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 가사문화권의 인물
1 눌재 박상 (訥齋 朴祥, 1474 ∼ 1530)
2 신재 최산두 (新齋 崔山斗 1483∼1536)
3 면앙정 송순 (仰亭 宋純, 1493 ∼ 1583)
4 석천 임억령 (石川 林億齡, 1496 ∼ 1569)
5 사촌 김윤제 (沙村 金允悌, 1501 ∼ 1573)
6 소쇄공 양산보 (瀟灑公 梁山甫, 1503 ~ 1558)
7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1510 ∼ 1560)
8 미암 유희춘 (眉巖 柳希春 1513 ∼ 1577)
9 서하당 김성원 (金成遠, 1525 ∼ 1597)
10 고봉 기대승 (高峯 奇大升, 1527 ∼ 1572)
11 제봉 고경명 (霽峰 高敬命, 1533 ∼ 1592)
12 송강 정철 (松江 鄭澈, 1536 ∼ 1593)
13 충장공 김덕령 (忠壯公 金德齡 1567 ∼ 1596)
14 석주 권필 (石洲 權, 1569 ∼ 1612)
15 은봉 안방준 (隱峰 安邦俊 1573 ∼ 1654)
1 눌재 박상 (訥齋 朴祥, 1474 ∼ 1530)
눌재의 생애는 호남 사림의 시조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청렴 결백하고 강직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광주의 서쪽 방하동에서 태어난 그는 22세에 생원에 합격하고 28살에 중정시 을과에서 오인으로 합격하여 교서관 정자가 되고 벼슬을 시작한다. 승무원 교검과 시강원 사서등을 하다가 병조좌랑을 거쳐 연산군 11년인 32세에는 전라도사가 되었다.
그 해에 나주에는 천민이었던 우부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딸이 연산군의 후궁임을 내세워 수탈과 횡포가 심해도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었다. 다만 박상이 도사가 되어 그를 엄죄하였는데 매를 맞아 죽고 말았다. 스스로의 죄를 인정한 그는 화를 당할 것을 각오하고 서울로 가는데 마침 중종반정이 일어나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후 홍문관 수찬, 응교등을 역임하였으며 담양부사가 되었다. 석천 임억령, 면앙정 송순등을 가르쳤다. 42세가 되던해인 1515년에 청백리에 제수되었고 그해 8월에는 순창군수 김정과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폐비가 된 신씨 부인의 복위를 바라는 상소를 작성하고 폐비에 연루된 당시의 반정 공신인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등을 처벌하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공신의 힘이 강해서 그는 백대의 곤장과 함께 귀양에 처해졌다.
귀양을 간 그였지만 곧 죄가 풀리고 다시 순천부사등을 거쳤다.
그가 의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쓴 상소문은 이후 사림과 훈구대신과의 치열한 공방을 불러 일으키다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그로 인해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지만 당시 그는 집에 상을 당하고 상복을 입는 중이여서 화를 피했다.
그후 충주목사를 비롯하여 나주목사를 지내다 고향으로 돌아와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현재 눌재의 사당은 광산구 소촌동에 송호영당이라는 곳에 있으며, 전라북도 순창군 강천산의 강천사의 맞은 편에는 자신의 벼슬과 목숨을 걸고 폐비신씨의 복위소를 올린 삼인(눌재, 충암 김정, 석헌 유옥)을 기념한 삼인대라는 비각이 있다. 그의 후손으로 용아 박용철이 있다.
박상의 생을 보면 정의를 위한 맑고 고운 영혼을 간직한 강한 선비의 자취를 더듬을수 있다. 그로부터 호남 사림의 정신이 바로서게 되었으며 그 후학들인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등이 승계를 하게 된 것이다.
2 신재 최산두 (新齋 崔山斗 1483∼1536)
성종 14년인 1483년 광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소양이 빼어났으며 학사대에서 10년간의 공부를 계기로 1504년에 진사가 되고 1513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당대의 학자들과 사귀면서 실력을 쌓아 홍문관을 거쳐 임금의 특명으로 공부를 하는 호당에 올랐던 인물이다.
바른 생각을 가진 그는 부패한 훈구파들을 비판하였는데 정암 조광조등을 비롯한 신진 사림과 뜻을 같이 하였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화순동복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동복에서는 그의 명성을 들은 많은 호남의 학자들이 그를 찾아 학문에 힘썼는데 그중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등을 꼽을수 있다. 그리고 동복에 있는 적벽이라고 불리는 곳의 이름 또한 그가 제자들과 거닐면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 온다.
동복의 귀양 생활이 15년만에 끝났지만 아쉽게도 귀양이 끝난지 3년만인 53세에 세상을 떴다. 그의 사후에 광양읍 우산리에 봉양사가 세워져 그의 위패를 모셨으며 화순 동복의 도원서원에도 배향되어 있다.
3 면앙정 송순 (仰亭 宋純, 1493 ∼ 1583)
조선 중기의 문신, 면앙정가의 창설자, 강호가도의 선구자. 본관은 신평. 자는 수초(守初)또는 성지(誠之), 호는 면앙정 또는 기촌(企村)이며 시호는 숙정, 본관은 신평이다. 1519년(중종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권자부정자를 시작으로 다양한 벼슬을 하였다.
1533년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 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 충청도 어사 등을 지냈고, 그 뒤 경상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 전라도 관찰사로 피출되었다. 1547년에는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고 1550년 대사헌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사론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 선산도호부사가 되고, 이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가 부를, 김인후, 임억령, 박순, 고경명 등이 시를 지었다. 이 후 70세에 기로소에 들고, 1568년 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과 의정부 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과 송세림에게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 성수침, 나세찬, 이황, 박우, 정만종, 송세형, 홍섬, 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인사로는 김인후, 임형수, 노진, 박순,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때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제일의 가단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이황, 소세양, 윤두수, 양산보, 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짓기를 즐겼는데, 특히 그는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등 수많은 한시(총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단가(시조) 20여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이 있다. 담양 산사(山詞)에 배향되었다.
송순은 양산보의 10년 년상으로 외종형인 동시에 벗으로서 그리고 김인후의 스승으로서 양산보와 소쇄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소쇄원과 가까이 제월리에 면앙정을 세운 경험, 한양에 있는 정원과 금원에 대한 견문, 진문사로 명경 방문시 얻은 견문, 전국각지에 있는 수많은 정사를 방문하고 시문을 지은 경험 등이 있어,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소쇄원 조영을 물심양면으로 크게 도왔을 것이다.
4 석천 임억령 (石川 林億齡, 1496 ∼ 1569)
눌재 박상에게서 수학을 하였던 임억령은 1496년 태어나 1568년 생을 마감한 16세기 민중의 정신적 받침목이 되었던 인물이다.
정치에 아첨하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연과 벗하면서 시문과 학문에 진력, 인격과 덕망을 쌓아 忠·孝·悌·信(충·효·제·신) 등 윤리도덕이 충만했던 고결한 정신의 선비였다.
조선 中·仁·明宗(중·인·명종)시대 석천 임억령을 선비중 선비로 꼽는 이유는 벼슬을 버리고 성산계곡에 은둔, 처사로 들어와서 선비정신을 그 스스로 실천에 옮겼을 뿐만 아니라 시(詩)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선생의 인생 철학, 사상과 문학이 다른 선비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석천은 중종 11년 진사시험에 급제하고 9년뒤 문과에 등제한 후 玉堂, 의정부 舍人 등 관직을 두루 거친다. 1540년에는 전서로 승진했고 그 이듬해 사간원, 대사헌을 두루 거치며 백성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강력히 주청하는 정치론을 펴기도 한다.
생활근거를 고향에 옮긴 후에 광주, 나주 출신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앵팽손, 나세찬, 김인후, 임형수, 기대승, 정철, 고경명 등과 각별하게 지냈다. 이들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품어낸 고결한 인품과 예술사상은 석천집 11권에 전하고 있다.
석천의 시 세계는 대체로 사실적이기보다는 낭만적 경향이 농후하며, 시 형식은 칠언시 보다는 오언시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율시보다는 절구쪽이 훨씬 많다. 일반적으로 오언시보다는 칠언시가 복잡하며 까다롭다. 석천이 오언시 형식을 선호하고 특히 칠언율시를 기피한 것은 시 경향 형식의 구애를 가능한 탈피하고 자연스러움의 미를 지향하려는 성격 때문으로 여겨진다.
식영정은 그가 은거하면서 시작에 전념할수 있는 좋은 처소로서 역할을 했으며, 그곳에서의 시작활동을 본 받은 송강 정철이 한글로 된 성산별곡을 지을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5 사촌 김윤제 (沙村 金允悌, 1501 ∼ 1573)
김윤제는 연산군 7년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로 恭老, 호를 사촌 沙村이라 했으며 김덕령金德齡 의 증조부다. 1528(중종 23년) 진사가 되고 1532년(인종 1년) 중직대부, 승문교리 겸 춘추관, 배주관, 1554년(명종 9년) 에 중정대부,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고, 나주목사를 비롯하여 13개 고을의 성주를 지냈다.
김윤제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인 충효리에 환벽당을 짓고 아름다운 산수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며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철과 김성원, 김덕령이다. 특히 그는 어린 정철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의지할 데 없는 그를 외손녀 사위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학문에 힘쓰고 이 지방의 문인들로부터 공부를 할수 있도록 하였으며, 관계에 진출하도록 뒤를 돌보아 주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아쉽게도 사촌 김윤제에 관한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다.
6. 소쇄공 양산보 (瀟灑公 梁山甫, 1503 ~ 1558)
연산군9년 ∼ 선조10년(1503 ∼ 1557)때의 선비이다. 양산보의 자는 언진(彦眞), 호는 소쇄공(瀟灑公 또는 처사공 處士公)이라 했으며, 연산군 9년(1503) 양사원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산보가 벼슬을 한 바가 없어 부르는데 처사는 세상살이의 표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사는 벼슬할 것을 권하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깨끗한 생활을 하는 선비를 말하며 아무나 붙일 수 없는 호이다.
양산보는 어려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 ∼1519) 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1519년 17세때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어린 나이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다. 당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신진사류들과 함께 정치개혁을 시도하던 조광조는 기묘사화(1519)로 남곤 등 훈구파의 대신들에게 몰려 화순 능주로 유배되었다. 이때 양산보는 귀양가는 스승을 모시고 낙향했으나 스승인 조광조가 같은 해 겨울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뜨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아 벼슬길의 무상함을 깨닫고 세속적인 뜻을 버린 채 산수경치가 뛰어난 고향에 은둔하게 되었다.
이때 양산보의 나이 17세였으며 창암촌의 산기슭에 소쇄원을 꾸미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성리학에 몰두하게 되는데, 특히 송의 주무숙(周茂淑)을 사숙했다. 양산보의 학문적 활동은 뚜렷이 알 수 없으나 그가 지은「효부(孝賦)」와 「애일가(愛日歌)」에서는 그의 문학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7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1510 ∼ 1560)
하서 김인후는 자가 후지, 호는 하서, 이름은 인후이며 본관은 울산이다.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도학자로서 학문과 덕행이 높았다.
1510년 7월 19일 장성현 대맥동(현 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일찍부터 영특하여 학문에 뛰어났으며 6,7세부터 시를 지었다.
10살때는 호남의 관찰사로 와있던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우기도 하였고, 18세되던 해 화순 동복에 유배와 있던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이듬해 성균관에서 실시한 시험에 장원하고 몇 달을 머물렀다. 이황과의 교유를 이시기에 시작하며 31세에는 별시 문과에 합격하고 연이어 승무원 부정자, 홍문관 박사겸 세자 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이때 세자인 인종의 학문을 가르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옥과 현감으로 재임시 인종이 승하를 하자 이를 슬퍼하고 이후 벼슬에 뜻을 저버리고 학문에 맹진을 하였다. 이후 고봉과 더불어 태극도설을 강론하고 일재 이항과도 태극에 관한 논쟁을 하였다.
학문이 깊어서 그는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인물로 현재는 장성의 필암서원에 그의 유품과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그는 인도정신의 실천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 도학자이자 성리학자이며, 호남 유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다. 그의 학맥을 이어 고봉 기대승은 그 유명한 퇴계 이황과의 사단 칠정론의 논쟁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소쇄원 양산보와 절친하게 지냈었는데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소쇄원의 경관 48가지를 시로 남겨 소쇄원의 옛 경관을 유추하는데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8 미암 유희춘 (眉巖 柳希春 1513 ∼ 1577)
미암 유희춘은 1513(중종8년)∼1577(선조10년)의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으로 해남 출신이다. 신재 최산두와 모재 김안국의 문인으로 김인후와 사돈지간이다.
1538년 중종 3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수찬·정언등을 역임하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어 19년간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여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어 직강, 응교, 교리등을 역임하며 이어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등을 지냈다. 1575년 예조와 공조 참판을 거쳐 이조 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여 낙향하였다. 경전에 밝았던 유학자로 시강원설서 재임시에는 나중에 인종이 된 세자를 가르쳤었다. 소탈한 성품의 선비로 학문과 도리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평가된 인물이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 續蒙求》·《역대요록 歷代要錄》·《속휘변 續諱辨》·《천해록 川海錄》·《헌근록 獻芹錄》·《주자어류전해 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 詩書釋義》·《완심도 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 國朝儒先錄》이 있다.
특히 미암일기는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선조 즉위시부터 10년간의 역사적 사실부터 개인의 대소사까지를 기록한 한 개인의 일기이지만 이를 통해 잃어버린 선조 재임 초기의 역사를 다시 복원할수 있었던 귀중한 사료이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의암서원에 배향되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담양 모현관에 그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9 서하당 김성원 (金成遠, 1525 ∼ 1597)
자는 서하당이다. 임억령의 사위이고 김윤제의 문하에서 정철과 함께 공부하였다.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은 김성원은 정송강의 명성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또한 학덕도 훌륭하거니와 정유재란 때 늙은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왜적의 손에 죽은 효열의 인물이기도 하다. 송강이 성산별곡의 서두에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했던 그 주인이 바로 김성원이다.
김성원은 자를 강숙(剛淑), 호를 서하당(捿霞堂) 또는 인제(忍薺) 라 했으며 「광주읍지」에는 김성원(金聲遠) 이라 했다. 1525년(중종 20년) 12월 17일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리공 김홍익(金弘翼) 이었으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 장사랑(將仕郞) 최계종(崔溪宗)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찬성함(贊成咸)이다.
1531년 7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당시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충주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8세 때부터 당숙인 사촌 김윤제에게서 글을 배워 34세 때에 사마시에 올랐다. (『광주읍지』에는 음보(음보)로 생원이 되었고 찰방(찰방)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동복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자 각자의 의병들과 제휴, 현민들을 보호했고 1597년 정유재란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성모산성에 피란하여 적병을 만나자 어머니의 신변을 보호하다가 함께 피살되었다. 뒤에 그 산을 모호산(母護山 : 지금의 모후산母后山)이라 부른다.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하여 식영정을 지었고, 자신의 호를 따 집이름을 부른 서하당을 지었다. 이러한 것이 토대가 되어 성산가단의 터를 만든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시작으로 풍류를 즐겼는데, 특히 거문고의 명수였다고 한다. 그의 호를 딴 서하당 건물이 1995년에 옛 모습을 찾아 복원되었다.
10 고봉 기대승 (高峯 奇大升, 1527 ∼ 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 호는 고봉 또는 존재, 아버지는 진이고, 어머니는 강영수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존은 그의 효부이다. 1549년(명종4년) 사마시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다양한 벼슬과 삭직, 복귀를 반복하였다.
1572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에서 객사하였다.
이처럼 그의 관로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이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1533년 중종 28년 계사 7세 비로소 학업을 시작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정좌하고 암송하여 읽기를 쉬지 않았다 한다. 사람들이 혹 너무 열심히 하느라 힘들겠다고 위로라도 하면 ""나는 이 공부가 좋아서 한다."" 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1588년 명종 13년 무오 31세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 이황 등과 만나 태극설을 논한바 있고, 정지훈의 천명도서를 얻어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논변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에 반대하고 주정설을 주장하였으며 주기설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론과 맞섰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였고 정치적인 식견은 명종과 선조 왕에 대한 경연강론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을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 숭례론, 언로통생론으로 분류된다. 그는 학행이 겸비된 사유로서 학문에 있어서는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지치주의적인 탁견을 나타내었다. 그의 시호는 문헌으로 광주의 월봉서원의 제향되었다.
11 제봉 고경명 (霽峰 高敬命, 1533 ∼ 1592)
젊은 의병 피끓게 한 구국 출사표, 고경명(고경명 1533-1592)은 조선중기의 문인, 의병장, 자는 이순, 호는 제봉·태헌, 본관은 장흥, 광주 출생이다.
1552년(명종7년) 사마시에 제 1위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을 하고, 곧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그 뒤 형조좌랑등을 거쳐 사가독서를 하였다.
1563년에 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인순왕후의 의숙인 이조판서 이양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몰래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파면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고전을 탐독하거나 자연과 벗삼아 산수를 유람하면서 『유서석록』을 저술하였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순의 나이에 문관이었던 그는 붓을 던지고 전라좌도 의병대장이 됭 의병 6천명을 이끌고 금산에 침투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나 이름을 떨쳤고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리 어른스러워, 백인걸이 남평현감으로 있을 때 그를 보고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사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종, 광주의 포충사, 금산의 성곡서원 종용사, 순창의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무등산기행문인 『유서석록』,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 正氣錄』이 있다. 시호는 충렬이다.
12 송강 정철 (松江 鄭澈, 1536 ∼ 1593)
정철(중종31년-선조26년)은 조선조 선조 때의 명신·문인,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 본관은 연일(延日), 판관 유심(惟沈)의 아들. 서울 출생. 어려서 담양 창평땅에서 김윤제(金允悌)·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에게 배우고 1562년(명종17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1567년(명종22년) 이이(李珥)와 같이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그때는 이미 동·서의 당쟁이 노골화하던 때라 정철은 어느 틈에 서인의 거두가 되어 동인 이발(李潑) 일파와 맞서서 싸웠다. 1580년(선조13년), 마침내 반대당에게 밀려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가 조용히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벗삼아 지냈다. 이듬해 다시 조정에 돌아왔으나 동인들의 세력이 굳어져 있어 관직을 사퇴하고 담양 창평(昌平)에 물러가 있었다.
1589년(선조22년) 다시 부름을 받아 우의정에 올랐으나, 얼마후 결국 동인에게 밀려나, 명천(明川)·진주(晋州)·강계(江界) 등지로 귀양을 다니고,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귀향에서 풀려나와 평양(平壤)에서 임금을 맞았다.
그 뒤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임금과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하다가 강화(江華)에서 병사했다. 본래 성질이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화(黨禍)를 입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었으니,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창평의 성산(星山) 기슭에 들어가 지낼 때 지은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을 위시하여 우리말체로 된 수많은 가사(歌辭)들은 국문학사상의 일품들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가사로써는 관동별곡·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성산별곡·장진주사(將進酒辭), 시조 70여수가 있고, 그 밖의 유고로써 송강가사(松江歌辭)가 있다.
1536년(중종(中宗)3년) - 1539년(선조(宣祖)26년) 송강(松江)은 1535년(중종(中宗)31년)에 서울 장의동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집안은 큰 누이가 계림군 유(桂林君 : 성종(成宗)의 셋째아들인 계성군의 양아들 인종(仁宗)의 사촌)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어린시절 왕궁(王宮)을 자주 드나들며 뒤에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명종(明宗)이 될 경원대군(慶原大君)과 친숙하게 지내기도 한 이름난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10세 되던 해인 1545년(명종(明宗)즉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집안이 풍지박산된다. 을사사화란 인종(仁宗)이 왕(王)이 되자 인종(仁宗)의 외삼촌인 윤임(尹任)이 세도(勢道)를 부리다가 8개월 만에 죽고 명종(明宗)이 왕(王)이 되자 이번엔 명종(明宗)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이 세력을 얻어 윤임(尹任)일파를 역모죄로 몰아 귀양보내고 죽인 사건이다. 그런데 이때 그의 매부인 계림군(桂林君)이 역모와 관련이 있다하여 무고하게 죽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정철(鄭澈)의 집안에도 화가 미치어 맏형은 죽고 아버지는 관북지방인 청평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5년간을 어린 정철(鄭澈)은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다니느라 생활의 안정은 물론 공부할 기회마저 잃었던 것이다.
13 충장공 김덕령 (忠壯公 金德齡 1567 ∼ 1596)
충장공 세하는 것으로 그의 인생 역정은 대단했다.
김덕령은 어려서부터 형 덕홍과 함께 수학하였다. 1592년 25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킨 형 덕홍을 따라 전주까지 간다. 그러나 전시 상황은 김덕령이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여 왜적과 싸울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명나라에 의해 일방적으로 왜와 화의가 진행돼 급기야는 명의 주장으로 전투 중지령이 내려져 많은 의병이 정세만 관망하고 있었다. 이때 김덕령은 지주에서 전쟁 준비를 마치고 싸우겠다고 요청을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청양·대흥 등지를 함락시키고 덕산까지 침입, 세력이 점점 커지자 권율이 토벌군을 거느리고 이산으로 향하면서 김덕령에게는 영남에 있는 항복한 왜군을 이끌고 오게 했다.
김덕령은 저간의 사정을 모른채 권율의 명을 받고 진압을 위해 운봉에 갔으나 이미 진압된 다음이었다. 이때 김덕령은 권율에게 고향에 가겠다는 뜻을 알렸으나 허락을 얻지 못해 진주로 다시 돌아가 있었는데 영문을 모른채 권율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권율이 이몽학의 진중에서 김덕령이 관련되었다는 문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김덕령은 억울하게 잡혀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형장 아래서 29세라는 나이에 죽고 말았다.
14 석주 권필 (石洲 權, 1569 ∼ 1612)
권필의 자는 여장(汝章)이고 호는 석주(石洲)이다.
서울 마포에서 태어난 그가 이 지역 인물처럼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송강 정철의 제자인 탓도 있고 호남지방을 3차에 걸쳐 방랑을 하였으며, 충장공 김덕령의 취시가에 화답을 한 것이 인구에 회자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석주와 교유했던 인물로는 동악 이안눌과 허균, 조위한, 임권, 차천로, 강항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의기가 곧고 시문에 능했던 이들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이 빼어난 석주는 동몽교관 등의 벼슬을 하기도 했지만 그가 43살 되던 해에 임숙영이란 이가 과거 시험에 급제를 했는데 시의 내용이 당시의 정치상을 풍자한 것이라 하여 급제가 취소되었다고 하자 그 소식을 듣고 임숙영을 위로하는 시를 지었다가 발각되어 심한 매를 맞고 귀양 가는 도중 친구가 건네준 위로주를 마시며 죽었다고 한다.
15 은봉 안방준 (隱峰 安邦俊 1573 ∼ 1654)
안방준은 조선이 일본과 청국으로부터 각각 침략을 당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의 난세를 살면서, 도학과 절의 또는 충절을 지상으로 여겼던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안방준의 본관은 죽산, 자는 사언, 호는 은봉 또는 우산이요, 시호는 문강이다. 그는 1573년 11월 20일 보성 오야리(현재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첨지중추부사인 안중관과 진원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뒤에 숙부인 안중돈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안방준은 열한살에 박광전(竹川 朴光前에, 1526 - 1579)에게서 수학하였고, 열네살에는 매부인 박종정(朴宗挺 蘭溪)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열아홉살 때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 - 1598)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이해에 '이대원전'을 집필하였다.
스물이 되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 선생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6년 12월 '진주서사'를 저술하여 김천일 장군 등 여러 의장들이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안방준은 임진과 병자의 양란을 생존시에 직접 겪었던 인물이며, 그의 관심은 도학과 절의에 있었다는 것이 그의 저술을 통하여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에 대하여 송시열은 ""무릇 그의 저서는 충효를 말하고 윤강을 밝히며, 사우를 높이고 사정을 분별하며, 도학을 숭상하고 억울함과 잘못됨을 밝히어 모두 절의를 권장하는 글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15세때에 지은 '이대원전'은 일찍부터 그의 학문적인 정열이 충절의 기상을 표장하는 데 기울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대원전'의 내용은 녹도만호였던 이대원이 왜적과 싸워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의 기록이다.
안방준의 저술의 대부분은 이른바 '사림'정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도학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여 분발, 순절한 숱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으로 일관하고 이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신과 한말의 의병운동과 이 정신적 일맥들이 일관된 호남의 학풍으로 생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곧 안방준의 사상이 갖고 있는 의의라 할 수 있다.
[출처 : 무등산권 문화유산 해설 http://tourism.dkc.ac.kr/htm/tour/namdo/index.html]
[참고]
[가사문화권의 주요 정자]
1 독수정 원림
2 소쇄원
3 취가정
4 환벽당
5 가사문학관
6 식영정
7 풍암정
8 수남학구당
9 관수정
10 동강조대
11 몽한각
12 상월정
13 모현관과 연계정
14 송강정
15 면앙정
|
첫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등록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