 깨달음을 기다리는 선, 즉 대오선待悟禪이라고 비판하는데, 이것은 깨달음을 ‘가지거나’, ‘가질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사물’ 또는 경험으로 잘못 알고 물상화시키는 선이라는 것이다. 또한 조동 종도들은 많은 공안들을 참구해 나가는 과정을 점오漸悟를 의미하는 용어인 단계적인 선, 즉 제자선梯子禪이라고 부르면서 비하한다.26
대혜는 묵조선을 ‘묵조사선默照死禪’이라고 하면서,27 마음과 깨달음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 마냥 앉아있기만 하는 묵조선의 수행형태는, 단지 돌에 눌려 있는 풀과 같아서 완전한 깨달음에는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풀을 누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뿌리 채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혜가 판단하기로 묵조선은 단순히 적조정묵寂照靜默이나 현실 도피주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중략) 대혜는 그들이 만약 한적한 곳을 발견하고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를 얻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최상의 평화와 축복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이 단순히 돌에 눌려있는 풀과 같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전환의 체험인데 그것은 풀을 돌로 누르는 것처럼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고 풀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이라고 대혜는 주장한다. 그러한 순간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동안에 우리는 항상 하나의 화두에 몰두해서 대혜와 백은이 말했던 대의심을 길러나가야 한다. 대혜가 권한 것처럼 한다면 종국에는 확철대오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28
대혜는 초기 언어나 문자를 믿지 않는 선사로『벽암록』을 보고 그 책을 바로 불살라 버리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활구를 기폭제로 사용하여 돈오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자신이 공안집을 편집하여 후학들에게 수행에 사용하도록 독려하였다.29 중국에 가서 임제종과 조동종을 두루 공부하고 돌아온 일본의 조동종의 개조開祖 영평도원(永平道元, 1200~1253) 선사도 300개의 공안을 모아서 공안집을 만들어 지도하였다고 한다. 선지도의 속성상 어떻게 공안을 활용했는지를 나타내는 기록들은 전해지지 않지만, 도원이 공안 공부를 불교수행에 핵심적인 부분으로 간주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주요한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개별적 참문을 위해 주지의 방에 입실入室했던 가까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정확히 어떻게 도원이 공안을 활용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은 없지만, 이런 문제는 대혜 이후 몇 세대에 걸쳐 임제종에 속했던 선사들을 포함해서, 송대 중국 그리고 카마쿠라 시대의 일본에 살았던 대부분의 선사들의 어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원은 공안 문학을 ‘불조佛祖’에 의해 남겨진 보리달마 법맥의 지혜의 보고寶庫로 간주했으며, 공안 공부를 불교수행에 핵심적인 부분으로 수용하고 권장했고, 공안에 대한 비평은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했던 주요한 도구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30
도원의 저술들을 보면, 그가 ‘안목을 구족한(具眼)’한 사람과 ‘구족하지 못한(未具眼)’ 사람들을 구별하였으며, 고칙古則 공안을 파악하는 능력을 보고 도를 이루었는지 이루지 못했는지를 판단하였다는 사실이다. 현재 선도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행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선도회 회원이라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한편,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묵조선 수행에 대한 대혜의 비판을 당시 사대부들이 대부분 묵조선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후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행해졌다는 학계의 주장이다. 대혜의 묵조선 비판이 단지 재가신도의 후원을 얻기 위한 경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슐러터는 大慧가 많은 사대부들이 묵조선을 배웠다는 것을 알게 된 때인 1134년 이후에야 묵조선을 비판하고 간화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大慧는 “내재적 불성을 강조하면서 비약적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요구되는 극도의 노력을 경시하는,”특히 재가불자들에게 매력적인, 묵좌가 유행을 끄는 것을 목격했습니다.31
大慧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지만, 화두에 대한 “비서술적인” 접근방법을 옹호하는 구절들은 대체로 그의 “편지”(大慧書)와 같은 소수의 작은 저술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편지”들은 특히 불교의 경전적, 학문적 전통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거의 교육받지 못했던 재가 문인 사도들에게 보낸 것이었다. 大慧가 재가인의 후원을 얻기 위해 당시의 다른 선사들과 활발한 경쟁을 벌였던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며, 특별히 그는 그의 재가 신도들을 위해 간소화된 간화선을 고안했던 것으로 보인다.32
묵좌가 유행을 끄는 것을 보고 대혜가 단지 재가신도의 후원을 얻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단순히 학자적인 견해이지 선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위 인용문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대혜는 선어록 공부에 전념할 수 없는 재가자들이나 법을 모르는 수행자들을 위하여 수행을 돕기 위한 간단한 방법을 찾다가 간화선을 개발하였다. 그러므로 선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법을 제시하면서 좌선만으로는 깨달음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묵조선 비판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임제종 간화선의 모습 인도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 습선기習禪期를 거치면서 기존에 있던 유교의 언어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노장老莊사상과 융합33 기존의 불교는 중국 선종禪宗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후 선종은 선의 황금시대를 구가하며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다양하게 분화하였고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五家는 9세기 중반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이 당시 선종의 특색에 따라 처음 나누었는데, 이후 법안종法眼宗 천태덕소天台德韶의 제자 영안도원永安道原이『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34』(1004)에 채용하면서 선종계보의 정형으로 되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5가중 임제종, 운문종, 조동종만이 그 세력을 유지 하였고, 그 중에서도 유독 임제종과 조동종만이 남아 지금까지 전한다.
唐代에서 宋초기까지 선의 시대는 ‘純禪의 시대’ ‘禪機의 시대’라고 할 정도였다. 이는 이 시대 선자들의 선이 大機用(뛰어난 작용)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越格의 역량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五家 중 송대에도 계속 세력을 유지해 나간 것은 임제·운문·조동 삼종이었고 시대의 전후를 살피면 북송 전기에는 운문종이 유력하고 중기 이후 임제종의 황룡파로, 이어서 임제종 양기파로 선의 주류가 옮겨져 갔다. 양기파의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의 문하인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계통의 이 주류는 북송 말 남송대의 선을 석권하였으며 이 시대의 선은 ‘공안선의 시대’라고 칭한다.35
임제종이 법맥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이들의 수행체계가 타 종파와는 다른 특별한 부분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그럼 임제종이 성공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문자선文字禪36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공안수행”이라는 수행방법을 개발하였다는 데 있다. 공안수행은 운문종에서 개발되어 임제종에서 발전되었던 것으로, 염고拈古와 송고頌古라는 두 방식으로부터 연유한다.
조사들이 공안집에서 어떤 어구를 골라 제자들로 하여금 반조하도록 한 것을 염고라고 한다. 염고를 한 후에는 스승과 제자가 고칙古則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주석과 함께 총괄했는데, 그것을 송고라고 한다. 이런 염고와 송고의 과정은 스승이 과거 조사의 말씀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그 다음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기리며, 동시에 이를 통해 다시 제자에게 깨달음을 일깨우도록 자극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 선사로부터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에 이르기 까지 널리 유포하는데, 이를 비판하면서 새로 개발된 것이 대혜종고 선사의 <간화선법>이다. 이런 다양한 시도와 함께 여러 형식이 임제종의 황룡파와 양기파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형식들이 임제종을 송대 가장 유력한 선종 종파로 성장시킨 동력이었다.37
공안이나 공안에 등장하는 선문답은 조사들의 깨달음의 순간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깨달음의 장으로 유도하는 기틀이 된다. “공안선”은 제자에게 깨달음을 일깨우기 위한 수단과 깨달음의 경험을 촉진시키는 도구로서 개발되었으며 후에는 “간화선”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경우의 수에 맞추어 다양한 공안이 활용되면서 공안집이라는 형태로 집대성되기 시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뽑아 엮은『송고백칙頌古百則』과 굉지정각의 또 하나의『송고백칙頌古百則』이다. 설두 중현의『頌古百則』은 圓悟克勤에 의해『벽암록碧巖錄』으로 되었고, 굉지정각의『頌古百則』은 만송행수萬松行秀에 의해『종용록從容錄』으로 완성되었다.
두 권의 선종서『碧巖錄』과『從容錄』에 이르러 선종의 ‘기연어구機緣語句’와 ‘문답상량問答商量’이 정형화된 틀로 묶여서 수행의 지침서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후에 장단점이 보완되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편집되어, 후학지도를 위한 전문적인 공안집으로 텍스트화 된다. 그것이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에 의해 <무>자 화두를 필두로 정리된 선종 최후의 공안집,『무문관無門關』(1229년 刊)이다.『無門關』에 이르러 <무>자 공안은 간화선 수행에 있어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도가에서도 수행법의 하나로 채택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서 간화선 수행체계가 완성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당시 간화선을 사다리선이라고 비난하였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공안을 투과하고 또 다른 공안을 투과하는 교육과정이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부연하면 공안을 투과하고 또 다시 다른 공안을 투과하는 간화선 교육체계는 임제종 간화선법의 특징으로 이미 송대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無門關』이 선종서로 자리 잡으면서 당연히 공안에 대한 모범답안 또한 결집되어 마음과 마음으로 전승되었을 것이다. 교육을 위해서는 적어도 화두들의 전형적인 혹은 정형적인 답안들이 형성되고 전승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를 두고 선종이 간화선에 이르러 방법론적 완성을 이루고 ‘선의 완결’을 의미하여, 내부적으로는 활발발함을 잃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선은『無門關』에 이르러 그 발전의 최고봉에 도달 한 것이며,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더 진보하려고 하지 않는 한계에 왔음을 보여 준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실제로『無門關』은 중국의 어록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문 추상적 글이며, 관례 또는 선례로부터 출발한 공안이 여기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것과 맞닥뜨리는 것이다.38
숭산 노사님의 공안집『한 송이 꽃』에는 우리나라 자생 화두와 더불어 300개가 넘는 화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선의 나침반』에는 10개의 화두를 제시하고 이를 모두 투과하면 인가하신다고 공언하고 있다.39 종합해보면 화두들을 광범위하게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10개의 화두로 점검하시고 인가하시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하면 사다리 제급梯級(사다리 계단) 숫자만 줄였을 뿐, 송대에서 행해지고 일본 임제종과 우리 선도회가 하고 있는 간화선 수행과정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실재 지도과정은 임제종의 전통인 사다리 방식을 따르면서, 그 지도과정이 고스란히 체계적으로 남아있는 일본 임제종 간화선 수행 과정40은 조동종사가 했던 것처럼 ‘사다리선’이라고 폄하하신 것이다. 스님의 수행체계가 일본과 차이는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실재로 사다리는 높은 곳을 편하고 용이하게 올라가게 한다. 대혜종고 선사는 ‘무수히 많은 작은 깨달음과 열여덟 번의 큰 깨달음을 얻었다’41고 술회하였다는데, 이는 무수히 작은 계단을 올랐고 열여덟 번은 몇 계단 씩 건너 뛰어 올라 대자유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비유할 수도 있겠다.42
숭산 노사님은 일본에서 홍법원을 개설하고 한국 최초로 해외 포교를 시작하셨는데, 이 때 일본의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다니시며 선문답을 통하여 임제종 간화선을 접하신다. 그때의 경험으로 일본은 ‘사다리선’이라고 하셨다고 볼 수 있는데, 말씀하신 의도가 수행방법에 국한하지 않고 전반적인 모습을 보고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잘은 모르지만 일본 불교계가 체계적으로 잘 짜여 있어 자율성이 떨어지고, 수행과정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사관학교 같다거나, 생동감이 떨어지고 권위적인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간화선과 묵조선 송대 이후 조동종과 임제종 두 종파는 ‘어떤 수행이 수행자에게 가장 적절한가?’라는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여왔다. 그 근본에는『육조단경』과 거기에 주제인 돈수頓修 문제가 있다. 임제종에서는 조동종의 ‘지관타좌’를 육조혜능이 거부했던 ‘마음의 거울을 닦는’ 종류의 “점오漸悟”의 선풍禪風이라고 비판하였고, 거꾸로 조동종에서는 지관타좌야말로 바로 육조혜능이 세운 “돈오頓悟”의 원리에 합치하는 수행이라고 주장한다. 현재도 그 논쟁은 계속되고 있는데, 그 융합의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43
일본의 조동종 선사인 순류 스즈키(1904~1971)는 선은 일상생활에 대한 집중이고 수행 자체가 선의 실현이지 어떤 확철대오나 불성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묵묵히 앉아 자신의 타고난 불성을 관조하는 선으로, 좌선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이미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완전한 불성을 자연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한다.
선은 어떤 신나는 일이 아니고 날마다 벌어지는 일상생활에 대한 집중이다. 만약 당신이 너무 바쁘거나 흥분되어 있다면 마음이 거칠어지고 흔들리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가능하다면 항상 고요하고 상쾌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고 흥분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중략) 우리의 방법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마치 내가 점진적인 성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사실 이것(조동종)은 신속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수행이 차분하고 평상적일 때 일상생활 자체가 바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44
정적靜寂의 달성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임제종 야스타니 하쿠운(安谷白雲, 1885~1973) 선사는 견성이 없다면 부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수행자가 부처의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하면 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야스타니 선사는 하라다 다이운 소가쿠(原田大雲朝岳, 1871~1961)의 문하에서 18년 동안 공부하여 1938년 정식 공안 공부를 마치고, 1943년에 인가를 받는다. 조동종에서 계를 받기도 한 그는 임제종 공안수행과 더불어 조동종 공안집도 수행과정에 포함시켰고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 조동선적인 방식을 도입하였다. 조동과 임제 두 전통의 단점을 피하면서 장점을 결합한 것이다.45 야스타니의 수행체계의 원리는 그의 미국 제자 필립 카플리어(Philip Kapleau)가 편집한『선의 세기둥 The Three Pillars of Zen』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의 수행체계를 세 단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정력定力을 닦고 본질적 부처됨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는 것에 집중하는 예비적 수행 (호흡을 세는 것, 호흡을 따르는 것, 지관타자) 2. 스스로의 본성을 보는 ‘단박(頓)’의 경험(대의정에 의해 촉진되는 견성)과 이에 뒤따르는 공안참구라는 과정을 통해 그 직관을 명확히 하고, 심화시키며, 통합하는 ‘점진적(漸)’수행. 3. 수행자의 존재와 일상적 삶 전체에 걸친 그 깨달음의 실현(무상도의 체현).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공안 수행에 있어 ‘돈오’를 중시하면서도 공안 참구에 있어서는 종밀의 ‘돈오점수頓悟漸修’ 이론을 들어 화두 수행을 점진적 수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종래 선종에서는 기피하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실재 공안참구의 과정이 길고 복잡할 뿐 아니라 사다리 형식의 점진적 수행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측면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한 것이다. 다음 수행 과정은 조동종 수행을 제외한다면 예비 수행 과정인 수식관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 그리고『무문관』『벽암록』등 화두 수행 과정이 현재 우리 선도회와 흡사하다.
1. 초관初關: 무자無字 공안 2. 점검질문(拶所) 3.『무문관無門關』: 무문혜개(無門慧開, 1184~1260)가 자신의 비평과 시 그리고 스스로 고안한 공안을 추가해서 1229년 편집한 48개의 공안집 4.『벽암록碧巖錄』: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모은 100개의 공안과 이에 대한 송고에 원오극근(園悟克勤, 1063~1135)이 수시, 착어, 평창을 더해서 편집한 공안집 5.『종용록從容錄』: 굉지정각(宏知正覺, 1091-1157)이 모은 100개의 공안과 이에 대한 송고에 만송행수(萬松行秀, 1196~1200)가 수시, 착어, 평창을 더해서『벽암록』을 모델로 편집한 공안집으로 조동종에서 주로 사용됨. 6.『전광록傳光錄』:옥산소근(莹山紹瑾, 1264~1325)이 편집한 조동종 법맥의 전등사 7. 동산洞山의 오위五位 : 정중편正中偏, 편중정偏仲正, 정중래正中來, 겸중지兼中至, 겸중도兼中到 8. 계戒 : 도원의『불조정전보살계교계수문佛祖正傳菩薩戒敎戒受文』에 기초함; 세 가지 광점에서 닦는 삼보三寶, 삼취정계三聚淨戒, 십중계十中戒.46
한편, 야스타니 선사는 임제종 계열이면서 종래 묵조사선이라고 기피하던 지관타좌를 수행에 도입하면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성격을 구분하였다. 같은 수행법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이들의 차이점을 그는 차별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 무자無字화두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력定力을 기르는 데에 유익한 예비적 수행 (2) 공안 참구의 전 과정을 완료한 후에 하는 수행의 절정絶頂
이는 (1)의 지관타자와 (2)의 견성을 체험하고 나서의 지관타좌가 그 깊이에 있어 사뭇 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의 경우 선도회 수행을 하면서 모든 화두를 다 타파하고 나면 뭘 참구해야 하느냐는 것이 화두가 된 적이 있었다. 간화선 수행만을 하다 보면 화두가 없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의심이 없어졌지만 간화선 수행자는 구조적으로 한번은 겪게 되는 문제라고 하겠다. 필자의 견해로는 화두 수행이후의 좌선수행이 야스타니가 말하는 두 번째 지관타좌에 해당한다고 확신한다.
결론적으로 초기 임제종과 조동종은 주로 화두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를 근거로 비교되고 있지만 그리피스는 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파하였다.
“거기에 앉지 말고 어떤 일을 해라.” 이것은 임제선의 수행 방식으로 수행자들이 화두를 드는 능동적인 신앙의 탐구수행이다. “어떤 일을 하지 말고 거기에 앉아 있어라.” 이것은 조동종의 수행방식으로 수행자들이 일상생활의 흐름에서 자리를 잡고 계속적으로 본래의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나타내도록 하는 수행이다. 이는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형성된 간화선과 조동종의 상반된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47
두 선종 종파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해준다고 하겠는데,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종파는 오랜 세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상생 발전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그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임제와 조동의 사원 모두에서 수행을 했던 수행자이자 두 종파 모두에서 사용하는 계율, 의례 문헌, 그리고 의례교범을 수집, 연구했던 학자의 입장에서, 필자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불교 수행과 관련해서 임제종과 조동종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차이점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48
간화선의 진화 중국은 원元, 청대淸代 이민족인 몽골 및 여진족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선승들은 흩어지고 선종은 그 힘을 잃게 되는데, 선과 정토사상의 결합, 삼교일치 등 제종융합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다. 청대에 한때 거사불교가 발흥하기도 하지만 송대 이후 중국선을 ‘선의 황금시대’를 “회상”하는 시기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선종은 청대에 이르러 이미 그 통합의 사명을 완성하였고, 또한 이미 일화오엽一花五葉의 각종 특색을 잃어버렸으며, 오종五宗 의 분화도 없게 되었다. 원元·명明 시기에 여전히 존재하던 임제와 조동의 법맥 또한 이름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49
우리나라의 경우 보조지눌 (普照知訥, 1158~1210) 선사가 처음 대혜의 간화선을 소개하여 간화선풍을 일으켰고, 고려 말에는 ‘여말삼사麗末三師’로 일컬어지는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4),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그리고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의 유학승들의 활약에 의해 간화선이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50 당시 정치적인 이유와 맞물려 간화선이 흥성하였지만, 조선시대 간화선은 다시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17세기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활약으로 잠시 부활하였다가51 20세기 들어서야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의 등장으로 다시 간화선 전통이 부각되었다. 이후 간화선 전통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에 선종이 전해진 것은 가마쿠라 시대52 명암영서(明菴榮西, 1141~1215)와 그의 제자인 원이변원(圓爾辨圓, 1202~1280)에 의해서이다. 심지각심(心地覺心, 1207~1298)은 일본의 여러 선승들에게 배운 뒤 입송하여 치절도충癡絶道冲에게 입문하였고, 이후 선지식을 두루 참알參謁하던 중,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를 만나 문답하다가 대오大悟하였다.53 이때 문답은 당연히 무문혜개 선사 본인의 저서인『무문관』에 등장하는 화두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心地覺心은 간화선 수행 텍스트인 선종서『무문관』을 처음 일본에 전한다.
이후 큰 정치적 변화 없이 일본 선종의 맥은 계속 이어져, 남포소명(南浦紹明, 1235~1308)은 송에 가서 임제종 양기파인 허당지우虛堂智愚의 시자로 있다 법을 받고 귀국하였고, 그의 제자이면서 대덕사大德寺를 개창한 대등국사大燈國師 종봉묘초(宗峰妙超, 1282~1337)로, 그리고 묘심사妙心寺를 개창한 중봉묘초의 제자 관산혜현(關山慧玄, 1277~1360) 등으로 이어진다. 남포소명, 종봉묘초, 관산혜현 삼대를 응등관應燈關이라고 하여 임제종 대응파大應派라 불리는데, 이 법맥은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인 백은혜학(白隱慧鶴, 1685~1768)을 거쳐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백은은 에도시대 중기 임제종을 고쳐 세우고, 간화선 공안 수행체계를 새롭게 정비하여 ‘근세 임제종 중흥조’라고 불린다.54 그러나 대혜의 간화선법이 백은에 의해 도쿠가와 시대에 부흥되었고, 기존의 체계가 다시 정립되었다는 것은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지만, ‘송대 사원의 정예 수도승들이 어떻게 공안을 다루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송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현대의 공안 수행법에 이르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55 이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선종의 교육체계가 사자전승師資傳承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 사이 외에는 그 내막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어 정황적으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백은은 임제종 비구들이 더 이상 화두를 참구하지 않는 것을 애석해 하면서 교육과정을 다시 바로 잡는데, 재미있는 것은 백은이 당시 묵조선을 비난하면서 한 말들이 송대 대혜 선사가 묵좌에게 한 비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이들이 말하는 禪 수행처는 황폐하고, 본래 모습은 시들어 버리고, 각지 총림, 재방 禪匠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종종 化城에 비슷할 뿐의 열반 경지를 잡아서, 자기 本有의 불성이라고 이해해 버리고, …이것을 黙照邪禪, 죽은 무리라고 하는 것이다.…(저들은) 깨달음을 구해서 어떻게 된다고 하는가라고 하며,…오로지 잠만 자면서 망념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된 것인가?56
슬픈 일이다, 50여명 雲水(선객)들도 거의 모두가 요즘 유행하고 있는 不生禪의 黙照枯坐이며, 노인도 젊은이도 모두 두 때 공양 시간 외에는 다만 묵묵히 열을 지어 앉아서 모두 졸고 있고, 배의 노를 젓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서로 소리를 다하여 외쳐 말하기를 “아! 편안하다 아! 편안하다”라고.57
송대 간화선과 묵조선의 대결을 다시 보는 느낌인데 단지 명, 청대이후 유행한 염불선이 추가 되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매우 슬프다. 시절인연인가, 천명인가? (중략) 명나라 말기, 운서주굉(1535~1615)이라는 선승이 있었지만 참선의 힘이 부족해서, 見道의 눈은 어둡고, 도를 나아가는 데에 寂滅의 樂을 얻지 못하고, 한발 물러서도 생사의 두려움을 껴안은 것 같은 것이었다. …禪門의 속된 것에 굽히지 않는 준엄한 참 수행을 버리고, 스스로는 蓮池대사라고 자칭하여 『阿彌陀經』의 주석을 만들고 크게 염불선을 주창하여 제자들을 지도했다. 고산鼓山의 永覺元賢대사(1578~1657)는『淨慈要語』를 만들어 보좌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널리 중국 일본에서 念佛禪이 보급되니, 마침내 구제할 방법이 없게 되어 버렸다.58
대혜가 묵조선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묵조를 비판하고 간화선을 주장하였듯이 백은이 묵조를 비판하였다는 것은 당시 일본에 선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주춤하고 있던 간화선이 일본에서는 활발히 진화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은은 간화선법의 전승과 함께 <척수성隻手聲>이라는 화두를 새로 개발하는 등 간화선 수행체계의 완성에 노력하였다.
공안을 통한 임제종 수행체계는 유학승들에 의해 우리나라나 일본에 유입된 후, 지리적으로 안전하고 정치적으로 비교적 큰 변화를 겪지 않았던 일본에서 더 잘 보존되었으리라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도 에도시대(1615~1867) 종교운동이 정치적 반란으로 이어질까 두려워 승려의 종교 활동이 극단적으로 제한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민족이 다스린 중국이나 유교로 인해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한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어쩌면 낭만적이기까지 한 소란에 불과한 정도기 때문이다.
일본선의 확립 일본은 송대 간화선이 전파된 이후 나름의 길을 걸으며 이를 발전시켜 나간다. 초기 圓爾辯圓(엔니변엔)은 선의 종지를 이치理致, 기관機關, 향상向上으로 구분하여 공안수행의 단계를 상정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독자적인 공안집이 편집되는 등 공안 참구가 널리 행해졌다.
세 가지는 理致(體,)에서 기관機關(用)으로, 理致, 機關에서 向上으로라고 하는 단계적인 발전을 상정했던 공안 수행체계이다. 宋代禪에서 이러한 말의 근거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세 단계의 명확한 체계로서 이해된다는 것은 일본선의 독자적인 발전이었다. 앞의 大應국사 ‘三門의 체계’를 받고, 다음 大燈국사에게는『大燈百二十則』이라는 일본 독자의 公案集이 편집되었다. 그 후 京都 근세 임제종 각파 속에서 각종 공안집이 형성되었지만 에도시대가 되어서 그것들은『宗門葛藤集』에 집대성되어, 17세기 후반 元綠2년(1689)에 처음 간행되어 安政연간에 이르기까지 禪院의 공안 참구에 널리 이용되었다.59
이는 백은에 이르러 언전言詮, 난투難透의 두 가지가 더해져 일본 임제종 오문五門의 공안수행체계를 완성되었고, 견성을 목적으로 한 수도修道와 견성후의 修道를 구분하여 명확하게 구분하는 등 체계화된다.
白隱의 공안체계는 大應의 三門(理致, 機關, 向上)에 대하여, 二門(言詮, 難透)를 가중하여 法身, 機關, 言詮, 難透, 向上의 ‘五門’체계를 열었다고 한다. 이 위에 더욱이 최후 결전으로서 ‘末後의 뇌관牢關’을 배치한 수행도 있다. 공안체계는 중국선종의 5가7종을 이었던 임제종 看話禪을 일본적으로 수행했던 결과, 에도시대에 이르러서 白隱에 있어서 집대성되었다.60
결과적으로 선종의 핵심인 사자전승師資傳承의 심법은 종주국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일본에는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만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그 종지를 지켜 지금까지 맥을 잇고 있었던 것이다.61 그리고 그 심법은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후 일본 임제종 화산 노사 문하로 출가하신 종달 노사님을 통해 선도회에도 오롯이 전수 된다.62 남송 시대의 간화선이 일본의 토양에서 발전을 거듭하며 체계화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선도회 간화선
종달 노사님 입적 후 법경 법사님은 두 차례에 걸쳐 숭산 노사님과 독대하신 일이 있었는데, 이미 선도회에서 점검 받은 화두들의 경계를 대부분 똑같이 점검해 주셨다고 한다.63 이때『무문관』제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공안의 점검과정을 통해 법경 법사님은 새롭게 깊은 통찰체험을 하며 다시 의심 없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안목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고 술회하셨다.64 숭산 노사님과 법경 법사님의 만남은 당, 송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입실점검 모습을 현대에 다시 보는 듯하다. 스승 문하에서 공부하여 인가를 받고 다른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진검 승부를 하는 선객의 모습이다.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 받기도 하고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그런 여정을 통하여 선종은 발전하였으리라.
그러므로 현재 선도회 간화선법은 종달 노사 가풍에 숭산 노사 가풍까지 합류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65 필자는 백은 선사로부터 비롯된 종달 노사님의 경계를 “즉심卽心”의 경계로 숭산 노사님의 경계를 “즉여卽如”의 경계로 정의하고 같은 비중으로 지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종달 노사님의 경계가 모두 즉심의 경계이고 숭산 노사님의 경계가 모두 즉여의 경계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경향성이 있어 편의상 그렇게 구분하였고, 초심자의 혼돈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두 경계를 구분하여 확립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기존 선도회에서는 1독의 경계와 재독의 경계로 구분하였는데, 두 경계가 같은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도 있다. 선어록을 광범위하게 공부하다보니 두 경계는 이미 송대에도 부분적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두 경계의 우열은 없고 견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그럼 다음 한국과 일본의 선종사 개관槪觀 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선종사를 개관해 보고 부족하나마 그 특징들을 짚어 본다. 중국 선종이 한국과 일본에 전해지는 과정과 그 전개를 살펴봄으로서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유추해 보고 현 선도회의 위치까지도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한 책과 글
1) 종달宗達 이희익李喜益 : 1942年 日本大學 哲學科 卒業, 1925年 日本 臨濟宗 妙心寺派 京城別院 專門道場 ․ 京都 南禪僧堂 修行, 1941年 日本 臨濟宗 妙心寺派 韓國 開敎師, 1949年 日本 臨濟宗 妙心寺派 特授 塔主職, 1953年 海印大學 敎授(現 慶南 大學), 1956年 東國大學校 講師, 1960年 月刊 <大韓佛敎> 創刊, 1964年 社團法人 ⌜法施舍⌟ 常務理事, 月刊 ⌜法施⌟ 編輯人, 1965年 大韓佛敎 禪道會 指導法師, 1975年 月刊 ⌜禪文化⌟ 發行人, 1983年 市民禪房 指導法師, 1990年6月7日 入寂. 著書로는『十牛圖』『禪定思想史』『禪은 根本科學』『생활 속의 반야심경』『禪이 우리文化에 미친 영향』『禪定四部錄』『禪속에 약동하는 人生』『頌古集. 上下(編)』『佛敎의 敎團生活』『坐禪』『생활속의 禪』『禪林句集』『碧巖錄』『禪 공부하는 要訣』『禪과 韓國 文化財』『無門關』등이 있다. (無門 慧開 原著, 宗達 李喜益 提唱,『무문관無門關』에서 인용)
2) 활안스님,「활안스님의 내가 만난 선지식, 57. 법시사 편집장 이희익 대선사」2009년8월19일 (불기2553년) 현대불교신문 제745호.
3) 종달 노사님 법맥: <중국> 54世 : 임제종 양기파 허당지우(虛堂智愚, 1185~1269) → <일본> 55世 : 남포소명(南浦紹明, 1235~1308) → 56世 : 종봉묘초(宗峰妙超, 1282~1337)→ 57世 : 妙心寺 開山 無相大師 관산혜현(關山慧玄, 1277~1360) → → → 71世 : 지도무난(至道無難) → 72世 : 도경혜단(道鏡慧端, 正受 1640~1720) → 73世 : 백은혜학(白隱慧鶴, 1685∼1768) → 74世 : 아산자도(峨山慈棹) → 75世 : 탁주호선(卓洲胡僊) → 76世 : 묘희종적(妙喜宗績) → 77世 : 가릉서가(迦陵瑞迦) → 78世 : 율해현창(潭海玄昌) → 79世 : 독담잡삼(毒湛匝三) → 80世 : 무해고량(霧海古亮) → 81世 : 화산대의(華山大義) → <한국> 82世 : 의현종달(義賢宗達).
4) 낙자絡子는 가사袈裟의 한 가지로 선승들이 일할 때 목에 걸어서 가슴에 드리우는 약식略式의 가사이다. 낙자는 중국 당나라 때의 측천무후가 법의를 축소시켜서 선승들에게 내려준 것이 시초라고 하며 그때부터 주로 장삼 위에 입게 되었다고 한다.
5) 활안스님,「활안스님의 내가 만난 선지식, 57. 법시사 편집장 이희익 대선사」2009년8월19일 (불기2553년) 현대불교신문 제745호.
6) 쇼스타인 베블린 Thorstein Veblen의『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한편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 Marvin Harris는『작은 인간』에서 타고난 것이 아니고 문화적인 영향 때문이라고 하였다.
7) 우리는 영・정조 시대를 문화부흥기로 보고 있는데, 당시 세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문화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영・정조 시대 (1750~1800), 청은 영국의 차 수입에 따른 은 유입으로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또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열어 정국이 안정되었고, 은 생산으로 부를 축적해 가고 있었다. 서구와의 교역도 이루어져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개방적인 일본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임란을 일으킬 정도로 국력이 이미 우리를 능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유교문명의 중심임을 자처하는 정도였다.
8) 명치유신(1853~77)은 일본의 봉건제적 지배체제를 타도하고 근대 천황제 국가와 일본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개혁운동이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일본의 개국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1854년 미일화친조약, 1858년 안정 5개국 조약 등 종속적인 외교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막부의 위신이 실추된 것이 개혁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개국과 갑작스러운 외국무역으로 심각한 경제혼란과 사회불안 속에서 각 계파 간에 국론분열, 대립이 거듭된 끝에 막부 타도운동이 하급무사계급을 중심으로 고조되었다. 1868년 무진전쟁으로 막부정부가 전복되어 명치정부가 수립되었다.
9) 1760~1830년에 산업혁명은 대체로 영국에 한정되었다. 남들보다 앞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영국인들은 기계와 숙련노동자, 제조기술 등의 유출을 금했다. 영국의 독점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다. 특히 유럽 대륙의 사업가들이 영국의 새로운 기술정보를 자국으로 유인하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일부 영국인들이 해외에서의 산업 활동으로 이윤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윌리엄과 존 코커릴이라는 두 영국인이 1807년경 벨기에 리에주에서 기계를 갖춘 공장의 문을 연 것을 계기로 벨기에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벨기에는 유럽 대륙에서 경제적으로 변모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벨기에의 산업혁명도 철·석탄·섬유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0) 얼마 전 KBS는 <일본, 아시아로 돌아오는가!> 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그럼 일본은 지금까지 아시아에 있지 않았는가? 1854년 서구열강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문을 연 일본은, 서구의 앞선 문명에 놀라 아시아적 가치를 버리고,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왜치며 전 국민의 서구화에 힘을 쏟았다. 그렇게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했던, 일본이 왜 아시아로 돌아오는가? 그것은 세계경제의 축이 아시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의 대외무역 구조를 보면 중국과 아시아 시장이 서구를 앞질러 수출액 면에서 미국과 유럽을 압도하고 있다. 아시아시장이 훨씬 커졌으므로 아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한국 중국 등 과거사에 얽혀있는 나라들에게 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프로그램이 요지다.
11) 중국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파. 이기설理氣說과 심성론心性論에 입각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시하는 실천 도덕과 인격과 학문의 성취를 역설하였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기에 들어와 조선의 통치 이념이 되었고, 길재, 정도전, 권근, 김종직에 이어 이이, 이황에 이르러 조선 성리학으로 체계화되었다.
12) 이덕일,『침묵과 왜곡 속에 숨겨진 이야기』(1996), p. 296.
13) 洋夷侵犯非戰則 和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
14) 한상길,「개화사상의 형성과 근대불교」『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 32.
15) 앞의 책, p. 37.
16) 양사오 문화(앙소문화, Yangshao Culture)는 중국 신석기시대 말기의 문화이다. 1921년에 허난 성(河南省) 몐츠 현(澠 池縣) 양사오에서 발견되었다. 산시 성(陝西省) 웨이허 강(渭河) 유역, 산시 성(山西省) 서남부와 허난 성 서부의 협장狹長 지대에 주로 분포한다. 훙산 문화(홍산문화, Hung-shan Culture)는 중국 신석기시대 후기 약 7,000 ~ 8,000년 전의 문화이다. 주로 랴오닝 성(遼寧省) 서부 일대에 분포한다. 1935년 랴오닝 성 츠펑 시(赤峯市) 훙산에서 발견되었다.
17) KBS 역사스페셜,「만주대탐사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그리고 「동성왕 피습사건의 전말」등 참조.
18)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2010년 말 일본이 보유한 해외 순자산은 전년 말보다 5.5% 감소하였지만(251조 4950억 엔(약 3.07조 달러)) 여전히 세계 최대 채권국의 지위에 있다. 지난해 말 현재, 일본정부와 기업, 개인투자자들이 보유한 해외자산 총액은 563조 5260억 엔(약 6.88조 달러)으로 동기대비 1.6% 성장하였고, 해외 부채 총액은 312조 3100억 엔 (약 3.81조 달러)으로 동기대비 8.1% 성장해 3년 만에 성장을 이룩하였다.
19) 2010년 세계 GDP(국내총생산 Gross Domestic Product, 국민 총생산에서 해외로부터의 순소득을 뺀 지표)를 보면, 1위 미국 14조 6578억불, 2위 중국 5조 8782억불, 3위 일본 5조 4588억불, 그리고 한국은 1조 70억불로 15위이다.
20) 일본 최초의 인공위성은 동경대학 우주항공연구소가 1970년 2월 11일에 쏘아올린 ‘오오스미’이다.
21) 달이 항상 한쪽 면만을 지구로 향하는 이유는 달 내부 물질의 밀도 차이 때문이다. 오래전 달과 지구는 지금보다 가까웠는데, 그 때는 달이 달걀 모양을 하고 돌고 있었다. 그런데 달과 지구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달걀 모양이 원형으로 변하였고, 그 과정에서 달 내부의 굳지 않은, 밀도가 큰 암석이, 지구인력 때문에 앞면으로 끌어 당겨져 밀도 차이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달 내부의 물질들이 표면으로 분출되어 나오면서 크레이터가 생기고 거무스름한 무늬도 만들어진다. 그래서 뒷면에는 무늬가 없다. 달은 지금도 계속 멀어지고 있는데, 인력에 의해 밀도가 큰 한 쪽 면만을 오뚝이처럼 지구로 향하고 있다.
22) 대혜종고 선사는 북송의 선주 영국현(宣州寧國縣, 지금의 안휘성 선성현)출신으로, 성은 해씨이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얼마 안 있어 가세가 기울었는데, 10살 때는 화재가 나서 집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16세에 혜제선사 문하에 출가하여, 17세에 경덕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또 20~21세의 때에 동산미 선사 등에게서 조동종의 종지를 배웠으나 실망하여 떠나고 만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묵조선을 비판하는 계기가 된다. 21세부터 담당문준에 참학하였으나 담당이 병이 들자 이를 떠나, 37세 때에 원오극근을 뵈었다. 원오를 뵌 지 42일 만에 오도한 대혜에게, 원오는『임제정종기』를 저술하여 법을 부촉하였다. 53세 때에 금金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주전파인 장구성과의 친분이 알려지자, 강화파인 진회의 모함을 사서 형주에 유배되기에 이른다(神臂弓事件). 17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복승한 것은 68세(1156년) 때였다. 75세에 시적하자, 효종은 보각普覺의 시호를 내렸다. 사법제자는 육왕준박, 개선도겸, 설봉온문 등 모두 110인을 넘는다고 한다. 저술로는 대혜시적 후 60권광록이 존재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고, 이것을 정리해서 1171과 1172년에 대장경에 입장된 것이 30권본『대혜보각선사어록』이다. 이것은 동시대인의 입장入藏으로서는 최초여서 대혜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30권본『대혜보각선사어록』의 권25~30에 해당하는『대혜서(大慧書, 일명 서장)』는 한국선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4권본『대혜보각선사보설』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데, 주장이 명확하여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이외에도 일종의 설화집인『종문무고』와『잡독해』, 공안집인『정법안장』 등이 있다. (정영식, 부산대 강사, 「‘간화선’ 확립…‘공안 참구’ 수행법 정착」불교신문)
23)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무문관無門關』p. 186.
24) 굉지정각 선사는 습주隰州(산서성)사람으로 성은 李씨, 이름은 正覺이다. 11세에 정명사淨明寺 本宗에게 체발剃髮하고,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산서성 임분臨汾) 지경智瓊에게 수구受具하였다. 18세에 諸方을 遊歷하다가 하남성 단하산丹霞山 단하자순(丹霞子淳, 1064~1117)의 법을 받고(1124), 건염建炎원년(1127)에 서주舒州 태평사泰平寺에 주하다 강주江州 원통圓通, 장로長蘆로 이주하다. 뒤에 천동산天童山(절강성 寧波부근)에 주하며 개법開法하니(1129) 따르는 제자가 항상 1,200인이 되었다. 이곳에 약 30년 住하면서 가람을 一新하고 學德을 베푸니 ‘天童中興의 祖’라 칭하다. 소흥紹興27년 10월 나이 67세로 입적. 시호는 宏智禪師. 저서로는『굉지선사어록』 4권, 『宏智廣錄』 9권(1157)이 있다. (『속전등록』17, 『계고략』4, 『회요』29, 『회원』14, 『명고승전』5)
25)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무문관無門關』p. 187.
26) 그리피스 포크 T. Griffith Foulk, 사라 로렌스 대학 Sarah Lawrence College,「도원道元이 사용한 여정如淨의 ‘지관타좌祗管打坐’와 다른 공안들 Rujing's "Just Sit"(shikan taza祗管打坐) and Other Kōans Used by Zen Master Dōgen」(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31.
27) 대혜가 묵조선을 ‘묵조사선默照死禪’이라고 비난하였는데, 굉지는『묵조명默照銘』을 지어 이에 대응하였다.묵조선이란 명칭도『默照銘』에서 유래한다. 묵조선과 간화선의 대립은 굉지정각 선사가 대혜종고 선사를 도와주는 사건이후 화해로 끝이 나고,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천강에 비친 달』(숭산행원선사 법어집, 불교통신교육원佛敎通信敎育院 1987). 정성본 스님의 『선의 역사와 사상』에 따르면, 대혜종고 선사의 『서장』 내용을 보고 추측하는 것일 뿐, 대혜종고 선사가 특별히 조동종을 비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2011년에 개최된 제 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에서 일본에서 유학한 한 스님이 <묵조선>이란 말은 근대들어 일본에서 처음 쓰기 시작하였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그전까지는 대혜 선사가 한 ‘默照死禪’이란 말만 통용되었다고 한다.
28) 제임스 랍슨 James Robson, Harvard University,「大死大悟의 선: 종교유형으로서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Born-Again Zen Again: Reflections on Kanhua Chan as a Religious Style」(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360~361.
29) 앞의 논문 pp. 365~366.
30) 그리피스 포크 T. Griffith Foulk, 사라 로렌스 대학 Sarah Lawrence College,「도원道元이 사용한 여정如淨의 ‘지관타좌祗管打坐’와 다른 공안들 Rujing's "Just Sit"(shikan taza祗管打坐) and Other Kōans Used by Zen Master Dōgen」(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35.
31) 나타샤 헬러 Natasha Heller, UCLA,「거울을 닦는 도구: 中峰明本의 재가신자들에 대한 가르침에서 화두」(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165~166.
32) 로버트 샤프 Robert Sharf,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선 공안,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How to Think with Chan Gongan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98.
33)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하는데, 격의불교 또는 격의格義는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인 위진시대(魏晋時代: 220-420)에 나타났던 불교 교리 이해 방법 또는 불교 연구 방법이다.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사상이나 교리를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유교사상儒敎思想 등의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불교 경전인『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공空”에 대해 노장사상의 “무無” 개념을 적용하여 그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격의불교로는 불교에 대한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동진(東晉: 317-420) 시대의 고승이었던 도안(道安, 312~385)은 격의불교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도 격의불교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불교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한 이후에야 비로소 극복되었다. (백과사전에서 인용)
34) 송宋나라 때 법안종法眼宗 천태덕소天台德韶의 제자 영안도원永安道原이 지은『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은 과거過去 칠불七佛로부터 시작하여, 석가모니불을 거쳐 달마達磨에 이르는 印度 선종禪宗의 조사祖師들과 달마 이후 中國 역대 禪宗과 다섯 종파의 52세, 1,712명(이 중 954명은 어록語錄이 있고, 다른 758명은 이름만 있고 사연이 없음)과 법안문익法眼文益의 제자에 이르기 까지 제대조사諸大祖師의 전법계통(傳法系統, 傳燈法系, 傳燈相承)과 행적 어록 등 전기傳記를 수록收錄하였다. 또한 각 조사와 선사의 성, 속가의 가계, 출생지, 수행 경력, 주석한 곳, 입적한 연대, 세수, 시호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본서가 완성되어 송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1년(1004년)에 봉정奉呈되었는데, 칙명에 따라 양억楊億 등이 간삭刊削을 가한 후 대장경에 편입시켜 간행하였다. ‘경덕전등록’의 이름에서 경덕은 남송南宋의 연호인데, 연호가 책의 이름 앞에 붙은 것은 저자 도원道原이 남송 원년에 이 전등록을 황제인 진종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명『전등록』이라 한다.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승과僧科 과목의 하나에 들어 있었다. 1,700공안이라고 하는 말이 전등록이 52세(世) 1701명의 이름을 들어 그 어구를 수록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景德傳燈錄』 해설에서 인용)
35) 혜원, 동국대학교 교수,「당대선에서 송대선으로의 유동적 演変의 과정에서 나타난 선사상 - 대혜종고以前을 중심으로」(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56.
36) 선종에서 발생한 어록語錄, 등록燈錄의 편찬, 송고頌古문학, 경전 읽기 등의 경향을 문자선文字禪이라고 하는데, 문자선은 선이 언어뿐 아니라 경전의 의미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문자선은 깨달음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 깨달음의 과정을 자극하기 위해 집합적으로 문자, 언어, 글쓰기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자선이 ‘선종 발전과정에서 발생한 폐해, 특히 불립문자에 의해 초래된 폐해를 극복하려는 시도’였으며, 동시에 사대부들에게 ‘선사의 지도아래 선을 배우라’는 초대이고, 선승들 사이에서는 문자가 법을 전달하는 좋은 기술이라는 공감대의 확산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자선은 깨달음을 향한 관심과 문학적인 성취라는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므로서 송대 초기 불교계와 사대부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요구에 효과적으로 적응하였고 시대적 보편성을 확보하게 된다. (명법,『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pp. 95~96.)
37) 명법,『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pp. 98~103.
38) 야나기다 세이잔, 추만호.안영길 옮김,『선의 사상과 역사』민족사 p. 156.
39) 현각 엮음,『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반 2』, pp. 188~216. 10개의 공안을 통과하고 나서 마지막 숙제도 풀어야 한다.
40) 일본 임제종에서 獨參은 다음과 같은 내용과 순서로 실천되고 있다. 먼저『無門關』제1칙인 趙州無字를 참구하는 데서 시작한다. 무자공안에는 찰처拶處가 약 250개 있고 (白隱의 隻手音聲의 공안과 그 拶處도 포함된다), 著語는 약 40句 있다. 제2칙의 百丈野狐부터 제49번째의 雜則·黃龍三關까지는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이 약 100군데이고, 著語는 약 80句가 있다. 다음에『碧巖錄』에 들어가기 전에,「碧前의 雜則」으로서『갈등집葛藤集』이나 『짐우집䲴羽集』에서 약 20則정도 뽑아서 참구한다.『碧巖錄』에서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은 약 180個所이고, 착어는 약 100구 있다. 다음에,『臨濟錄』에 들어가기 전에「臨前의 雜則」으로서『葛藤集』에서 약 25칙 정도 뽑아서 참구한다.『臨濟錄』에는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이 약 75개소이고, 착어는 약 40구 있다. 다음이 五位十重禁인데, 그 전에 「臨後의 雜則」으로서 葛藤集에서 종래 투과하기 어렵다고 간주되어온 칙을 중심으로 약 25칙 정도 뽑아서 참구한다. 五位에서는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은 약 100개소이고, 착어는 약 10구 있다.『十重禁』에서는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은 약 70개소이고, 착어는 약 15구 있다. 최후는『허당록대별虛堂錄代別』인데, 100칙이 있다. (코지마 타이잔 (小島岱山/ 臨濟宗 向嶽寺派 向嶽寺 僧堂師家)「일본 禪界의 현황과 전망 日本の禪界の現狀と展望」(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168.) 코지마 타이잔 Kojima Taizan (小島岱山) 스님은 임제종 향악사파에 속한 향악사向嶽寺 스님. 중국 무한武漢대학 철학부 명예교수. 1947년생. 동경대학 문학부 인도철학과 졸업 및 동경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박사논문은「중국 오대산계 화엄사상의 연구(中五台山系 華思想(李通玄)の 硏究)」. 주요 저서로『신화엄론 新華厳論 자료집성新華厳論 資料集成』,『동아시아불교학체계 자료집성(東アジア仏敎学体系 資料集成)』외 다수가 있다.
41) 大悟十八回, 小悟不知其數, (나까지마 시로, 하나조노대,「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2011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4). 한편, 연지대사蓮池大師 운서주굉雲棲袾宏의 저서『竹窗随笔』「大悟小悟」장에는 이 문구에 대해 논평을 하였다. 참고하시라고 원문을 옮긴다. 해석은 번역본을 참고하시라. (相传大慧杲老,大悟一十八徧,小悟不计其数。愚按学道人时有觉触,谓之有省;乍而省,未大彻也,则名小悟,容或多徧。至于大悟,则世尊夜见明星而廓然大悟,是一悟尽悟,不俟二三矣。即如诸祖,有直至如今更不疑者,有从此安邦定国天下太平者,有“元来黄檗佛法无多子”者,虽来至佛,亦皆大悟也。而必重重累累如是,则向之不疑者当更起疑矣,向之太平者当更变乱矣,向之无多子者当更欠少矣,云何得称大悟?若夫无明虽断,犹欲断最后穷微至细之无明;公案虽透,犹欲透最后极则请讹之公案,则几番大悟者容有之,但不应多之至于一十八徧也.)
42) 법경 법사님은 저서에서 물리학의 양자도약에 비유하여 이 과정을 ‘양자도약이 입장에서 보면 1,700 단계의 에너지 상태를 대부분은 한두 단계씩 뛰어 넘었지만 열여덟 번은 수십 단계를 단번에 뛰어 올라 드디어는 영인 임계 에너지를 뛰어 넘어 더 이상 그를 속박할 것이 없는 대자유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설명하셨다. (박영재,「양자도약을 통한 돈오와 점수의 이해」『두 문을 동시에 투과한다』)
43) 선종이 일본에 전파되었을 때 임제종은 조정과 막부 장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크게 흥성한 데 반해, 조동종은 지방의 영주 층, 하급무사 농민 등 피지배층에 퍼져나가, “조동사민曹洞士民 임제장군臨濟將軍”이란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인물人物의 임제, 조직組織의 조동”이란 말이 있는데, 임제종에서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 그 맥을 잇고 있는데 반해 조동종에서는 조직을 통하여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조동종은 道元이후 그와 비견 되는 제자들이 없어 그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요사이 교세를 다시 확장하고 있는데, 도원의 철저한 수행정신이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고 있고 그가 만든 엄격한 영평청규永平淸規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호준 엮음, 『일본의 십대선사』, 우리출판사, p. 53)
44) 제임스 랍슨 James Robson, Harvard University,「大死大悟의 선: 종교유형으로서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Born-Again Zen Again: Reflections on Kanhua Chan as a Religious Style」(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66. 그 전체적인 내용은 순류 스즈끼 지음, 강연심 옮김,『禪 (Zen Mind, Beginner's Mind) 』참조.
45) 피터 그레고리 Peter N. Gregory, 스미스 대학 Smith College,「둘 또는 하나의 구원론? 간화선과 종밀宗密의 돈점頓漸 수행체계」(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p. 124~125.
46) 피터 그레고리 Peter N. Gregory, 스미스 대학 Smith College,「둘 또는 하나의 구원론? 간화선과 종밀宗密의 돈점頓漸 수행체계」(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32.
47) 제임스 랍슨 James Robson, Harvard University,「大死大悟의 선: 종교유형으로서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Born-Again Zen Again: Reflections on Kanhua Chan as a Religious Style」(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371~372.
48) 그리피스 포크 T. Griffith Foulk, 사라 로렌스 대학 Sarah Lawrence College,「도원道元이 사용한 여정如淨의 ‘지관타좌祗管打坐’와 다른 공안들 Rujing's "Just Sit"(shikan taza祗管打坐) and Other Kōans Used by Zen Master Dōgen」(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31.
49) 마 티엔샹 Tianxiang Ma 麻天祥, 중국 무한대학武漢大學,「청초淸初의 두 선승 올림통수와 위림도패」(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272.
50) 백운경한은 1351년 54세의 나이에 원나라로 가서 지공指空과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의 가르침을 받았고, 나옹혜근은 승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1347년 원나라에 가서 지공과 여러 간화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온다. 태고보우는 1352년 원나라에 유학하여 石屋淸珙의 인가를 받고 원 황실의 귀의를 받는 등 간화선사로 명성이 높았다. (최연식, 목포대,「고려말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정에 대한 검토」(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46~147.)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선사는 1,700 공안을 스스로 공부하고, 호주 하무산霞霧山 石屋淸珙 화상에게 가서 보름 간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기간 동안 보우선사가 공부한 내용을 점검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색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스님은 일찍이 1천 7백 공안을 참구하다가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서 막혀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참 묵묵히 있다가 갑자기 깨닫고는 냉소를 머금고 한마디 하였다. “암두스님이 활을 잘 쏘기는 하나 이슬에 옷 젖는 줄은 몰랐다.” (선림고경총서 『태고록』))
51) 중종이 승하하자 보우대사는 문정왕후에게 불교중흥책의 하나로 승과僧科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청을 올린다. 문정왕후는 명종 3년(1548년) 보우대사를 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수진대사를 봉선사 주지로 취임케 하고, 명종 7년, 선교禪敎양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승과를 실시하였다. 훗날 임진왜란의 구국성사들인 서산대사는 1回 합격(명종 7年, 1552)하였고, 사명대사는 4回 합격(명종 16년, 1561)하였다. 조선시대 유명한 선사로 서산대사와 사명당을 드는데, 이들이 나온 시기와 승과의 부활이 맞물린다. 문정왕후의 죽음과 더불어 승과가 폐지되므로 서 더 이상의 선사는 나오지 않았다.
52) 가마쿠라 시대(Kamakura, 겸창시대鎌倉時代)는 1192년 일본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에 막부幕府를 세운 때부터 1333년 호조 다카도키北條高時가 멸망할 때까지 시행되었던 무인 집권 시기를 말한다.
53) 한보광韓普光,『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 pp. 91~92.
54)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73.
55) 로버트 샤프 Robert Sharf,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선 공안,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How to Think with Chan Gongan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98.
56) 앞의 논문 p. 76.
57) 앞의 논문 p. 77. (柳田聖山,『臨濟의 家風』pp. 211~213)
58) 앞의 논문 p. 78. (柳田聖山,『臨濟의 家風』p. 258)
59)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1.
60) 앞의 논문.
61) 일본의 보존력은 여러 면에서 탁월하다.『대덕사의 선』,『이큐 선사 연구』등 일본 예술의 미학연구로 유명한, 존 카터 코벨 여사는『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이라는 책을 썼다. 그녀는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일본 문화를 연구하다 그 본류를 따라 한국 미술사를 연구하게 된 학자이다. 그 책에서 그녀는 일본이 자랑하는 미술품이 알고 보니 한국 것이었고, 일본은 한국 예술품을 보관하는 ‘박물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아니었으면 대부분의 한국 불교 문화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졌을 것이며, 잦은 전쟁 등으로 소실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통도사에서 전시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고려 불화 ‘경신사수월관음’도 일본이 아니었으면 지금 다시 볼 수 있었을까? 많은 불교 탱화들이 그렇게 저렇게 사라져 우리나라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는데, 그것은 낡은 후불탱화를 새 것으로 교체하면 낡은 것은 태우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우리 문화재를 빌려서나마 볼 수 있게 된 데는, 일본이 때로는 구걸하고 훔치고 하여 애지중지 간직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교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은 일본으로 건너가고, 우리 불교는 명맥을 잇는데 급급했을 뿐 화석화 되고 만다. 우리나라는 교와 선 모두에서 불교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고려 시대 불교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문화였다. 그 문화까지도 사라진 것이다. 코벨은 또 다도와 렌가 하이쿠를 통해, 일본 불교의 선 예술을 꽃피운 선승 일휴종순(一休宗純, 이큐, 1394~1481)선사가 고려에서 일본으로 보내진 한국인 궁녀의 아들이라는 것과 일본 100대 일왕 고코마쓰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가 정치적인 이유로 절에 보내져 선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9년 연구 끝에 밝혀내기도 하였다.
62) 선도회 간화선은 중국 당 송대 확립된 임제종 간화선 수행체계에 따라 선종서인 『무문관』을 투과해 나간다. 선도회 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 10여개, 『무문관』48개, ‘마무리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 10 여개 등 100 개 가까운 화두들과 함께 『벽암록』 100개의 화두들을 투과해야 한다.
63) 법경 법사님은 화두에 대한 입실점검이 한 사람 한 사람 독참으로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지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개적으로 진행하시는 숭산 노사님의 화두점검 방식이 자칫 화두의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편지를 계기로 두 분의 회동이 이루어져 서로의 화두 경계를 비교한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법경 법사님은 선도회 간화선 수행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셨다고 한다. (「숭산 노사와의 만남『두 문을 동시에 투과한다』 p. 101, 「숭산 노사와의 재회『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 하루를 부리네』 p. 65). 선도회 간화선 수행을 마치면 모든 경계가 확연히 드러나 어떤 선문답이라도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조계종 큰 스님들이 선문답을 접하면 대부분 선도회 공부에 포함되어 있어 그 경계를 다 알 수 있는데, 혹 비밀리에 전해지는 어떤 경계는 없을까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선도회 간화선 수행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셨다’는 위의 말씀은 법경 법사님도 인가를 받으시고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으셨는데, 숭산 노사와의 만남은 그 한 줌의 의심조차 기우였음을 아시는 기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도회 후학들에게는 큰 은혜다. 필자는 처음에는 스님들을 만나면 선문답을 시도하려 하였었지만, 지금은 선문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몇 마디 나눠보면 이내 알 수 있는데, 그런 수행은 하지 않아서 모를 뿐 아니라, 누가 ‘깨달았다’더라 하고 남 소개하기에 바쁘다.
64)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즉 법경 법사님이 말씀하신 경계를 120% 라고 말씀하신 경우이다. 이는 법경 법사님의「숭산 노사와의 재회」『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 하루를 부리네』에 서술되어 있다. 일본선과 한국선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도회의 경계는 그 둘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65) 법경 법사님은 “비유컨대 학문의 세계로 말하자면 종달 이희익 노사님 문하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숭산 노사님 문하에서 박사후 연구원 과정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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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사님의 <선도회 간화선 읽기>는 정말 명작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선도회에 입문 하시는 모든 분들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글로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왼쪽 게시판 들어가면, 제일 위에 고정시켜 두어서 항상 볼 수 있게 해주시는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다가오는 이번 모임에 있을 <선도회 간화선 읽기 2부>를 기대해 봅니다. ^^
무상 대자님 님들을 위해 큰 복 지으십니다!
감사 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