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목)/블라디보스톡 장로회 신학교(정호상 목사님)
모스코바와 시간도 7시간이나 다른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9시간이나 날라서 도착하니 이곳 시간으로 12시 15분이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출구로 나오는데
고려항공 인공기가 그려진 북한 비행기가 보이고 그 비행기에서 많은 짐들을 실어내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나오니 김건수 목사님과 정호상 목사님 두 분이 마중 나오셨고
김건수 목사님이 장미 꽃 송이를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김건수 목사님은 교회로 돌아가시고 정호상 목사님 차로 신학교로 가는데
운전석이 오른쪽으로 된 일본 차로 이곳에는 두 종류의 차들이 다니는데
나라에서는 오른 쪽 운전석 차를 쓰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헌차, 한국 차 등이 많이 달리고 있다.
이곳 사람들이 한국을 아주 좋아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에 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도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은 연해주의 수도로 연해주는 남한의 두 배 정도인데
일제시대에 한국의 독립투사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농지를 개발하여
잘 사는 많은 조선 사람들을 스탈린이 강제로 허허벌판 카작스탄으로 내다버린
비극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특집 드라마 '까레이스키'라는 슬픈 역사 드라마가 있다.
옛날에는 한국 사람들이 이곳을 시베리아라고 불렀던 곳이고
이곳에 1920년도에 시베리아 노회로 장로교 노회가 있었는데 90%가 연해주 쪽 교회였다고 한다.
불라디보스톡에는 한국인은 300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러시아가 외국 사람들에게 까다롭게 굴어 이곳에 정착해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사업하는 사람들만 살므로 숫자가 적은 것이다.
그 300명의 숫자 속에 선교사 가정이 100명 정도라고 하니
한국인 선교사가 어디나 참 많이 퍼져서 선교하고 있다.
이곳은 북한은 기차로도 갈 수가 있는 지역이고 남한과는 2시간의 거리이다.
북한이 가족은 인질로 북한에 두고 성분이 좋은 사람들을 내보내 외화벌이를 시키는데
하루에 30불을 벌어 나라에 내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게 한다고 한다.
하루에 30불을 벌기가 너무 힘들고 또 잘 버는 사람은
나라에 바치고 자기 수중에 넣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북한 사람들은 체격이 작고 초라해서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참 가슴 아프다.
본래 북한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잘 생겼는데 말이다.
모스코바에서 아주 예쁘게 생긴 아내와 자녀를 둔 일을 잘하는 탈북자가 있었는데
고려인이 시기해서 그를 북한 대사관에 고발해서 북한 대사관이 러시아 경찰에게 돈을 주고
러시아 경찰이 조사할 것이 있다고 그를 잡아 북한에 넘겨서
그의 아내와 자녀도 잡혀 가게 되어 김 목사님이 한국 대사관에 연락하니
자기들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해서 청와대에 이메일을 보내니
그 후에 즉시 한국에서 그 아내와 자녀를 한국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아내를 우리 목사님도 보았는데 아주 예쁘고 착하게 생겼는데
남편이 잡혀가서 너무 가슴 아프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톡 신학교는 이곳 한 곳으로 교수님은 한국과 외국에서 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주로 이곳 선교사 목사님들이 돌아가며 하시는데 강사비는 없다고 하신다.
본래는 초교파로 시작했지만 러시아에서 다 쫓아내려고 할 때가 있어서
뿌리가 있는 신학교로 만들기 위해 장로교 신학교로 명명했고 학교 운영비는
한국의 새문안 교회가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고 한다.
재작년 겨울에 남편이 김바울 목사님 소개로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큰 길에 차를 세워놓고 발이 푹푹 빠지면서 걸어서 언덕을 올라
학교 기숙사에 왔다고 추억을 이야기 하다.
정 목사님이 많은 강사 목사님들을 모시느라고 그때의 사건은 기억하지 못하시면서
남편이 강의 한 요한복음은 기억하고 계셨다.
정 목사님은 1991년에 러시아가 문을 열기시작하자마자 이곳에 들어오셔서
지금까지 계시는데 처음에는 러시아인들을 선교하다가
3년 전부터 이곳 신학교를 맡아달라는 새문안 교회의 청을 받아 맡게 되었고
주일에는 한국인 교회 목회도 하고 계신다.
이곳 신학교는 이곳 선교사님들이 돌아가면서 학장으로 책임을 맡고 있는
참으로 특이한 선교사님들 공동으로 운영하는 신학교이다.
이 학교는 세례교인으로 목사님의 추천을 받아 신학교에 들어 올수가 있는데
들어오면 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으로 숙식을 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공부를 하고 금요일 오후에 자기가 일하는 교회로 돌아가 봉사하고
월요일에 다시 돌아와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이곳 신학교에서 공부한 목사들이 성령 충만을 받아
이 러시아를 복음화하므로 러시아가 한국의 진정한 우방이 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한 가족이니
세계에 참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이다.
학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가파른 층계를 올라가
삼층에 강사님 숙소가 있는데 샤워장은 없는 화장실이 있는 한 칸의 좁은 방이다.
의자를 펴서 침대를 만들었는데 부부 강사님들이 오시므로
최근에 이 의자를 들여놓았다고 하시다.
의자를 침대로 펴고 가지고 온 짐 보따리를 펴니 방은 더욱 좁아졌다.
남편은 이것저것을 신학생들에게 주느라고 신이 났다.
오후 시간에 강의를 하는데 먼 길을 달려 왔는데도
남편은 성령 충만으로 강의를 하고 듣는 신학생들도 진지하게 듣고 은혜를 받는다.
사례비도 없는 이 강의를 전하기 위해 남편은 무거운 선물보따리를 들고
좁은 방에서 샤워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너무나 신이 나서 쉬지도 않고 전하니 통역하는 아주머니가 힘 들어 하신다.
그 아주머니는 고려인으로 남편이 중풍으로 꼼짝을 못하시어
이곳 신학교 기숙사에서 남편 병간호를 하며 일하고 계신다.
다른 곳에 통역으로 일할 수도 있는데 이곳에 일하도록 하나님께서 붙들어 두시는 것이다.
오후 강의를 마치고 정 목사님댁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는데
7층 아파트에 방 한 칸 인데 침실이 막혀있지도 않고
벽은 책장이고 맡 붙은 두 개의 침대에 하나는 딸이 쓰고
하나는 목사님 내외분이 쓰신다.
아들은 연대를 졸업하고 해군장교로 근무하다가
지금 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딸은 대학 4학년을 다니다가
잠시 이곳 현대 호텔에 비서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사모님은 이곳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시면서
대학교에서 학국어 교수로 일하고 돈을 벌어 학비를 내신다고 하시는데 젊고 아름답다.
목사님 아파트 높은 창문에 커튼을 치지 않아 해가 밝게 비치고
음식의 열기 때문에 방이 아주 더웠다.
부엌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경치에
아래에는 아주 웅장한 집들로 모두 4,5층의 고층 주택들로 부촌이고 아름답다.
이 땅에서는 특권층으로 저렇게 누리고 살지만
내세에는 어떻게 살 것인지 저들에게도 이 좋은 복음이 들어가야 하는데 하는 불쌍한 마음이 든다.
사모님이 큰 게, 튀긴 셀몬, 은대구 국으로 정성을 다해
진수성찬으로 준비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고
딸도 같이 식사를 했는데 저들이 어릴 때에 이 러시아에 들어와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을 생각하니 저렇게 잘 자라서 어엿한 사회인이 된것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저녁식사를 너무 잘하면 더 피곤하다. 오주 저녁 강의에 처음에는 잘 듣다가 조니
사모님이 올라가시라고 한다.
먼저 올라와서 세수를 하고 잘 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곧 올라와서 어떤 할머니께서 은혜받고 감사하다고 1,000루불을 주었다고 한다.
예전 주일에 이곳 러시아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사례비를 1,000루불을 받아
너무나 감사해서 그 돈을 쓰지 않고 이렇게 잘 보관하고 있다고 보여주었더니
어떤 할머니께서 1,000루불을 또 준 것이다.
러시아에 16차례로 방문하며 많은 선교비를 주고 선물도 갖다 주었지만
사례비를 이곳 교회와 신학생에게 이렇게 받은 것이 처음으로
너무나 신기하고 잊지 못하고 감사한 것이다.
너무나 피곤하여 밤에 잘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