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원 옛터(松石園址) 탐방기 필자(筆者)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근처 언커크 본부에 큰 불이 났다.
사진: 언커크 본부에 큰불- 동아일보 1966년 4월 05일자 이제까지 위 불을 직접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확인하니 4월 05일 식목일이다. 그럼 휴일인데? 불탄 다음날 남은 뼈대만 본 것인지? 휴일이지만 도서관에 나와 공부하다가 본 것인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언커크는 (UNCURK-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필자 먼저 글에서 UNKIRK 로 잘못 썼음) 1950년 유엔 결의에 의해 한국의 경제재건과 평화회복을 위해 설치되고 1973년 해체되었다. 필자 학교 다닐 때는 10월 24일을 유엔데이라 부르고 휴일로 정하고, 유엔참전 16개국 이름을 시험에 낼 정도로 유엔이라면 대단했다. 그런데 위 사진 불타는 건물에 언커크 본부가 들어 선 것은 1950년 대고 원래는 윤덕영의 집이었다. 윤덕영의 집
사진 : 윤덕영 저택 조선일보 1926년 9월 23일자 위 기사에 소제목이 아방궁(阿房宮) 이다. 1920년대 저런 집을 지으니 그런 소리 들을 만도 하다. 천정에 금붕어가 논다고 하여 ‘금붕어집’ 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1913년부터 10년이 넘게 걸려 지었으며 프랑스 설계도에 의해 석재를 혼입한 벽돌조의 2층 건물로 르네상스 양식이다. 윤덕영(尹德榮) 윤덕영의 됨됨이에 대해 한양가(漢陽歌) 중 한 구절 인용한다. 못된 사람 윤택영은 부원군만 욕심내어 경사는 못보았네 렴치없는 윤택영이 중략(中略) 합방시에 한양보소 만고역적 윤덕영은 황후백부 명색없네 임금옥새 빼앗다가 일본통감 갖다주니 우리나라 상감님은 룡포옥새 빼앗기여 백수군왕 가련하다. 윤택영은 순종황제의 황후-순정효황후 윤씨의 친정 아버지고, 덕영은 택영의 형이니 윤 황후의 백부(伯父)다. 윤 황후의 아버지 택영도 쓰레기지만 이 글에서는 덕영만 이야기 한다. 한양가 중 ‘임금옥새 빼앗다가 일본통감 갖다주니’ 부분은 다음 소문을 말한다. 합방 때 윤비가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다가 친일파들이 순종황제에게 조약날인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들칠 수 있으리요만 친정 큰아버지 윤덕영이 강제로 옥새를 빼앗아 갔다. 윤비가 병풍 뒤에서 나라 일을 엿들었을 것 같지는 않고, 옥새를 보관하는 관청이 따로 있는데 황후가 가져오란다고 그냥 들고 왔을 것 같지 않고, 옛날 옥새와 그 함이 꽤 커서 치마 속에 감추기 어려울 것 같고 (못 넣을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조카딸이라 해도 치마를 들쳤다는 것은 개연성이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고종의 사돈, 순종의 처백부-황실의 지친으로서 합방 때 차마 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일에 앞장 선 것은 틀림없으니 거기서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 공작의 악역을 좋다 하고 자임하고 나선 것이 윤덕영이다. 순종의 모든 것 을 덕수궁의 고종이 조종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고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첫 공작이 고종의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는 일 이다….. (이규태 씨 글 중에서) 또한 1919년 고종황제가 돌아 갔을 때 실은 윤덕영이 일본 총독부에 50 만원을 (요즘 50억(?) 받고 독살하여 황제의 시신이 흑갈색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고종황제 독살설’ 도 사실이 아닌 것 같으나 오죽하면 이런 소리가 나올까? 이렇게 돈을 모아 호화주택을 지으니 당시 윤덕영 집을 보는 시선이 어떠했는지? 1924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를 들여다 본다. 옥인동 송석원(玉仁洞 松石園) 착한 이만 사람입니까. 악한 자도 사람입니다. 중략(中略) 청탁을 가릴 것 없는 바에 윤자작(尹子爵) 송석원인들 명물이야 아닙니까. 독일식(獨逸式, 프랑스식인데 착오임)을 모떠서 별별 사치를 다한 집이라, 대궐도 못 따르겠지요. 그런데 어린 아이라도 이 집은 때 악마(惡魔)가 얼어붙은 것처럼 흉하게 보아서 저 집 참 좋다고 불없게 알지 않습니다. 더구나 뾰족한 머리를 (윤덕영의 짱구머리가 당시 흉이었다.) 얹어 밉게 보았던지 이 집 위에 있는 피뢰침만 보아도 만가지 궁휼한 수단이 그리로 솟아오를 것 같이 안답니다. 이 집 마당 연못이 어느 해인지 장마통에 터져서 앞동리 초가집들이 물벼락을 맞았섰는데 손해는 대궐 안에서 물어주었답니다. 그러기에 충심이 그리 갸륵하지요. 중략(中略) 문 앞 다리와 살던 골목이 무슨 죄입니까. 이 집을 송석원이라 말고 윤자작저(邸)라고 하시지요. 푸른 솔, 흰 돌이 원통하다 할 것입니다. 이 사람 욕을 하자면 5박6일도 모자랄 터이나 이쯤하고 이 윤덕영의 집터는 조선후기 위항문학의 본거지 송석원(松石園)이었다. 위항문학 (委巷文學)과 중인(中人)
중인과 위항문학에 대하여는 연세대 허경진 교수가 서울신문에 ‘ 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이란 제목으로 25회에 걸쳐 연재한 글이 읽을 만 하니, 글의 사이트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www.seoul.co.kr/news/newsList.php?section=mlevel_hanyang
위(委)는 보통 ‘맡기다’는 뜻으로 쓰나 ‘굽었다’ 라는 뜻도 있다. 항(巷)은 거리 또는 마을이다. 따라서 위항(委巷) 은 굽고 꼬불꼬불한 길 또는 마을-떵떵거리는 양반이 아니라 서민들이 사는 마을이다. 그러나 위항문학이라 할 때 주체는 그냥 서민이 아니라 중인(中人)들이다. 중인은 글자 그대로 위로 양반, 아래로 상인(常人;쌍놈) 사이로 그 폭이 넓어, 서얼(庶孼), 중앙 지방의 아전(衙前), 토관(土官), 군교(軍校) 등이 모두 들어 가니 개념을 정의하기 어렵다. 중인은 잡과(雜科)시험이나 취재(取才)를 거쳐 뽑히나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로 올라가는 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지방에서는 양반의 명단인 향안(鄕案)에 오르지 못할 뿐 아니라 향교(鄕校)에 들어 가지 못하거나, 들어 가더라도 축담 밑에 내려서는 수모를 받았다. 조선시대 아전은 중인으로 차별 받지만 고려시대는 달랐다. 고려는 지방호족을 아전으로 포섭하니 아전이 바로 지방 세력가였다. 조선 중기 족보편찬 붐이 일 때 이런 역사적 지식이 없어 각 집안에서는 고려 때 아전 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숨긴다. 예로 필자의 고향 근처 이렇다 하는 쟁쟁한 양반 집들도 고려 때 아전이었으나 그 족보에는 나오지 않는다. 어느 신분체제나 세월이 지나면 느슨해 지고 실력을 갖춘 하위계급이 상부로 치받는 현상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 (1789년) 전 구체제-앙시앙레짐에서 실력을 갖춘 부르주아가 지적 능력이나 재산 모두에서 변변찮은 전통귀족에 비해 사회적 차별을 받지 못하자 불만이 끓어 오른 것은 그 대표적 예다. 조선 후기에 중인 중 경아전(京衙前), 역관(譯官), 의생(醫生)등 현대 용어로 전문직 종사자들은 양반보다 재력과 지식이 오히려 나은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이들은 사회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런 것이 쌓이면 체제가 흔들리나 한편으로는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볼 수 있다. 이들 경아전(京衙前), 역관(譯官), 의생(醫生)등 전문직 종사자-중인들이 조선후기 이룩한 문화를 위항문학(委巷文學)이라 한다. 이들-위항문학의 주체 중인들은 주로 인왕산 자락에 살고 또 모였다. 조선 시대 도성에서 양반으로 권력을 잡아 서슬 시퍼런 노론들은 대체로 북촌-가회동, 계동 일대, 양반이지만 권력과 거리가 먼 쪽은 남산아래, 중인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은 개천(開川-청계천) 주위 ‘아래대’ 라고 부르는 곳, 위항문학의 주체인 전문기술직 중인들은 인왕산 자락 ‘우대’에서 주로 살았다.
사진 : 수선전도 중 인왕산 밑 조선 후기 인왕산 밑에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지만 위 지도 중 장동(壯洞) 일대에는 노론(老論) 핵심인 장동 김씨-안동 김씨들의 저택과 추사의 서울 집이 있었다. 추사의 증조부는 영조대왕의 부마로 그야말로 쟁쟁한 명문세력가다. 송석원(松石園) 18세기 후반부터 이 중인(中人) 위항문학 (委巷文學)의 중심지가 송석원이었고, 훗날 윤덕영이 나라 팔아 금붕어집을 그 자리에 지었다. 이인문(李寅文)의 옥계(玉溪)
이인문(李寅文: 1745-1821, 호: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 위항문학인 (委巷文學人)들의 모임인 송석원시사(詩社)의 부탁을 받고 그린 그림이다. 왼쪽 봉우리는 인왕산이고 오른쪽은 둥글지만 틀림없이 백악(북악)이고 가운데 원경은 삼각산이다. 왼쪽 아래 냇물은 위 수선전도에 옥류동(玉流洞)에서 나오는 물길-옥계(玉溪)일 것이다. 옥계 위로 이날 시회(詩會)에 참가한 이들이 있고 다시 그 뒤 바위에 송석원(松石園)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상 위치를 구글로 본다.
6월 10일 일요일 송석원을 찾아 나섰다. 송석원 문설주(?) 인터넷에서 옛 윤덕영 집 대문 기둥-문설주가 남아 있다는 글을 보고 이것부터 확인하니 옥인동 군인아파트 앞 빌라다.
사진: 문설주 1. 왼쪽 골목 사이로 멀리 보이는 언덕이 송석원 자리다. 건너 편에 역시 문설주 잔해 같은 것이 있다.
사진 : 문설주 2 왼쪽에 오른 쪽을 올리거나, 오른 쪽 아래에 왼쪽을 붙이면 뭐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설주가 과연 원래 위치에 있는 지는 의심스럽다.
사진: 동아일보 1924년 7월 21일자 위 사진 윤덕영 집 대문에서 보는 본채와 현재 문설주의 위치에서 본 옛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현재 문설주 위치와 옛터 사이에는 길과 (옛 지도를 확인하니 옛날부터 있는 길이다) 지금은 복개 되었지만 개울도 있다. 동아일보 사진이 비록 흐릿하지만 문설주와 본채 사이에 길과 개천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 사진 상 본채가 현 문설주 추정위치와는 너무 가깝다. 따라서 이 문설주가 과연 윤덕영집 송석원 것이라면 원위치는 아닐 것이다.
사진 : 송석원 옛터. 사진 위 부분 고급빌라들이 모두 옛 송석원 터다. 송석원 위치와 물길 송석원-언커크 자리는 알고 있지만 이인문과 다음에 실을 겸재의 그림의 위치와 시각(視角)을 확인하려면 옛 물길이 어찌 흘렀는가를 알아야 한다. 호암 문일평(湖岩 文一平) 선생은 조선일보 1935년 9월 22일자 ‘천수경구기송석원 (千壽慶舊基松石園)’ 이라는 글에서 이 일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골짜기는 셋으로 나누었는데 세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조그만 삼계류(三溪流)는 '지치바위' 앞에 이르러 서로 모여 일계류(一溪流)를 이루어 혹(或)은 수인석애 (數인石崖)의 좁은 협곡(峽谷)을 몇이나 통과(通過)하여 송석원(松石園) 앞의 수문(水門)으로 내려간다. 셋이고 한 물길이고 간에 모두 복개 되어 땅 속에 있으니 그냥은 알 수 없으나, 다행히 디지털한양에서 (http://digitalhanyang.culturecontent.com )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사진: 디지털한양에서 옛 물길을 찾아 옥계 주위를 잘라 냄. 호암의 서술대로 송석원 주변에서 세 물길이 만난다. 위가 옛 물길이고 아래는 요새 지형으로 필자가 송석원 옛터를 적어 넣었다. 이상 디지털한양 자료를 구글로 본다.
필자는 전문가가 아니고 디지털한양을 보고 그려 넣은 것 뿐이지만 대강 형태는 맞으리라. 송석원(松石園) 글씨 이인문의 옥계 그림에 송석원(松石園) 글씨가 있고, 실재로 부근에 추사가 썼다는 송석원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여 찾아 보았다.
사진: 송석원글씨-추사 이인문 그림에는 세로글씨이나 위 사진의 추사 글씨는 가로 글씨다. 이리 저리 동네 사람에게 들으니 다음 집안에 있다고 한다.
사진 : 옥인동 47-23 기웃거리는 데 마침 문이 열려 들어가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니 자기도 그런 이야기 여러 번 들었고 청와대에서도 나와 보고 교수도 여럿 왔다 갔지만 아무리 찾아도 자기 집에는 없다는 것이다. 문틈으로 볼 때는 아래 암벽에 있지 않나 했지만 안에서 보니 시멘트 옹벽이다.
다른 집이거나 혼란기에 추사 글씨고 무엇이고 그냥 시멘트 발라 버렸을 수도 있다. 수성동(水聲洞) 18세기 말에 가면 송석원 일대는 중인 위항문학의 중심지로 변하나 그 전 조선 초기,중기에는 쟁쟁한 양반 권력자들이 살았으니 이 일대가 도성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때문이다. 서울의 명승지로는 반드시 인왕산이 꼽혔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국도팔영(國都八詠)에는 필운대(弼雲臺), 청풍계(淸風溪), 반송지(盤松池), 세검정(洗劍亭)을 포함했다. 인왕산 자락의 명승지가 서울 명승지의 절반을 차지한 셈이다. 필운대는 배화여고 구내, 청풍계는 청운초등학교 오른 쪽 골목에서 산 밑 까지다. 송석원 일대는 수성동으로도 불린 모양인데 세종 때 안평대군의 별장이 있었다. 다음은 겸재의 그림 수성동이다.
수성동(水聲洞),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영조27년 (1751)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x33.7 cm, 장동팔경첩, 간송미술관 소장 (이하 그림해설 : 최완수 선생의 ‘겸재의 한양진경’ 중 발췌 요약) 인왕산 기슭에 있으니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시내와 암석의 빼어남이 있어 여름에 놀며 감상하기가 가장 좋다. 혹은 이르기를 이 골짜기가 비해당 (匪 心+解 堂)의 옛 집터라고 한다. 다리가 있는 데 기린교(麒麟橋)라고 한다. 중략 옥인동 어느 곳일 듯한데 인가가 들어차고 암석이 파괴됐으며 시내가 복개 된 상태라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그림으로 보면 둥근 바위 벼랑이 내려 와 우뚝 멈춘 아래에 널찍한 평지가 있고 그 앞뒤로는 수직의 바위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평지 아래로는 계곡물이 힘차게 흐른다. 인왕산 동쪽 기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터전은 남향집을 지을 수 있는 집터였을 것이다. 구글 지도를 다시 군인아파트가 아래에 오게끔 방향을 돌리면서 버티컬 단추도 건드려 하늘이 아니라 수평선에서 입체로 본다.
김영상씨 (사진 작가)에 의하면 60년대 말 옥인시민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기린교를 없앴다고 하니 겸재의 그림 왼쪽에 흐르는 냇물이 옥류동 물길이요 위 그림의 무대는 그 물길을 따라 송석원과 시민아파트 일대일 것이다. 사진: 옥류동 물길-옥인시민아파트 내 복개가 시작되는 지점
옥동척강(玉洞陟崗) 다시 겸재의 그림 한 장을 더 본다.
옥동척강(玉洞陟崗),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영조 15년 (1739) 비단에 엷은 채색, 33.5x33.8cm, 개인소장 그림 왼쪽 위에 선비 일곱이 산길을 걸으니 수성동 뒷산을 오르는 장면이다. 그 추정위치를 역시 위 구글에 표시해 넣었다. 이상 |
출처: 구룡초부 원문보기 글쓴이: robustus
첫댓글 별로 읽지 않고 읽더라도 대강 그림만 훑을 것으로 생각하나... 그래도 글쓴이로서 의무는 다해야기에 ^^ : 위 중인부분- 프랑스 부르주아들을 예로 들은 설명중 ' 변변찮은 전통귀족에 비해 사회적 차별을 받지 못하자' 이부분 내용상 당근 '받지 못하자' 는 '받자'로 수정되어야 함. 블로그에 써서 옮기니... 쪼까 불편함. 블로그 것은 고쳤는 데 여길 고치려니 키가 먹지 않아... 지우고 새로 옮기던지 해야 함. 그렇게 할 것 까지는 아니라서... 여기 꼬리글로 수정하는 것임 ^^
그동안 알지 못한 구한말 왕실의 비극을 알게 된거 같습니다 윤덕영 참 매국노의 행적을 알게 하는군요 많은거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대댁손자님으로부터 잊어버리고 알지 못하였던 역사를 많이 배우게 하는군요!앞으로도 더많은 자료부탁해요!
유엔데이 아 그렇군요 ^^아쉬움이 있다면 그대로 보존 되어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구요늘 좋은글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