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자시절 - 종림 스님 “설도인으로 불렸던 해인사 행자시절”
계절만큼 세월의 무상함을 정직하게 보여 주는 게 또 어디 있을까.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의 문턱에 서있다.
이제 곧 눈발이 흩날리고 산사에는 깊은 정적만 감돌리라.
출가를 결심하고 들어간 그 해 겨울 월정사는 그렇게 눈 속에
파묻혀 태고의 깊은 정적 속에 있었다.
겨울날 눈 덮인 월정사는 한적했다.
무릎까지 때로는 허리까지 내린 눈 속에서
나는 불 때고 밥하고 시간 나는 대로 나무를 팼다.
이무도 없는 눈 속에서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나무를 패며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가족, 그 동안 배워 익힌 학문과 지식,
그리고 지난 시간을...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왔다.
삼월 스무 이렛날, 한암 스님 생신날에 계를 받는다고 했지만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월정사는 가족적인 오붓한 분위기였으나
내가 머물 곳은 아니었다.
막연히 떠오르는 인연이 아니라는 생각.
나는 계를 받기 보름 전에 오대산을 내려와 해인사로 발길을 돌렸다.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종무소에 앉아 있으려니
한 스님이 나타나 내게 깊숙이 합장을 했다.
지금 구룡사에 있는 정우스님이었다.
옷을 그렇게 입고 앉아 있으니 중물이 꽤 들어보였던 모양이다.
해인사는 행자실이 위채 아래채 두 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해인사 행자실은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위채의 상행자들을 향해서는 눈 한번 바로 뜰 수가 없었다.
물론 나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하행자들이 모여 있는 아래채로 갔다.
그 곳에는 스무 명쯤 되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온 길이 달라도 모두 한 공간에서
그 길의 다름을 모두 묻어버리고 다 같은 길을 가고자 서 있는 사람들.
말을 하면 저마다 다른 과거가 언어 끝에 짙게 묻어나
전정에 대한 다짐을 앓을까 조바심하며 깊게 침묵을 지키던 그들의 입술.
그것은 마치 오대산 계곡을 울리며 지나던 세찬 겨울바람과도 같았다.
출가란 이런 것인가. 모든 것을 베일 듯, 한 칼날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출가란 무엇이란 말인가.
베어 버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출가의 길.
나는 비로소 출가의 길을 바로 보는 것만 같았다.
침묵과 하심.
입을 닫으니 마음이 고요해졌고
마음을 낮추니 낮출수록 잔잔한 기쁨이 몰려왔다.
언어와 문자와 관계 속에서 살 때는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마음의 복됨을 나는 비로소 만난 것이다.
내 고뇌와 방황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 찾음과 갈등은 무엇이었을까.
말을 버리고 욕망을 버린 자리에서
지난 내 삶의 의례적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만 버리지 못했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버릴 수만 있다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 그런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힘들 때나 괴로울 때도 짜증내지 않았다.
누군가 행여 푸념을 하면 따뜻하게 그를 감싸고자 했다.
누군가 내게 와서 그의 고충을 말할 때면
마치 하밀 할아버지처럼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해 주었다.
언제나 성내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가는 나를 보고
나의 동료 행자들은 설도인이라고 불렀다.
‘설익은 도인’으로 불리었던 나.
그것은 아마도 이런 저런 사람들의 온갖 얘기를 다 들어 주고
뒤치다꺼리 하던 나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사람이 좋았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해인사에서의 짧은 행자기간이 나를 많이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어떠한 가르침도 없이
그저 내게 큰 스승으로 다가왔던 ‘침묵과 하심.’
그것은 어떤 훌륭한 스승보다도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생각을 버리고 그냥 따라가 보라.
‘침묵과 하심’이 낸 길을 따라 그저 걷다 보면
마음이 망망대해가 되어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게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또랑이 되어 부딪치며 소리 내며 흐르는 것은
‘침묵과 하심’에 마음을 비우고 발 디딘 적 없기 때문이다.
행자시절은 그렇게 침묵과 하심의 길을 향해 발 내디디며
열심히 걸어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의 의미를 나는 닭이 알을 품듯 품고자 했다.
행자사절 나는 간상看床 소임을 주로 맡아 했다.
신도들이 오면 상을 봐 내가는 일이었는데
신도들이 왔을 때 찾아서 없으면 말썽이 생길 소지가 많아
누구나 내심 꺼리던 일이었다.
하루는 강주실에 손님이 왔다기에 밥상을 차려 내갔더니
은사이신 서경수 교수님이 앉아 있다 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는 서로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뒤 내 신분이 드러나고 말았다.
인도 철학을 공부한 행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행자생활이 몸에 익어갈 무렵 어느 결제 법문 날.
나는 방장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깨달음'에 대하여 깊이 고뇌하기 시작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깨달음의 유용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유용성의 현실적 전개는 어떻게 가능한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대답을 찾으려고 나는 홀로 떠나 참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반들이 모두 잠든 시간,
나는 칠흑 같은 해인사 산길을 내려와 지리산 쪽을 향해 밤새 걸었다.
쌀과 라면만 가지고 찾아간 지리산.
보름동안을 오롯이 화두 하나만 들고
분별의 세계를 뛰어넘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자했다.
장맛비가 내리는 인적 드문 세석산장에 앉아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사무침으로 몇 밤을 새웠던 시간들.
그 시간은 아마도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값진 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먹을 것이 떨어져 화엄사로 내려와 두 주쯤 있다가
해인사로 다시 돌아와 아무 것도 못 먹고 한동안 앓아야 했다.
절집안의 법도라는 것이 말없이 도망간 행자를 받아주는 일이란
어림없었으나 간호를 극진히 해 주었고 별말 없이 받아 주었다.
도망가기 전 행자노릇을 착실히 잘한 덕분이었을까.
사월 보름부터 행자생활을 시작해 시월 보름에
지관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으니 월정사 시절을 빼고
꼭 여섯 달 만이었고,
1972년 가야산이 붉게 물들어 있을 때였다.
출가를 하기 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온 뒤
두 해 남짓 도서관에 파묻혀 책만 읽은 적이 있다.
종교, 철학 서적에서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며
과학과 서양철학의 방법론에 끌렸고,
불교적 태도의 ‘유용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이나 프롬의 저서들을 읽으며
나는 그들이 연기적인 사고의 틀을 실제에 적용시켰다고 보았다.
절집에 들어와 보니 경전에 대한 해석 방법이
습관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나의 유용성에 대한 관심이 대장경의 전산화를 시도하게 했다.
컴퓨터를 처음 만지면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불교가 형성되어지는 과정에서 세습된 구태의연하고
왜곡된 관습을 새롭게 만들어 낼 자료를 제시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경이 전산화되면 새로운 기준이나 상상력이 적용되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불교가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불경의 전산화 작업도 어쩌면 출가 전이나 뒤에 늘 가지고 있었던
‘유용성’에 대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행자시절부터 큰 꿈이나 욕심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욕심을 하나 낸다면 '사이버 승가'를 창조해 내는 일이다.
가지고 가고 싶은 자료를 마음대로 가지고 가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토론해
불교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면 족하리라.
출처 : 호암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