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ㆍ충남의 양반문화 기행
정리: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1) 송시열(宋時烈, 1607년 음력 11월 12일 ~ 1689년 음력 7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이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했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예송 논쟁 당시 서인의 이론가였으며,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지정하는 문제에 연루되어 사사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회 이상 언급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송갑조, 김장생, 김집의 문인이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해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했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로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조선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송자대전]으로 간행된다.
우암사적공원-남간정사(南澗精舍) 대전시 대덕구 비래동의 낮은 야산 기슭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자리해 있는 남간정사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지은 것이다. 우암은 소제동에 살 때 서재를 짓고 능인암이라 하여 학문을 연마하였다. 숙종 9년(1683) 능인암 아래에 이 건물을 지었는데, 많은 제자를 기르고 그의 학문을 대성한 유서깊은 곳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편은 앞뒤 통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오른편 뒷쪽 1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 1칸은 마루보다 높은 누를 만들어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건축되었다.
2) 동춘당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위치해 있다. 보물 제209호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別堂)이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평면으로는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앞면·옆면·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들어열개문을 달아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차별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 또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받침은 4각형의 키가 높은 돌을 사용했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 건물은 조선(朝鮮) 효종(孝宗) 때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別堂)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표본으로 들 수 있으나,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과히 크지 않다. 오른쪽 4칸이 대청이 되고 왼쪽 2칸이 온돌방인데, 전면에는 쪽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의 벽 아래 부분에는 머름을 대었다. 주춧돌은 사각형의 귀가 높은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주택(住宅) 건물(建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樣式)이다.
3) 도산서원(道山書院) 대전시 서구 탄방동에 위치해 있다. 만회 권득기와 그의 아들 탄옹 권시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권득기는 41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냈으며,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도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권시도 학문이 뛰어나 대군사부·한성부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에서 학문에 힘썼다. 이 서원은 조선 숙종 19년(1693)에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숙종 37년(1711)에 나라에서 내린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당 3칸·묘문 3칸·강당 4칸·서재 3칸·남재 4칸·전사청 3칸 등 모두 23칸 규모를 가진 서원이었다고 하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그 뒤 1921년 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4) 한밭수목원 한밭수목원 동편한밭수목원은 대전광역시 서구 만년동에 위치한 국내 최대의 인공 수목원이다. 연면적 39만 4000㎡의 부지에 건설은 총 3단계로 추진되었으며, 비용은 총 297억원이 투입되었다. 1단계와 2단계는 2005년 4월 28일 완공되었으며, 3단계는 2008년 공사를 마친 이후 2009년 5월 9일에 정식 개원하였다. 보유수종은 목본류 1,083종, 초본류 1,087종 총 2,170종을 보유하고 있다.
5) 대전선사박물관-042-826-2814(5) 대전선사박물관은 1997년에 발굴된 유성구 노은동 유적지(기념물 제38호)에 위치한 시립 박물관으로 대전지역에서 발굴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까지의 유물들과 생활상 등을 디오라마로 보여주고 있다. 구석기문화관에서는 구즉동, 용산동, 용호동 등 대전의 구석기 유적에서 확인된 주먹도끼, 찍개, 세석인 등과 함께 인류의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신석기문화관에는 둔산동, 송촌동 등의 유적에서 확인된 빗살무늬토기편, 마제석기류 등과 농경생활을 비롯한 신석기인들의 생활상이 디오라마로 전시되어 있다. 청동기문화관에는 관평동, 괴정동, 비래동 등에서 확인된 무문토기류, 각종 청동기류, 마제석기류 등이 전시되어 있고 청동기 시대의 무덤 형태와 생활상들이 디오라마로 전시되어 있다. 철기문화관에는 장대동, 구성동, 용계동 등에서 확인된 각종 철기류와 옥제품, 토기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6) 유회당(有懷堂)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94번지, 농촌 전통 테마 체험장이 있는 무수천하마을에 위치해 있다. 주요시설은 유회당, 판각, 기궁재, 삼근정사, 별묘 등이다. 조선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有懷堂 權以鎭 1668~1734) 선생이 아버지 권유(權惟)의 묘를 뒷산에 모신 뒤 부모의 첨배소(瞻拜所)로 제사를 지내고 독서와 교육을 하기 위해 1714년(숙종 40)에 지은 건물을 유회당(대전유형문화재 제6호, 0989. 3. 18. 지정)이라고 한다. 현재는 안동 권씨 찬성공파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유회당을 건립한 권이진은 본관은 안동,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다. 호는 유회당(有懷堂), 만수당(漫收堂) 그리고 시호는 공민(恭敏)이다. 우암 송시열의 외손으로 윤증(尹拯)의 문인, 1693(숙종 19)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723(경종 3) 사은부사로 청나라 여행했고, 1728(영조 4) 호조판서, 1732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7) 돈암서원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전화 041-736-0096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며,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김장생을 추모하여 후학에 힘썼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사계선생을 중심으로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네 분을 모시고 있다.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사우(祠宇),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 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 있는 곳이다.
8) 윤증(尹拯, 1629년~1714년 1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며 당색은 서인, 소론의 영수이다.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서인 윤선거, 김집, 유계, 권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할 때 소론의 영수가 된다. 유계, 김집(金集)을 거쳐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가 회니논쟁과 김익훈, 김석주의 역모 날조에 염증을 느껴 후일 노론이 된 주류파와 갈등하였으며,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를 계기로 송시열과 절교한 후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682년 관계에 나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이르렀으나 사퇴하였다.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나 1673년부터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문제, 송시열 비난 서신의 전달 등으로 송시열과 절교하여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다. 1715년에는 아버지와 스승 유계의 저서 <가례원류> 발문속에서 정호(鄭澔)로부터 비난을 받아 당쟁이 격화되어 소론이 거세당하고, 그의 관직도 추탈당하였다가 1722년에 복구되었다.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는 성리학외에도 양명학과 실학 사상을 접하고 연구하기도 했다.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충청남도 출신.
윤증고택 : 윤증고택(尹拯古宅)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의 정치 및 학계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으로 ‘충청도 양반’의 본거지이다. 마을 주변에는 향교를 비롯하여 윤증고택과 궐리사(闕里祠)가 있어 충청도의 유학을 이끌어 가던 곳이기도 하다. 윤증고택(尹拯故宅)에는 바깥에 노출된 사랑채가 있다. 보통 옛날 한국집은 집 외곽을 둘러싸는 담이 있다. 이 담은 집밖과 집안의 경계가 되어 이 둘을 구분한다. 그리고 사랑채는 이 담 안에 들어가 있다. 집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윤증고택(尹拯故宅)은 예외이다. 윤증고택(尹拯故宅)에서는 집 외곽을 둘러싸는 담을 찾을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채 건물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래서 사랑채가 바깥에 내어 놓여진 꼴이 된다. 그만큼 훨씬 개방적인 성격을 갖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개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윤증고택(尹拯故宅)의 사랑채에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진 누마루가 있다. 이 누마루는 건물 좌측에 놓여 있다. 누마루가 이곳에 위치한 것은 윤증고택(尹拯故宅)의 좌측에 서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 서원은 집주인인 윤증(尹拯)이 설립, 운영하는 서원이었다. 이 누마루에서 바로 서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누마루가 앉혀 있는 사랑채 건물은 서원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서원을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즉, 이 누마루는 망루 같은 성격을 가진 곳이다. 이 누마루 좌측에는 사람들이 통행하는 통로가 있다. 집안사람은 물론 바깥사람들이 출입하는 통로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시각 및 접근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이 누마루가 공개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사랑채 건너편에 위치한 유사한 형식의 마루에 비하면 더욱 공개적이라 할 수 있다. 윤증고택(尹拯故宅)에는 보통의 옛날 한국집에서 볼 수 있는 대문이 없다. 그 대신에 대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장소가 있다. 윤증고택(尹拯故宅) 앞에는 길과 단이 있는데 바로 이 곳이 그런 역할을 한다. 여기에 놓인 길은 제법 길다. 그래서 윤증고택(尹拯故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걸어야만 한다. 단 또한 제법 높다. 그래서 단 위의 공간과 단 아래의 공간은 제법 떨어뜨려진 것이 된다. 대문이 집안과 집밖을 구분하듯이 윤증고택(尹拯故宅)에서는 단과 길이 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옛날집의 경우 사당채는 집 안에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당이 집안과 집 밖을 구분하는 큰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당으로 출입하는 문 역시 그 울타리 안에 놓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증고택(尹拯故宅)의 사당은 예외이다. 집안에 들어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윤증고택(尹拯故宅)에는 집 전체를 둘러치는 울타리가 없다. 그래서 사당건물은 물론, 출입문 역시 집 밖에 놓여진 꼴이 된다. 집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사당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독특한 방식의 접근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 만큼 사당은 개별적이다. 다른 시설과 독립된 그런 사당이 되는 것이다. 안채에는 네모난 마당이 있다. 크게 보면 이 마당은 ㄷ자의 안채 건물과 -자로 된 문간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문간채는 사랑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사랑채와 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안채, 문간채, 사랑채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이 집의 사랑채는 개별성이 적은 대신, 안채, 문간채 등 집의 다른 시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개별적이면서도 전체적인, 이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가진 사랑채가 되는 것이다. 윤증고택(尹拯故宅)에는 안마당 외에 조그마한 마당 하나가 더 있다. 이 마당의 주위는 건물과 담으로 둘러 싸여 있다. 그래서 제법 개별적인 마당이 된다. 하지만 이 마당은 집안의 다른 곳과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안채, 사랑채, 사당채 모두와 통하게 되어 있다. 이 마당은 안채 건물과 면해 있다. 그리고 그 건물에는 출입문이 있어 사람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나머지, 담으로 둘러쳐진 부분에는 문이 있다. 그 위치가 각각 사당, 사랑채 쪽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당, 사랑채 쪽으로의 통행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런 조건 때문에 이 마당은 매우 독립적이면서도 주변과 모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런 특성을 가지게 된다. 윤증고택(尹拯故宅)의 사랑채에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진 대청이 있다. 사랑채 우측에 있는 대청이 바로 그곳이다. 이 대청은 좌측에 있는 대청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통행로로부터 떨어져 있고 비교적 그 위치가 안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이 대청은 세 면이 열려 있는 구조이다. 앞 쪽은 바깥쪽을 향해, 오른쪽은 화초 등이 가꾸어진 뜰을 향해, 그리고 뒤쪽은 사당을 향해 열려있는 식이다. 그만큼 이 대청은 주변과 다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오지랖 넓은 대청이 되는 것이다. 집 바깥에 나와 있는 것 같은 사당, 안채, 사랑채 등, 집의 이곳저곳을 서로 묶어 주는 장치가 있다. 사당에 난 문이 그 하나이다. 사당의 문은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사당이 아닌, 다른 시설들이 있는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다. 그 앞에는 또한 길이 나 있다. 이들 때문에 사당과 시설들과의 거리가 좁혀 진다. 실제적인 거리는 물론 심리적인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문이 가운데 있다면 권위적이기 쉽다. 즉, 사당 중심의 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사당과 다른 시설과는 그만큼 거리감이 생기게 될 것이다.
9) 초려 이유태 유허지: 소재지는 충남 공주시 상왕동 339-4이다. 관리자는 '초려이유태기념사업회'로 되어 있다. 안내전화는 041-840-2225이다. 초려 이유태(李惟泰) 선생은 선조~숙종대의 문인으로, 특히 현종 때 크게 활약했다. 본관은 경주. 송시열, 송준길과 더불어 사계 김장생(金長生), 신독재 김집의 문인으로, 예학에 이름이 높았다. 송시열, 송준길, 윤증, 유계와 더불어 충청5현(忠淸5賢)으로 일컬어진다. 인조 대에 세자사전(世子師傳)을 지냈고, 공조·이조참의, 승지를 지냈으며, 효종 즉위 후에는 김집의 천거로 환로에 나가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과 북벌계획에도 참여했다. 삼사(三司)가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자 앞장서 상소를 올려 처벌을 반대하기도 했다. 현종 대 초 현실정치를 비판하고 당시 사회 개혁안으로 유명한 <기해봉사>를 조정에 올리기도 했다. 현종 대에 이조참판, 사헌부대사헌등 무려 22차례나 벼슬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숙종 1년(1675)에는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 57세 되던 1663년 이후 공주의 중동골(상왕동)에서 거주하면서 중동서재(中洞書齋)와 용문서재(龍門書齋)를 열고 후학을 가르치며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초려 이유태 유허지는 선생이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현재는 고택과 초려선생을 제향하는 용문서원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78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도 후손들이 남아 제향을 올리며 유지를 받들고 있다. 사후에는 금산의 반계서원에도 제향이 되었다
첫댓글 오랫만에 들러 눈에 익숙한 읽을거리가 있어 흔적을 남깁니다. 잘 지내고 있지요? 대전 이문숙.
아, 이문숙 누나! 찾아주셨군요. 고마워요. 어떻게 지내요. 잘 지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