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선교기념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이신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복음선교와
일제의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하신 신앙심과 애국정신을 전승하고자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 세운 기념관입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신학교 졸업사진.. 7명중의 한 분이시죠..
이기풍목사님의 가족사진..
이기풍 목사는 독노회의 뜻에 따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되었습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들어 왔을 당시에는
1901년 일어났던 이재수의 난(신축교난-천주교와 제주도 민간의 마찰로 생긴 난)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제주 민의 인식은 별로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주민들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서 위협을 당하였고,
굶주림과 병마에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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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목사는 제주에서 1907년까지 선교활동을 하면서
성안교회(성내교회), 금성, 삼양, 성읍, 조천, 모슬포, 한림, 용수, 세화, 중문에 교회를 설립하는 등의
수확을 올렸습니다. 그 당시 기록을 보면
1912년에 제주도의 교인은 410명, 예배당 3개, 기도처소 5곳,
매주 모이는 남녀가 300명에 이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후 이기풍 목사는 1915년 안식년을 얻어 평양으로 돌아갔고,
1916년 전남 광주 북문안 교회의 모사로 담임하였습니다.
또한 이 목사는 일제의 종교탄압에 맞서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감옥에 감금되게 되었고
1942년 6월 20일 주일 아침 8시경 여수 남면 우학리 섬에서 순교했습니다.
이기풍에서 수련회를 하고 있던 학생과 족구를 잠시 했던 민혁이..
그 다음으로 갔던 조봉호전도사의 의병항쟁 기념탑..
조봉호는 제주도 구우면(한림읍) 귀덕리에서 태어나 서울 경신과 숭의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상투를 자르고 기독교에 귀의한 그는
이기풍 목사가 최초로 설립한 제주 서부(성내)교회의 전도사로 있었고,
금성교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조봉호는 서부교회의 전도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도왔는데
그것으로 인해 관련된 사람 모두가 잡히게 되고, 조봉호 전도사는 모든 책임을 혼자 지기로 결심하고
혼자 감옥에서 복역중에 순교했지요...
성안교회에 있는 이기풍 목사님의 선교기념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다..
누울 자리를 확인하고, 짐을 내려 놓고 배를 채우기 위해 해안도로에 있는 '노블하우스'를 갔다.
음식이 다른 곳보다 조금 비싸긴 하지만 맛이 있었다.
먹으면서 하루 일정에 대해 생각해 보고 얘기를 나누었다.
화기 애애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둠이 내려 앉은 앞바다를 구경하고 아마도 이마트로 가서 간식거리를 샀죠?
잠잘 곳으로 돌아와서 씻고 잠시 한 방에 모여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요..
너무도 다정한 네 사람...
첨에는 사진도 찍지 않으려고 피하던 사람들이 이렇듯 포즈를 자연스레 잡다니요...^^
우리가 밤을 지냈던 펜션입니다.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요~ ^^;;
이것으로 2006년도 캠프 일정을 마칩니다.