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군은 전라남도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어요.
이웃 해남군와 함께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든 땅이에요.
북서쪽에 머리를 쑥 내밀고 있는 저 월출산 좀 보세요.
턱 밑까지 들어온 바다를 두 팔로 보듬어 안은 강진만을 졸졸졸 따라 갔어요.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있어 얼마나 살기좋을까, 하는 생각에 무척 부러웠어요.
끝없이 펼쳐져 있는 보리밭도 아름다웠구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을 통해 한국 현대 서정시에 새 지평을 연
시인 김영랑 생가는 강진읍에 있었어요.
김영랑 생가를 찾아 올라가는 길은 참 아름다워요.
돌담 사이 사이에 매발톱꽃도 옹기종기 피어 있고, 담쟁이 덩쿨도 대롱대롱 올라가고 있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돌담이에요.
산모퉁이에도 이런 돌담을 만들었음 좋겠어요.
이 돌담길이 맘에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돌담길을 한참 동안 오르락내리락 걸으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지요.
김영랑 생가 올라가는 길에 있는 집들은 모두 강진군에서 이렇게 돌담을 만들어 주었대요.
돌담 하나 때문에 자칫 밋밋한 길이 될 수도 있는 길이 다정하고 예쁜 길로 변했어요.
드디어 김영랑 생가....
첫눈에 맘에 들었어요.
김영랑의 본명은 김윤식이에요.
1903년 강진읍 남성리에서 태어나 강진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결해 휘문의숙에 다녔어요.
휘문의숙 3학년때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진에서 의거를 하려고 내려왔지요.
그런데 안타깝게 치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기도 했답니다.
그것 뿐이 아니에요.
김영랑은 또 일제 말기에 창씨 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어요.
한 마디로 절개가 높은 시인이었어요.
모란은 이마 다 져버렸지만, 김영랑 생가는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만약 모란이 활짝 피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더욱 좋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차라리 모란이 없어서 김영랑 생가가 더 빛이 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지요.
이렇게 생각하니, 덜 섭섭하네요.
한적하고 아늑하고 편안한 집이에요.
자연과 어우러져, 자연 속에 묻혀, 그대로 자연이 된 집...
작은 물건 하나도 그저 그대로 놓여 있는데도 아름다운 집...
이런 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그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는 것 아닐까요?
김영랑은 1931년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어요.
우물가에도 모란 한무더기...
김영랑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많은
서정시들을 발표했어요.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여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안타깝게도 1950년 전쟁의 와중에 사망했어요.
마흔 일곱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김영랑 시인...
자신의 방에서 관람객들을 바라보고 있네요.
우리가 그를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우리들을 구경하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요즘 사람들, 왜 이렇게 정서가 메말랐지요?'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해요.
모란으로 가득 찬 김영랑 생가를 보며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강진군은 김영랑 생가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어요.
찾아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모두 조용히 관람하고 있었고요.
남도의 얼이 느껴져 참 기분이 좋았어요.
손때 묻은 물건들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김영랑 생가....
오래되고 낡은 물건들을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또 다시 해 봅니다.
누이가 자주 드나들던 장독대....
누이의 손때가 묻은 장독들이 햇빛에 반짝입니다.
된장을 뜨면서, 빨갛게 든 단풍잎에 놀라 소리지르던 누이를 보며
김영랑은 이렇게 예쁜 시를 지었습니다.
뒷담을 둘러친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솨솨솨~
시원한 오월의 바람이 싱그럽네요.
전라도를 좋아하는 이유...
오래되고 낡은 것들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마음이 느껴져서입니다.
낡은 것들도 모두 보물이 되는 땅, 전라도...
저 은행나무의 나이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첫댓글 산지기님과 같이 가셨군요... 부러운 여행입니다 ㅎㅎ
다음에 같이 가요. 6월에 전북 고창에 가볼 생각입니다.
대나무숲이 참 아름답네요. 돌담도 좋고.. 전에 말씀하시더니 기어이 시작을 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