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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위영의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오위영은 울산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중앙무대에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는 장면 정권 때 경제개발 계획을 세우고 내각 구성에 참여하는 등 실세로 활동했다.
흔히들 울산을 ‘2인자의 도시’라고 하는데 이것은 해방 후 정치가 바뀔 때 마다 울산에서 2인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면 정권에서 오위영이 2인자로 활약한 후 공화당 때는 이후락이 박정희 대통령의 2인자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는 최형우 의원이 2인자로 당과 내각을 드나들면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이 외에도 윤보선 대통령 시절에는 정해영이 일급 참모 역할을 했고 평민당 시절에는 김대중 아래서 최영근이 부총재로 있으면서 김대중의 영남 진출 교두보 역할을 했다.
오위영이 울산에서 정치활동을 한 것은 고작 4년 밖에 되지 않는다. 제 2대 총선에서 울산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것이 전부다. 이후 그는 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었고 5대 총선에서는 참의원으로 당선, 민주당의 실세가 되었지만 5.16이 일어나는 바람에 겨우 8개월 정도 의정활동을 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우리 정치사에서 활동한 것이 10년이 채 안 된다.그러나 울산 사람들이 정치를 얘기할 때 오위영을 항상 떠올리는 것은 짧은 시간 그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 오위영은 무임소장관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내각 구성에 참여하는 등 장면 정권의 실세로 활약했지만 장면 정권이 너무 일찍 무너지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사진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잠적했던 장면 총리(왼편)가 사흘 뒤 나타나 기자들을 만나고 있다. 장 총리의 비서실장이었던 송원영이 기자들과 함께 그를 따르고 있다. |
그는 1902년 울산 언양에서 태어나 1913년 언양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18년 졸업했다. 이후 행적이 잘 나타나지 않고 1928년 일본 고베고등상업학교(神戶高等商業學校)를 졸업했다. 상업전문학교는 일본 전체로 보더라도 5~6개 밖에 되지 않아 조선학생이 입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등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오위영의 경우 중등 과정을 어떻게 마쳤는지 기록이 없다. 고베 상업을 졸업했을 때 그의 나이는 27살이었는데 그 해 귀국해 금융조합 이사가 되었다. 1947년 신탁은행장이 된 후 1950년까지 은행장으로 있었고 은행장에서 물러난 그해 2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로 진출했다.
장면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49년이었다. 이 때 그는 한국 경제인들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장면 박사가 미 대사로 있었기 때문에 대사관에서 그를 만났다.
오위영이 이승만 박사를 만난 것은 장면 박사를 만났던 때 보다 훨씬 앞선다. 1946년 그가 신탁은행 상무로 있었을 때 한강변에 있었던 마포장을 방문, 이곳에서 이승만을 만났다. 이 때 이승만이 오위영을 부른 것은 경제에 대한 자문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는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이기붕(李起鵬)과 함께 ‘88구락부’ 멤버로 조각 등 실무 면에서 이 박사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하고 도왔다.
정치인으로 이 박사를 만난 것은 자유당이 창당 작업을 한창 벌였던 1951년이었다. 이 때 이 박사가 그를 불러 자유당 창당에 앞장 서 줄 것을 당부했다. 따라서 오위영은 자유당 창당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어 엄상섭(嚴祥燮,) 이재학(李在鶴), 정헌주(鄭憲柱), 윤길중(尹吉重), 김영선(金永善) 등 원내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들을 만나 창당 작업을 벌였다.
그가 자유당 창당에 앞장 선 것은 울산 선거와 무관치 않다. 2대 총선에서 오위영은 정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2대 총선에서 그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김수선을 못마땅하게 본 이승만 정부가 김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관권 선거를 폈기 때문이다. 김 후보를 정부가 미워한 것은 그가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펼치는 각종 정책을 앞장 서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승만과 뜻이 달랐던 오위영은 이후 자유당을 떠나 지모와 재력 그리고 두둑한 배짱으로 야당의 간판 역할을 했다.
이런 행동 때문에 3대 총선에서는 그가 울산에서 다시 출마했지만 정부의 탄압해 선거를 끝까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정부는 이 때 경찰에 지령을 내려 오위영의 선거 운동을 방해했는데 당시 오위영과 함께 탄압을 받았던 다른 지역 후보로는 조봉암(曺奉岩)과 신익희(申翼熙)가 있다. 그러나 1958년 제4대 총선에서는 부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자유당의 박선기(朴善琪)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그가 야당 투사로 진면목을 보인 것은 이때부터다. 4대 국회 동안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각종 비리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때 그는 민주당 원내 총무로 야당 의원들을 이끌고 이 박사의 장기집권을 막는데 앞장섰다.
자유당은 결국 3·15 부정선거로 무너지고 1960년 7월, 그는 5대 선거에서 부산에서 출마해 참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실세로 장면 정권의 2인자가 되어 활동한 것이 이 때부터다. 그는 민주당 정부에서 신파로 무임소장관이 되었지만 구파와 신파의 끝없는 정권 투쟁을 막지 못해 결국 정권을 군인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그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발휘했나 하는 것은 장면 정부가 내각 명단을 발표했을 때 이철승(李哲承)과 김재순(金在淳)의원 등 구파들이 들고 일어나 “이것이 어떻게 장면 정권이냐 오위영 정권이지” 하면서 조각의 책임을 오위영에게 돌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위영은 정치인이기에 앞서 경제인이었다. 오위영은 특히 울산공업단지 조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5·16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후 군사정부가 울산공업단지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울산은 바다가 가까워 항만시설의 확충으로 물류수송이 원활해 공업단지 입지로 울산만큼 좋은 곳도 없는데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정치를 하는 동안 그를 괴롭힌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기관지가 나빴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말하는 ‘중석불 사건’이었다. 청년 시절부터 기관지가 나빴던 그는 장관이 된 후에도 기자회견을 할 때면 항상 기침을 했다.
중석불 사건은 1952년 자유당 때 터졌는데 우리정치의 고질병인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자유당 정부가 일본에 중석을 수출한 돈으로 국내 특정 기업들이 외국에서 비료와 밀가루를 사들여 우리 농민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도록 허가를 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야당의 돈줄 역할을 했던 오위영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그는 정치를 그만 둘 때까지 시달려야 했다.
그는 3대 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한 후 모든 조직을 최영근(崔泳謹)에게 물려주고 울산을 떠났다. 5·16으로 정계를 떠난 뒤에는 서울 정릉에서 살다가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린 공화당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1978년 77세로 타계했다.
가족으로는 장녀 숙주(淑珠)가 일본에서, 장남 재근(在根)이 국제통화기금 고문 변호사로 워싱턴에서 생활했고, 3녀 덕주(德株)는 서울에서 살았다. 그리고 막내 호근(浩根)이 한국금융주식회사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 떨어진 KAL기 사건으로 죽은 서울대 오정주(吳貞株)교수가 그의 2녀였고 빼어난 미모로 미스유니버스 대회에 입상해 한국의 미를 세계에 과시했던 4녀 현주(賢珠)는 서울 예전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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