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바람에 갇혀 며칠 동안 집안에서만 지내다가 모처럼 문 밖을 나서 보았다. 바닷가 마을
은 조용하다. 집집마다 꼭꼭 들어앉아 하는 일이 있어서이다. 해마다 초겨울에서 이른 봄까
지, 마을 아낙네들을 분주하게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굴 까는 일이다. 동이 트면서
부터 해가 뒷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아낙들의 손놀림은 쉼이 없다.
저녁이 되면 굴을 사러 오는 자동차들이 줄을 잇는데, 그 와중에도 한 두 그릇은 남겨서 참
기름에 살짝 볶거나, 국을 끓이거나, 달걀을 씌워 전을 부쳐서 식탁에 올린다. 해서, 겨울
밥상 위에는 굴 반찬 일색이다.
간혹은 옆집 현지네나 우물집 앵자 아줌마, 또는 이장 댁 어머니가 굴 한 그릇씩을 들고 어
둠이 드리워진 현관문을 두드린다. 덕분에 굴 까는 데엔 통 문외한인 고모와 나도 매일 그
향기로운 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굴 동네에 사는 주민의 특권인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 자동차를 타고 십 분쯤 거리에 있는 해안 마을인 강개에서도 돌담 아래에 포
장을 치고 굴을 까는데, 거기엔 싱싱한 먹거리를 즐기는 이들이 가깝고 먼 곳에서 찾아와 통
굴을 구워 먹는다. 숯불에서 나는 연기와 구운 굴에 소주 한 잔을 걸치며 흥겨워 하는 사람
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아낙들의 굴까는 경쾌한 손놀림이 어우러진 광경은 하나의 거대한 잔
치와 같다. 이 잔치는 겨우내 드문드문 이어진다.
나는 혀에 감기는 굴의 향내를 음미하며 문득 이들의 일생이 궁금해졌다. 옆집 현지 아빠에
게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일단 굴 까기를 마치고 나면 성한 굴 껍데기를 골라서 구멍을 뚫
고 줄에 꿰어 대막대기에 매달아 놓았다가 칠월이 오면 바닷가에 갖다 둔다고 했다. 그것은
바닷물이 따뜻해지는 여름이 굴의 산란기이기 때문이다.
갯바위에 붙어있던 굴들이 알을 낳으면 그들은 바닷물 속에서 부화되어 유충의 형태로 두세
주 동안 부유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두세 번의 변태 과정을 거치는데 두세 주가 걸린다.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하게 된다. 그들이 정착할 때 바닷가에 놓
인 굴 껍데기들은 그들을 위한 정갈한 아파트가 되는 것이다. 물론 갯바위에 정착하는 놈들
도 있을 것이다.
굴 포자가 다 정착하고 나면 사람들은 대막대기들을 깊은 바다로 옮겨 물 속에 담가 놓는
다. 바다 속엔 먹거리가 풍부해서 거기에 사는 놈들은 갯가에 사는 놈들 보다 훨씬 크고 빠
르게 자라난다. 굴은 자라면서 자신의 말랑말랑한 속살을 감춰주는 뚜껑을 만들어 덮는다.
안전한 보금자리 속에서 그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가을이 오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사람들은 성숙해진 굴들을 건져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진동
하는 굴의 향긋한 내음과 함께 신명나는 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잔치는 스산한 겨울 풍
경을 따스한 것으로 바꾸어낸다. 봄, 여름, 가을, 다투어 피어나던 꽃들도 스러지고 작은 분
신들이 언 땅 밑에서 희미한 호롱불을 켜고 있을 때 굴 내음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무엇에게나 자기도 모르는 꿈을 품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람들 속
에서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아름다운 꿈이 자라나고 있는 것 아닐까.
첫댓글 아 피는것 같아요. 사람들 속에서도 무언가 따뜻하고 좋은 느낌의 정겨운 꽃이 피오르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