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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명료하다.
어디로 가니?
남목에서 주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는다.
땀이 흥건히 온 몸을 감싸 안을 때 산길을 따라서 방향을 바꾼다.
소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길가에 국수나무, 며느리배꼽, 청미례덩굴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냥 지나치기에 아쉬워서 살짝 눈웃음을 보낸다.
우리나라 식물들의 이름은 수수하면서도 정겨움을 지니고 있다.
국수나무는 우리가 즐겨먹는 국수의 면발같이 가지가 길게 뻗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봄이되면 늘 국수나무 새순을 먹었었다.
지금은 아무런 맛이 없지만 그 때는 주전부리가 없던 시절이라 물기가 많은 줄기는 시원한 새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사라질 즈음에 동해 바다의 푸르름이 먼 발치에서 아득히 보인다.
조금 밖에 보이지 않으니 걸음이 빨라질 수 밖에 없다.
작은 절집 봉호사를 지나면 둥그스럼하게 돌로 쌓아 올린 주전봉수대가 자리하고 있다.
한쪽으로 소라 계단이 있어서 올라 갈 수 있다.
바다가 보인다.
광활함을 느끼기에는 주변의 나무들에 가려서 아쉬움이 남는다.
봉수제도는 고려시대 1149년(고려 의종 3년)에 시작되어서 세종대에 이르러 체제가 정비되었고 1894년(고종 31년) 전화가 보급되면서 폐지 되었다.
연기와 불로 신호를 하는 하는 통신 수단으로 5거 중 평상시는 한 번, 적이 나타나면 두 번, 국경에 접근하면 세 번, 국경을 넘어오면 네 번, 접전을 하면 다섯 번의 봉수를 올렸다.
수원화성의 경우는 봉돈이 5개가 있어서 명확히 알 수 있는데 비하면 복원된 주전봉수대는 어떻게 연기와 불을 올리는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안타까움이 든다.
주전봉수대는 북쪽 유포봉수와는 5,17km, 남쪽 천내봉수와는 6.54km에 이른다.
봉수대 아래로 내려가면 동해의 푸르름을 볼 수 있다.
광할하게 펼쳐진 푸른 색감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곳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면 <고호>의 <만종>같은 맛있는 풍경을 그려낸다.
맛이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면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바다를 바라보면 된다.
해변을 따라서 이어지는 작은 길들도 이곳에서는 가느다란 실타래 같이 보인다.
속속들이 보는 것이 아니라 간략하게 요약된 지도를 보는 셈이다.
사람의 생각은 변한다.
자연의 색채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바다는 색채의 마술사다.
강한 햇살에는 코발트블루의 강렬함으로, 비오는 날은 잿빛의 어두움으로, 파란 가을 하늘 날에는 옥빛 바다를 보여준다.
또 하나의 변신은 윤슬이다.
아침 햇살이 떠오를 때 비춰지는 은빛 반짝임과 달빛의 은은함에 마법에 걸린 듯한 풍경은 잊을 수가 없게 만든다.
하나의 풍경이라는 그림을 그려내는데 윤슬...만한 단어를 생각하면 여행은 또 다른 묘미를 가져다 준다.
파도 소리가 들려주는 교향곡을 들으러 바다 곁으로 가고 싶다.
봉대산 주전봉수대 아래쪽 바닷가에는 주전동이 있다.
어촌마을과 작은 도시가 공존하고 살아가는 곳이다.
7개의 작은 마을이 모여있다.
보밑마을은 하기 해변쪽에 터를 잡았고,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상마을, 그 아래에는 중마을 그리고 아랫마을이 있다.
두 개의 연이어진 포구를 가진 큰불마을을 지나면 언덕위의 번덕마을, 끝자락에 새마을이 있다.
조금 더 세세하게 이야기하면 상마을은 건너각단과 상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큰불마을은 대장국과 큰불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어찌보면 모두 9개의 마을이 서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다.
이렇게 세분화된 어촌은 주전동 만이 가지는 특징이고, 바닷가 마을이라서 배를 타는 일이 많아서인지 안녕을 기원하는 제당이 마을 별로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마을이 되듯이 사람이 엮어진 공동체의 끈이 제당이다.
봉대산 아래 주전동의 가장 남쪽에 보밑마을이 있고 동해 바다의 멋스러움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미역철에는 길가에 널린 미역들로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이 보밑마을이다.
남목에서 마성터널이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있지만 그래도 주전봉수대를 거쳐서 보밑으로 간다.
여행은 둘러가더라도 그곳에 또 다른 생각들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하기해변은 자갈들이 많이 깔려있고 모래가 약간 있는 곳으로 해변의 길이는 짧지만 소나무로 둘러 쌓인 캠핑장이 있어서 휴식하기 좋은 곳이다.
<넘에>라는 이름을 가진 화장실이 있는데 운치가 있다. 이런 곳은 지나치지 않고 볼일을 보는 습관도 생겼다.
<너머에>가 줄어든 말. 남목에서 산넘에 보밑마을이 있는 셈이다.
이제부터는 해안길을 따라서 걷는 여정이다.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바닷 바람이 향기로움으로 다가오는 그런 길이 이곳에 있다.
포구들이 하나 둘 모습을 길을 따라서 볼 수 있다.
하기해변의 끝자락에 까만 색깔의 푸드트럭 한 대가 있다.
늘 그자리에 있다.
바다와 친구다 되고 싶은자도 모른다.
길을 걷는 이들에게 목을 축일 기회를 주는지도 모르겠고....
왼쪽으로 휘어지는 길가에 전형적인 어촌의 한 집이 있다.
집 옆으로 고구마가 심어져 있고 뒷편 작은 동산으로 참나리의 주황 빛깔이 멋스러움을 자아내는 집이다.
해양생태학습장이 있는데, 소라. 전복, 고동, 미역 등을 채집할 수 있고, 맨손잡이 체험장도 마련되어 있다.
큰 돌을 둥그스럼하게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바다 생물과 교감을 할 수 있게 했다.
문은 잠겨 있다.
어민들의 생활 터전 한켠에 만들어진 체험장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위돌 위에 가만히 앉아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싶다.
나의 시선과 바다의 선이 일치되면 고요한 정신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랫마을로 접어들면 <성지방돌>이 있다.
이곳에는 옛 제당의 흔적을 남겨두었는데 주전마을에서 가장 영험하고 신성시 여기던 아랫마을 제당이 있던 장소였다.
주전동에는 2005년 까지 10곳에 걸쳐서 제당이 있었다.
마을별로 동제를 지내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2005년 경로당을 신축하면서 모든 제당의 위패를 경로당 2층에 모시게 되었고 제당들은 사라지게 된다.
그 10곳 제당의 흔적을 이곳에 남겨두었다.
네 개의 돌 기둥은 사람이 서있는 모양이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을 보면 제당의 기와집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뒤로 2014년 대한민국 경관대상 우수상을 받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이런 곳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새마을제당, 큰불마을제당, 번덕마을제당, 동사당터, 학교밑제당, 상리마을제당, 중마을제당, 아랫마을제당, 건너각단제당, 보밑마을(주포)제당.
이름을 기억하고 싶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제당은 그데로 두고 동제만 한 곳에서 행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니면 하나의 제당 정도는 남겨두었으면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지금 이곳은 아랫마을 제당이 있던 곳이다.
거친 바다인 할매를 달래기 위해 할배가 불쑥 바다로 튀어나간 바위 위에 서 있는 모습의 제당이다.
옛 흑백 사진도 기와 지붕만이 보일 정도로 바람을 막기 위해 높이 쌓은 돌담으로 둘러 쌓여진 제당의 모습이다.
전복 모형물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손전화의 힘을 빌려서 지나간 흑백 사진 속의 아랫마을 제당을 그린다.
마을의 일상을 소소하게 바라보던 제당들은 사그라진 추억같이 바다속으로 사라졌다.
하리항은 갈매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고 사진 촬영하기 좋은 곳이다.
그 곁에 큰 해변이 있다라는 의미의 큰불항이 있다.
포구의 멋스러움이 있는 곳으로 비취빛 바다 빛깔의 멋스러움이 있는 곳이다.
금방이라도 빨려들어갈 것 같은 바다의 흡인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포구의 입구에 학교밑 제당터의 표지석이 있고 길다란 철제 솥이 있다.
지금은 낮잠 중이지만 그도 바쁜철이 있다. 멸치가 선창가에 뿌려질 때.
큰불항의 길가에 몽돌여인 <김순연 시인>의 집이 있다.
누가 주전동 좀 사가소...라는 싯귀를 큰 글씨로 만들어 두었다.
그 아래에 시인의 시들이 걸려 있다.
몽돌예찬, 가마우지, 개꿈, 갈매기, 아침 등등
가마우지
어머나, 저 춤사위 한 번 봐라
마을과 너른 바다는 온통
그의 찬란한 날개짓에 눈이 쏠린다.
참 신통하다
날개로 바닷물을 풍덩풍덩 퍼대니
바다가 다 뒤똥거리네
내 목이 길어지네
마을이 술렁거리네
중략... ...
수수한 마음씨를 가지신 분으로 이곳 주전에서 태어나 주전 시인이 되신 분이다.
옥수수가 햇살에 익어가는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렸다.
거친 파도를 견디어내는 바위의 변함 없음에 감사한다는 그 였다.
늘 그 자리에 같은 모양을 자신은 바라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도 했다.
차 한 잔의 여유를 나눌 수 있었던 건 그 분을 만나서 가능한 일이었다.
석가탑 모양을 하고 있는 빨간 등대가 인상적인 주전항으로 간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면 이 색감이 바다 빛깔과 잘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미역, 전복 등의 조형물들이 있어서 잠시 동안의 쉼을 가질 수도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삼층석탑의 지붕돌의 표현도 똑 같이 만들어 두었다.
층급받침도 만들고 안기둥, 바깥기둥도 있는 삼층석탑 등대다.
방파제의 아랫길을 따라서 걸으면 해녀가 물질을 끝내고 돌아오는 맑은 표정의 조형물도 볼 수 있다.
해산물을 많이 채집했는지 얼굴의 표정이 밝다. 물질은 늘 위험이 따른다.
주전은 제주도에서 온 해녀들도 있다.
주전몽돌해변은 동구의 소리 9경 중의 한 곳이다.
바다로 부터 밀려온 파도는 자갈 사이사이를 흐르는 동안 자르르자르르 소리를 낸다.
여운은 지속적으로 남아서 다음에 밀려올 파도를 기다린다.
다가옴과 멀어짐의 소리의 울림은 하나의 울림으로 완성되어서 교향곡의 한 부분이 된다.
수평선 너머 먼바다에서 이름없는 작곡가가 선율을 바다로 보내주는지도 모를 일이다.
몽돌해변에는 조그마한 터널 비닐하우스가 있다.
몽돌 밭에 만들어져 있는데 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생각을 거듭해도 알 수 없어서 물어보았다.
주변으로 고추가 떨어져 있다. 고추를 말리기 위해 만들어진 비닐 터널인 셈이다.
몽돌들이 햇살에 데워져서 그 열기에 고추는 더 잘 마를 것 같다.
바다 내음과 커피를 볶는 향기가 파도소리와 어우러진다.
걸을 때 마다 달라지는 그 느낌은 이곳 주전이 제격인 셈이다.
배고픔이 있다.
그건 냄새가 주는 멋이다.
풍경의 멋과 맛의 멋을 동시에 해결해주는 집이 바닷가에 있다.
청색의 화덕 피자가 있는 가게가 있다. 구워지는 피자의 향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리에 앉으니 바다는 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피자 한 판을 건넨다.
바삭함이 있다고 얘기를 하니 부드럽기도 하다고 바다가 이야기한다.
피곤이 잠시나마 사라진다.
계속 바다와 함께하는 길을 걷는다.
당사마을 담장의 벽화에 용 한마리가 꿈틀거린다.
그 앞에는 용바위가 있다.
방뜸이라고 불리는 용바위는 전설이 내려온다.
옥상황제는 큰뱀과 거북 둘 중 누가 나쁜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땅으로 내려보냈다.
땅으로 내려와도 거북은 등껍질에 나쁜 일들을 감추었다. 이에 큰뱀은 다시 용으로 변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인지 움푹패인 자국들이 바위에 보인다.
작은 섬이지만 이곳에는 해국이 자라고 있다.
바닷가에 자라는 둥근바위솔도 그 품위를 지키려하고 있다.
가을이면 하얀꽃들이 피어서 이 용바위와의 사연을 간직하려는 듯 더 화려함을 뽐내는 꽃이다.
다행히 이곳은 사유지라서 그나마 개체가 유지되고 있다. 길가에 있었다면 벌써 채집을 당해서 사라졌을 꽃이다.
10월경에 이곳에 가면 꽃들의 화려한 군무를 볼 수있다. 용바위의 전설을 보여주려는 듯 거대한 용이 한마리 있다.
이 용도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만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
인공 구조물이 필요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느낌이다.
역사의 잘못된 고증이나 자연속에 인공 구조물은 옷이 맞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당사마을을 뒤로하고 우가마을로 향한다.
위우가에 자리한 포구의 멋스러움이 있다.
물빛이 좋고 그곳을 바라보는 위치도 좋다.
풍경이라는 것은 자연이 그려준 그림이다.
돌담이 연이어져 있는 집안을 둘러본다.
담이 있어도 집 안을 볼 수 있다. 막은 공간이 아니라 열려져 있는 공간이다.
주상절리들이 보인다.
갯봄맞이꽃이 자생한다고 알리는 표지판도 함께 있어서 마음이 흡족해진다.
도로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멋있는 제전마을로 간다.
제전마을은 <딱밭>이라는 지명 유래를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이다.
닥나무(딱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1990년까지만 하더라도 울산 북구의 중심 어항이었다.
암반이 많아서 해조류가 잘 성장해서 소고동, 대청방 등의 이름을 가진 <미역바위>도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해초들이 자라는 바다속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물고기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바닷속을 유영하기도 한다.
해초들이 있는 곳에는 그 앞쪽에 돌들을 갖다 놓아서 마치 바닷속 같은 느낌이 있다.
눈먼 사랑의 배경 제전항...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용왕의 딸인 공주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장어가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용왕에게 공주와 결혼시켜 달라고 애원을 했고, 이 말을 들은 용왕은 다시는 공주를 볼 수 없도록 장어의 눈을 빼라는 벌을 내렸다.
눈이 빠지는 형벌을 받고도 장어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찾아오자 용왕은 태평양 바다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갔다오면 결혼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약속을 받은 장어는 그 날로 태평양 바다로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 갔고, 눈 먼 장어를 위로하려고 제전항으로 많은 장어들이 모여들고 있어서 자어로 이름난 마을이란다.
-강동 사랑길 중에서-
<제전마을 박물관>도 있다.
마을회관 건물은 1989년 3월 26일에 준공했는데 기건물의 이층에 박물관이 있다.
<2017년 울산 민속문화의 해 민속조사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있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16년 주민들의 도움으로 민속조사를 무사히 마쳤고 그 이후에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그 이야기를 <미역바위를 가꾸며 살아가는 울산 구유동 제전마을>
<울산 제전마을 한종문, 박숙자 가족의 살림살이>로 펴냈다는 내용이다.
어느 초등학교에 걸려 있었던 종이 걸려있는데 낡았지만 종소리는 맑다.
<여 사는 사람은 눈교? 어찌 사는교?>라는 글이 눈에 띄인다.
4월에서 5월은 미역을 채취하고 건조하는 시기, 10월에서 12월은 미역바위를 기세작업(돌멘다, 돌깎는다)하는 시기이다.
호미나 실갯대를 이용한다.
미역철에는 모든 생활이 미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기세작업은 날씨의 영향으로 언제 끝날지 그 시기를 추측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주민들은 관광, 세시풍속, 개인 일정들을 자제한다.
2층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유리창에 위치를 표시해 두어서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해녀의 집이 있고, 그 옆으로 미역건조장이 있으며, 등대라고 표시된 곳에는 빨간 등대가 방파제 옆으로 자리하고 있다.
장어는 연중 어획이 가능하지만 5월말부터 어획을 시작하여 추석을 전후로 통발을 철수한다.
장어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새벽 2시경에 출항을 하고, 미끼는 계절별로 달리 사용을 하는데 박물관에는 긴 통발과 장어 주낙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마을이 왜 장어 마을이라고 하는 줄 아나?>
회사에 취직을 쉽게 할 무렵에는 한 배에 5명 넘게 타는데 사람이 없어서 어구도 큰것을 할 수 없었다.
장어 통발을 처음에 300개, 500개 이렇게 하니까 배있는 사람은 다 하고 싶어 했고 이렇게 해서 장어 잡는 마을이 되었다.
<맨날 하루 나가서 잡아와가 그 날 그거 가지고 장사하고 그러면 기름기가 안빠졌거든 그라이 고기 맛이 좋제>
그래서 장어 마을로 소문이 난 제전마을이다.
2016년 미역 채취 일정을 볼 수 있다.
4월 9일-첫날은 단치암과 진창 한 두 곳에서 채취작업
4월 14일-7개의 모든 바위에서 채취작업
4월 16일- 오전에 비가 내려거 미역 채집 중단
5월 3일-풍랑이 불어서 미역 채취가 이루어지지 않음
5월 7일-갑자기 날씨가 좋아져서 늦게 미역 채취 시작
미역이 걸려 있고, 해녀 잠수복도 걸려있다.
물버선, 오리발, 호미, 납벨트...기세호미(찍호미), 미역낫 등등
전시되어진 것들이 마을의 흔적들을 찾아나가는 것들이다.
마을마다 이런 작은 박물관들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길게 연이어진 동해의 포구를 따라서 떠난 여행은 이곳 제전마을에서 끝맺음을 한다.
여행은 삶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떠난 자 또한 그 삶의 한 부분이다.
결국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도 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목적지가 어디라고 설정을 할 필요성도 없고 그냥 떠나면 되는 것이 여행이다.
감성으로 떠나는 여행의 마지막은 문득 뒤돌아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