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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국불교사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는 선문스님
미주의 한국사찰 110개 중에서 비구니 스님이 주지로 있는 사찰은 30개에 이르고 약 40여명의 스님이 활동하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이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분야는 교육분야이다. 북가주 형전스님, 뉴욕 청아사 석담스님, 현재는 귀국했지만 뉴욕 한마음선원의 혜고스님이 교육분야에서 나름대로 활동하면서 성과를 냈다. 주지는 아니지만 뉴욕불광선원 선문스님은 ‘불광한국문화학교’의 교장으로 미주한국불교사에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불광한국문화학교’가 뉴욕지역에서 주목 받는 한국학교가 되기까지에는 선문스님의 지도력이 큰 힘이 되었다. 스님의 지도력이 인정되고 빛을 발하면서 스님의 처소를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스님의 전화기에는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뉴욕 불광선원에서 재무, 어린이부 지도법사, 한글학교 교장 직책을 맡고 있는 선문스님은 1992년 출가하여 이제 20년 차가 되는 비구니스님이다.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한 것은 2006년 5월부터이다. 이제 5년에 불과하지만 불광선원에는 선문스님이 어린이들을 지도하면서 남기는 흔적이 많다. 불광선원 구 법당은 이제 완전히 선문스님과 어린이들의 장소가 되었다.
불광선원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맡아 일하면서도 2009년부터 뉴욕시립대 헌터칼리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여 지난 6월에 졸업하였다 현재는 롱아일랜드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3학기째 하고 있고 졸업까지는 2년이 남았다. 이렇게 사찰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고 또 학업까지 병행하는 선문스님이 교육분야에서 미주한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불광한국문화학교를 통해 한글과 한자, 그리고 한국문화를 성공적으로 이곳에서 자라는 2세들에게 지도하는 것이다. 미주에 있는 2천여 개의 한국학교 중에 개신교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한국학교가 95% 이상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중에서 선문스님이 교장으로 있는 ‘불광한국문화학교’는 이제 불교계를 넘어 뉴욕과 뉴져지 지역에서 널리 알려져 학부모들로 부터 관심 많은 학교로 성장하고 있다.
선문스님의 출가
강원도가 고향인 선문스님은 1992년에 대전에서 출가했는데 출가하기 2-3개월 전까지 어린 시절부터 17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이런 스님이 출가하게 된 계기는 꽤나 극적이다. 선문스님의 어린 시절시절부터의 장래희망은 국가를 위하고 국가를 지키는 여군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이 “여자가 왜 군인이냐!”는 완강한 반대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대학에 진학하였지만 대학생활이 스님과 맞지 않아 학교는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공무원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공무원이 되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2년 6개월간의 고시원과 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청주로 여행을 갈 기회가 있었다. 청주의 화장사라는 사찰 부근에서 놀다가 보니 절 진입로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래서 화장사를 방문하고 주지스님으로부터 물 한잔을 대접 받으면서 스님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 절에는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주지스님의 배려로 선문스님도 이 절에서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절 생활을 접하게 되었다. 사찰에서 지내면서 일요일이면 근교의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틈틈이 스님들의 생활을 엿보게 되었는데 전혀 다른 세상에서의 색다른 삶에 대해 신비롭고 스스로 감명스운 경험들을 해보게 되었다. 그 중의 가장 감명받은 부분의 하나가 새벽예불이다. 스님들의 새벽예불을 태어나 처음 들었는데 스님들의 수행의 일면을 보여주는 영혼을 울리는, 그리고 부처님을 향해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내는 소리였다고 한다. 절에서 시험공부 하는 동안 스님은 불교교리 등을 알기 전에 먼저 스님들의 생활을 알게 되었고 절 분위기에 심취되어 불교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절에서 공무원 시험공부 하는 동안 스님들로부터 들은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너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한다”라는 불교적 가치관이 담긴 말이 절을 떠난 후에도 항상 스님의 생각에서 맴돌았다.
절에서 나와 다시 고시원에서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면서 스님은 혼자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 소리를 들은 불교신자 친구가 깜짝 놀라면서 그 가락은 절의 ‘예불문’이라고 알려주었다. 이 친구의 소개로 지리산 칠불사에서 10년 결사 중이던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가기 힘든 칠불사를 여러 번 방문하였다. 이 사찰을 가기 위해 스님은 보다 쉬운 교통편을 이용하지 않고 순례자 같은 마음으로 어려운 등산길을 통해 칠불사를 찾곤 했다 한다. 이는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구례 역에서 내려 화엄사에서 새벽예불하고 아침 공양을 한 후 노고단을 넘어 반야봉, 토끼봉을 거쳐 가는 여정이었다. 한 번은 산길을 오르던 중 길을 잃고 헤매다 저물어 가는 저녁 길에 하산의 길을 포기하고 반야봉의 바위 밑에서 홀로 밤을 세운 적도 있을 정도로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선문스님은 이런 힘든 여정을 거쳐 칠불사를 방문하여 스님들과 세상살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생의 향로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었다. 선문스님은 청소년 시절부터 인생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며 살아왔다. 가령, 3년 후에는 무엇을 하며 어떤 상태에 있고, 5년, 10년 후에는 어떤 상태에 이른다는 년도 별로 나름대로 인생계획표를 가지고 살았다. 당시에도 선문 스님은 이런 자신의 삶의 방향이 곧 자신을 위하고 부모를 위하며 이웃과 나아가 사회 그리고 국가를 위한 삶을 산다는 인생의 가치관과 목표를 상담해 주시던 스님에게 설명하였다. 선문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겠지만 한 개인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런 뜻을 가졌으면 보다 큰 물에서 놀아 보지 않겠느냐?”고 이왕이면 출가를 하여 스님의 뜻을 크게 펼치라고 권유하였다. 이 권유를 들은 선문스님은 망설임 없이 출가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출가를 결심한 선문스님은 혹여 자신의 뜻 깊은 출가의 의도를 도가 깊은 어느 스님이 “내가 네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라며 반겨주리라 상상을 하면서 수덕사 견성암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견성암에서는 어느 스님도 선문스님을 기다리는 스님이 없었다. 절 앞에서 어정거리며 놀면서 선문스님에게 관심을 표명할 스님을 기다렸지만 많은 스님들이 공양을 가면서도 선문스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선문스님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견성암을 나와 다시 칠불사 스님을 찾아갔다. 칠불사 스님은 대전에 있는 도솔산 감로사의 장차 은사스님이 되실 묘정스님과 진일스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 후 이 두 분 스님은 선문스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선문 스님은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절 집안에서의 세 분의 스승이 있다. 은사 묘정스님과 진일스님, 그리고 휘광 석원 스님이신데, 두 분 묘정, 진일 스님들로부터는 수행자의 기본교육은 물론 출가수행자의 근본이 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이념과 사상을 배웠다. 미국 불광선원에서 만나게 된 휘광스님에게는 소임자로서 지녀야 할 공심에 대한 살아있는 교훈을 배웠다.”라고 말한다.
선문스님은 대전에서 출가를 한 후 대천에 있는 대승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선문스님은 출가 후 그 해 겨울, 인파선 결핵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은사스님은 선문스님에게 지장 천일기도를 권유하였다. 기도를 하는 스님에게 다른 스님들은 ‘기도를 제대로 안하면 평생 동안 큰 일 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천일 기도를 하면서 1993년 사미니계를 받았다. 계를 받고 절에 돌아 온 날 은사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그날 공교롭게도 대천에 있는 군부대에서 군인이 죽어 장례식 집전을 부탁하는 연락이 왔다. 사망한 군인은 선문스님이 행자교육 가기 전에 대승사 법회에 딱 한번 온 적이 있는 선문스님과 동갑내기 군인이었는데 교통사고로 이 세상과 인연을 다한 것이었다. 장례식 경험이 없는 선문스님이 은사스님에게 연락을 했지만 스님은 대천으로 올 상황이 못되었다. 스님은 의식집 책을 의지하여 장례식을 마쳤다. 당시에 지장 천일 기도를 하던 중었는데 동갑내기 군인의 죽음은 스님에게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화두를 주었고 기도를 마치는데 큰 동력을 주었다. 기도의 목표가 뚜렷해졌다. 또 죽음이라는 것, 나라를 위한 순국, 그리고 죽음 후의 남겨지는 것들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을 하면서 육신에 대한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정립해 갈 것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승가 교육을 받다.
선문스님은 동학사 강원을 1995년 입학하여 99년 졸업하였다. 그리고 바로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2003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학년이던 2002년 겨울부터 2004년 1월까지 대구 견성사를 맡아 운영하였고 이후 2004년부터 12월까지는 서울 금호동에 있는 금오정사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였다. 견성사에 소임을 볼 당시 대구지하철 사고가 바로 견성사 부근에서 났다. 대구지하철 사고를 가까운 데서 경험한 후에는 사회에서 소외 당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즉 수행자로 살면서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무시당한 사람이 사회에 대해 무차별적 앙갚음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에 대해 많은 사색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창 시절에는 ROTC 지도법사로 2년 동안 활동하였고 학인 스님들의 모임인 석림회의 법사단, 봉사단을 거쳐 석림 부회장과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원인 혜광사에서 입승 소임을 맡았다. 이 직책들은 대중을 이끌고 단체를 총괄적으로 끌어가는 역할이었다. 이런 활동들은 선문스님으로 하여금 행정과 재무, 지도력을 기르는 좋은 경험을 쌓게 하였고 어떤 일을 할 때 전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었다. 스님은 또 동국대 내에 ‘맑은 세상이야기’라는 환경단체를 조직하여 교내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이 활동을 위해 동국대가 위치하고 있는 서울 중구청과 담배인삼공사에서 제공해 준 휴대용 재떨이 나누기, 화장실 깨끗이 사용하기 캠페인, ‘아름다운 사람들’ 등의 스티커를 붙이는 활동을 하였다. 당시 ‘맑은 세상이야기’는 동국대의 ‘참사람 봉사단’을 통해 한국대학생봉사연합회의 우수한 봉사활동 단체로 선정되어 활동지원금을 받았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활발한 교내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미국으로 유학을 오기 전, 선문 스님은 강원 도반인 자우 스님이 주지 소임을 보고 있던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 소재의 ‘해인사 인도네시아 포교원’에서 한국인 교민들을 대상으로 해외포교생활을 경험을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 생활을 시작한 며칠 후 주지스님과 함께 사찰의 학생들을 이끌고 해변으로 수련회를 갔다. 당시 동남아 국가들을 강타하여 약 3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냈던 쓰나미가 일어났는데, 그때 스님이 동참하여 갔던 수련회 현지에서는 일체의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스님은 단지 기상악화로 인한 주변지역의 재해상황이 발생한 것이라 여기고 포교원으로 다시 돌아와서야 쓰나미가 일어난 것을 알았다. 쓰나미 현장에 있었지만 스님과 학생들은 쓰나미가 난 줄도 몰랐던 것이다. 쓰나미로 인도네시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태국과 스리랑카와 인도 등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곳에서 스님은 자연재해나 재난 이후의 구조활동 등을 보면서 본인이 앞으로 공부하고 활동할 사회복지에 대한 기본적 맥락과 방향을 설정하고 보다 넓은 의미를 부여한 국제사회봉사자가 되기 위한 동기를 갖게 되었다. 이후, 2005년 5월에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일주일 후, 스님은 미국유학의 길을 나섰다.
선문 스님의 미국진출
선문스님은 사람들의 스승으로서 활동하기 위해서 세상을 넓게 보고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왔다. 맨 처음 온 곳은 오레곤 주 포틀랜드 보광사였다. 당시 주지스님이었던 일묵스님도 선문스님의 이런 뜻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선문스님은 포틀랜드에서 보광사에서 주어지는 소임을 보며 대학원에 진학하는 본격적인 미국생활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해인사 포교당에 있던 도반 자우스님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현 듀크대학 교수인 일미스님을 통해 뉴욕 불광선원에서 어린이들을 지도할 스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선문스님에게 자꾸 불광선원으로 가라고 연락을 해왔다. 당시, 불광선원에서는 어린이 부를 맡을 비구니 스님을 구하고 있었고, 이에 사찰 외부에서 기거하고 공부할 수 있는 숙소와 자동차를 제공하며 반드시 뜻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스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지 휘광스님의 대중을 들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조건은 어떤 스님이라도 반드시 학교에 등록하여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보광사 주지 일묵스님도 크고 넓은 지역인 뉴욕에서 공부하며 포교를 하라고 흔쾌히 선문스님의 뉴욕 행을 찬성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선문스님은 뉴욕불광선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포교와 교육을 할 기회를 맞게 되었다. 스님은 그 동안 여행과 언론보도를 통해 본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의 비참한 삶이 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직접 목격한 인도네시아의 어린 십대 소녀들이 노년의 서양인과 가정을 이루고 살며, 또는 어느 가정집의 식모 생활로 자신의 가족들을 부양하는 모습들을 비롯하여 부모의 보호 하에 공부하며 즐겁게 놀아야 할 아직은 어린, 가난한 어린이들의 동냥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또한 한국 개신교 선교단체에서 동남아시아 불교국가들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불교를 믿기 때문에 가난하다”라는 내용을 주입시켜 주는 것을 알고는 이 그릇된 선교행위에 어떤 형태로든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선문스님은 가난한 나라와 소외계층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키워왔다. 선문스님의 결론은 ‘이미 생각과 행동이 굳어진 어른들은 그들의 생각과 삶의 행동양식을 바꾸는 것이 힘들지만 어린이들은 올바로 교육을 시키면 가난을 극복할 수 있고, 세상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선문스님은 현재의 본인의 미약한 재정적, 사회적 위치에서 위의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고픈 원력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중의 하나로 유니세프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스님의 동학사 강원시절, 아프리카의 기아 아동들을 돕기 위해 제작, 판매되고 있던 post card를 통해 처음 유니세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유니세프에 대한 큰 관심을 갖고 유니세프의 이념과 활동방향 등이 스님이 원력을 세운 바와 뜻이 같음을 알고 기회가 된다면 이 기구에서 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곧, 유니세프에서 말하는 우리 인류의 발전이 곧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다는 믿음과 이를 위해 국가나 인종 또는 어떠한 종교나 이념에 차별하지 않고 오직 어린이들을 위한 건강과 교육 그리고 그들을 보호 하는 등의 필수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공감하면서 이의 원력을 갖게 된 것이다.
불광한국문화학교 설립
뉴욕에서도 뉴욕 시립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나 뉴욕지역의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의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친 사람들 중에서 유니세프에 입사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니세프에서 직원으로 선발되어 현장에서 활동을 하려면 5개 언어를 하여야 한다는 조건에서 선문스님은 목표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선문스님은 불광선원에서 일요일에 어린이부를 맡아 지도하고 주중에는 학교에 다니며 미국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또 기회가 되면 미국의 어린이 교육현장에 직접 참여하며 미국적인 가치관을 알기 위해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브르클린의 DAY SCHOOL에서 4개월 일한 것은 스님에게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미국에서 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한인사회의 문제점과 이곳에 사는 한인 2세들의 문제점이 스님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타종교에 나가는 어린 아이들이 “교회를 안 다니면 지옥에 간다”, 또는 “너희 스님은 마귀다” 등의 말을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을 통해 전해 들으면서 심각한 문제를 느꼈다. 불자인 어린 아이들이 타종교에서 운영하는 한국학교에 다니다가 부모와 함께 결국 개종하게 되는 과정도 목격하게 되었다. 또한,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8-9년을 한국말을 배워도 한국말을 잘 모르고 싫어하며 자기들끼리 대화 할 때는 영어로만 대화하기 때문에 청소년기에 문제가 생겨도 부모와는 심도 있는 대화가 어려운 이민사회의 현상을 목격하고는 이러한 것들을 해결할 대안으로 학교설립을 강력하게 느꼈다. 2007년도에 선문스님, 이선아 보살, 박지영씨와 함께 뜻을 모아 ‘한국학교를 설립하자’라고 결정하였다. 주지 휘광스님도 적극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세 사람은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약 1년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2008년 2월 둘 째 주 토요일 8명으로 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음 가을학기에는 학생수가 16명으로 두 배 증가하였다.
선문스님의 교육관
불광 한국문화학교 대통령 자원 봉사상 부여할수 있는 기관으로 등재
스님은 교장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역점을 두는 것은 ‘중도적인 사고’ 즉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인간의 양성이다. 본인이 스님이지만 학생들이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현대사회의 다문화와 다민족, 다종교의 이념들 속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여 본인의 정신세계를 구축한 다음 다양한 가치관에 대해서도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어느 사고에 매몰되어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평화로운 세상, 이웃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한 몫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을 양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 네가 하는 일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네 가족이 너의 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그 일이 이웃과 사회에 유익한 일이라면 그 일에 최선을 다 하라”고 지도한다. 선문스님이 불교에 입문하여 배우고 경험을 통해 정립된 철학이 반영된 지도력을 바탕으로 선생님들, 자원봉사자와 학부모가 일심동체가 되어 노력하여 성장한 ‘불광한국문화학교’는 큰 경사가 났는데 지난 3월 8일 <PVSA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자원봉사상(The President Volunteer Service Award)을 부여할 수 있는 공식기관(Certifying Organization)으로 등재되었다. 이렇게 대통령 자원봉사상을 부여할 수 있는 단체는 뉴욕의 한인사회에서만 보더라도 ‘KCS한인봉사센터’ 등 여러 단체가 있지만 미주한국불교사찰에서 운영하는 기관이 대통령 자원봉사상을 부여할 수 있는 공식기관으로 등재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러한 노력과 성과에 힘입어 ‘불광한국문화학교’는 이제 멀리 떨어진 중부 뉴져지 그리고 타종교인들에게도 그 명성이 알려졌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하고 안주할 선문스님이 아니다. 스님의 중장기적인 사업계획안에는 ‘불광한국문화학교’를 한국문화 교육법인체로써 학교를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현재 뉴욕 주정부와 연방정부로부터 이미 법인체 설립 승인을 받아 마친 상태다. 승인은 받았지만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학교운영을 위해서는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이 필수다. 현재 불광한국문화학교’는 등록금 $200, 이사회 지원금, 그리고 불광선원의 후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는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학사운영금일뿐 지속적인 프로그램 개발과 법인체 유지, 발전을 위한 운영기금으로는 전혀 충분치 못함이 현실이다. 스님의 재정확충에 관한 앞으로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법인기관으로써 보다 광범위하게 학생들을 지도, 교육하고자 하는데 있어 불광한국문화학교 만의 독창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다. 곧 전래문화와 현대 사회 속에서 다문화와의 조화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학교발전을 위한 후원회를 양성하여 이를 통한 기금 마련을 계획하고 있다. 이를 위한 시작으로 지난 6월 한국을 잠시 방문했을 때, 스님은 자신의 대학원 학비마련을 뒤로하고 전국의 인연 사찰에서 한국문화학교를 위한 화주를 하였고 이에 뜻을 모아주신 스님 및 불자들로부터 $20,000을 모금해 왔다. 스님은 요즈음 다음 단계의 사업계획안의 구체화를 위한 기금확보를 위해 고심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짧은 기간 내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지만 앞으로 불광한국문화학교의 내적 외적 성장과 발전은 불자들과 교계의 관심과 협력에 달려있다고 스님은 말한다.
선문스님은 “옳다고 믿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말라” 라는 스님 자신의 MOTTO와 뜻을 같이하며 숭고한 가치를 위하여 함께 손잡고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곧 불광한국문화학교의 교육이념을 함께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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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들 표정이 힘들어 보입니다. 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