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끝부분에 해당된다. 대방광불화엄경은 부처님의 깨치신 내용이 그대로 설해진 경전이라고 일러지고 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대각을 성취하신 뒤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삼매 중에 설하셨다는 경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 전부가 포함되는 것인 만큼 그 분량은 한량없다고 할 것이다.
중국에 전해진 화엄경의 가장 완벽한 번역본은 8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방대한 80화엄경도 약본(略本) 즉 간략하게 추려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화엄경에는 상본(上本) 중본(中本) 하본(下本)이 있다고 하는데 그 상본은 열 개의 삼천대천 세계의 미진수만큼의 품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그보다 적은 중본은 1천2백 개의 품과 49만 8천 8백 개의 게송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이 방대한 경(상본과 중본)은 남염부제 중생들이 감당할 수 없어 이 곳에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본만 하더라도 10만의 게송과 48품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용수 보살(龍樹菩薩)이 히말라야 산에서 수행중에 어떤 노비구스님을 만나 그의 안내로 용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화엄경의 상·중·하본을 보고 하본만을 가지고 나와 그것을 간략하게 만든 것이 약본이라고 한다. 절에서 새벽에 종송할 때 외우는 글 중에 화엄경의 글자 수를 10조 9만 5천 48자라고 하는 것이 있으니 얼마나 방대한 경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여하튼 이 80화엄경 말고 그 이전에 60권으로 된 60화엄경이 번역되어 있어서 이 두 가지가 유통되어 왔었는데 반야삼장이라고 하는 분이 맨 끝부분인 입법계품(入法界品)만을 따로 번역해서 40권으로 간행하게 되어 다시 40 화엄경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 입법계품의 마지막 부분이 보현행원품인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이 화엄경이니까 그 화엄경을 불교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고 다시 보현행원품이 그 경의 맨 마지막에 설해졌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총 결론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보현행원품은 입법계품(入法界品)의 끝에 있는 가르침인데 ‘입법계’란 말은 바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을 뜻하는 것이니까 이 보현행원에 의해서 우리는 진리의 세계를 그대로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법계품은 선재동자(善財童子)라고 하는 구도자의 구도 행각을 그려놓은 것이다. 구도자를 청소년을 뜻하는 동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육신의 연령과 관계 없이 진리를 찾아가고 있는 구도자는 어느 때나 청소년인 것이다.
반대로 진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세상을 사는 이는 아무리 육체적으로는 젊었다 하더라도 이미 청소년의 특권을 버린 사람이다. 선재동자는 곧 우리 모든 구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선재 동자가 문수보살에게서 지혜로 계발되어 53선지식을 순방하게 되는 기록이 입법계품이다. 이 53선지식은 그 신분이 일정하지가 않아 여러 계층의 남녀가 선재 동자에게 진리로 들어가는 방법을 일러 주고 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보현 보살을 만나서 듣게 되는 법문이 바로 이 보현행원품이다. 문수 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보현 보살은 행(行)을 상징한다고 불려지고 있다. 그러니까 입법계품 이전까지의 화엄경의 법문을 깨달음을 설해놓은 법문이라고 한다면 입법계품 특히 보현행원품은 바로 실천에 의해서 진리의 세계를 실현시키는 데 대한 법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현행원품은 이론의 전개가 아니라 곧바로 실천해 나아가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일러주신 참으로 고마운 법문인 것이다.
진리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론의 세계가 아니라 생명의 자기 완성의 사실 세계인 것이다. 그 완성을 위하여서는 실천 말고 따로이 진리 실현의 길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불교를 사상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철학적·학문적으로 구명하고자 노력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것은 그것대로 참으로 귀중한 노력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는 사상 체계를 확립한다는 공적은 있을 수 있어도 진리 그 자체의 실현은 가망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진리 자체의 원리에 따라 그대로 순일하게 실천해 나아가면 비록 이론적 무장은 부족할지 몰라도 그렇게 실천한 만큼은 진리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성불을 위한 종교라고 한다. 그리고 성불이란 위에서 말한 우리 모두의 순수 생명(純粹生命)의 실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본래부터 이렇게 있는 것이므로 그 생명의 완성을 뜻하는 순수 생명의 실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생명의 원리를 몰랐을 적에 미혹 속에서 헤매고 좌충우돌하면서 인생을 슬픔과 공포라고 믿고 살아오던 우리가, 보현 보살의 밝으신 법문을 듣고 생명의 원리에 맞게 사는 방법을 배워서 그것을 진리라 믿고 그대로 살아가면 거기에 생명의 본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성불은 실로 이론이나 철학·학문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생명 자체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현행원의 실천은 굳은 믿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 믿음은 자기 참 생명의 완전함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유한·상대의 것으로 생각하고 살고 있다. 유한·상대인 까닭에 투쟁이 있고 죽음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유한·상대 생명은 육신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미혹된 눈에는 그렇게밖에 안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치신 안목에서는 이 세상이 온통 법신 세계·법신 생명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이다. 우리의 생명은 본래부터 절대·무한 곧 완벽하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절대·무한인 부처님 세계는 이제 앞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적지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사실 그대로 있는 세계이다. 이렇게 사실 그대로 있는 세계에서 그 생명을 그대로 드러내서
사는 것이 보현행원의 실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은 마하반야바라밀의 믿음의 바탕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의 믿음 없는 보현행은 그 모양은 보현행인 듯 보일지 몰라도 결코 보현행일 수 없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신앙 없는 사람의 삶은 엄격하게 말해서 생존 경쟁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어떤 바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생명의 완벽함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리주의이다.
보현행원은 바라밀 신앙 위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삶의 내용인 까닭에 새삼스럽게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 없다. 목적이 따로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보현행원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현행원은 마하반야바라밀의 신앙 위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현 보살께서는 선재 동자에게 열 가지의 행원 덕목을 일러 주셨다. 그러나 실에 있어서는 이 열 가지는
곧 한 가지이고 한 가지는 곧 열 가지이다.
그러므로 열 가지의 덕목 중 어느 한 가지만을 실천해 가더라도 그것은 그대로 보현행원의 원만 성취가 될 것이다.
보현행원의 실천은 시기와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아니한다.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나 누구에게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보현행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생활 경험은 그 모두가 내 생명의 현상인 까닭에 어느 하나를 버려서도 안 된다. 경험적 현실로 나타나는 모든 일은 내 생명의 완성을 위해 그 자체로서 절대화(絶對化)되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 과제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하거나 기피하게 될 때 내 생명의 완성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모든 일은 그 모두가 그대로 보현행원의 수련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의 수행 도량은 따로이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가정과 직장과 거리가 그대로 거룩한 행원 도장이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선지식이며 도반이다. 당면하는 사건들은 좋고 나쁘고가 없다. 모두가 나로 하여금 보현행원에 정진하게 하는 고마운 일들뿐이다. 세속적으로는 재앙인 듯 보이는 일이 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성스러운 행원의 재료이기 때문이다. 얼른 보기에는 원수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가 바로 나에게 보현행원의 실천을 격려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현행원은 깨달음을 위한 어떤 수준의 공부가 있고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의 믿음이 있는 사람이 바로 지금 행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위해 별도의 공부·정진을 한 뒤에서야 행원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지금은 미혹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 된다. 이 말은 미혹의 세계를 실유(實有)라고 인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참으로는 미혹의 세계는 실유가 아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바라밀 세계뿐이다.
우리가 깨치고 깨치지 않고에 관계 없이 바라밀 세계만이 참으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대로 믿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하겠다는 것은 공연한 아집이다. 바라밀 신앙을 바탕으로 보현행원을 닦을 때 여래의 공덕장 세계는 있는 그대로 펼쳐진다.
이와 같은 보현행원은 언제까지 닦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영원히 닦는 것이다. 본래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까닭에 행원도 영원한 것이다. 중생이 무량 무변인 까닭에 행원이 끝날 날이 있을 수 없다. 영원한 행원으로 우리의 생명은 찬란히 빛나는 것이다.
다음 호부터는 광덕 스님께서 번역하시고, 불광출판부에서 발행한 『지송보현행원품』 원문을 중심으로 강의를 계속해 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