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도르의 비상
- 영화 『플로렌스』를 보고나서
김 범 용
“카네기홀 공연이 별거야. 안되는 게 어딨어?”
처음에는 웃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응원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눈물겨운 영화였다.
『플로렌스』는 음치 소프라노로 유명한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의 불꽃 같은 삶을 그린 영화다. 186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난 젠킨스는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며 음대 진학을 꿈꿨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포기한 후 16세 연상의 의사와 결혼한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녀는 성악가가 되기 위해 나선다. 이 영화는 32년간 성악가로 활동하며 5장의 음반을 발표한 젠킨스의 열정적인 삶을 그려냈다.
젠킨스(메릴 스트리프)는 음악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지녔지만, 자신이 음치라는 사실을 모른다. 매니저이자 남편인 싱클레어 베이필드(휴 그랜트)를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숨긴 채 그녀가 자신의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하도록 배려한다. 첫 레슨 때 젠킨스의 독특한 고음을 확인하고 웃음을 참지 못했던 코스메(사이먼 헬버그)는 돈의 유혹에 빠져 그의 공연 반주자로 나서고, 젠킨스는 카네기홀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말한다.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가 우려했지만, 공연은 거행되었다. 객석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에 젠킨스는 당황한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그녀는 주요 신문을 통해 자신이 비웃음거리가 된 것을 알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부유한 환경으로 걱정 없이 노래를 즐기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주인공이 부족한 재능을 극복하려는 열정과 음악을 사랑하는 모습에 흠뻑 빠져든 시간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지난 수년간의 합창단 활동이 떠오른다. 매일 호흡 훈련과 발성 연습을 하고 가사를 외우던 모습이 젠킨스의 연습 장면과 겹쳐진다. 합창은 상대방 노래를 들으며 절제된 소리를 낼 때 비로소 좋은 화음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였다. 밥벌이의 시름을 잊게 한 시간이었다.
몇 해 전 공연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부분 생업 전선에서 물러난 연세가 많으신 가곡 애호가들의 무대였다. 공연 후 어느 여성 성악가에게 감동적인 공연이었다고 말하자 그분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어요?”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노래 실력보다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흔적이 엿보이는 무대였다. 어떤 분은 적절한 감정이 배여 있었고, 포르테와 피아니시모를 잘 표현하기도 했다. 연주회가 끝날 무렵 은빛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성악가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몇 달 후 그날의 감흥은 페루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콘도르 새의 마지막 몸부림을 연상시키는 시가 찾아왔다.
그때의 환희는 아직도 남아 있다. 가까운 길을 두고 피아노 뒤로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틀어막았다. 늙은 성악가의 입이 열린다. 흑색 반점으로 수놓은 얼굴, 노동으로 단련된 검은 손등에는 성난 힘줄이 솟아나 있다. 울대가 떨리며 탁한 멜로디가 객석으로 날아든다. 오른발이 바르르 떨릴 때 흔들리는 왼손, 자벌레가 곰실거리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브라보를 외치던 객석은 울먹이고, 시 노래 ‘세월’은 아직도 들려온다. 나는 달아오른 진공관 앰프를 오래도록 놔두었다. 오늘 밥벌이 걱정은 구석에 밀어둔 채.
- 「콘도르의 비상」
얼마 후 그 노인의 동영상을 진공관 앰프와 연결했다. 젊은 직업 음악가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애환이 묻어있었다. 인생의 고단함과 세월의 더께를 노래로 승화시킨 그 노래는 나의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절대자인 신은 예술 할 필요가 없고, 인간 이하의 짐승은 예술을 할 수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황병기 가야금 명인은 말했다. 젠킨스 연주나 성악 애호가들 공연처럼 굳이 음악적 가치를 따지지 않고 완성도를 슬며시 뒤로 밀어 놓고 다양한 음악을 즐기는 분위기는 어떠할까. 누구나 작가나, 성악가나, 배우가 되고 싶은 열망은 있을 것이다. 서툴지만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는 그들의 용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