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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이 확정된 원정대는 곧 혹독한 등반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지로 채택된 곳은 팔공산과 한라산이다.
팔공산에서 중점을 둔 훈련은 주마링이다.
주마 Juma란 자일을 통과시키는 등산 장비의 일종인데, 한 방향으로만 전진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즉 갑작스러운 추락 시 등반자를 확보해줄 수 있는 장치다.
선등자가 고정 자일을 깔면서 올라간 다음 안전한 장소에서 확보를 완료하면,
후등자가 이 주마를 이용해 추락을 예방하면서 따라 오르는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주마링은 필수 테크닉이다.
모든 사람이 다 선등할 수는 없다.
가장 기량이 뛰어난 등반자가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한 다음 선등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가 확보해 놓은 고정 자일에 매달려 주마링으로 오른다.
특히 휴먼원정대의 경우 엄청난 주마링을 감수해야만 했다.
8750미터의 고지에서 시신을 수습하자니 올려야 될 장비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평소에도 암벽 등반이나 거벽 등반에 익숙해 있던 산악회 출신들은 이 주마링을 그야먈로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냈다.
문제는 취재진들이었다.
송인혁은 주마링 도중에 팔 근육이 완전히 마비되어 바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제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냥 이렇게 빈 몸으로 바위에 매달리는 것도 힘든데...
거긴 모든 게 눈과 얼음이고 게다가 ENG 카메라까지 들고 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한라산에서는 시신 수습 훈련을 중점적으로 했다.
국내에서 가장 적설량이 많은 산이 한라산이다.
덕분에 대부분의 히말라야 원정대는 한라산을 훈련지로 택한다.
우리는 이번 원정을 위해 특벽히 개발한 시신 수습용 들것을 가지고 한라산에서도 가장 가파른 절벽을 찾았다.
대구에서 철공소와 기계 제작을 전문으로 하고 있던 계명대 산악회 OB들이
특수 제작한 시신 수습용 들것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시신의 머리를 고정시킬 플라스틱 모형, 시신의 몸체를 고정시킬 각종 밴드들,
그리고 최대한 가벼운 재질로 완성시킨 버팀용 철근,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입체적 설계.
하지만 실제로 모의 훈련을 실시해 보니 적잖은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초모랑마 북측 노멀 루트 등반 시 최대의 난코스는 해발 8600미터 지점에 있는 세컨드스텝이다.
도저히 우회할 방법이 없어 반드시 뚫고 올라가야만 되는 이 절벽은 높이만 대략 50미터쯤 되는데
발 디딜 곳을 찾기조차 여의치 않은 천 길 낭떠러지다.
1924년 영국 원정대의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 역시 이곳을 통과하지 못해 조난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에 이 루트를 초등한 중국 원정대는 그야말로 사람의 어깨 위에 사람이 올라타는 인해전술을 구사하여
알루미늄 사다리를 고정시킨 후에야 이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오르기 힘든 코스는 내려오기가 더 힘들다.
게다가 시신 수습용 들것을 들고 그곳을 내려와야 한다면?
"차라리 세컨드스텝이 완전한 오버행이라면 문제는 오히려 수월하게 풀릴 수 있어요.
허공에 자일을 걸고 조금씩 내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곳은 울퉁불퉁한 바위와 얼음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곳이에요.
시신이 벽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구조자들이 균형을 유지하기도 힘들고..."
세컨드스텝과 최대한 닮은 곳으로 선정된 한라산의 빙설벽 앞에서 엄홍길이 한숨을 내쉬며 토해낸 고뇌다.
실제로 훈련 도중 대원들이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는 일들이 빈발했다.
절벽은 풀 수 없는 수학 문제처럼 난해했고, 시신은 지독히도 무거웠던 것이다.
장비 담당 장헌무 대원은 시신 수습용 들것의 설계에 대해 냉정한 의견을 피력했다.
"들것의 재질 자체를 보다 강한 것으로 바꿔야 해요.
이 상태로라면 하강하면서 벽에 부딪힐 때마다 찢겨져 나갈 게 뻔해요...
들것의 손잡이 부분도 보강해야 돼요.
최대 8명이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손잡이 밴드를 여벌로 만들어야 되고...
또 파이프를 이것보다 가볍게 할 수는 없나요?
이를테면 두랄루민 같은 재질로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고된 훈련을 마치고 나서도 평가와 제안은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들은 인적 끊긴 캄캄한 눈밭에 앉아 우리가 해내야 할 과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새벽을 맞곤 했다.
힘겨웠던 나날들이다.
하지만 원정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겨웠던 과정은 따로 있었다.
육체적 혹은 기술적 훈련이야 이를 악물고 달라붙으면 그만이다.
장비야 보강해서 개선하면 되고 체력이야 훈련해서 강화시키면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고통이 있다.
죽은 친구들을 여전히 놓아주지 못하는 유가족들의 슬픔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원정대의 출국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엄홍길과 더불어 대구로 내려갔다.
유족들에게 출국 인사를 올리고 혹시 고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받아오기 위해서였다.
엄홍길은 내려가는 내내 침울한 표정이었다.
나는 기차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채 괴로운 듯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저릿하게 느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백준호의 집이었다.
그의 집은 대구 달성고 근처에 있는 작은 아파트였다.
집에는 미망인과 더불어 백준호의 부모들이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의 벨을 누르기 전에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무슨 말부터 건네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은 필요 없었다.
문이 열리고 우리가 들어서자 그들은 대뜸 눈시울부터 붉혔다.
백준호의 어머니는 기골이 장대하고 괄괄한 성격을 가진 여장부였다.
그녀는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우리 준호가 갔다는 생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어딘가 살아있을 거야...
그놈 보고 싶어...
엄 대장, 내가 우리 준호 보고 싶다고!
가서 그놈 좀 데려와줘...
응? 그럴 수 있지?"
차를 내오던 미망인이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만류했고 남편은 아내의 팔을 붙잡았다.
노모는 그러나 한풀이하듯 가슴에 맺혔던 말들을 마구 토해냈다.
그 이야기들을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엄홍길은 노모가 서럽게 흐느끼며 원망과 그리움을 토해내는 동안 마치 죄인처럼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뿐이고,
보다 못한 나는 그녀에게 손수견을 건네주었을 뿐이다.
"아들놈이 없으니까...
며느리 볼 낯도 없어...
내가 저 애한테 뭐라고 그럴껴?
아직 저렇게 시퍼렇게 젊은 나이에...
애새끼들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라고!"
슬픔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슬픔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고 나면 슬픔이 아닌 그 무엇으로 변해버린다.
그래서인지 정작 남편을 잃은 당사자인 미망인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미망인은 우리가 앉아 있는 마루를 피해 부엌 쪽으로 몸을 숨긴 채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조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는 남편의 결단을 수긍하고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수긍과 이해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당신이 그 사람들 구하러 올라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너무 당신다운 결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당신이 우리 가족하고, 산이랑 수야랑, 나랑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지..."
우리는 그녀에게 혹시 남편의 시신을 찾게 되면 함께 묻어주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편지 한 통과 두 아이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그리고 반지를 내놓았다.
반지는 백준호가 ROTC 시절에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란다.
아이들에게도 아빠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했지만 그들은 한사코 쓰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우리는그녀가 전해준 물건들을 소중히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그동안 과묵하게 앉아 있던 백준호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엄 대장, 이렇게 노력해줘서 고맙소...
거기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아무 사고 없이 잘 갔다 오시오."
엄 대장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르신도 어떻게... 마음 잘 다스리시고..."
"허허 나야 뭐 그냥... 다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잘 지내니까 걱정 말고..."
노모가 버럭 화를 내며 다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잘 지내? 잘 지내긴 뭘 잘 지내! 이 양반, 허구한 날 술이요... 농사고 뭐고 다 작파하고...
그냥 하루 종일 멍하니 있다가 해 지면 기어 나가서 술타령이요!
이 양반아, 나처럼 펑펑 울기라도 해 봐! 가슴에 피멍이 들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우리는 도망치듯 그 집에서 빠져나왔다.
아파트의 현관 밖으로 나오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봄날 햇살은 화창했고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유쾌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 무엇을 해야 될지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아파트의 화단 한편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엄홍길 역시 한동안 빈 하늘만 멍하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미망인이 건네준 편지를 꺼냈다.
그녀에게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둔 터였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미망인이 망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산이 아빠
잘 지내고 있죠? 무심한 사람...
그렇게 좋아하던 산이 수야 두고 갔는데 한 번도 꿈에 안 오고 당신 별명대로 정말 미련곰탱이 맞네요...
당신 거기 누워 있는 그때부터 더워도 덥다고 추워도 춥다고 말하기가 참 미안했어요.
갑자기 아빠 보고 싶다고 울어대는 수야를 볼 때,
아침에 자고 일어난 수야가 아빠가 내 마음속에 없는 것 같다고 풀죽은 소리로 말할 때,
아빠가 없어서 우리 가족은 행복할 수 없다고 심각하게 말하면서 눈물 글썽이는 수야를 볼 때,
애들 학교 행사란에 당신 자리 비워두어야 할 때,
왜 우리 애들이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나...
당신 원망 참 많이도 했어요.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참 편하게 말아더라고요.
당신 거기 누워 있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고...
부럽다고까지 말하던데 그건 참 이기적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아 있는 가족들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는 말이에요.
그 흰 산에 당신의 꽁꽁 얼어서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사지가 뒤틀리고 피가 마르는 걸 그들은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육체는 중요한 게 아니라지만 커서 에베레스트에 아빠 찾으러 갈 거라고 애들이 불쑥불쑥 말할 때
얼마나 가슴이 철렁하는지 그들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 그렇게 되고 서점에 책 사러 갔는데 우리 산이가 망설임 없이 고른 책이 [에베레스트 등정하기]였어요.
아빠 찾으러 가야겠다고...
당신 꼭 닮은 당신 아들 맞죠? (중략)
우리 산이랑 수야 항상 밝고 건강하게 자라주면 그걸로 됐어요.
일이 잘 안 되고 속상할 때면 당신 원망도 하겠지만...
그 정도는 들어줘야 되지 않아요 당신?
이제 우리 가족 걱정하지 말고 당신 그곳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하게 지내요.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요.
우리가 부르면 언제든지 돌아봐줄 수 있는 곳에 있어요...
그리고 우리 산이 수야 항상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해줘요.
산이 수야 엄마가...
박무택의 노모가 살고 있는 집은 경북 안동의 산골 오지에 있었다.
박무택이 고등학생이 되어 대구로 유학가기 전까지 자란 집이다.
집 앞에 논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멀리 야트막한 야산들이 고즈넉한 스카이라인을 그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미망인이 쪼르르 뛰어나왔다.
은테 안경을 낀 눈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그녀는 여전히 결혼 전의 고은 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엄홍길의 부인과도 언니 동생하며 지낼 만큼 가까운 사이였던
그녀는 우리를 맞이하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이렇게 시골까지 찾아오시게 해서..."
박무택의 노모는 사랑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을 밭일로 살아와 얼굴이 배카맣게 탄 어머니는
일행 중 경상도 출신의 사람조차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안동 사투리를 썼다.
노모는 우리가 큰절을 올리고 나서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엄홍길이 이번에 초모랑마에 가서 꼭 무택이를 좋은 곳으로 모시겠다고 말씀 올리자 저고리 고름을 부여잡기 시작했다.
"내가 8남매를 낳았어...
그런데 그중에서 대학 보낸 놈이 무택이 그놈 하나뿐이야.
제일 머리가 똑똑해서 없는 살림에 대학까지 보내놨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뭐 하러 대학 보냈나 싶어...
그놈의 잘난 대학 산악분지 뭔지만 안 들어갔어도..."
노모는 마치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듯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애들이 무택이 사진 다 치워버렸어...
내가 사진을 보면 자꾸 운다고...
사진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것까지 다 치워버렸어...
테레비 보다가도 가끔씩 무택이 목소리 비슷한 게 들려...
깜짝 놀라서 내가 얘들아, 무택이 살았나 보다, 저기 무택이 소리 들린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화장실엘도 가는 척하며 슬그머니 일어나 사랑채에서 나와버렸다.
음료수 캔을 사들고 들어오던 미망인이 나를 보더니 어서 들어가서 한 잔 드세요 하듯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와 눈을 맞출 수 없었던 나는 딴청을 피우며 집 뒤꼍으로 돌아섰다.
산골 농촌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나는 집 뒤꼍에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장작더미며, 나둥굴고 있는 농기구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채 뒤쪽으로 뚫린 조그마한 창문 안쪽에서 노모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벽 한쪽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다.
박무택이 신고 다니던 등산화다.
햇살에 말리려고 널어놓은 그 등산화 곁에는 호미며 갈퀴 따위의 농기구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물건들이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여기 경상도 산골 오지에서 자라나던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아이는 형제들 중에서도 유난히 두뇌가 명석해 집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호미며 갈퀴 따위를 들고 농사일에 배달리고 있을 때 소년은 대구의 명문 대학으로 진학했다.
이를테면 출세를 한 것이다.
하지만 청년으로 자라난 그는 온 세상의 산들을 쏘다니다가 결국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얼어붙은 채 잠들어 있다...
그는 혹시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이 아닐까?
그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간 것이 아닐까?
나는 박무택의 버려진 등산화를 어루만지며 풀 수 없는 화두에 잡혀 넋을 놓고 있었다.
"산아, 밖에 있냐?"
엄홍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뭐 하냐? 어서 안으로 들어와라!"
나는 백준호의 집에서 이미 물러 터저버린 눈시울을 다시 한 번 닦아내고 사랑채로 들어갔다.
사랑채 안에서는 미망인이 우리가 가져갈 물건들을 펼쳐놓고 있었다.
박무택이 입던 등산복, 가족사진, 편지.
그 가족사진은 엄홍길도 익히 여러 번 보아왔던 것이다.
엄홍길과 함께 등반할 때마다 박무택이 자랑 삼아 꺼내 보였던 사진들인 것이다.
사진 속의 박무택 가족들은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 사진을 건네고 있는 가족들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분노가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저번에 그 사진 보니까...
우리 찬민이 아빠가 장갑도 안 끼고 누워 있던데예... 장갑이라도 끼워주면 안 되예? 너무 추워 보여서...
엄 대장님, 그 사람 꼭 안 데려와도 돼요... 거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거기에 그냥 묻어주기만 해도 되요."
엄홍길이 제 손으로 입을 막고 끄윽끄윽 울었다.
"혹시 데리고 내려와서 화장하게 되면... 저랑 찬민이가 가볼 수 있을까예?
가보고 싶긴 한데... 사정이 그렇게 안 되겠지예?"
"화장할 수 있는 데까지 운구할 수 있으면... 제가 미리 제수씨한테 연락할게요. 꼭 오세요."
미망인은 엄홍길이 꼭 쥐고 있던 손을 빼내어 은테 안경을 벗고는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찬민이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뭔가 해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내 손수건이 흠뻑 젖었다.
너무나 착하고 여린 미망인이었다.
사랑채 밖에서 찬민이가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베이지색 멜빵바지을 입은 이 꼬마녀석은 오랜만에 아빠 친구들이 여럿 찾아오자 무척이나 신이 난 눈치였다.
나는 다시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와 녀석과 함께 마당을 뛰어다녔다.
녀석을 끌어안고 마음 속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찬민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네가 커서 언젠가는 네 아빠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녀석에게는 내 마음 속의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찬민이는 계속 꺄악꺄악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마당을 뛰어다녔을 뿐이다.
찬민이 엄마가 전해준 편지는 짤막했다.
찬민 아빠!
당신이 떠난 지도 벌써 1년이 지나버렸습니다.
문기둥에 그려놓은 찬민이 키 높이가 한 뼘이 커지도록 당신은 오시질 않는군요.
그곳에서 지켜보고 계시겠죠.
우리 민이가 얼마나 씩씩하고 의젓하게 자라고 있는지.
처음엔 당신이 언제 오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묻고 하더니
이제는 그 마음에도 아빠는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나 봅니다.
당신이 떠나던 날 아빠 가지 말라고 그렇게 울던 찬민이가
이제는 제 눈물 닦아주고 위로해주는 든든한 아들이 됐답니다.
이곳엔 벌써 봄이 오려 합니다.
당신과 한 번도 같이 해보지 못한 그 봄이 또 오고 있습니다.
이맘대만 되면 짐을 꾸려 떠나던 당신 모습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제가 그렇게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던 당신이 미울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같이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왜 혼자 가버렸냐고 원망도 해봅니다.
당신의 그늘이 그렇게 크고 넓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찬민이랑 살아갈 날들이 두렵고 겁이 납니다.
보고 싶은 사람, 불러보고 싶은 이름, 이제는 가슴 속에 묻어야 되는 당신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하나 이젠 잊은 척 살아가겠습니다.
찬민 아빠! 잘 가세요.
그곳에서 우리 민이 꼭 지켜봐주세요.
작별 인사도 못하고 떠나보낸 당신께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렵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라고...
장민은 외아들이었다.
그것도 어머니가
제발 아들 낳게 해달라고 몇 년을 성황당에 다니면서 온갖 정성을 다해 기원을 드린 끝에 기적적으로 얻게 된 자식이다.
그런 아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누가 무슨 말을 해서 그들의 슬픔을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나는 본래 눈물이 메마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원정에 앞서 유족들을 찾아뵈면서 몇 년 동안 쏟아온 눈물보다 훨씬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그들과 함께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산에 다니는 놈들은 다 불효자식들이다.
제 부모보다 먼저 죽는 놈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다.
그것도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세상의 지붕 끝에서 꽁꽁 언 채로 죽은 놈들은
정말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죄를 짓고 간 놈들이다...
하지만 그런 자책마저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장민의 집에 들어설 때는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민의 어머니가 함께 묻어 달라며 배냇저고리를 꺼내놓을 때 오열은 또다시 터져 나왔다.
"이게 민이 배냇저고리여... 그놈 장가가서 지 새끼 낳으면 줄라고 고이 간직해왔는데... 이제는 그럴 일 없네...
이게 내 탯줄이니께 그놈하고 같이 묻어줘... 망할 놈의 새끼, 그놈의 산이 뭐가 그리 좋다고...!"
어머니는 곱게 짠 목도리와 털스웨터도 함께 내놓았다.
"거기 지랄같이 춥다면서...? 이건 내가 그놈 소식 듣고 나서 매일 뜬 거여...
한 코 한 코 뜰 때마다 내 심장을 후벼 판 거여...
엄 대장! 가서 그놈 찾으면 이거 좀 따뜻하게 입혀줘... 그놈이 얼마나 춥겠어...
흐이구, 불쌍한 내 새끼! 내 새끼 불쌍해서 어쩐댜...!"
장민의 어머니는 원정대가 출국하기 직전에 다시 편지를 보내왔다.
삐뚤빼뚤 맞춤법도 틀리는 글씨를 깨알같이 적어 넣은 10장짜리 편지였다.
꾹꾹 눌러쓴 볼펜 자국 위로 어머니가 떨어뜨린 눈물들이 엎질러진 물처럼 흉하게 멍울져 있었다.
나는 그 어머니의 편지를 차마 끝까지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 편지의 공개를 원치 않았다.
다만 장민의 시신을 발견하거든 그 녀석이 잘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읽어주라고 했다.
하지만 끝끝내 장민의 시신을 찾지 못한 우리는 결국 그 편지를 제문처럼 불붙여 燒紙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세상에 가 있는 장민이 어머니가 며칠 밤을 새워가며 쓴
그 애끓는 마지막 편지를 잘 읽었으리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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