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여행 1
2010년7월26일 몽골로 선교사역을 떠났습니다. 몽골은 남북한 크기의 약 17배이고 인구는 250만명입니다. 세계에서 크기가 17번째라고 합니다. 수도는 울란바트로 이고 주로 수도에 많이 거주하는데 100만명이 삽니다.
한국인들은 주로 울란바뜨로에 2,500명이 삽니다. 그중에서 1,000명은 선교사와 선교사가족이고 나머지는 그곳에서 사업하는 분들입니다.
이곳은 몽골의 씨름 경기장인데. 몽골에서는 매년 7월 국가 축제인 나담이 치러집니다.
나담은 에른 고른 나담의 준말로 남성축제라는 뜻입니다.
나담은 원래 ‘놀다’라는 뜻의 몽골어 ‘나다흐’에서 유래되었는데 몽골인은 경기의 의미보다는 놀이의 의미로 나담을 즐깁니다.
나담 축제에서는 씨름, 활 쏘기, 말달리기 3개 종목의 경기가 열립니다.
2008년부터는 한국의 축제 기획 회사인 메타기획에서 나담 축제를 기획 진행하고 있어
언론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나담의 하이라이트인 씨름은 최고의 인기종목입니다.
씨름 선수들은 옛 몽골 병사들의 옷과 같은 짧은 윗옷과 체육복 반바지 목이 긴 장화를 갖춰 입습니다.
몽골 씨름에는 체급 구분과 경기시간 제한이 없으며 경기 시작 후 상대방의 무릎이나 발꿈치 등을 땅에 먼저 닿게 하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우리나라 씨름은 샅바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잡지만 몽골 씨름에서는 상대방의 몸을 잡고 경기를 합니다. 하지만 발을 사용하는 기술 방법은 우리나라 씨름과 비슷합니다. 고구려시대 고분벽화 각저총에 그려진 씨름 모습과 조선시대 1700년대 후반에 그려진 김홍도의 씨름 풍속화에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샅바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상대방의 몸을 잡고 경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달리기 시합은 약 30킬로미터를 달리는데 말을 모는 기수는 4-7세의 어린이입니다.
경기는 우편제도의 초기형태인 역참을 권장하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몽골에서는 걷는 것보다 말 타는 것을 먼저 배운다는 말이 있는데 기수는 남녀 어린이 모두 참가할 수 있습니다. 말들은 꼬마 기수를 태우고 초원지대를 질주하는데 이들이 달리는 거리는 옛 역참의 거리와 같습니다.
한글이 써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합니다.
솔롱고는 무지개라는 뜻이고 솔롱고스는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수흐바토르 광장은 울란바토르의 어느 지역이든 갈수 있는 교통의 요지로 광장 중심으로 국회의사당, 역사 박물관, 중앙우체국, 외무부청사, 국립오페라 하우스, 자연사 박물관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각국의 대사관, 사원, 대학등의 교육기관 또한 이광장과 가까운곳에 밀집해 있다.이곳이 국회의사당입니다.
광장 주위.. 이곳은 1920년에서 1990년까지 러시아에서 통치를 하여 러시아 알파벳을 사용합니다. 고유의 몽골글씨보다는 러시아 글씨가 많이 보입니다. 이곳 몽골사람들은 러시아보다는 한국어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어가 붐입니다. 한국어가 어순이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한류바람으로 곳곳 가라오케, 사우나 등등...이 많이 있습니다.
수흐바토르 광장의 남쪽 피스 에비뉴 건너편에는 반달모양의 특이한 고층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울란바타르 시내 어디를 가더라도 보이는 유명한 건물입니다. 우리나라 기업에서 건축한 건물이라는데 그곳 사람 말로는 부실공사라고 합니다. 외국에 짓는 건물이라도 좀 더 견고하게 지어서 국가 위상을 실추시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 광장을 '수흐바토르 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광장 중앙에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수흐바토르'의 동상이 서있기 때문입니다. 수흐바토르가 1921년7월11일 혁명을 선포하고 몽골 인민정부를 수립한것을 기념해 1925년부터 이곳을 수흐바토르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수흐바토르(Damdini Suhbator)는 가난한 유목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16세때 역전 마차의 마부가 되었고 1911년 몽골 독립후 건군된 자치 몽골군의 소집을 받고 입대하여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관총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습니다. 1918년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는데 그 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러시아 혁명에 자극을 받은 수흐바토르는 1920년6월초이발산 등과 몽골인민당을 결성하여 독립을 위한 무장투장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2차례에 걸친 레닌과의 회담을 통하여 몽골 혁명의 성공과 그 후의 국가건설을 위한 전술 지도를 받고 1921년 인민 의용군을 결성,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Red army)과 함께 마이마친에서 군사를 일으켜 7월10일 우르가(현재 울란바타르)에 인민 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습니다.
수흐바토르의 동상이 서 있는 장소는 1921년 몽골군이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때 개선 환영식이열렸던 장소이며 7월11일, 수흐바토르 장국이 혁명을 선포할때 말을 타고 서 있었던 곳 입니다. 그가 당시 탄말이 오줌을 쌌는데 모여있던 사람들은 이를 길조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말뚝을 박아놓았고 나중에 동상을 세울때에 그 말뚝을 찾아내 그곳에 세웠다고 합니다. 동상 밑에는 1,865kg의 금과 수흐바토르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에서 입었던 옷한벌, 그리고 장군부인이 눈물을 닦은 손수건을 넣어두었습니다.
원래 동상은 1931년에 만들어졌는데 1946년 혁명 25년을 기념하면서 새 동상으로 다시 만들어 세우고 이전 동상은 현재 몽골 대학교에 있습니다 그는 30세때 결핵으로 짧은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국회 의사당 정면에는 몽골을 상징하는 세명의 동상이 서 있는데 가운데 칭기즈 칸, 왼쪽은 칭기즈 칸의 셋째아들이자 몽골제국의 두번째 칸인 오고타이 칸, 오른쪽은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중국을 통일하고 베이징을 원나라로 세운 쿠빌라이
칸입니다.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를 통일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몽골족의 가상을 세계에 떨친 칭기즈 칸은 몽골을 상징하는 이름이며 몽골의 정신적인 지주입니다.
신혼부부가 막 결혼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차 광장에 오고 있어서 찰칵.. 뒤의 핑크 건물은 오페라 하우스입니다. 4계절 의복인 델은 기본적으로 오른쪽 깃을 앞으로 해서 입지만 보통 델 위에 부스라는 허리띠를 매는데 허리띠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말을 탈때 격렬한 요동으로 인한 내장의 손상을 방지하는 기능적 역활도 하는 몽골족의 의복입니다.
갖은 포즈를 잡고 멋있게...아주 멋있게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좋을때다...ㅎㅎㅎ
축하객과 가족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흐믓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유목민족들은 모자와 허리띠를 권위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제사를 드릴때에는 반드시 모자를 벗고 허리띠를 목에 거는 관습이 있습니다.
유목민들은 집에 들어가 모자를 벗을 경우 남이 접근할수 없는 가장 높은 곳에 둡니다.
수도에서 약 5시간 떨어진 볼강 아이막에 가는 길입니다. 이곳은 2차선으로 되어있지만 차선표시는 없습니다.
길거리 양 옆에는 그냥 초목지로 야생화가 피어있습니다.
멀리 양떼를 몰고 있는 말탄 목자
몽골에서는 아이들은 걷기도 전에 말을 태워 ...말을 탈줄 알아야 합니다.
허허 벌판에 음식점이 있어..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음식점 건물 뒤편에는 독수리를 키우는데 마침 양고기를 뜯고 있습니다.
창고에 양고기를 넣고 있는데 안을 들여다 보니 지하로 돼어있어 겨울에는 양고기를 보관하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화장실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볼강 아이막 주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